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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신(7) 주재권(욥기1:21-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001 추천수:9 220.120.123.244
2021-03-21 13:44:49

마음의 백신(7) 주재권

욥기1:21-22

 

어느 목사님께서 '팔복산에 오르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세분의 장로님에게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 어딘가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한 분은 한라산이라 했고, 또 한 분은 지리산이라 했고, 다른 한 분은 백두산이라고 했답니다. 그때 목사님은 웃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은 '부동산'이라고 했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 ‘부동산’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요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도 조카와 부동산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세상이 부동산 문제로 수없이 전쟁을 하며 죽이고 죽었습니다. 얼마 전 LH 투기 의혹 조사로 두 명이 자살하였습니다. 분당에서 숨진 A씨는 "책임을 통감한다.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고, B씨는 새벽 가족과 통화한 뒤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생명을 끊었답니다. 본인은 물론 그분들의 가족이 얼마나 비통하겠습니까? 그동안 나름대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 직장인으로 잘살았을 터인데 이렇게 인생을 끝마치게 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탐욕의 결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간이나 게하시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나, 가룟유다 처럼 탐욕은 인간 개인과 세상을 불행하게 합니다.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을 탐욕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탐욕을 좋아합니다. 탐욕은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의욕을 주며, 활력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삶의 원동력처럼 보입니다. 에덴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안전 경계선을 넘어 끝없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을 탐합니다. 오늘날은 탐욕의 시대입니다. 매스컴은 계속 탐욕을 자극하고 탐욕을 이용하여 장사를 합니다. 현대를 살면서 탐욕 즉, 자기 극대화 욕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탐욕의 노예가 되면 깨진 항아리처럼 무엇인가 채워 만족을 누리려 하지만 채울 수 없어 삶은 고문이 되어 버리고, 탐욕은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마음 속에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를 제거하지 않으면 인생은 심각한 병에 걸려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잃어 버립니다. 탐욕의 항아리엔 정말 좋은 것은 담기지 않습니다.

예전에 뉴스위크지에 "돈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은 피보다 진하고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고 합니다. 돈에 대해 이런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솔직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권력과 폭력, 즉 모든 정치의 진앙지가 돈이고 전쟁은 늘 돈 때문에 일어나고 언제나 돈으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돈은 모든 것이고 돈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핏발 선 한탕 심리가 대낮에도 허황된 일확천금의 욕망이 되어 춤을 추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백만장자 앤드류 카네기는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가 된다고 했습니다. 탐심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십계명을 범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죄가 탐욕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탐욕이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탐욕이 부모를 바로 공경하지 못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고, 간음하게 하고, 도적질하게 하고, 거짓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탐심은 결국 우리가 사는 가정과 사회를 무덤처럼 만들어 버리게 합니다. 자신의 건강과 인격을 파괴해 버리고, 행복을 빼앗아가게 합니다. 유명한 문호 단테에 의하면 탐욕이란 '꺾을 수 없는 원수'라고 지적했습니다. 돈에 탐심을 갖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타락하고, 어떤 권력이라도 부패하며, 어떤 나라라도 멸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큰 소망은 '무병장수'입니다. 그러나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이 무병장수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울 것입니다. 산과 들에 사는 짐승들은 좀처럼 병을 앓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어쩌다 상처가 생겨도 금방 낫고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떠날 때를 알고 은밀한 곳에서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간답니다. 짐승은 탐욕을 위해 땅투기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남겨 주기 위해 쌓아 놓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병마에 시달리는 이유가 야생동물들과는 달리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자연을 거역하며 탐욕과 이기심 속에 묻혀 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탐욕으로 온 지구촌이 썩어가고, 몸과 마음이 막히고 뒤틀려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행복=소유/욕망'이라는 공식을 내 놓았습니다. 소유가 불변하는 상황이라면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지수는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과도한 욕망은 즐거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지나친 욕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탐욕은 행복을 방해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이 탐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고 좀 더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마음에 어떤 백신을 맞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백신입니다. 조금 생소한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제자훈련을 받으신 성도님들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이란 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주재(主宰)라는 말은 사전에 찾아보면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것,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되어 있습니다. 주재권(主宰權)은 주인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 바로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주재권(LOADSHIP)이란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모셔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도록 나의 모든 영역을 내가 맡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경제생활, 결혼생활, 취미생활, 자녀교육, 신앙생활, 시간, 몸, 재능, 물질, 인간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것을 인정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면 죽을 때까지 탐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탐욕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탐욕이 문제를 십자가를 통해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께서 내 안에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게 하면 탐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바뀌고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탐욕의 인생을 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 주님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우리의 고백도 이런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십시오. 00도 사나 죽으나 나의 주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해 주었는지를 고린도 후서 5장 15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주님만을 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와 우선순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 주재권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평생 탐욕의 노예에서 벗어나 참 행복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탐욕의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주재권 백신은 어떤 백신이겠습니까?

