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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빌2:25-30. 빌립보서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543 추천수:6 220.120.123.244
2019-08-25 13:18:55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빌립보서12)

빌2:25-30

 

어느 한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너희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 물음에 아이들은 대답했답니다. “위대한 학자가 되겠습니다.”, “세계적인 갑부가 되겠습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겠습니다.” 등 각자의 생각을 대답했답니다. 이때 한 명의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놀란 선생님이 그 이유를 묻자 아이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큰일을 하고 명성을 떨친다 해도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면 동물과 다를 바 없으므로,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 아이는 성장하여 훗날 미국을 통치하는 20대 대통령이 되었답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A. 가필드’입니다. 오늘 가족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어린이들, 학생들, 청년들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다른 말로 질문을 던지면 어떤 평판을 받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참 믿음이 좋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작곡한 '천지창조'라고 하는 오라토리오를 비엔나에서 연주할 때였답니다. 공연이 끝나자 청중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쳤답니다. 그때 사회자가 천지창조를 작곡한 발코니에 앉은 하이든을 소개했답니다. 관객들은 하이든을 향하여 기립하여 박수를 쳤답니다. 이때 하이든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라고 외쳤답니다. 76세로 병들어 하반신을 쓰지 못하여 앉아 있었는데 박수가 끝나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답니다. 병원으로 가면서도 "나는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이 영광을!"이라고 계속 외쳤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나는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 이 영광을!" 하면서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았던 그가 인생에서 제일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답니다. 첫째, 평판을 얻는 것. 둘째, 살아있는 동안 평판을 유지하는 것, 셋째, 죽은 뒤에도 평판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 가족 예배를 같이 드리는 우리 어른 성도님들은 지금 어떤 평판을 받고 있고 앞으로 이 세상을 떠난 후 자녀들에게, 아는 지인들에게 어떤 평판을 받겠습니까?

사람들은 살려고만 생각하지 죽는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때가 되면 죽습니다. 2018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83세라고 합니다. 남자는 80세이고 여자는 85세라고 합니다.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남자 70세면 앞으로 살날이 10년 남은 것입니다. 죽은 후 자식들에게 지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어떤 자매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는데 십년 전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주었답니다. 친구들, 직장동료, 일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추가 음식을 주문하며 적잖이 놀랐답니다. 다들 한결같이 어린 딸인 자신에게 와서 아버님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아버님한테 받은 빚 갚게 해달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답니다. 그 때 아빠 딸인 게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졌었답니다. 그동안 아빠를 잘 몰랐던 딸이라 죄송했었답니다. 그리고 답을 정했답니다.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자신의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아는 모든 이가, 남은 가족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썼습니다.

