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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 있는 신앙인(삼하9: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518 추천수:4 112.168.96.218
2017-07-16 20:23:34

 

의리 있는 신앙인

사무엘하9:1-8

 

오늘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참 의리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의리하면 조직폭력배들이나 쓰는 빗나간 의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끝까지 추종하거나, 불량배나 범죄 집단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하지 않는 행위를 ‘의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남자라면 의리’ ‘네가 의리가 뭔지 알아’ 식으로 혈연, 학연, 지연 등에 근거하려 집단의 비리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의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리(義理 Justice or loyalty)라는 말은 의로울 “의(義)”에 다스릴 “이(理)”로 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의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바른 도리’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상대를 대할 때 정의롭고, 윤리적이며,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의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과 의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 신의(信義 fidelity or truthfulness)와 비슷합니다. 우리 조상 선비들의 대표적인 윤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선비들은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요즈음 사회를 너무 의리와 신의가 무너진 사회라고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의리없는 신앙인이 많다 보니까 교인들은 ‘신앙은 없어도 의리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도 의리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본 어느 목사님이 중매하기 위해 어느 청년을 소개하면서 “공부도 잘하고 잘났지만 싸가지가 없다”고 말하며 “싸가지 없는 사람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즈음 일부 기독교인들을 보면 조직 폭력배 수준의 의리도 없다. 신앙인도 의리가 없으면 별 볼일 없다”고 말하며 의리 있는 신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마치 속담이나 격언처럼 "여자는 절개, 남자는 의리!"라는 말을 했지만 물질주의와 실용주의에서 사는 지금은 그 가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절개가 밥먹여 주고 의지라 밥먹여 주느냐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지혜가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이익과 편리와 쾌락만 있다면 변절하지 않고 시종일관(始終一貫)하는 인간관계를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는 사람도 있고, 조금 잘 나가면 젊고 예쁜 마담과 바람피우며 조강지처를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도 조금만 이익이 되면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의리의 사람들입니다. 신앙인 좋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리나 사람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의리가 다 살아진 시대에 룻이라는 여인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의리를 지키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의리를 지키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얼마나 따뜻하고 정감이 넘칩니까? 사도 요한은 평생 주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며 의리를 지키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자신의 무덤에 장사지낸 의리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늙고 병든 바울을 떠났지만 의사로써 끝까지 바울 곁에 있었던 의리의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리의 세계는 아주 멋이 있고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진정한 의리 있는 공동체가 교회공동체입니다. 초대 교회 때 신앙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형제들을 지켰습니다. 신사참배 때 신실한 성도들은 한결같이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히자 성도들은 의리를 지키며 목사님의 가족을 먹이는데 일제 순경들이 감시하니까 쌀을 조그마한 주머니에 넣어 집안으로 던졌다고 합니다. 몇 푼 돈 때문에, 체면 때문에, 언젠가 없어질 욕심 때문에, 목숨 부지하지하기 위해 신앙과 우정과 교회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의리를 지키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인으로 어떻게 의리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1. 과거의 증오보다는 사랑을 기억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군인임과 동시에 40년 동안 통일 왕국을 이룬 정치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1차 2차에 걸려 정복 전쟁을 하였습니다. 외교 문제를 잘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부강해졌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울의 집에 아직 남은 사람이 있는가를 찾았습니다. 당시 고대 왕조이기 때문에 왕은 세습됩니다. 그러므로 반역을 하지 못하도록 전 왕조의 씨를 다 제거했습니다(삿9:5; 왕하11:1) 우리나라에서도 반역을 하거나 가능성이 있으면 3족을 멸하고 9족을 멸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스승까지 10족을 멸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은총을 베풀려고 사울 집안에 남아 있는 자를 찾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사울이 자신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위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빼앗고 쫓아내었습니다. 쫓아 낸 것으로 끝내지 않고 수없이 자기 심장에 창과 칼을 들이댔습니다. 아홉 가지 잘해 주다가 한 가지 섭섭하면 의리를 팽개치는 것인 인간입니다. 만약에 그 후손을 살려 두면 언제 다시 사울 가를 따르는 백성과 함께 역적모의를 하여 자신을 추방하고 왕위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후손 중 남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준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생각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인답지 않은 사람입니다. 임금답지 않은 임금입니다. 나라를 블레셋으로부터 건져 주었는데 자신을 죽이려는 의리 없는 원수였습니다. 자신의 미래의 이익을 위한다면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의리를 지키겠다는 것은 무슨 이유서입니까? 첫째는 요나단을 인하여서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삼상18:3,4; 19:1-3; 20:4-42) 요나단은 왕위를 계승받은 왕자였고 다윗은 한갓 초라한 목동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해주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은 충성스런 종이라고 죽이지 말라고 간청을 합니다. 사울이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을 숨겨 주고 도망하게 하여 목숨을 살려 줍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는 사울 가를 생각할 때 사울을 생각하지 않고 요나단을 생각한 것입니다. 집안이 틀어지면 자식도 싫은 것입니다. 목사와 틀어지면 목사 자식도 싫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집안이 틀어지면 친구도 원수가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울이라는 “사”자도 듣기 싫고 입에 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10여년 넘게 그 응어리를 마음에 묻어 놓았을 것입니다. 의리는 나쁜 것을 생각하면 증오하며 지킬 수 없습니다. 좋은 점을 생각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 나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면 정으로 살고 정도 떨어지면 의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편과 강아지의 공통점이라는 유머를 보니까 “1. 끼니를 챙겨줘야한다. 2. 가끔씩 데리고 놀아줘야 한다. 3. 복잡한 말은 알아듣지 못한다. 4.초장에 버릇을 잘못 들이면 내내 고생한다.”

