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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풍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사도행전27:20-2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442 추천수:5 220.120.123.244
2020-12-06 14:08:50

큰 풍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

사도행전27:20-26

 

올해 수능 시험이 끝났습니다. 그렇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대학 어떤 학과에 들어갈 것인가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사르트르가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매일 수 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치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B와 D 사이는 치킨이라고 우길 수 있겠지만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 '책을 볼까, 영화관에 갈까?', ‘어느 대학에 들어갈까?’ '어디에 취직할까?', ‘오늘은 뭘 입을까?’, ‘ 몇 시에 일어날까?’ ‘어디로 이사갈까?’ 등과 같이 인간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수많은 선택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선택의 과학>이라는 책의 저자 리드 몬터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분석에 근거하여 보통 하루에 150가지 이상을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1년이면 5만 4750번의 선택을 하는 셈이 됩니다. 90년 산다면 4,927,500 번 선택이 쌓여 일생이 되는 것입니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총합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각각의 선택이 쌓이고 쌓여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인생은 곧 과거 선택의 결과물이고, 미래는 현재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택할 때 인간의 뇌는 가치 판단이라는 효율적 계산 시스템을 가지고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 가치 판단의 기준이 ‘보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드시 실질적 이익을 담보하는 쪽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가치 체계를 가지고 그 가치 체계에 따라 보상이 있는 쪽으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뇌 과학의 인문 사회적 연계를 연구하는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에 의하면 인간은 선택할 때 손실회피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눈앞에 더 큰 이익이 있어도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고 안전을 우선시한다고 합니다. 현금 1천만원과 50% 당첨 확률을 가진 3천만원 짜기 복권이 있을 경우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대부분 1천 만원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가급적 현상 유지의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70% 가량의 익숙함, 30% 정도의 새로움이 가미된 것에 가장 큰 흥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익의 보상, 편리의 보상, 기쁨의 보상이 있을 때 그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보상을 위해 선택하지만 어떤 선택은 큰 손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결혼으로 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잘못된 건강을 잃는 사람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재산 상의 큰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잘못된 선택으로 태풍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27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죄인이 되어 로마로 압송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가다가 무엇을 만났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통제 불가능한 상태를 만났습니다. 밀리고 밀리는 인생, 주도권을 상실한 인생, 방향 감각을 노친 인생, 자포자기한 인생, 두려움과 낙심에 처함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17절에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15절에 나온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냥 쫓겨 가더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데로 그냥 가는 삶입니다. 더 나아가 쫓겨 가는 삶입니다. 빚에 의해, 나쁜 습관에 의해, 중독에 의해, 세속적 가치관에 의해 그냥 자기 주도권을 잃어 버리고 밀려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역시도 그 큰 풍랑 가운데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살다 보면 우리가 이런 태풍 속으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건강의 태풍, 경제의 태풍, 가정의 태풍, 결혼 생활의 태풍, 직장생활의 태풍, 사업의 태풍, 신앙의 태풍 등이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자신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순식간에 태풍이 다가 왔습니니다. 911때 보면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지 2일 만에 돌아가신 한국 교민이 있었습니다. 2일 전에는 세계적인 무역센타에 근무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아이가 MT에 갔다 죽은 일도 생깁니다. 지금 인류는 코로나 19라는 큰 태풍을 만났습니다. 어제 통계를 보니까 66,747,789명이 확진되었습니다. 사망자가 152만 명입니다. 이때 이런 일을 실제 당하는 신앙인들은 내가 선택하여 당하는 폭풍도 아닌데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느냐?”라고 항변을 합니다. 그러나 별은 낯에도 있지만 밤이 되어야 밝게 볼 수 있는 것처럼 태풍 가운데 하나님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태풍 가운데 계시면서 무엇을 하십니까?

