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애원(5) 하나님 제가 소명의식이 부족합니다(출애굽기3:9-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327 추천수:7 112.168.96.71
2017-05-21 13:51:33

 

애원(5) 하나님 제가 소명의식이 부족합니다

출애굽기3:9-12

 

지난 주 개척교회를 하시는 목사님께서 전화가 왔습니다. “성지 순례를 가는데 새벽기도를 맡길 분이 없어서 새벽기도 인도하실 부목사님 계시면 한 분 보내 주었으면 감사하겠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러면서 개척교회를 하지만 돈이 많이 드는 성지 순례를 가게 된 이유를 저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서울에 사람이 많이 나오는 교회를 섬기는 권사님이신데 자기 교회 근처로 이사를 왔답니다. 서울까지 새벽기도회를 갈 수 없어 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예배를 자기 교회에서 드렸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자기 교인은 아닌데 젊은 목사님이 개척 교회 하신다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젊으신 목사님을 도와주며 섬긴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헌금을 해 주시고 평일에 행사가 있으면 교회에 나와 연로한 몸으로 봉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이 몇 년 동안 목사님 성지 순례를 보내 드리기 위해 매달 돈을 모아 그것을 가져 오셨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 성지 순례를 꼭 목사님이 가야한다”고 100% 경비를 대 주며 “가시라”해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오늘 날도 참으로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시는 권사님이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즈음 보기 드문 가슴으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 중에는 입으로만 믿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월급 1년치 가치가 있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으니까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요 12:5)고 비난합니다. 입술로만만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바르게 물질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는 욕심많은 도둑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아주 계산이 빠릅니다. 빌립과 같은 사람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먹을 사람은 5천명이 넘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어봅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사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 때 머리기 빙글빙글 도는 빌립이 말합니다. “각 사람이 조금씩 먹게 해도 이백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합니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정확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빌립은 수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막상 현실 앞에서 머리로 돌아가 이성의 늪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체험을 한 베드로는 어떻게 됩니까? 가슴으로 믿습니다. 무식한 것같고 비상식적인 것같은데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있는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합니다. 타협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전인적으로 예수님을 믿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은 입술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소명체험을 하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계산이 아니라 나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익이나 사람들의 대접, 편리나 쾌락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도 요즈음 보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않으면 참여하지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교회 일꾼인 항존직으로 부름받은 안수집사도, 장로도,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을 받을 때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직분으로 서약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로 알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겠다고 찬양하고 다짐합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 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 가 지고 강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라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다짐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이나 제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사가 되기 위해 처음 신학교에 들어가면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도 있고 복음에 대한 뜨거움과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점점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1학년 때 해변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 옷 입은 채 물에 뛰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 튜브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졸업반이 되면 뛰어 들어가지도 않고 링을 던지지도 않고 밖에서 "어 나와"하며 손짓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 우리 교회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섬기는 분을 보면 감동을 받습니다. 바자회를 하면 밤을 새워가면서 준비하시는 권사님들도 계십니다. 사업하면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기 위해 애를 쓰시는 권사님도 계십니다. 바자회를 할 때 평일에 사장으로 일을 하면서도 그래도 하루쯤을 봉사해야 한다고 휴가를 내고 교회에 와서 봉사하시는 집사님도 계십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린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우리 이 장로님 보면 “제가 목사가 아니고 장로라면 저렇게 소명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섬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참으로 투절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을 봅니다. 병점에 사십니다. 교회에서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제일 먼저 나와 교회 문을 열고 기도를 합니다. 주일은 말할 것도 없고 수요 기도회, 금회 기도회 거의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라와 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정이 있을 때는 저에게 꼭 연락을 합니다. 매일 쉬운 일이 아니라 고된 일을 하시지만 열린 교회 장로가 하나님께서 불러 맡겨준 일이라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시는 것입니다. 아들 결혼하여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아들이 군대 가 있을 때 한 번도 면회를 가지 못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주일에 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신집사님 가정을 전도하신 강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장로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하이니스를 다니며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 차량 운행을 하셨습니다. 명함에 하이닉스 직책을 쓰시고 열린 교회 주일학교 교사라고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참 소명의식이 투철한 집사님이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는 것보다 더 고상하거나 궁극적인 열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실까요?

