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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요한계시록2:8-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200 추천수:6 220.120.123.244
2020-08-30 08:58:00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

요한계시록2:8-11

 

오늘 성경에 서머나 교회가 나옵니다. 이 교회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7교회 중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이때 로마를 통치한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처럼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였다고 합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64년 네로 황제 때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 여파로 기독교가 대중의 분노의 대상이 되어 기독교인은 ‘혐오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게 된 부류’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코로나 19로 인하여 일부 교회와 교인들이 8.15 행사를 함으로 코로나가 확산되었다고 하여 교회가 반상식적이고 반사회적 집단으로 취급받는 현실을 봅니다. 이유야 어떻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전도의 문을 막고 교인들을 위축시키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제주, 코로나 확진 목사부부 거짓진술에 '방역망' 흔들” “온천 방문 숨겼다 들통난 코로나 확진 제주 목사 부부”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 이들 목회자 부부는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코로나19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역학조사 과정에서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동창 친구가 대한민국 6대 거짓말이라는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도 교인입니다. 첫 번째가 목사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말이랍니다. 법관이 법과 원칙에 따라 판결합니다라는 말이랍니다. 검사가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랍니다. 사기꾼이 지금 이거 안하시면 손해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자가 단독 팩트체크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목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만큼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단과 일부 목사와 교회의 혐오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미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는 달랐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에 환난과 궁핍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환난과 궁핍함에 처한 이유 세 가지만 들라면

