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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진이 엄마의 꿈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2206 추천수:19 112.168.96.71
2014-11-25 13:20:43
왜, 라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몸으로 물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5년을 한결같이 이 동네 주스를 배달해온 효진이 엄마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냥 '주스 아줌마'로 알던 그녀가 특별해진 것은 알게 된지 5년이 되어가던 여름이었습니다. 땀이나 식혀가라고 냉수 한 잔 건넨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명문의대를 다니는 맏이와, 과외 한 번 받아본 일 없이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주말이면 동네 외로운 노인들을 찾는 막내가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과외활동이 점수로 환산되는 때도 아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둘째 효진이 이야기를 할 때였습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지쳐 돌아오는 엄마를 누구보다 반기는 효진이는 정박아였습니다. 스무 살 나이에도 대여섯 살 동네 꼬마들과 놀고 싶어하는 만년 아이. 그 아이 이야기를 할 때도 맏이나 막내를 이야기 할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세상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손길과 마음을 몇 십 배 더 써야 하는 아이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습니다.

세 아이만 남겨 놓은 채 일찍이 집을 떠난 남편을 이야기 할 때도 목소리는 조용조용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효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는 데만 해도 다달이 들어가는 돈이 수십만 원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면 절망과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녀에게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갖게 한 것은 효진이었습니다. "내가없으면 저걸 어떻게 하나, 누가 돌봐주겠나, 살아야지, 열심히 살아야지." 동네아이들을 모아 과외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외는 불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주스배달이었습니다.

그녀는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두 아이에게도 평소에 자신의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혹 엄마의 손길이 덜 미친다 해도 그것은 너희들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효진이가 엄마를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란다. 너희들은 영특해서 노력하는 것만큼 이뤄낼 수 있을 거야. 엄마 꿈은 지금부터 10년이나 15년 후, 효진이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집을 마련해서 함께 사는 것이란다. 그 때 맏이 너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찾아와 식구들을 진료해주려무나. 엄마가 가더라도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그 일을 이어준다면, 엄마는 더 바랄 게 없다."

하루하루의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효진이 엄마는 그런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서 막내가 대학 3학년일 때였습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내던 막내는과외로 번 돈 2천만 원 중에서 절반을 선뜻 엄마에게 내놓았습니다. 언니를 위한 기금이었습니다. 다시 5년이 지난 며칠 전, 저녁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구역이 바뀌어서 가게에서나 볼 수 있던 그녀를 집 앞에서 만났습니다. 다시 이곳 배달을 맡게되었다는 말에 반가워 잠시 이야기나 나누자고 함께 집으로 왔습니다.

그녀를 본지 15년, 세월이 거꾸로 간 것일까요. 체크 남방에 멜빵 청바지, 캡을 눌러쓴 그녀는 쉰 일곱 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활기가 있었습니다. "행복해요. 이제 정말 행복해요." 덩달아 나도 기뻤습니다. 의대생이던 큰 아이는 군의관으로 복무 중이었고, 과외로 번 돈 중에 1천 만 원을 선뜻 내놓았던 막내딸은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벌써 서른이 된 둘째는 천 원이 몇 개가 모여야 만 원이 되는지는 몰라도, 피곤한 엄마를 제일 반기는 딸로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궁금한 그녀의 꿈에 대해 물었습니다. 세월이 그냥 흘러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가게에서 만나 잠시 인사하고 돌아서던 그 세월, 그녀는 주스를 배달하고 남은 시간 또 다른 일을 해가며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철쭉꽃이 만발하고, 그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흘러서 효진이의 발을 씻겨줄 수 있는 그런 곳'을 꿈꿨다는 그녀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땅 2백 평을 구입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중퇴했던 대학에서 특수교육 과정 2년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때 막내가 준 돈은 장애인 목사님을 중심으로 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혼자 올 수 없는 장애자들이라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일도 하는 그녀는, 자신을 '자칭 식반장'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내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해서 같이 먹는 것이지요." 집에 있는 서른 살 아이 효진이를 위해서 요즘 그녀가 하는 일은 성경을 녹음해서 들려주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엄마 목소리" 라고 환호하는 것도 잠시뿐이지만, 그래도 반복하다 보면 들리는 말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틀어놓는다고 했습니다.

효진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노래. 찬송가 중에도 복음성가를 좋아하고, 그 중에도 가족이 함께 부르는 성가는 테이프가 늘어나 버릴 정도로 듣고 또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그녀가 늦게 주스를 배달한 것도 거동이 불편한 교회 식구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국립의료원에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늘도 꿈을 향해 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효진이 엄마의 꿈/정 화 신(수필작가)
주부편지 2000년 12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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