남편이 강아지보다 좋은 점이 있답니다. “1. 돈은 벌어온다. 2. 간단한 심부름은 시킬수 있다.

3. 훈련을 안시켜도 대소변을 가린다. 4. 집에 혼자두고 여행 갈수 있다. 5. 같이 외출할때 출입제한구역이 적다.” 그런데도 강아지가 더좋은 까닭이 있답니다. “1. 신경질이 날때 발로 찰수 있다. 2. 한 집안에 두마리를 같이 길러도 뒤탈이 없다. 3. 강아지의 부모형제로 부터 간섭받을 일이 없다. 4. 데리고 살다가 내다 팔 때 변호사가 필요 없다.”

인간관계의 나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베풀었던 좋은 것을 생각할 때 의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남편과 좋은 점을 생각하며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아내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울의 얼굴을 떠올리면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얼굴을 떠올리면, 요나단이 베푼 사랑을 생각하면 의리를 지켜야하겠다는 다짐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요나단과 생전에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사울로부터 다윗을 살려주면서 사무엘 상 20장 42절에 이렇게 언약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라고 했습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자와 은총은 둘 다 원어는 “헤세드”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어 이것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버릇도 없고, 예의도 없으며 지극히 이기적이고 의리 없는 인간이 됩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살만하니까 자기 성찰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가를 냉정하게 자신의 뿌리를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 만큼 잘 살게 되고 이 만한 배움을 가지게 되고, 이런 아내 이런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지를 살펴보면 뿌리가 있습니다. 그 언약에 근거하여 지금 다윗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다가 올지도 모르지만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나 이해타산이나 반응이 문제가 아니라 언약을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서운한 감정을 따를 것인가 약속을 따를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약속을 따르는 것입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때 마음과 결혼하고 어려움이 다가 왔을 때의 마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어떻게 의리를 지키고 있습니까?

2. 실제적으로 끝까지 호의를 베풀므로 의리를 지켰습니다.