첫째가 황제숭배를 거부했고 당시 종교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살아 있는 자신으로 신으로 숭배하라고 했는데 그것을 기독교인은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여러 신들을 섬겼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공식 종교를 인정하길 거부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이상 다른 신이나 인물(이를테면 황제 같은 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황제와 일반 대중의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가 이방 신의 사제들, 우상 제조자들, 점쟁이, 화가, 신전 건축가, 신상 조각가 등에게 자신의 생계 수단을 위협하는 적대세력, 혐오세력, 피해를 주는 세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많은 로마인들은 전통대로 섬겨온 신들을 바로 섬겨야 도시와 사람들이 안녕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는데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거부하니까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취급하여 “비가 오지 않는 건 그리스도인 탓이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불행과 지진, 질병, 기근, 홍수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신들에게 제사드려야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드리지 않아 그들이 믿은 신들이 진노하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둘째 이유는 로마인들의 제의나 운동경기와 같은 사회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부도덕한 신전 행사, 극장, 운동경기나 검투 시합과 같은 것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당시 주류 세력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지금의 노동조합같은 길드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조합원이 되면 신전에 가서 의식을 치르고 술을 먹고 문란한 성행위를 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습니다. 거룩한 신앙인을 이런 것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류층의 추잡한 삶을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으로 질책했으며, 귀족이나 노예나 만민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물건처럼 취급받는 여성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습을 파괴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미움의 대상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출세 지향적인 로마 사람들과는 달리 사치를 배격하고, 공적 행사에 불참하니까 기독교인의 비타협적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의식과 관습을 기독교인들이 거절하니까 가정을 파괴하고 의식을 거절하는 반사회적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을 믿고 로마가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말하니 반국가적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셋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식과 예배 형식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가짜 뉴스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연합적인 조직이나 집회를 금했는데 기독교인들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감독을 중심으로 교회를 만들고 교회 안에 감독, 장로, 집사 같은 지도자를 세워 조직을 활성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국보다는 교회를 우선순위에 두고, 황제보다 그리스도에 더 충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라고 했습니다. 권력자들이 볼 때는 자신들의 통치권을 반대하는 반국가적인 조직체처럼 보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찬식을 하는 것입니다. 항간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는 가짜 뉴스가 퍼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버려진 아이들을 불쌍하여 데려다 길렀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잡아먹기 위해서라고 거짓 소문을 낸 것입니다. 모여서 큰 빵으로 성찬식을 하였는데 아이들을 잡아 그 안에 넣고 나누어 먹기 위해서이고 새 신자들이 그것을 같이 먹음으로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서로 모여 형제, 자매라고 하고 만날 때마다 거룩한 입맞춤을 하니까 근친상간을 하고 난교를 한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밤에 몰래 비밀예배를 드리니까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음모를 꾸민다는 가짜 뉴스가 퍼진 것입니다. 예배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확실한 정보는 없이 가짜 뉴스만 퍼져 그리스도인의 명예만 깎아내리는 헛소문만 넘쳐 흘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환난과 궁핍함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우리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 우리 예수님이 교회의 형편을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안다는 말을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단순하게 경험적 지식이나 불완전한 사실적 지식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라 전지하신 능력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안다는 말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환난이고 둘째는 궁핍이고 셋째는 유대인의 훼방입니다.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 초래되는 압박과 박해, 고통과 고뇌를 뜻합니다. 궁핍은 물질적으로 심각하게 가난을 말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제재를 받아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은 폴리갑이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이 중심이 되어 서머나 교회는 이 황제 숭배를 철저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외적으로 환난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 환란은 큰 돌에 눌려 찌그러지게 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을 히11:36-3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내적으로는 궁핍이 다가 온 것입니다. 여기서 궁핍은 아주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황제 숭배를 거절한 성도들은 재산과 산업 나아가 집마저 몰수당하였습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10:34)" 이방신을 숭배하는 길드에 참여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유대인들의 훼방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훼방이라는 말은 이간시키다라는 말입니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 서머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폴리갑은 아시아의 선생이요 기독교인들의 아버지요 우리 신들의 박멸자라 저가 황제에게 드리는 재물과 숭배를 거절한다."고 고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작과 불쏘시개를 준비하여 과격하게 폴리갑을 죽이는데 열심히 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사단을 추종하는 무리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을 위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환난과 궁핍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욕심과 목적을 위해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것을 주님이 알고 있다고 위로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영광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힘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환난을 받도 궁핍함을 당하는 것 우리 주님이 다 알고 있다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금요일날 한 집사님께서 전화가 왔습니다. 모여서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데 얼마나 어렵냐고 도울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네 형편 달 알고 있다는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있다면 우리 주님이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낙심하지 말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업, 우리 자녀, 우리 나라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주를 위해 살면서 주눅 들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형편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 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흘린 눈물을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김영희 편역)>라는 책을 보면 그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의 기록으로 실제적인 재판과정에 대한 보고를 기초로 하고 사건이 일어난 직후 그 사건을 지켜보았던 증인들이 다른 교회의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해지고 과장되거나 수정이 된 순교 전설이나 순교사화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읽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의 순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터툴리안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 요한에 의하여 폴리갑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인 도미티아누스는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이 중심이 되어 서머나 교회는 이 황제 숭배를 철저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잡혀 채찍에 맞아서 동맥과 정맥, 몸의 내부 조직이 환이 볼일 정도로 찢기었답니다. 그들은 초인적인 수준으로 고난을 참았고, 누구도 한 마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인간적인 집행관들이 뜨거운 불에 집어 넣어도, 날카로운 조개껍질 위에서 뒹굴게 해도, 맹수들을 대항하여 싸우게 해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고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그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스미르나에서 멀지 않는 작은 영지로 피신해 밤낮으로 기도에 전념했답니다. 체포되기 사흘전 기도하는 중에 자신의 베개가 불타는 환상을 보았답니다. 환상에서 깨어난 그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나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할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말했답니다. 밀고에 의해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하고 2시간 동안 기도하였답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치안관이 폴리갑을 체포하여 "황제를 주라고 말하고 제물을 드리며 그에 따른 의식을 행하여 당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왜 나쁜 일인가?”라고 말하며 그를 설득하였답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폴리갑을 계속 설득하자 폴리갑은 “나는 당신들의 충고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총독은 “당신의 나이를 생각하시오.”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시오.” “마음을 바꾸시오.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을 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저주하시오.”라고 말했답니다. 그 때 폴리갑은 대답했답니다. “여든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나쁘게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내가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이 계속 강요하니까 폴리갑이 “만약 당신이 내가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리라고 헛된 기대를 하고 있거나 내가 누구인지 모른 체하고 있다면 분명히 들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기독교에 관심이 있다면 하루 날을 정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총독은 “맹수들이 당신에게 겁을 주지 못하고 당신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당신을 불에 던져 버릴 것이오."라고 말하자 폴리갑이 대답했답니다. “당신은 한 시간 동안 타다가 곧 꺼져 버릴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다른 불, 다가올 심판의 불,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불을 당신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시간을 끄십니까?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폴리갑은 화형을 당하였고, 총독의 위협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고 용기와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고 얼굴은 충만한 은혜로 빛이 났답니다.