 

1. 태풍을 통해 잘못된 결정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21).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9절에 보면 살기 위해 생명처럼 귀중한 배의 도구도 버렸습니다. 20절 보니까 태풍이 여러 날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먹지를 못해 기력을 다 상실하였습니다. 아마 잠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악의 상태입니다.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이때 바울이 일어나 말을 합니다. 바울을 마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망하는 말보다는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말입니다. 항해를 하다 미항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미항에서 겨울을 보낼 것을 제안합니다. 비록 선장과 선주는 아니지만 지중해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바울은 강하게 설득하였습니다. 조금 더 항해하면 하물과 배 생명도 위험할 것을 경고합니다. 바울은 지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년의 때입니다. 바울은 이미 지중해에 11번 이상의 항해를 한 분입니다. 바울의 항해 기록을 계산해 보면 5,600킬로미터쯤 된다고 합니다. 세 번이나 난파의 위험을 경험했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한 시대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관에 의해 선택의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안은 무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태풍을 통해 그 잘못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11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죄수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일 것입니다. 선장과 선주가 전문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폭풍을 통해 알려 주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은 우리의 판단에 중요한 자료인 것은 확실합니다. 아무리 전문적이라고 해도 옳아야 하고 하나님을 대적해서는 안됩니다. 전문적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값지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신뢰하다 풍랑을 만나는 길로 가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의 전문적인 지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이성으로 판단한 내 뜻보다 신앙으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더 우선해야 합니다.

둘째는 12절을 보십시오. 다수결주의를 따릅니다. 그러나 다수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가 바른 다수결은 민주주의가 될 수 있지만 지식이 없는 다수결은 우민정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수결주의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이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두가 반대해도 홀로라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반대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세 홀로라고 뜻을 굽히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떠난 다수결주의는 잠시의 평안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거센 태풍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는 미항은 과동하기에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편의시설이나 유흥시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미항은 사방이 틔어 있어서 겨울을 지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뵈닉스는 그레데 섬에 있는 항구로 서남쪽과 서북쪽만 틔어 있어 온화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좀 더 큰 항구에서 편안하게 여흥을 즐기며 겨울을 보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편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편리함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편리하지 못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불편한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편리를 좇는 삶을 살다보며 순풍에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어느 순간 폭풍이 다가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잠깐은 그들의 의견이 맞는 것같았습니다(13). 온화한 남풍이 불기 시작하여 항해하기에는 좋은 날씨였습니다.

이때 아마 바울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이" "죄수 주제에 정치 차려" "기도하면 다야" "세상 물정 모르는 늙은이가" "뭐 예수가 밥을 먹여 주냐?" 별소리를 다 했을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그것은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창피를 당하고 자신들의 뜻을 이룬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뜻이 얼마나 갑니까? 며칠이나 갑니까? 얼마 못 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어왔습니다.

하나님은 태풍을 통해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잘 깨닫지를 못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인간에게 하나님은 경고하고 있지만, 인간은 깨닫습니까? 권력의 힘, 돈의 힘, 지식의 힘, 언론의 힘, 과학의 힘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뉴스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신경을 끕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고 사항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멀리합니다. 말씀대로 선택하면 손해이고 반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 선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예고하고, 계시록에 예고한 내용을 무시합니다. 끝없는 성장과 탐욕으로 생태계가 붕괴하여 가고 있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1970년대 이후 척추동물 개체수는 58%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양서류의 30%, 포유류의 23%, 조류의 12% 이상이 멸종 위기에 놓여있다고 해도 끝없는 성장과 탐욕을 미덕으로 삼고, 그저 아파트 앞을 보면 일주일이면 택배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지구 종말의 시계가 100초 전으로 되어 있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아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죄를 낙으로 먹고 살아갑니다. 코앞에 닥쳐야 인간은 깨닫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폭풍이라는 메가폰을 들고 폭풍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하는 것이 최상의 보상이라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아담의 후예인 사람이 잘못되고, 실패하고 불행해지는 것은 대부분 잘못된 선택 때문입니다. 롤프 도벨리는 <스마트한 선택들>이라는 책에서 후회 없는 결정을 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심리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선택을 하는 비결은 잘못된 선택을 피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다윗 상을 만든 미켈란젤로가 다윗 상을 만드는 데 필요 없는 돌을 다 버린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들, 하지 않아야 할 것들, 피하여야 할 것은 분명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적 선택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말씀에 근거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뜻(주권적, 도덕적, 개인적)에 따른 선택이 태풍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평탄한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선택을 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했습니다.