사울의 집의 시바를 불렀습니다. 아주 의리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배신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종이지만 부자가 된 종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아들과 종이 몇 명이나 됩니까? 아들이 15 명이고 종이 20명입니다. 이 사람에게 다윗이 무엇을 물러 봅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의 집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자가 있느냐?”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울처럼 찾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아주 약삭빠른 자였습니다. 어디에 가야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이익 앞에 밥 먹듯 배신하는 자였습니다. 기회주의자이고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실용주의적 사고가 교회까지 파고들어 교인들을 보면서 정말 깡패보다 의리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너무나 신앙이 좋다고 말하면서 너무나 교인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하고 이익이 없으면 밥 먹듯 의리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시바는 이것을 다윗에게 알리면 큰 상을 받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윗에게 다리를 저는 요나단의 아들이 살아 있다고 알려 줍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을 때 유모가 급히 도망가다가 아이를 떨어뜨려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삼하4:4). 왕은 그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시바는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로드발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는 히브리어로 ‘아니다’라는 것을 뜻하고 ‘드발’은 목초지를 의미합니다. 목초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니까 그는 황무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로드발 광야에 아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길은 참 의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폐족이 된 사울 왕가의 손자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자신도 잡혀 죽을지 모르는데 아무 힘도 없는 두 다리 장애인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며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참 의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쫓겨 갔을 때도 마길은 다윗을 그의 집에서 보호해 주었습니다(삼하17:27-28)

다윗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마길의 집에서 데려오게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드디어 올 날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름도 본래는 므립바알(대상8:34; 9:40 바알로 만족하는 자)였는데 므비보셋(부끄러움을 없애 버리는 자)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는데 발각이 된 것입니다. 이 때 나이가 12절에 보니까 아들 하나를 낳아 결혼한 것과 다윗의 통치 기간을 보면 아마 20대였을 것입니다. 이 때가 다윗이 유다 왕으로 7년 반 그리고 10여년이 흐른 때이니까 므비보셋이 다섯 살이었고 17여년이 지났으니까 대략 22~23살 쯤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젊은 날에 아이 하나와 아내를 두고 처참하게 처형당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므비보셋은 다윗 앞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첫째는 생명의 자유를 줍니다.

7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지니라” 고대 사회에서 왕위에 오르면 일단 정적과 그 일가 친족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동서양의 일반적인 관례여서 꼼짝 없이 죽는 줄 알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런데 첫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겠습니까? 과거의 서운 한 것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사울에게 당한 불이익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경제적 자유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사유지를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숨어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자유를 줍니다.