 

박해하는 자들 편에서 보면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죽지도 않고 재산을 잃지도 않고 살 수 있을 터인에데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한 마디를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궁핍을 당하고, 이간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이 주님을 위해 환난당하고 주님을 위해 가난해지고 주님을 위해 이간질을 당하고 주님을 위해 순교를 당하는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심지어는 가족까지 인정해 주지 안는다해도 우리 주님께서 그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네가 영적으로 부유한 자라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경기장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처럼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11절 크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의 해가 무엇이겠습니까?

계시록 20장 14절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불못은 지옥입니다. 둘째 사망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15절에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사망은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당하는 육신의 사망을 말합니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롬8:36) 둘째 사망은 몸과 영혼이 아울러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고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천국과 지옥은 공허한 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를 통하여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아직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에드어드 도넬리 저)>라는 책을 사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48절에서 “지옥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5절에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질 것 같으냐? 아니다. 지옥에까지 내려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50번 이상 나오고 형벌의 장소를 의미하는 구절이 100번 이상 나옵니다.

계시록 19:20절을 보십시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계시록 20장 10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영원한 천국이 분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얼마나 많이 천국에 대하여 강조해서 말씀해 주셨습니까? 계시록 21장 4절 한 절만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권력과 명예, 부와 지식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부요한 삶이 아닙니다. 인생은 전체로 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에 가서 상급받고 사는 삶이아야 말로 진정 부요한 삶입니다.

 