 

1. 하나님께 절대 소유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백신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욥을 보십시오.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7남 3녀를 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2). 그런데 한 순간에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1:15) 어느 날 갑자기 쓰나미가 다가 온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도가 나고,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스바 사람이 쳐들어와 종을 죽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불이 내려 양과 종을 살라 버렸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갈대아 사람 세 패거리가 약대를 약탈해 가고, 종들은 죽였습니다. 한순간에 사업이 망한 것입니다. 한순간에 직장에서 내몰린 것입니다. 소득원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으로 고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들딸이 다 죽었습니다.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하였는데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이 집을 무너뜨려 다 죽었습니다.

이 때 욥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의 첫 번째 고백은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의 격언이라고 합니다. 전도서 5장 15절에도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세속적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무소유(無所有)적 존재이고 절대 소유주는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고백하는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의 주인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 주재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사탄은 세상이 네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사탄은 첫 사람 아담도, 예수님도 그렇게 유혹했습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단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것이 될 것이니 끝없이 탐욕을 가지고 쌓아 놓으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 것이라고 우겨도 다 놓고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지식도 자식도 내가 가지고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적신으로 태어났습니다. 다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다 다 놓고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살려고 하니까 세상이 지옥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물론이요 우리가 자신과 자신보다 더 애착을 보이는 자녀라 할지라도 원초적으로 보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탐욕적 소유권만 내려놓아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서 우리는 좀 더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 우리 자신의 생명도, 우리 인생도, 우리의 재물도 우리 자식도 영원한 소유권이 내게 있지 않습니다.