셋째는 왕자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식탁에 앉아 같이 밥을 먹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왕 앞에 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을 친아들처럼 여겨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요나단이 누렸던 그 자리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신분을 완전히 바뀌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자답게 살도록 시바로 하여금 돌보도록 합니다(10절) 실제로 므비보셋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왕자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므비보셋이 잘 나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밑줄을 그어 보세요.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요나단이 자기 목숨을 살려 주었는데 그 아들이게 요나단에게 받은 선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의리입니다. 다윗은 장애를 가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평생 보살피면서 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과 고마움을 마음에 담고 빚진 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게 다윗의 의리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고 그들의 공로와 죽음을 야살의 책에 기록하여 요나단을 기리고 기억하였습니다(삼하1:17,18).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이 어려울 때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고 실제적으로 명예를 회복해 주고, 실제적으로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의 성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며 움켜잡는 사람이 있고 그 성공의 축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리의 신앙인은 성공의 축복을 자신에게 준 사람과 나누려는 사람입니다. 성공의 축복을 나누려는 사람 중에는 자신에게 돌아올 반대급부를 생각하며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 마케팅을 하는 것입니다. 돌아올 것을 보고 선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미래의 기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받은 은총을 생각하며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의리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의리를 지키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하여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의지를 지킨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밑줄을 그어 보세요. “헷세드”입니다. 본문에 3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입니다. 요나단이 끝까지 다윗의 편에 서서 그를 보호한 것도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헷세드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이렇게 요나단의 후손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은혜, 자비, 인해, 사랑” 등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므비보셋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랑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사랑,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것은 대상의 상태와 상관없이 주는 것입니다. 대상이 감사하든 감사하지 않든지, 나에게 무엇인가를 돌려주든지 돌려주지 않든지, 의를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변함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울로부터 수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어 세워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다윗을 살려 결국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입니다. 이해 못할 과정을 거쳤지만 그 때마다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둠과 밝음은 늘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둠 속에서도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붙들어야 합니다. 인간적 정이나 인간인 의지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므비보셋에게도 그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요나단과 한 맹세가 단지 인간끼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었습니다(삼상20:14,15,42) 이 은혜는 어떤 은혜이겠습니까? 므비보셋을 통해 성경은 말하게 합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돌보시는” 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개를 멸시하였습니다. 더구나 죽은 개는 시체를 의미합니다. 율법에서는 아주 부정한 것이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비유적인 말로 가장 싫고 하찮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전혀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 못되지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시고 신분을 의인으로 바꾸어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의리 때문입니다. 의리 없이 시시 때때로 배신하고 변질되는 우리이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그 언약에 근거하여 의리를 지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한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더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하 16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황급히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때 시바가 두 마리의 나귀와 떡 이 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이합니다. 다윗은 많은 신하들이 반역에 동참하여 황급하게 도망 나왔는데 시바가 그렇게 해 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시바에게 물어 봅니다. 2절에 보십시오.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냐?” 시바가 즉시 준비해 온 것처럼 왕의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을 합니다.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미시게 하려고” 가져왔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참으로 의리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윗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계산된 호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이 자신이 의리를 베풀어 준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봅니다. 이 때 시바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했다는 것입니다. 의리를 지키지 않고 배신하고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브비보셋에게 준 땅을 다 그에게 하사합니다. 얼마나 간교하고 인간은 얼마나 쉽게 속습니까? 위급한 때, 고난당할 때, 외로울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고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상당히 균형 잡인 신앙인이었지만 위기 앞에서 공정한 판단력을 잃어버립니다. 성급하게 결정해 버립니다. 한 사람 말만 듣고 쉽게 그것을 믿어 버렸습니다. 제가 시바가 간교하다는 이유를 알겠지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의리고 나발이고 없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바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십시오. 다윗이 승리하고 결국 왕위에 복귀를 합니다. 그 때 시바가 어떻게 합니까? 잽싸게 왕을 맞이합니다.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입니다. 목회자들 가운데는 하는 말 중에 “처음 시무하는 교회에 부임할 때 차를 가지고 오신 분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의리를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삼하19장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들 15명과 종 20명과 더불어 왕을 맞이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므비보셋도 왕을 맞이합니다. 그 동안 땅을 다 빼앗기고 다시 반역자처럼 살았습니다. 왕이 물어 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않았냐고 다그칩니다. 그 때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26절 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의리 없는 시바가 므비보셋을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귀를 다윗에게 바치고 주인을 모함한 것입니다. 그는 왕이 도망갔을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왕에 대한 신의를 입증합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저는 발 맵시를 내기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염을 깍지 않았고, 옷도 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애와 종의 배신으로 같이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슬픔에 같이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이 된 자신을 처분대로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시바를 죽일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질 심문하지 않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시바와 밭을 나누라고 합니다. 시바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속였지만 어려움 당했을 때 자신을 도와준 것을 생각하여 보답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리 없는 약삭빠른 인간이어 뱉어 버리고 싶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배신과 무책임, 위선과 거짓을 다 표용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익을 위해서는 쉽게 의리를 배신하고 사는 인간들이지만 하나님은 구역질 내지 않고 끝까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다 넘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밝히면 다 빼앗기고 죽어야 만 하는 것인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붙들고 의리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바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어지신 영원한 구속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에 근거하여 용서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대속해 주신 예수님 때문에 구역질나는 배신을 하나님은 참고 그래도 살만한 것을 주시고 지옥의 형벌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죽은 개같은 사람일지라도 찾고 있습니다. 다윗 앞에 나아가 다 회복되었듯이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죽음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죽음의 공포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 용서를 받고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전 것이 다 청산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홍같이 불은 죄가 용서되고 깨끗해지고 모든 죄를 도말하여 기억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은 개같이 생각한 므비보셋은 어떻게 합니까? 30절 크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에게 전부를 주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땅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돈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땅이 없어도 왕만 평안이 돌아 왔으니 자신은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리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없었는데 영원한 천국 백성 만들어 주시고 이 만큼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한 평생 살면서 마길 처럼 계속 어려운 이웃들의 아픔을 품어 주고 도와 주며 의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시바처럼 약삭빠른 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의 약점과 어려움을 이용하여 자신만 잘 살겠다고 의리 없이 배신만하며 사기 치며 비열한 인간으로 살겠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끝까지 잊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삶을 살겠습니까?