오늘 8월 마지막 주일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 아들딸들, 우리 성도님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평판을 받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성숙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평판 하나가 열 가지 스펙을 이긴다고 합니다. 탈무드는 “평판은 최고의 소개장이다.”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자베스 아덴은 “평판이 명성을 만들고 그 명성은 고객을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사업에서도 그만큼 평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소비자에게 평판이 나쁘면 사업은 망하지만 평판이 좋으면 사업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인생은 짧지만 좋은 평판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이 됩니다. 요즈음을 직원을 채용할 때도 평판 조회를 하는 직장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스펙이나 외모, 학벌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SNS같은 것을 통해 평소 개인적 성향이나 성격 등을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서미림 지음)>라는 책을 보면 우리나라도 평판조회를 진행한 기업이 51.4%에 이르고, 이 결과로 탈락한 지원자도 70%가 넘는다고 합니다. 경력직원을 채용할 때는 대기업 57%가 평판조회를 하고 94%가 평판 조회 결과로 채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취업할 때 면접하러 가기 전에 이미 평판이 도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아무 글이나 사진을 올리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인터넷에 아무것이나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들을 올렸다가 어느 순간 주홍글씨를 달고 파멸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좋은 평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평판의 힘(주희진 지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과 다양한 인터뷰를 하면서 평판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행동습관을 찾아내 3대 원칙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3대 원칙을 중심으로 좋은 평판을 만드는 21가지 성공원칙과 평판을 망치는 4가지 금기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평판관리 원칙 3가지 중 첫째가 좋은 인간성입니다. 지난 주 신문에 나온 것처럼 사람을 죽여놓고 죽어야 할 사람 죽였다고 얼굴에 철판깔고 말하는 사람처럼 인격파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평판을 좌우하는 첫 번째 영역은 인간성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성 좋은 사람은 주변에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분에 따라 행동이 변하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을 자주 감동시키고, 조직에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로 개인의 역사, 양심, 가치관, 기질, 성격, 성향과도 관련된 것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가, 다정한가, 남을 배려할 줄 아는가,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가, 유머 감각이 있는가, 냉소적인가, 권위적인가, 이기적인가” 등의 질문에 답을 해보면 자신의 인간성 점수를 체크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성이 나쁘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고, 실력이 있다해도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참으로 좋은 평판을 받은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분의 인간성은 어떤 것 같습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형제"라고 말합니다.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로 영적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형제란 그리스도인과 같이 쓰이는 말입니다. 그는 바울이 형제라고 서슴없이 부를 수 있도록 확실히 거듭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동료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성숙한 성도로 인간성을 말할 때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신앙이 좋아야 합니다. 믿음 좋은 사람이 평판이 좋고, 믿음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개인적인 도덕성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도덕성은 어느 정도인 것같습니까? 그는 빌립보교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습니까? “너희 사자로”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교인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돕기 위해 헌금을 하였는데 그 헌금을 믿고 보낼 수 있는 자로 여겼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대표해서 파송을 할 정도로 돈을 맡길 만큼 정직한 도덕성에 하자가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도덕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요즈음도 장관 청문회로 시끄러운데 대부분 돈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직무능력, 직무에 대한 성실성, 청렴성, 애국심 등과 같은 것인데 도덕성 검증에 온통 매달립니다.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발가벗겨 의혹을 제기하고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합니다. 주로 다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병역, 이성 문제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것이 돈과 관련된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지갑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성숙한 인격자로 좋은 평판을 듣는 데는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침례교회에서 침례식이 거행되고 있는데, 한 성도가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합니다. 왜 안 들어오느냐고 하니까 지금 지갑이 여기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당신의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 청문회 때 도덕성에 걸리면 평생 쌓아놓은 평판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상처는 고칠 수 있지만 나쁜 평판을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유다의 나쁜 평판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잘 아는 사람들에게 에바브로디도처럼 도덕성에 인정받을 만큼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여 사명을 완수하는 능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품과 재능이 없는 사람을 사람들은 폐품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재능은 없고 인품만 있는 사람은 반제품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인품은 없고 재능만 있는 사람은 위험물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훌륭한 인품과 재능을 동시에 겸비한 사람을 최상품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평판의 힘(주희진 지음)>에서 평판관리 원칙 첫 번째가 좋은 인간성이고 두 번째가 뛰어난 업무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평판을 구성하는 두 번째 영역은 업무능력, 즉 성과 창출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회사에서 좋은 평판을 받으려면 핵심역량에 집중하여 결과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업무능력을 높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 능력, 중간보고를 잘하는 습관, 무능한 상사라도 잘 모시는 태도 등을 들고 있습니다. “성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인가, 추진력 있게 일 처리를 하는가, 자원 동원력이 있는가,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가, 목표 달성을 위해 협력할 줄 아는가, 일에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는가, 실패를 통해 성장해 가는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가, 개인의 성과와 조직의 성과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해 보면 자신의 업무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교회에 보낸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부탁을 합니까?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충심으로 기뻐하며 그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존경받고 존대 받을 사람으로 가치 있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30절을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 때문에 생명을 건 수고를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들을 엄청나게 박해할 때 일반인들은 기독교도들을 식인종 혹은 불륜(不倫)을 일삼는 이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 집단의 괴수인 바울을 디도처럼 심방하고 면회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하여 그들 모두가 와서 바울을 섬길 수 없으니까 자신이 그들이 하지 못한 것까지 사도바울을 섬기기 위해 생명을 건 수고를 당담했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한 사역이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을 했다는 말입니다(계2:10).