2.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어려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십니까?(10)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첫째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천국에 갈 때까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부를 빼앗아가지만 영원한 영적 부요를 빼앗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를 위하여 핍박받고 궁핍함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 못됩니다. 자신을 위해 핍박과 궁핍함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주의 영광을 가리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주를 위한 것이라고 우기면서 뻔뻔하고 담대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에서 당하는 핍박과 궁핍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핍박과 궁핍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도 그 두려움 때문에 배신하고 배교하고 부인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진하여 배교했습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같은 분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담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두려움 앞에 타협하고 배교하였습니다. '대동아전' 일본군 군사들은 ‘우미유가바’를 부르면서 전선에 나섰습니다. 자살특공대원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가미가제 비행기를 몰고 진주만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대부분 한국교회는 주일예배 중에 합창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바다에 나간다면 나의 시체는 바다에 띄우고, 산에 나간다면 초원에 버린다. 아무튼 천황 가까이에서 죽는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 그런데 대부분 한국교회는 주일예배를 ‘애국예배’로 드리면서 국가 ‘기미가요’를 봉창함으로 시작했답니다. 예배자들은 일동 기립하여 일본의 식민지배와 군국주의와 침략의 상징인 이 노래를 목소리 높여 합창했답니다. 주일 예배 중에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황', 그가 살고 있는 도쿄 궁성 방향으로 허리를 90도로 숙여 일왕에 대한 절대 충성의 의지를 표명했답니다. 주일 예배를 대동아전쟁 필승기원묵도와 우미유가바 합창을 한 뒤 제 2부로 찬송, 사도신경, 기도, 성경봉독, 헌금, 광고, 찬양, 설교를 하였고, 나라를 위한 국방헌금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친일에 앞장선 목사들은 교회당 안에 이동용 신사를 설치하고 신사참배를 하였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과 궁핍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오늘 제가 주보에 천주교 1호 신자, 1호 신부 이승훈 이야기를 실어 놓았습니다.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중심으로 실어 놓았습니다. 그는 오늘의 명동성당이 자리잡은 명례동에 있는 김범우 집을 신앙집회소로 한국천주교회가 창설하였지만 1801년 45세에 “서학 전파의 원흉”이 되어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지도, 복자의 지위에도 오르지도 못했습니다.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저자 윤춘호는 “그의 삶은 살아서는 처절했고 죽어서는 더욱 처참했다”고 말합니다. 책의 서두는 1801년 처형을 당하기 전 이승훈이 다산 정약용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여 1822년 유배지에서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이 먼저 떠난 이승훈에게 보내는 편지로 마감합니다. 정약용과 이승훈은 처남과 매부 사이였습니다. 정약용 누이는 이승훈과 혼인했습니다. 한 가족이 되어 천주교에 뜻을 같이하고 살았지만 이승훈과 정약용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갈린 사건은 신유박해 때였습니다. 천주교에 대하여 온화한 정책을 썼던 정조가 승하한 후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는 자신과 대립한 남인·시파를 숙청하기 위해 천주교를 인륜을 무너뜨리는 짐승과 같은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다섯 집 중 한 집만 적발되어도 처벌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죽은 신도만 3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신유박해 국문의 현장에서 정약용은 천주교를 매우 적극적으로 서슴없이 배반했으며, 전국각지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색출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이승훈 역시 천주학을 배척하며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온갖 거짓을 지어냈지만 동료 신도들의 이름은 발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승훈은 참수형을 당하였고, 정약용은 살아났습니다. 이 책에서 이승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게, 다산! 방금 전에 자네는 살아남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다산! 답해 보게. 자네에게 한순간이라도 천주가 자네의 모든 것이던 시절이 진정 있었나? 두 발을 온전히 교회에 둔 적이 있었나? 있었다면 그게 언제였던가? 말해 보게... 한 손으로는 성서를 읽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천주교도를 사냥하던 사람이 자네였네. 자네는 양쪽을 모두 기웃거리며 조정과 교회, 세속과 성직 사회 두 곳 모두에서 인정받고 출세하고 싶어 했던 것이네. 그게 자네의 진정한 얼굴일세...나 역시 자네처럼 천주를 부인하는 글을 썼네. 그래, 여러 번 썼어. 글만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에서 천주와 신앙이라는 두 단어를 지워 버렸어. 아니 영구히 파내 버렸네. 천주를 버렸어...한 때의 동지로서 말하노니 부디 부끄러움을 아시게" 조선의 1호 신자이자 1호 신부였던 이승훈은 자신의 배교를 철회한다는 조그마한 표시도 없이 참수형을 당했는데 그 이유를 저자는 “나는 어떻게 해도 죽을 사람이었고 그래서 회개는 어찌 보면 쉬운 선택이었네. …배교자로 죽어 내가 이 세상에서 지은 죗값을 치르려 하네. 정직한 배교자로 죽어 주님 앞에 서고자 하네.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려고 하네. 믿는 일이 힘들었다고. 믿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고.”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믿는 일이 힘들고 믿는 일이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그래도 은혜로 주신 믿음 붙들고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신앙생활을 완주해야 합니다.