므비보셋 처럼 비록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장애는 있지만 은혜를 잊지 않고 신의를 지키며 살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의리를 지키고 신의 있는 신앙인으로 살고 싶어도 한계는 있습니다. 때로는 이익 앞에 배신을 하고, 조그마한 불이익이 다가와도 참지 못하고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십자가의 보혈로 다 씻어 주었습니다. 다 덮어 주었습니다. 다 넘겨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윗과 므비보셋 처럼 하나님의 그 크신 은총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의와 의리를 지키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장 석윤 박사의 책 중(The Ways of Folly) 의리를 위하여(For the Sake of Uiri)라는 글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는 아내와 두 어린 남매를 한국에 두고 30여 년 전 미국에 유학을 왔답니다. 학비를 벌며 공부하고 한국에 생활비까지 부쳐야 할 형편이었지만 학생 신분으로 일을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처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렸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답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한국에 있을 때 미 8군에서 태권도를 가르쳐 검은 띠까지 따게 했던 Frank라는 청년이 서있었답니다.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하니까 영주권을 신청하라고 하면서 자신이 모든 비용 일체를 먼저 지불할 터이니 형편되는 대로 천천히 갚으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뭣 때문에 이런 호의를 베푸냐고 물었답니다. 그 때 그는 “It's Uiri. Master."라고 대답하였답니다. 한국에서 태권도를 가르쳐 줄 때 ‘의리’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냐고 하면서 자기는 스승님으로부터 배운 의리를 실천 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답니다. 20불을 헌금하고 영주권을 받도록 기도했답니다. 그러나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해 영주권을 받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직원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다음에도 꼭 당신이 인터뷰를 해 달라고 사정을 말했답니다. 다시 인터뷰 날짜를 잡아 결국 영주권을 받은 날 이민국 직원의 손을 붙들고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형님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 직원은 왜 내가 당신의 형님이 되야 하냐고 의아해 했답니다. 그는 동양 사상 중 고상한 도덕적 가치중의 하나인 "Uiri"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죽을 때까지 형님으로 모시면서 형제로서의 의리를 지킬 것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얼마 후 미국에 도착한 그의 가족과 영주군을 준 Taylor 가족은 수년간 서로의 집을 오가며 친 형제 보다 더 가깝게 지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Taylor 씨의 전화번호가 끊겼답니다. 집에 찾아가 보니 그들은 집을 팔고 어딘가로 이사를 가 버렸답니다. 그의 아들이 다니고 있는 하버드 법대를 수소문해서 어머니가 뇌종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 집을 팔고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병원에 찾아가니까 부담이 될까 봐 알리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그러면 내 아내가 이런 병에 걸려도 당신은 모른 척 하려고 했오? 우리는 서로 형제이니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함께 풀어 나갑시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는 아내가 수술하려면 12만불이 필요한데 집을 팔고 보험 혜택을 받아도 6만불밖에 충당이 안되어 수술을 못 받고 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뉴욕에 오자 마자 아내에게 그 동안 두 부부가 안 먹고 안 쓰면서 모아 놓은 총 재산 6만 불을 Taylor 부인의 수술비에 보태자고 말했답니다. 아내는 펄쩍 뛰고 울면서 반대했지만 “이웃 사랑의 참 뜻이 무엇이오? 우리가 이 돈을 형제 사랑을 위해 쓰면 하나님이 백배로 갚아 주실 것이오.”하며 밤새 설득하였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을 찾아 가 Taylor 씨에게 6만불짜리 수표를 내밀었답니다. 그는 구슬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리는 Talyor 씨에게 말했답니다. “It's Uiri of brotherhood. 형제된 의리일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Taylor 씨는 그를 꼭 껴안으며 ”You are my real brother." 라고 말해 주었답니다. Taylor 부인은 완치 되어 건강한 삶을 되찾았고 그들의 아들은 하버드를 졸업한 후 한국 여성과 결혼하여 현재 뉴욕에서 이민법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사람들의 법적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특별한 열심과 정성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25년 전 백배로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축복을 누리고 사고 있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리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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