그러면 에바브로디도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게 되었다는 말은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저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근심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으로 죽었다면 얼마나 빌립보교인들이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것을 염려한 바울의 근심도 에바브로디도를 하나님께서 살려주심으로 바울의 근심도 덜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데 어떤 평가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공부하는 사명, 사업하는 사명, 가정을 일으키는 사명, 전도의 사명, 교회 부흥의 사명 등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8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역을 얼마나 성과 있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목회자로,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교사로, 성가대로, 사장으로, 직원으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아들딸로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판의 힘(주희진 지음)>에 의하면 평판관리 원칙 첫 번째가 좋은 인간성이고 두 번째가 뛰어난 업무능력이라고 말하고 세 번째는 긍정적 조직 마인드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성이 좋고 일을 잘해도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함께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함께 어울렸을 때 더욱 시너지를 내는 조직 마인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직 생활은 결국 단체생활인데 함께 있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사람이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세 번째 영역인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는 조직 적응력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합니다. 조직원으로서 소속된 조직의 문화와 제도, 관습과 규범, 가치관 등에 부합하는가가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인 조직마인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인가,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인가, 조직에 도움이 되는가, 개인과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가, 팀워크를 형성하고 촉진하는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때로는 조직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가, 성과를 독식하지 않고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는가” 등을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조직을 세우는데 방관자나 파괴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회사에서 좋은 평판을 받으려면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불장군으로 혼자 잘난 체하며 조직을 파괴하는 자가 되면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는 신앙생활 잘 하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덕을 끼치지 못하고 자기 자랑하려다 교회를 욕하고 지도자들을 비난함으로 전도의 문을 막고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만들어 교인들의 열심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데는 커다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표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헌금하여 선교비를 보내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이나, 선교하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나,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 디모데나, 죽기에 이르도록 헌신한 에바브로디도나 다 그렇게 사역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30절에 나와 있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입니다. 디모데도 마찬가지입니다. 2장 22절을 보십시오.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습니다. 왜 빌립보 교회가 어려운 중에서 선교 헌금을 해서 바울에게 보내었겠습니까? 4장 15절을 보세요. 내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내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1장 18절을 보십시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이일에 목숨을 걸고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에바브로디도를 평가할 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수고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함께 일한 동역자라라는 말입니다.

함께 군사된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대적자들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자라는 말입니다. ‘함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함께'를 빼버린 행복이란 자기 만족이 될 수 있고, 함께하지 않는 대화는 독백에 불과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희망을 가지면 힘겨운 삶은 가벼워지고, 무기력한 삶을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들 때 돕는 배필로 만들었습니다. 감시하는 배필, 괴롭히는 배필, 비판하는 배필, 이용하는 배필, 대적하는 배필, 자랑하는 배필, 잘난 체하는 배필로 만들지 않고 돕는 배필로 만들었습니다. 함께 성공하는 사람, 함께 사귀는 사람, 함께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 함께 짐을 지워주는 사람, 함께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사람, 함께 끝까지 동행하는 사람, 함께 땀을 흘리는 사람, 함께 소중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평가받아야 합니다. 좋은 가정을 만들려면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들이 함께 수고하고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함께 교사로, 성가대로, 주방 봉사로, 화장실 청소로, 차량 안내로, 차량 운전으로, 헌금으로, 선교로, 예배 참여로, 기도로 열심히 동역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제 아이들이 대형 찬양 집회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집회에 가서 찬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금요 기도회에 나와 찬양하고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찬양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형집회에 가면 나는 찬양 인도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구경꾼이나 참여자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은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천 번 텔레비전 광고를 보는 것보다 내가 한 번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자꾸 자신을 종교 소비자로, 구경꾼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참여 수의 많고 적음이나 분위기의 좋고 나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내가 섬기는 교회라는 큰 목표, 이 교회에서 내게 주신 사명을 놓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홀로 서 있으면 숲은 될 수 없습니다. V자로 대형으로 날아가는 철새는 한 마리씩 따로 이동할 때보다도 71% 정도 빨리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두께 2인치, 폭 4인치의 각목 하나가 지탱할 수 있는 최대 하중은 167kg이고 두 개가 따로 사용되면 334kg을 지탱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똑같은 각목 두 개를 접착제로 붙여 사용하면 최대 하중이 2,212kg이나 된다고 합니다. 무려 1,878kg이나 차이가 납니다. 협동하면 시너지(Synergy) 효과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멋진 춤이라고 홀로 춤을 추면 피곤한 것입니다. 오늘날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무엇보다 팀플레이가 중요합니다. 자동차는 약 2만여 개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만여 개의 부속품이 하나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자동차는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합한 두 사람은 흩어진 열 사람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누가 잘하느냐보다 함께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12).

