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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신앙생활(7) 죽음과 싸움(요11:25-2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144 추천수:6 220.120.123.244
2019-02-17 09:33:32

 

승리하는 신앙생활(7) 죽음과 싸움

요한복음11:25-26

 

우리는 새해에 계속해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부터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과거의 아픈 기억인 상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기억 속의 과거는 해석과 반응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관점으로 해석하고 십자가의 용서로 용서하면 어떤 아픈 과거의 상처와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여섯 번째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데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기억 속의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기대 속의 시간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좋은 두려움과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나쁜 두려움이 있습니다. 위험한 동물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는 것같은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좋은 두려움은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각성하게 하여 직면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나쁜 두려움은 재능을 마비시키고 대인관계를 위축시킵니다. 신심을 쇠약하게 만들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불러 사명을 주실 때는 항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물에 빠진 아이를 건지는 어머니처럼 먼저 사명을 감당하면서 당할 고통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더 크게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홀로라고 생각하니까 두려워하는데 파괴적인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경우도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은 두려워하는데 우리는 미래는 반드시 형통할 것이라는 확실한 결론을 알고 두려움과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로 시간 속에 살면서 인생의 끝에 찾아오는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 죽음과 싸우며 살아갑니다. 죽음은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역사 속에 산 사람들은 힘을 다해 싸웠지만, 모두가 처절하게 참패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죽음을 정복하고 불멸의 생명을 가지기 위해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황제 진시황은 불멸의 생명을 꿈꾸며 연금술사들에게 죽음을 막아 주는 불로장생약을 찾아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성물질인 수은이 들어있는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16세기 스페인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젊음의 샘을 찾기 위해 카리브해로 항해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플로리다를 발견했지만, 원주민과 전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과학주의 신봉자들은 과학이 영생을 줄 것이라고 믿고 죽음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영생하는 새로운 인간, 즉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포스트휴먼(posthuman)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래학자 호세 코르데이로(Cordeiro) 박사는 "인간의 영생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과학기술의 성과를 감안하면 시간문제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에디슨 이후 최고의 발명가’로 손꼽히며 지난 30년간 미래 예측에서 80%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45년엔 인간의 모든 질병이 극복됨으로써 인류가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2045년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는 ‘특이점’에 도달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특이점이라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시점을 말합니다. 그는 그때까지 생존하기 위해 각종 영양제를 하루 150알 이상 복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돈이 연간 11억쯤 된다고 합니다. 구글, 아마존, 오라클 같은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최대 관심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일반 쥐에 고통을 느끼지 않고 암에 걸리지 않아 일반 쥐보다 10-30배 오래 산다고 하는데 구글은 영생의 비밀을 벌거숭이 두더지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과 90%가 유전자를 가진 통상 쥐의 수명은 2년인데 유전자 조합으로 이미 현재 5년까지 사는 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뇌과학, 분자 생물학, 생명공학, 정보기술, 나노기술, 첨단 의료기술 등의 발달로 2029년부터는 해마다 기대수명이 1년씩 더해질 것라이라고 합니다. 과학기술로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여 늙지 않고 죽지 않은 신인류(포스트 휴먼) 시대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기술과 돈으로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췌장암 수술을 받았을 때 그는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도 죽어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앞으로 수십 년간은 죽음에 가까이 가지 않길 바란다.”라고 했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 뒤 6년 만에 모든 사람과 똑같이 죽음과 싸움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죽음은 필연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하14장 14절에서는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7)”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합니다.

 

