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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환경과 신앙인(빌립보서 4. 빌1:12-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757 추천수:5 220.120.123.244
2019-06-23 10:23:45

 

고난 환경과 신앙인

빌1:12-18

 

우리는 계속해서 빌립보서를 보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복음을 전하다 바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12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당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13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나의 매임”입니다. 14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17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다시 강조합니다. 무엇입니까? “나의 매임”입니다.

나의 매임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 감옥에 죄수로 갇힌 것입니다. 바울은 A.D. 61-63년 경 로마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의 환경, 불리한 환경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순경이 아니라 역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다가 순경을 만날 때도 있고 역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성도님들이 당한 역경이 무엇입니까? 사업을 하다 거래처가 끈기고, 자금이 부족하여 부도 위기에 있고, 거래하다 사기꾼에게 속아 큰 재산상의 손해를 보고 있습니까? 자녀를 잘 기르기 위해 노력하다가 자녀에게 사고나 질병, 장애가 다가오고, 자녀가 중독에 빠지고, 왕따를 당하며 비전을 잃고 방황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는데, 질병이 찾아오고, 갈등과 환난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 잘 해보려고 했는데 되는 일이 없어 의욕을 잃어버리고, 회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고난의 환경을 만났을 때 신앙인들을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역경을 만날 때 복음 전파의 후퇴가 아니라 복음 전파의 전진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2).

지금 바울은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입니다. 젊어서 고생하였으면 늙어서는 좀 편안하게 쉬며 영광을 얻고 명예를 가지고 원로대접을 받으며 살아야 할 텐데 백발이 성성한 지금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는데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환경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감금된 환경입니다. 그에게 처한 최악의 환경입니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불리한 환경입니다. 신앙 생활하다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무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충성하였는데도 환경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어야 할 텐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녀가 잘되어야 할 텐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도 기도하였는데 건강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보이지 않는 충성을 다하였는데 오히려 근심거리만 더 늘어난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처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크게 나눈다면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그 고난의 환경을 준 대상자를 원망하며 불평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사업을 포기하고, 직장을 포기하고, 비전을 포기하고, 가정을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에게 불리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에게 불리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을 하나님이 주신 시련으로 생각하고 극복해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2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될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감옥을 복음의 진전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진전(프로코펜)’은 원래 군대의 진군을 위해 길을 개척하는 것을 뜻이라고 합니다. 복음 전파 때문에 당한 바울의 투옥은 복음의 문을 닫는 일이 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문을 광활하게 여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난과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그가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을 더 널리 효과적으로 전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수많은 고통과 아픔이 바로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우리가 당한 모든 일이 복음 전파의 진전을 이루는 일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경에 우리에게 명령한 세 가지 가장 큰 명령이 있습니다. 첫째는 문화명령입니다(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8)”

둘째는 대 명령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누가복음 10:27)”