 

같이 하다 보면 함께 못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이라고 완벽한 사람이겠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설교 잘하지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외모가 변변치 않다고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온다로 약속해 놓고 오지 않았다고 이중인격자라고 했습니다.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에게 단점이 있어도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가 되어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흠 없는 조직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신공격적인 말들과 모욕적인 표현 등으로 비방과 비난을 쉬지 않고 받았습니다. "목수의 아들", "배우지 못한 자", "창기와 세리 등 죄인들과 어울리는 자",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어기는 자", "귀신 씌운 자" 등 수 없는 꼬리표를 붙여 비난받았습니다. 조직에 대한 긍정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조직을 비난하면 내가 몸담은 조직의 평판이 나빠지고 결국, 내 얼굴에 침을 뺏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인품을 가지고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성과를 내었다고 해도 공동체에 피해를 주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면 그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트 노벨에 관한 유명한 평판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로 큰 명성과 돈을 벌었습니다. 1888년 그의 동생 루드비그 노벨이 사망했는데, 한 신문사가 잘못 알고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기사를 내었답니다. 기사 내용은 많은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죽음의 상인 노벨이 죽게 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벨은 기사에서 자신을 ‘죽음의 상인’이라고 칭한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답니다.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명성과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무기가 사람을 대량 살상하는 것이 되어 공동체에게는 피해를 끼치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 무기를 만들면 평화로워질 줄 알았는데 전쟁터의 살상 무기가 되어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을 죽이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7년 후 1895년 자신의 전 재산으로 의미 있는 상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벨상’입니다.

평판이 좋은 사람은 자기 잘 먹고, 잘 살자고 남에게 피해는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 잘난 체하자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만 살자고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파괴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사람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국가 전체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 정파와 자기 정당의 유리한 측면으로 해석을 하고 대처함으로 오히려 일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 민족에게는 더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정당, 이런 사람들은 결국, 시간 지나면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빈대 잡으려고 하다가 초가삼간 다 태우면 아무리 불 지르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사람은 결국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보십시오.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잘 살펴보세요.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대인관계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돌려보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간절히 사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보고 싶고 사모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상대를 원수나 이용의 대상, 미움의 대상,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아주 강조하였습니다. 율법사가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했는지는 그다음 구절에서 바로 나타납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또 다른 이유는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인들이 들은 줄 알고 그것을 근심하였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자기가 병들면 자식들이 어려움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자신의 질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더 염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히 근심하다는 단어는 신약에서 3번밖에 쓰이지 않았는데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마26:37; 막14:33). 자신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그들이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할 정도로 에바브로디도 <평판의 힘>을 쓴 주희진의 말을 빌리자면 긍정적인 조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자기중심이 아니라 같은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도 가정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헌신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순교하더라도 복음은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해야 한다고 순교하는 순교자와 같은 마음입니다. 내가 손해더라도 교회는 부흥되어야 한다고 헌신하는 성도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내 잘남을 들어내기 위해 가는 곳마다 분쟁을 야기시키고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기쁨을 줌으로 공동체를 더욱 발전시키고 빛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평판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인격 파탄자가 아니라 성숙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여 사명 방관자가 아니라 사명을 완수하는 능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파괴자나 방관자가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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