1. 그런데 역사상 이 땅에 사신 분으로 유일하게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바로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과 역사 비평의 합리적 사고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 속에 실제적으로 일어난 유일한 사건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나눌 때 크게 기록된 역사와 사실적 역사로 나눕니다. 기록된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써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바로 보도되는 오늘날 신문도 사실이 아닌 가짜 보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기록된 역사가 사실이려면 객관성이 필요합니다. 많은 증거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고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간 역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경험과 불일치가 되면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과거 발생한 사건은 오늘과 상호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일어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이 없는데 어떻게 과거에 부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과학적 사고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활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에 대한 의심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 둘째, 부활 기사의 신빙성, 셋째는 빈무덤의 역사성, 넷째는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입니다. 결국,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적이고 유일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씀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릿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 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과학적 증명만 꼭 사실을 입증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법적-역사적 증명도 있습니다. 재판을 할 때 보십시오. 사실을 모르니까 재판할 때 법적 증명은 구두 증언과 문서상의 증거 그리고 증거물에 의존합니다. 런던대학교 법률학 교수 노먼 앤더슨도 <부활의 증거>라는 책을 통해 만약 부활이 참이라면, 그것은 역사의 의미를 뒤바꾸는 최고의 핵심적 사건이 될 것이며, 만약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법률을 가르치는 교수로 여러 기록 문서의 증언을 철저히 검토하고, 빈 무덤이나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여러 가설을 과학적으로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결론은 부활이 사실이다는 것입니다. 어떤 법정에서든 최고의 증거는 '직접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인과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성경의 증언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초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옮겨 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 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했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자신의 형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희생 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바벨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것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사회 구조가 바뀔 수 있겠습니까? 로마가 부활신앙으로 정복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채 20년도 되지 않아 로마의 황실까지 들어가 로마의 권력을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부활밖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이 부활을 증거하다 순교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분이십니다. 문학적인 천재이며 캠브리지의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인 'C.S 루이스'는 부활을 믿지 않고 기독교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자기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마다 연구하다가 자기가 가장 협오했던 복음서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과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카고 트리뷴지의 기자였던 리 스트로벨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한 후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에 대한 증언과 증거의 수량은 압도적으로 많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의 부활 후 출현을 목격한 증인들을 한 사람씩 법정에 세우고서 사람마다 15분씩 시간을 들여 반대 심문을 한다고 해보자. 쉬지 않고 종일토록 심문하면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금요일 저녁 때까지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연이어 129시간 동안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후에도 믿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볼 때 분명히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장 4절에서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장 9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우리가 어떻게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25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죽는다는 말입니다. 육신적으로 죽는다고 해도 영적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음에는 육적 죽음, 영적 죽음, 영원적 죽음이 있습니다. 인간은 다 누구나 이 땅에서 육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으로 살고 영원히 살아 천국에 가고 예수님 재림할 때 다시 부활합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는냐?” 육체적으로 죽은 자든, 지금 살아 있는 자든 믿는 사람들이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여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분인 것을 전적으로 믿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믿게 만들기 위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는데도 바로 가시지 않고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동안 기다렸습니다.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게 만들기 위해 기다린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11절을 읽어 보십시오. 자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밖에서 놀다 마루에 자면 어머니가 포근한 침대에 뉘어 놓는 것처럼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깨어나게 하는 잠과 같은 것입니다. 누가 잠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잠은 하루의 수고와 슬픔이 끝난 후 찾아오는 고마운 휴식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모든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며 모든 것을 상실이며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죽음을 초월하여 살듯했던 사르트르도 죽음 앞에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 동안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갔다고 합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프랑스의 한 기자는 사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기사를 썼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했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해서 이런 기사가 실었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죽음이 끝이어서 영원한 본향, 참 안식의 본향, 죽음도 슬픔도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본향, 천국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마르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지금 살리시는 예수님이신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확인하고(27) 나사로의 무덤에 가십니다. 무덤에 가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나사로가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살아났습니다. 재판장의 말 한마디에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무죄로 석방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 한마디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성 만능주의자들, 경험 만능주의 자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스피노자는 "만일 누구라도 나를 위하여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나사로의 부활 기사를 진실로 입증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내가 세운 철학을 파괴하고 크리스천이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합리주의 신학자 파울루스 "기절한 나사로를 무덤에서 꺼내 바깥바람 쐬어 호흡을 회복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전을 쓴 르낭 "예수에 대한 신앙이 식어 가자 베다니의 세 남매와 짜고 술책을 부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이 가짜일 수 없습니다. 소경이 태양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귀머거리가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해서 바람이 없습니까?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자신의 경험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초논리, 초이성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해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서울역 가는 길을 아이에게 알려 주면 아이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알려준 아버지를 믿고 그대로 가다보면 서울역이 나오고 아버지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직접 경험했고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4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믿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목격한 사도들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 4:33)"

행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사람들은 무엇을 싫어합니까?

행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예수님은 우리가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마르다는 무슨 고백을 합니까(27)? 왜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까(42)? 결국 유대인들이 믿음을 가집니다(45,12:11).

막연한 부활 신앙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면 죽음과 싸움에서 이긴다는 확고한 부활 신앙을 가지시길 원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막연한 부활신앙을 가졌던 마르다의 부활신앙이 확고해집니다. 21절에 보십시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질병에서 고침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꼭 주님이 문제의 현장에 계셔야만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죽음에서 부활시킬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주님께서 하시면 살릴 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지금 살아난다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24절에 보십시오. 마지막 날에 부활할 줄 믿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부활시킬 것을 믿지 못합니다. 무덤 앞에 가신 예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보십시오.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에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합니다(40).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라"합니다(43).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 종말론적인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신앙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부활한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에는 역사적 부활을 믿는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 년 전에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또 다른 부활 신앙은 볼트만이 말한 실존적인 부활 신앙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의 이적이나 표적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앙적인 사건이다”라고 봅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같은 것은 역사적으로는 있을 수 없고 신앙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시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초월해서 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20,51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도 결국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소망과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의 세포의 생성과 소멸은 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7년이면 다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계속 세포가 죽고 사는 것입니다. 암세포처럼 안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 땅에서 몸이 영원히 살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과 삶은 연속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있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땅에 잠깐 살다가 영원히 사는 나라, 천국으로 가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빈정대던 유대인들도 죽음에서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보고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6,37,45). 그들은 빈정대었습니다(36,37).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보고 부활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포로가 되어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활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12:11). 확실하게 부활을 체험한 나사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 보니까 죽음이 그렇게 겁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6:14)”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죽음 앞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끝났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부활할 것이고 영원한 천국에서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 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 개척자로 일생을 바친 의사 부부였던 부모 아래 태어나, 훗날 다시 의사인 아내와 함께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16년의 세월을 보낸 닥터 셔우드 홀의 자서전입니다. 그분은 98세까지 사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정을 가지고 봉사했는데 그분의 열정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 요양소가 세워졌고 1932년 남대문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제임즈 홀은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환자를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남매 둘을 남겨 놓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로제타 홀은 죽음 앞에 무기력해지고 우울증에 걸려 자포자기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그 통증이 심각했겠습니까? 로제타 홀은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에 병원을 세우기 위해 모금 활동을 하고, 조선의 시각 장애인을 돕기 위해 점자 공부를 하였습니다. 김 에스더를 유학시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다시 조선에 돌아왔지만 6개월 만에 세 살 된 딸 에스더를 천국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싸움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간 남편의 이름을 붙여 "홀 기념 병원"을 세웠고, 어린 딸을 생각하며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에디스 마거리트 어린이 병동'을 세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이대 부속병원이 된 '동대문 부인 병원'을 세워 무지한 부인들을 치료했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세워 의사들을 배출시켰습니다. 시각 청각 장애인을 공부시켰습니다. 자신들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은 조선 땅인데 어떻게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남편과 딸을 잃고 외아들을 기르면 조선 땅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죽음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부활을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그녀를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게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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