셋째는 대위명령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 없지만 이 땅에서 사역에 있어 가장 우선 순위를 두고 해야 할 것이 바로 대위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켰고 계속 강조하였고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평생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 전파의 진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고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손가락질을 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질병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별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로는 비인간적인 대접이라는 감옥에 갇힐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난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감옥도 복음 전파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감옥도 전화위복이 되어야 합니다. 순경을 만날 때도 있었지만 역경을 만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신이 당한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맞추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감옥같은 환경이 다가와도 복음의 진보에 초점을 맞추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당시 최 강대국의 왕자였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다가 살인자가 되어 40세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최절정의 나이입니다. 왕이 될만한 나이입니다. 그런데 최악의 환경을 만났습니다. 40년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아갑니다. 처가살이합니다. 날마다 술 마시고 신세타령했다면 40년 그의 인생은 퇴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40년이라는 세월이 그에게 있어서는 퇴보의 기회가 아니라 진보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200만여 명을 광야에서 40년간 이끄는 지도자로 쓰시기 위한 훈련의 기회였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하고 살인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에 최악의 환경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그 환경으로 퇴보가 된 것이 아니라 성군으로 진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 기다림의 기간이 다 퇴보가 아니라 진보가 되게 하였습니다. 아마 음악가 중에서 '요한 세바스챤 바하'처럼 최악의 환경을 만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마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일곱 자녀를 낳고 바하가 레오폴드 후작과 연주 여행을 떠난 사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재혼하여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지만 그 중 10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그의 자녀 가운데는 정신 박약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년에 자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인이 죽었을 때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처절한 환경을 극복하고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을 그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만민의 죄를 홀로 감당하시고 누구든지 못 박혀 돌아가신 구주만 믿으면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그 황무지 같은 인생 속에서도 장엄하고 경건한 음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 즉, '예수 이름으로'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하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 50여 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때때로 감옥 같은 고난의 환경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풀 수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감옥 같은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끝없이 밀려가는 복음의 후퇴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어진 사명 붙들고 복음의 전진을 이루는 인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내 삶 때문에 복음 전파의 후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진전이 있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역경을 만났을 때 주님 나라에 불이익이 아니라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쉬운 말 성경은 “그리스도의 일로 내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문이 경비대 전체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감시하는 시위대는 궁정 수호대로 황제의 친위부대입니다. 이 부대의 간부직의 임기는 16년으로서 황제의 임면(任免)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답니다. 이들의 임무는 황제 보호와 외국에서 잡혀온 죄수를 관리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알려져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4장 22절을 보십시오. 이미 성도 중에 가이사의 집 사람 몇이 있습니다. 이미 황제의 궁정에 전도의 거점을 확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일가, 친척, 친구들에게 알려집니다.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시위대 군인일지라도 감옥을 지키는 군인은 보직이 나쁜 군인일 것입니다. 온종일 분만에 가득 차 찡그리고 있는 죄수를 볼 때 얼마나 짜증이 났겠습니까?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며 불평 원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환한 웃음을 짓고 기뻐하는 노인을 만난 것입니다. 너무나도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사랑에 넘치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데도 항상 여유가 있고 편안함이 있는 그를 보고 군인들은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온 시위대 안에 이런 바울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는 것입니다. 근무시간에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고난의 환경이 그들 감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가 아니라 생명 구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유익을 준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질병이, 믿는 사람의 실패가, 믿는 사람의 고난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처럼 수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고 말한 것처럼 로마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유인으로 좋은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감옥이라는 역경을 만난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으면 복 받고, 믿으면 행복해지고, 믿으면 평한해 진다고 했는데 오히려 감옥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수가 되게 하여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까지 가게 했습니다. 당시 바울을 죽이겠다고 동맹 맺은 자가 4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행 23:13). 하나님은 바울을 감옥에 갇히게 함으로 로마의 호위병으로 그를 지키게 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가난했는데 로마에 가는 모든 비용과 머무는 비용을 국비로 충당하게 했습니다. 앞으로 로마를 변화시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시나리오에 바울이 쓰임 받는 것입니다. 당시 죄수들을 지키는 군인들은 6시간마다 교대했답니다. 4교대 시스템이었답니다. 16명이 하루에 4번 교체되면 요즈음 말로 하면 4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일이 적어도 2년간 계속된 것입니다. 그는 죄수의 몸이 되었지만, 그 환경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결국, 네로의 삼촌과 친척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최고로 핍박한 도미티안 황제 때 어머니, 딸들 등 많은 고관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답니다. 313년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때 실제 그리스도인은 전체의 7%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국교로 정할 수 있었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전한 복음으로 세상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리고 바울을 사랑한 바울의 신앙의 동지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히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낙심하고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녀보았자 손해만 본다고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일을 당한다면 제 가족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신앙생활 잘하다 병들고 부도나고 직장 잃으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습까? 잘 되는 것을 보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있어도 잘 안되는 것을 보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습니다. 14절을 같이 큰 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형제 중 다수”, “주 안에서 신뢰” “겁 없이” “더욱 담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신실한 성도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핍박과 고난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15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 감옥에 보낸 것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자신의 감옥 생활이 오히려 신실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일지라도 그 주어진 환경을 잘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유익을 얻고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하신 우리 하나님이 과정을 통해 그렇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불리한 환경, 어려운 환경, 고통스러운 환경, 역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크나큰 유익을 얻지만 어떤 사람은 그 어려운 환경으로 말미암아 더 큰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심지어 가장 고귀한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환경도 선용하면 유익을 받고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어떤 나쁜 환경도 주님을 전파하는데 사용하면 결국 수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용기를 주는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교육을 할 때도 환경의 제물로 아이들을 바쳐서는 안 됩니다. 도저히 기를 수 없는 환경이라고 자식을 미리부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와 몸통 그리고 발가락이 두 개뿐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얼마나 처절한 환경에서 태어났습니까? 그러나 그는 신앙으로 모든 악조건의 환경을 극복하고 지금도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세계를 다니며 행복을 전하는 행복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를 보십시오. 장애인으로 정상인도 어렵다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합니다. 루터 아버지 광산 노동자였답니다. 김활란 박사의 어머니는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양잿물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려고 한 사람이었답니다. 링컨은 너무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꼭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야만 시대의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역경을 만났을 때 주님 나라에 불익이 아니라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역경을 만날 때 신앙인으로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8).