 

2. 태풍 속에서 사명의 선택을 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함께 풍랑 속에 있는 바울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었습니까? 24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인생의 태풍을 만나면 사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도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태풍이 자신이 잘못 선택해서 만난 것도 아니고 힘있는 자들의 선택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하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선교 사역 그만하겠다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당하면 목사의 사명, 장로의 사명, 안수집사의 사명, 권사의 사명, 집사의 사명, 성가대의 사명, 교사의 사명, 아버지의 사명, 어머니의 사명, 아내의 사명, 남편의 사명, 자식의 사명, 사장의 사명, 사원의 사명 등을 포기해 버리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풍을 통해 하나님은 사명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사명자에게 태풍은 훈련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생이 태풍이 크면 클수록 사명을 붙들어야 인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연장도 내리고, 짐도 바다에 풀어 버리고, 배우 기구까지 살기 위해 내버린다고 해도 사명만큼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태풍을 만나면 우선 사명부터 접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코로나19 같은 어려운 상황이 다가 오면 성가대도, 구역장도, 교사도, 목자도, 교회 봉사도, 전도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살면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 끝까지 붙들고 가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고 격조 높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로저 도슨은 <내 인생을 바꾸는 결정의 기술>에서 선택을 잘하려면 선택을 위한 정보수집을 할 때 편향된 정보를 배격하라고 합니다. "익숙한 것을 좇는 이용성 편향, 자신의 편견을 따르는 경험 편향, 자신의 신념과 다른 것을 거부하는 갈등 편향, 기억에 의존하는 회상 편향, 좋아하는 것에만 치우치는 선택 편향, 맨 처음 것에 비중을 두는 닻 편향, 최신 정보에 얽매이는 최신 편향, 자신의 선택에 구속당하는 선호 편향" 등의 편향 정보를 걸러 내어 실수할 확률을 줄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선택>의 저자 다니엘 R. 카스트로는 '위대한 선택을 위한 7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1) 선택의 순간에는 한발 물러서서 전체 그림을 보라. (2)항상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살피고 분석하라. (3)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반복 효과'에 속지 말라. (4)보고 싶은 것만 보지말고 꼭 보아야 할 것을 보라. (5)'지도'에 얽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지형'을 관찰하라. (6)'닭의 30cm 시야'를 버리고 '독수리의 3km 시야'를 가져라. (7)'과거를 향한 창문'을 닫고 '미래를 향한 창문'을 열어라." 등입니다. 그의 견해를 기독교적 용어로 한 마디로 말하면 사명을 보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감정적 선택보다 이성적 선택이, 이성적 선택보다 사명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태풍 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확실하게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가이사 앞에 가야하겠다는 것입니다. 태풍 속에서 확실히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확실하게 바울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풍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이미 이 말씀을 들려 주셨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18장 9-10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고린도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말씀을 전할 때 대적들이 비방합니다. 그때 주신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다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큰 태풍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로마 천부장이 바울을 감옥에 가두어 보호를 합니다. 내일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때 주신 말씀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약속을 밥먹듯이 바꾸지만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지 않고 살아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할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 이룰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폭풍 가운데 사명 붙들고 살라는 메시지를 강조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 지금 안 죽게 만드는 것은 사명 이루기 위해 안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사명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제자 요즈음 열린편지에서 <하버드 상위 1%의 비밀(정주영)>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해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부정적 신호를 차단하고 한 분야에 ‘깊은 몰입’을 하면 재능은 나이와 상관없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4학년생 중 동기 부여 없이 월스트리트의 금융권에 진출한 사람은 경쟁에서 밀려나지만 하버드 입학 또는 그 이전부터 오로지 월스트리트만을 바라보며 몰입하며 꿈을 키워온 이들은 그곳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하버드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엘리트 집단 ‘블랙 다이아몬드’라고 합니다. 과목에서 기계식으로 우아한 성적만 낼 줄 알던 대다수 하버드 학생보다 블랙 다이아몬드처럼 한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학생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사명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들 딸 결혼시키고 나이 60이 넘으면 특히 사명 붙들어야 합니다. 젊을 때는 자기 하나 제대로 만들기 위해 살아갑니다.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아이들 제대로 만들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제 아이들 결혼 다 시키면 영원한 천국에 가서 직접 우리가 사랑했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날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만날 때 부끄러움 없는 낯으로 뵈어야 합니다.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좀더 영적인 사명에 관심을 기울려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실수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사기꾼이었습니다. 모세는 말을 더듬었고, 살인자였습니다. 삼손은 바람을 피우고 살인자였습다. 나오미는 과부였고, 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다윗은 너무 어렸고, 맞는 갑옷조차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여성 관계가 복잡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우울증을 앓기도 했고, 자살 충동도 느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창녀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성미가 급했습니다. 마르다는 걱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을까봐 두려워 거짓말을 했습니다. 기드온과 도마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디모데는 위장병이 있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힘들다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모세와 베드로, 바울은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주고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을 그들을 통해 이루게 했습니다.