 

1. 하나님은 지금 부여된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로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9-10)

왜 소명의식이 부족합니까?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로 받아들이기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어진 일이 우연히 주어진 일로, 또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로, 아니면 내가 선택한 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교육이나 직장 생활이나 가정 생활이나 교회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내용과 질과 성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한 시대 불러 사용하신 모세를 보십시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의 압제 하에 고된 노동을 하면서 탄식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괴롭힘과 학대를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냅니까? 하나님이 보내는 것입니다. 언제 보냅니까? 이제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역사의 가장 절적한 때가 되어 너를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몰랐을 지라도 하나님은 모세를 준비시켰습니다. 살인자, 도망자가 되어 40년 동안 초야에 파묻혀 잊힌 사람이 된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사명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사역의 원대한 계획을 진행하시면서 한 시대 모세에게 그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소명의식입니다.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일을 맡겼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소명의식입니다. 소명의식의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평생 이루어야 할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소명의식이 부족합니까? 내게 맡겨 준 일이 하나님이 일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교육하는 일도, 직장에서 사업하는 일도, 교회에서 직분을 수행하는 일도, 열심히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내게 맡겨준 일로 하나님은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 소명은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환경과 조건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녀도 실제로는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소명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직장을 단지 생계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소명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직분은 받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해도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명의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아닙니다. 스스로 계신분이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초월하여 인간의 삶과 무관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역사 속에 살아계서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5-16).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주어진 일을 감당하시길 원하십니다.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며 핑계대고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소명의식을 가지고 할 때 성취도도 만족도도 행복도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생계유지 위한 직업에서 진정한 만족을 얻으려면 소명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거리의 쓰레기를 주어도 하나님의 땅을을 청소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면 행복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고칠 때도 생계만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준 생명을 살리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할 때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릴 때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식을 가지고 할 때 바르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면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로 받아들이면 화장실 청소도 천한 것이 아닙니다. 소명의식을 가지면 직업이 생계 수단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장이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 다녀도 소명의식이 없으면 일을 하지 않고 이직의 기회만 노리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주식 사이트를 열어놓고 카카오톡 창을 열어놓고 일하게 됩니다. 평소 컴퓨터 작업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업무 외의 일을 즐기며 회사를 옮기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소명의식이 없으면 그렇게 합니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누가 뭐래도 내 마음대로 직장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유분방합니다. 직장을 하찮게 여기며 아무 때나 출근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사가 어떻게 되는 자신만 편하면 된다고 직장을 다닙니다. 자기 일도 안하고 빈둥거리며 시간만 보내다가 자신의 복리와 휴가는 누구보다 꼼꼼히 챙깁니다. 애사심이 없습니다. 돈만 쫓아다닙니다. 이익과 편리와 쾌락만 쫓아다닙니다. 교회에서 주어진 직분을 꼭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명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구원도 시켜 주실 뿐 아니라 교외내의 직분에로의 소명과 교회 밖의 직업으로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교회 내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것 다 소명입니다. 직장에서 사장으로 부장으로, 사업으로, 가정에서 주부로 섬기는 것 다 소명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주어진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80세에 불렀고, 예레미야를 불러 멸망해 가는 민족에게 눈물로 호소하게 하였고, 꿈이 없는 백성에게 에스겔을 불러 비전을 제시하였고, 성벽이 무너진 것을 재건하기 위해 느헤미야를 불러 사용했습니다. 불신의 암흑 속에서 진리를 잃은 백성에게 진지를 빛을 보여 주기 위해 엘리야를 불러 사용하였고, 시대마다 사사들, 다니엘, 에스더, 모르더게, 12제자, 바울, 바나바 등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였습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 시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우리도 나에게 지금 주어진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지금 부여된 일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하시길 원하십니다.(11)

왜 사람들이 소명의식이 부족합니까? 자신의 무능력 때문입니다. 자신은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나이 때문에, 능력 때문에, 과거 경력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리이까?"

자신은 지금 도망자, 실패자, 처가살이하면서 양치는 자, 80세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당대 최고의 권력자 바로에게 가겠냐는 것입니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없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비관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어떻게 거절합니까? 4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바로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짐작하고 추측하고 단정하여 이일의 부적합자라고 판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은 내 능력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내 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대사가 자기 잘나서 대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대통령의 권위에 근거하여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계속 자신의 능력과 실패 경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일을 거절합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다 찾아 거절합니다. 4장 13절에서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모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거부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다. 결국 그 일을 함으로 나는 상처만 받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직장일 그만 두고 교회일, 가정 일 그만 두겠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1-12)"