자신과 자녀, 재물에 대한 지독한 탐욕적 집착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탐욕스러운 집착과 애착으로 고통스러워하고 미안해하고 부담스러워하고 끝없이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모든 고통의 근원으로 봅니다. 집착을 끊어 버리는 순간 고통은 그치고 열반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헬라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는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을 장례할 때 관 양쪽에 구멍을 내어 맨손을 보여주라고 했답니다. 돈은 삶을 윤택하는데 도움이 되고 자식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영원한 내 것이라고 집착하여 탐욕에 사로잡혀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는 탐욕을 버리지 못하니까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집착하는 것들 들고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맨 몸으로 왔으니 맨 몸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탐욕에 마음이 병들지 않은 욥은 모든 소유물들과 그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과 비록 그것들이 그의 선함과 순전함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소유주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시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소유물들의 실제 주인으로 그것들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지니고 계시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앗아가신다 해도 자신은 원망할 권한이 없으며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따름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의 근원은 자기중심주의에 있습니다. 우주 만물이 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소유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쌓아 평생 누리고 후손에게도 물려주어 내 핏줄이 대대에 잘 먹고, 잘 살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시적으로 상대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영원하고 절대적인 소유권을 하나님은 인간에게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원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잠깐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축복해 일시적 소유권을 허락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6)” 만물 속에 자신의 이름, 물질, 재능, 시간, 자식을 넣어 읽어 보십시오. 믿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부자가 수확이 풍성하니까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어 걱정합니다. 그래서 곡간을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을 계획을 합니다. 그리고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그때 그런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절대적 소유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절대적 소유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입니다. 탐욕으로 쌓아 놓으면 다 썩어 버리게 했습니다. 탐욕으로 원망 불평으로 죽은 사람은 있었지만 굶주려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도적으로 탐욕으로 가나안 땅을 지옥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다 공짜로 공평하게 땅을 나누어 줍니다. 안식일을 만들어 쉬게 하고 안식년을 만들어 땅을 쉬게 합니다. 희년을 만들어 모든 것을 원위치로 돌립니다. 고아와 홀로된 여인과 나그네를 위한 경제적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약자보호법을 만듭니다. 공정한 상거래를 위한 법을 만들고, 약자를 위해 추수를 다 거두지 못하게 합니다.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십일조를 하게 합니다. 이런 것이 다 무엇입니까? 너희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다는 것입니다. 주인인 체하며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절대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2. 하나님께 절대 주권(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백신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소유권을 인정한 욥의 두 번째 고백은 무엇입니까?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인생의 모든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욥의 고백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로 절대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하나님 주재권의 표현입니다. 욥이 믿는 여호와가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절대자라는 사실을 믿고 있음을 더 확연하게 나타내주는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가지고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는 주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인 복(2,3절)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것을 빼앗아 갈 권리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녀의 복도 주신 것처럼 빼앗아갈 권리도 갔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물질적 복과 혈육이 끊어짐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단순한 자연 현상(16,19절)이나 우연의 결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본 것입니다. 종들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人災)로 보고 스바 사람(15절)과 갈대아 사람(17절)들의 습격을 사전에 감시하지 못한 종들을 질책하거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욥은 1차 원인과 2차 원인을 분별할 수 있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재앙의 1차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절대 권한을 인정하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과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인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 권한을 자신이 가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에 의해 무엇인가를 이루면 자신의 노력의 대가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며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도 자신의 탐욕을 채울 때만 인정합니다. 잘 될 때 잘 풀릴 때, 자신이 소원대로 되고 탐욕의 그릇을 채울 때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을 주시고 그렇게 은혜를 주셨다고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마음입니다. 욥과 같은 일이 다가오면 금방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해 버립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깨닫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있습니까? 인간이 교만하여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될 것처럼 탐욕의 늪에서 사는 것이지 실제 내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매일 뛰고 있는 심장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혈압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회사에 나가 일하면서 하루 생활 중에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다 얽히고설켜서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일지라도 하고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세상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통치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과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도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들은 탐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듭니다. 그릇의 용도와 목적에 맞게 만듭니다. 사람보기에는 귀한 것도 있고 천한 것도 있겠지만 토기장이에게는 귀한 것 천한 것이 없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용도에 맞게 통일한 가치를 두고 합당하게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사45:9; 렘18:6) 이유는 잘 모르지만 살다 보면 질병도 걸리고, 사고도 당하고 손해도 보고, 원치 않는 일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주재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도 다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과정을 겪으면서 욥은 어떤 고백합니까?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고난받으신 우리의 대속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3. 하나님께 절대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인정하는 백신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 소유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절대 권한을 인정한 후 세 번째로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에 대하여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탐욕으로 마음이 병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며 목적 자체를 하나님께 영광에 맞추어야 합니다. 사업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집을 사는 것도, 권력을 잡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건강해지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어르신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정치와 건강에 관심이 많고, 중년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부동산과 직장, 사업에 관심이 많고, 청년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주식과 비트코인에 관심이 많고, 학생은 하나님이 영광보다 진학과 외모에 관심이 많은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재권을 인정하고 교회를 다녀도 탐심에 중독되기 쉽습니다.

탐욕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고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창조하였다고 말씀합니까?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살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명확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찬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앞에 잡혀간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신상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만약 절하지 아니하면 용광로에 던져 넣는다는 것입니다. 절하지 않자 왕이 불러 절하지 않으면 즉시 맹렬한 용광로에 던진다고 합니다. 그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면 우리 마음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사니까 탐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는데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해 못할 일을 당했습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을 당했습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매일 예배를 드리며 그렇게도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어마어마한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사의 부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는 것보다 먼저 찬양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의 경외와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자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될 때 찬양이 아니라 지극한 고난 가운데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황과 무관하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까닭 없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대하시든 그는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사단은 욥이 그 소유물들을 상실하면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공언했기 지만(11절) 욥은 세속적 번영이나 종교적 유익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지면 절대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주재권(主宰權)이란 주인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재권’이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제와 권위, 임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행16:25). 욥은 자신의 고난으로 원망하거나 불평하며 하나님이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경배(20)하고 찬송(21)하며 원망을 하지 않으며(22)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제가 오늘 주보 표제시로 “스스로 피는 꽃은 없습니다”라는 시를 지어 올렸습니다.

“스스로 / 사는 꽃은 없습니다.//아무리/ 잘생긴 꽃도/ 스스로 살지 못하고//아무리/큰 꽃도/스스로 살지 못하며// 아무리/ 힘센 꽃도/ 스스로 살지 못합니다.//누군가/ 기대를 가지고/ 뿌린 자가 있고//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태양이 있고// 제 몸 내어 주는/ 땅이 있어/ 꽃은 삽니다.// 스스로/ 사는 꽃은 없고/ 꽃은 제 힘만으로 피지 못합니다.”

너무나 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탐욕의 종이 되어 불행하게 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주재권을 가지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인생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벧전4:10).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다 놓고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절대 소유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절대 주권(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절대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인정하는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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