 

폭풍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의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 바울은 폭풍 가운데 어떻게 반응합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은 이 사실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붙잡혀 심문을 받았습니다(행21:27-40). 공회에서 심문(행23:1-10)을 받았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로마에 이르러 가이사 앞에 서겠다고 약속해(행23:11,행27:24) 주었고 40명의 손에서 건져 주었습니다(행23:12-35). 그를 죽이려고 길에서 매복한 자들(행25:1-5)의 위험에서 건져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결국 그 사명 이루도록 폭풍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바꾸어서라도 이루고야 맙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어서라도 이루고야 맙니다.

바울은 폭풍 가운데 확실하게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장 14-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결국 로마에 도착합니다. 누가 궁극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저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로마에 도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선박도 숙식도 다 제공받고 보호도 받고 인정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인생이란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가는 것같지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냐 사탄의 종노릇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은 결국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같지만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

 

3. 태풍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자들을 바른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태풍을 통하여 잘못된 선택을 한 자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다른 사람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태풍을 만나면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있겠습니까? 아내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손해를 보고, 남편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태풍을 만나면 서로를 원망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파산을 하면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태풍의 한 중앙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향애 잘못된 선택으로 폭풍 속으로 들어와 있지만 그 일로 죽지 않으니까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배가 손상되는 고비용을 치르지만 생명을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암인 줄 알고 걱정하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안심하세요. 건강합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위안이 됩니까? 부도 위기에 있는데, 가정이 파탄 위기에 있는데, 자녀의 앞길이 폭풍 가운데 있는데, 사업이, 직장이 태풍 가운데 있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는데 “안심하라 너는 예수님의 보혈로 천국으로 가라”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안심하라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바울 덕분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덕분에 가정이 살고, 우리 덕분에 교회가 부흥되고, 우리 덕분에 기업이 성장하고, 우리 덕분에 나라가 잘 되어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셨다(카리조 마이)는 말은 “아무 이유없이 허락하다. 인도하다. 호의를 베풀다” 등과 같은 말로 번역됩니다. 그들이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하며 화를 당하고 있지만 결국 그와 함께한 275명도 안전(37)게 생명을 건짐받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명의 사람 바울 덕분에 죽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안심하라고 합니다. 22절에도 안심하라고 말하는데 22절은 지금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안심하라는 말이고 25절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한 섬에 반드시 걸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14일 째 되는 날입니다.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바울의 말은 듣고 선택합니다. 사공들이 도망하려고 합니다. 그 때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말합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백부장과 군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습니다. 바울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때문에 모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33-3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주도권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켜 줍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이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이제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매사 선택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 덕분에 소아시아와 유럽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선택한 이레니우스가 덕분에 프랑스가 복음화되었고 영국에서 건너온 보니페이스 한 사람 덕분에 독일이 기독교 나라가 되었습니다. 패트릭이라는 16살 난 포로 소년 한 사람이 덕분에 아일랜드가 복음화되었으며, 토마스 선교사가 덕분에, 언더우드 덕분에 한국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덕분에 미얀마가, 허드슨 테일러 덕분에 중국이 변화되었습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는데 그것은 그 어머니 헬레나의 신앙적 감화력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예수님을 만난 이름 모를 한 하녀 덕분에 예수님을 믿었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답니다. 이름 모를 하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인생의 태풍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에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메가폰이 되는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추수할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명백하게 달라집니다. 곡식은 창고에 들어가지만 가라지는 다 불에 태워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듣기 원하십니다. 내 선택 때문에 가정이 복을 받으며 자녀들이 평안해지고, 교회가 부흥되고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 한 사람의 선택이 나라를 살렸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한 에스더 덕분에 민족이 죽음 앞에서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늘 기도를 선택한 사무엘 한 사람 때문에 민족이 평안해지고 잃은 것을 찾고 찾으며 태평을 누렸습니다. 나사로 한 사람 덕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태풍 가운데 바른 선택을 해야 가족도 살고, 가정도, 기업도, 나라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폭풍이 몰아치면 잘못된 선택을 교정하는 기회로 삼고, 사명 붙들고 그 사람을 이루어 수많은 사람도 우리 덕으로 바른 선택을 하며 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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