소명을 받아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주신 소명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배반하고 실패하고 약한 자 쉽게 버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배반한 자도, 실패한 자도, 약한 자도, 간음한 자도, 우상을 섬긴 자도 불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약하고 실패하고 못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한 번 실패 했다고 사업포기하고 가정 포기하면 안 됩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상장사의 아들입니다.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불러 사용하였습니다. 요셉은 사기꾼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한갓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충분히 교육받은 명문가의 아들이 아닙니다. 바울 살인을 방조한 사람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찾아다닌 사람입니다. 일평생 질병으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베드로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배신자이고 예수님을 저주까지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소명의식을 주시고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 내게 무엇이 있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실력이 무엇이냐?" “나의 환경이 무엇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쓰시는 분이 누구냐?"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니까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가 수많은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다윗의 물매와 돌이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쓰임받으니까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가 블레셋 사람 600명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미모가 없고 능력이 없고 돈이 없다고 할지라도 있는 것 하나님이 쓰시면 거기에서 오병이어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모세 80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을 완성한 것도 여든이 넘어서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일흔 살 때 완성했습니다.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도 고희(古稀)의 나이를 넘어 불후(不朽)의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소명의식을 갖는 것은 질병이 장애물이 아닙니다. 파스퇴르 하면 대부분 사람은 우유회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미생물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46세가 되던 해에 뇌출혈로 몸의 절반이 마비되었답니다. 그것으로 포기해 버리지 않았습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반신불수의 장애인이 된 이후에 실험기구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던 그는 광견병 치료와 전염병 예방법 발견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소명의식을 가지는 것은 환경이 장애물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무디를 보십시오. 1875년 미국에서 7남 2녀 중 6남으로 태어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석공으로 일을 했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학교 공부를 여섯 달밖에 하지 못하였습니다. 10살 때 출판사의 직공으로, 16살 때에는 친척이 운영하는 구두 깁는 공장의 직공으로 취직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소명의식을 가졌습니다. 교회 학교 교사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시켜 주지 않습니다. 교회에 사정을 합니다. 아이들을 자신이 데려다가 교회 신발장 앞에서 가르칠 테니까 허락만 해달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00명의 교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가 미국을 변화시킵니다. 미국에 청교도 정신으로 다시 한 번 정신 혁명을 일으킵니다. 일 년에 200만 명을 전도할 만큼 세계적인 부흥사로 일어서게 됩니다. 누가 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하십니다. 지금 부여된 일을 내 힘이 없다고 나이가 많다고 능력이 없다고 회피하고 핑계대며 도망갈 길을 찾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유일한 일이라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사명을 완수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지금 부여된 일을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여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기를 원합니다(12)

왜 사람들은 소명의식이 약합니까? 그것을 받아들이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만 그 일을 감당하며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이 일을 해야 하냐?”라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맡겨 준 일을 하기 싫어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겠습니까? 왜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맡겨 준 일을 회피합니까? 4장 19절을 보면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 목숨을 노리던 자 다 죽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광야의 소박한 삶도 다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소명의식이 약한 것은 그것을 하므로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행함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독약이라고 마시는 것이 인간입니다. 회사에서 승진되고 연봉이 높아지고 미래가 보장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 고생을 하고 나에게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2절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을 해 주십니다. 직장과 가정, 교회에서 소명의식을 잃어 버리고 지쳐 계시는 성도님 계십니까? 이 말씀 붙들고 소명의식으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 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후렴)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 다면 어떤 역경(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이 약속은 백만 대군을 얻는 것보다 확실한 보장을 해 주는 것입니다.(사 35:3;고전1:27;히 12:12).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겠다는 확실한 언약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서 있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그림을 보여 주고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이익이 없으면 사람들은 다 버리지만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고 네 편이 되어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육신의 부모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버렸습니다. 양어머니도 정치적 득실을 계산하여 그를 버렸습니다. 자기가 도와 주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도 자신을 배반하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호렙산에 나타나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우리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홀로가 아닙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눈물 흘리는 골짜기에도, 실패와 절망 가운데 울부짖는 순간에도, 승리의 환호에 젖어 있는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불러 소명의식을 가지고 산 사람들을 보십시오. 바울이 고린도에서 고난을 받을 때(행18:9-10) 함께 하셨고, 바울이 공회에서 잡혀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행23:11)도 함께 하셨으며 파선의 위험을 당했을 때(행27:23) 함께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였습니다. 다윗이 음식 먹을 기력까지 잃었을 때도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였습니다.(시102:1-7) 야곱이 형을 속이고 도망자로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여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다윗은 시32에서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사업을 하면서 나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며 홀로 외롭게 싸워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가정에서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나의 외로움 나의 고통을 몰라준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나만 외롭게 홀로 신앙 생활하신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울과 함께한 하나님, 다윗과 함께한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 모세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험한 길일지라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사명을 완수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는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십니까?

4장 14절을 보십시오. 형 아론을 이미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을 잘합니다. 모세 대신 말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자를 미리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협력하는 것을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협력할 자라는 것입니다. 비록 형이지만 모세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하나님처럼 섬겨줄 형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여 네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통해 이적을 행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너무나 이익을 쫓아 불나방처럼 불을 찾아 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사는 우리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명 따라 살아야합니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한 길일지라도 그 길이 십자가의 길, 가시밭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아에 주신 사명이라면 소명의식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에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그 길에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붙여 주어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모세는 눈 앞의 이익만 보며 사명을 피해 버렸다면 오늘날 모세로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모든 조건을 극복하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었기에 모세는 죽었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 모세로 역사 속에 남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감동과 영향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소명의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부여된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지금 부여된 일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이루시길 바랍니다. 지금 부여된 일을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여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고 사명을 완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을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4:17)”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5.21.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