신앙인이 아니면 대부분 사람은 고난의 환경, 역경을 만나면 슬퍼합니다. 아마 거의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감옥에 갔는데, 회사가 부도났는데, 실직했는데, 병이 들었는데, 자녀가 낙방했는데 웃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1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쉬운말 성경은 “하지만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릇된 동기에서 하든, 아니면 좋은 동기에서 하든, 중요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사실로 인해 기뻐하고, 앞으로도 계속 기뻐할 것입니다.”

문제가 여전히 있는데도 기뻐하고 앞으로도 계속 기뻐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가장 기쁘지 못하게 하는 사람 문제입니다.

“겉치레”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위선적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위선적으로 합니까?

15절 전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그리스도를 전파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바울을 사도로 보지 않고 경쟁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이때야말로 우리의 세력을 넓혀야 하겠다고 분쟁과 시기심으로 열심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 ‘어떤 이들’ 무리에 속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목회자를 목회자 사모를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장로와 집사와 권사를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인들처럼 진영논리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종종 보면 신앙생활하면서 이 무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이 동기가 아니라 투기와 분쟁이 동기가 되어 매사 행합니다. 기도하던, 전도하던, 봉사하던, 헌신하던 깊은 마음의 바닥에는 투기와 분쟁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중에서 어떤 집사님이 교회 창문 커튼을 해 놓았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모든 성도가 손뼉을 쳐 줄까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성숙하여 다 손뼉을 쳐 줄줄 믿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권사가 되어야 하겠다고 라이벌 의식을 가진 집사가 있다면 “난체한다고, 뛴다고, 잘 보이려고 한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더 비싼 커튼을 1층에 달아 놓을 수 있습니다. 라이벌 의식을 가지면 이렇게 행동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복음을 전할 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쉬운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시기와 다툼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나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이기적이고 불순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감옥이라는 역경도 힘든데 같은 배를 탄 성도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당하면 대부분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면 참 참고 견디기 힘들 뿐 아니라 가장 먼저 기쁨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의 감정을 지배하는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감정은 내가 좋은 대접을 받느냐 나쁜 대접을 받느냐보다 복음이 전파되느냐 전파되지 않느냐에 지배되었습니다. 민감하고 집착하는 것이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종으로 자신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주님만 증거되면 되었습니다. 자신의 방식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해되지 않은 방법으로 복음이 증거되어도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압살롬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주님과 영적 결혼을 시키는 중매쟁이로 살았습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열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에만 집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라는 신앙 고백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라는 믿음이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면 수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자존심이 시퍼렇게 칼날을 세우고 있으면 그 칼로 자신을 찔러 수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사람에게 집중하면 다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존심, 이익, 체면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계속 상처받게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기하고 다툼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며 슬퍼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도 복음이 전파되는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고 계속 기뻐하여야 합니다. 복음의 중요성과 복음의 선포는 어떠한 인간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투기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야욕을 교묘히 감추기 위해 위장을 하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역겨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전파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입니다. 바울을 공격하기 위한 구실로 교묘히 위장하여 전도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기만 한다면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결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비난받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복음이 이기적인 야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파되었을지라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조금씩 알아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점을 자신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불리한 환경을 통해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복음이 진보되는 것으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복음이 진보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이었습니다. 자신은 망하고 자신은 망신을 당하고 자신은 참담한 지경에 이르더라도 복음의 진보만을 기뻐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쁜 환경, 불리한 환경, 역경을 만나면 슬퍼하지 말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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