 

박해가 없을 때는 모르지만 신유사옥과 일제와 6.25와 같은 박해의 시대에 환난과 죽음,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박해와 내면의 회의 끝에 스스로 믿음을 내려놓은 이승훈은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믿는 일이 힘들었다고. 믿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세명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그는 베드로처럼 세 번 부인합니다. 첫 번째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입니다. 두 번째는 조상제사를 금하는 교리 앞에서입니다. 세 번재는 45세에 참수형 앞에서 공식적으로 세 번 배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라고 질문합니다. 다원주의와 진화론, 과학주의, 인본주의, 자본주의가 팽배한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으며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산 남은 자들은 늘 있었습니다. 노아 때에도, 롯 때에도, 엘리야 때에도, 이사야 때에도, 바벨론 포로기에도 남은 자들은 늘 있습니다.

 

왜 환난과 궁핍과 이간질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는 지엽적인 고난이기 때문입니다(10). 한정된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충성할 기회와 신앙 연단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기 위한 환난과 궁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고 죽음의 고통을 받았으나 결국 부활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계2:8)

 

둘째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라는 말입니다. 믿음과 충성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피스토스)는 미쁜, 신실한, 충성스러운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위기 때, 환란의 때, 핍박의 때, 궁핍의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충성입니다. 믿음의 개념 속에는 신실함이 포함되고 진짜 믿으면 주님에 대한 충성으로 그 믿음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도록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께 충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10절을 보면 시험하는 자는 마귀인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로마 권력이나 유대인의 배후, 조롱하는 대중의 배후에는 결국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핍박이고 둘째는 유혹입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핍박을 사용하고 광명의 천사처럼 유혹을 사용하여 신앙인이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합니다. 시험(페이라조)은 유혹을 말합니다.

 

요즈음 코로나 19로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은 단지 코로나와 싸움이 아닙니다. 국가 권력과 싸움도 아닙니다. 언론과 싸움도 아닙니다. 국가 권력이나 언론이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인간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무신론자가 있으면, 기독교를 전투적으로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세력이 있으면 허위의식을 만들고 반기독교적인 프레임을 만들어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인간들의 배후에 있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무엇과 싸우는 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움의 본질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단을 인간끼리 싸우는 것으로 자꾸 적을 인간으로 만들어 버려 인류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적으로 생각하여 동생을 죽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지금 세계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런 상황도 자꾸 사람끼리 적을 만들어 낙인찍고 원망하며 서로 적대시함으로 인간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 대학인 옥스포드 및 케임브리지에서 영문학 교수하였던 C.S. 루이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책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경험 많고 노련한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이자 풋내기 악마인 웜우드에게 그가 맡은 인간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도록 유혹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31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그는 세상에 보이지 않지만 악마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마에 대하여 우리 인류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악마를 믿되 불건전한 관심을 지나치게 많이 쏟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에서 사단의 전술은 사단이 없는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거짓의 아비, 인간을 유혹하고 핍박하여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단은 존재합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31가지 편지에서 사단이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오늘 이 시대 믿음으로 충성스런 종이 되어 승리하기 위해 사단의 전략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논증과 이성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시선을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 붙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그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낫다는 교만함을 갖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항상 꼬아서 생각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극단적 애국지사 또는 열성적 평화주의자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매사에 극단적인 경향을 갖게하여 균형을 잃고 편 가르기에 힘쓰게 하라는 것입니다. 천국보다 이 땅에 소망을 두게 하라는 것입니다. 괘락을 이용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을 교묘히 변질시키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코로나 19 시대에 사탄이 이런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루이스 교수는 말합니다. 사단은 결국,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핍박하고 광명의 천사로 우리를 유혹해도 믿음으로 싸우면 결국 우리는 충성스런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요즈음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교회 생활하는 것이 회의가 들고 힘이 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형편, 우리 교회의 형편, 우리 가정의 형편, 우리 사업의 형편, 우리 민족의 형편 우리 주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진정 네가, 네 교회가, 네 가정이, 네 사업이, 네 민족이 부요한 자라는 칭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담대하게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핍박과 궁핍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끝까지 충성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결코,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모두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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