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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삶(빌1:27-30. 빌립보서 강해 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759 추천수:4 220.120.123.244
2019-07-14 13:35:35

복음에 합당한 삶

빌1:27-30(빌립보서 강해 6)

 

지난 주 가수 유승준씨에 대하여 비자 발금 거부는 위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는 1997년 댄스 가수로 데뷔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평소 선행으로 '아름다운 청년'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2002년 1월 그는 입대를 앞두고 미국에 사는 가족에게 인사를 한다고 미국에 가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대한민국 국적 상실 신고를 했습니다. 이유는 "입대하면 서른이 되고 댄스가수로서 생명이 끝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포기를 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병무청은 병역을 기피했다고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에 입국금지 조치를 요청했고 법무부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1심, 2심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방의무를 하지 않으므로 "자신을 희생하며 병역에 종사하는 국군 장병의 사기가 저하"되고 "청소년들 사이에 병역 기피 풍조가 만연해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17년 동안 한국 입국을 거부당했습니다. 헌법에 의하면 대한 민국 국민은 6대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환경 보전의 의무, 재산권 행사의 공공복리 적합 의무 등이 있습니다. 이 중 국방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법원 재판에서 승소하였지만 리얼미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0명 중 7명은 유승준 씨의 입국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으로 표명했다고 합니다. 국민은 국민으로 특권과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으로 평등권, 자유권, 사회권, 청구권, 참정권 등과 같은 5대 권리를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으면 특권과 권리도 박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들로서, 천국 시민으로 특권이 주어집니다.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생명의 특권과 교제의 특권입니다. 생명의 특권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영적 죽음에서 벗어나 중생하게 됩니다. 둘째는 육적 죽음에서 벗어나 부활하게 됩니다. 셋째는 영원적 죽음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영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언제든지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교제의 특권은 첫째는 영적 소경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셋째는 친죄성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죄 용서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삽니다.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삽니다. 죽음에서 승리하는 특권을 누리고 삽니다. 등을 받았습니다. 을 받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지만 천국 시민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고, 언제든지 회개하여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 시민은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천국 시민으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 3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 시민으로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오직(모논)’은 단 한 가지로라는 말로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너희는...생활하라(롤리큐에스데)”라는 말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특권과 권리를 누릴 뿐 아니라 의무와 책임을 이행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받은 자로 로마가 요구하는 관습과 법에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권리와 함께 의무도 이행하라는 말입니다. 복음에 알맞은 삶의 방식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시민(천국시민)으로서 행할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은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천국 시민이 되었으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 바로 하늘의 시민답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기 위해서는 복음을 위하여 협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27b).

27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협력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이 요청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듣기를 원했던 첫 번째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협력하는 것과"이었습니다. “협력하는(쉬나들룬테스)”라는 말은 함께 분투하다는 말로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협력한다는 것은 "누구와 함께 나란히 싸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 대오를 갖추어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기마전을 할 때 다섯명이 함께 협력해야 이기는 것처럼 영적 전쟁터에 사는 신앙인은 함께 협력해야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은 천국 시민을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 책동을 일으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분열 책동을 합니다. 서로 핑계를 댑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게 만듭니다. “이 여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목회자가 설교를 잘 못하니까 금요기도회 나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 자녀를 보면 헌신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도 헌금하지 않는데 내가 왜 참여하느냐는 것입니다. 끝없이 핑계거리를 찾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은사를 많이 받은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파당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예수파로 나누어져 서로 싸웁니다. 자신들이 대장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으면 싫은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이 들러나지 않으면 구역장 모임도, 교사 모임도, 바나바 모임도, 교사 모임도, 권사 모임도 협력하기 싫은 것입니다. 내가 협력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손해가 됩니다. 분열되면 가정도 교회도 회사도 나라도 망하는 것입니다. 외부외 공격보다 부부끼리 싸우고 가족끼리 싸우면 가정을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가족 끼리고 고소 고발하고 교인끼리도 고소 고발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협력하지 못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온 성도가 한 마음이 되어 떡을 떼면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욕심에 끌려 함께 협력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봅니다.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 협력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이성 전투는 실패합니다. 동료들이 죽습니다. 그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결정적으로 결단하고 목숨을 걸고 신앙의 전투를 할 때 협력자보다 비판자나 방관자가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가는 것을 보십시오.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함께 협력하여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이 어떻습니까? 끝없는 비판자가 됩니다. 불평자, 원망자로 남습니다. 장자가 죽는 곳에서 구원함을 받았고, 홍해의 기적을 통하여 생명을 구원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물이 없으면 물 때문에, 고기가 없으면 고기 때문에, 모세가 산에서 늦게 내려오면 늦게 내려 온다고, 적들이 있으면 적들 때문에, 불평과 원망을 하며 협력하기 보다는 비판을 해 댑니다. 심지어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까지도 협력자가 아니라 비판자로 섭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끝까지 협력자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데 방광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비판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며 원망하는 원망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팀이 되어서 운동경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가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결단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는 코치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양보도 해야 되고 또 전략을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협력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첫째는 주님을 사령관으로 모시고 협력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상관 없이 협력하라고 말씀합니다. 담임 목사가 참가 하던 참가 하던 상관없이 협력해야 합니다. 유력한 인물이 있던 없던 협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없어도 주님이 그곳이 계시는 것이고 하잔케 보여도 주님의 일입니다.

둘째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의 목적이 분명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분열되고 서로 싸우며 사분 오열되면 복음이 증거되겠습니까?

셋째는 한 마음이 되어 협력해야 합니다.L

“한마음으로 서서” 협력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한마음으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자꾸 내 마음을 따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영적 전투에서 총 사령관인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다(스테케테)”는 말은 “너희가 자리를 고수한다”는 말로 병사가 전쟁터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또 다시 한 뜻으로라는 말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라는 뜻입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입니다.

우리에게 직분을 주어 일하시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고전 12:25-27)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자신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조직과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을 머리로 몸된 교회는 다릅니다. 이익이 중심으로 하는 조직체는 조금만 어려움이 다가 오면 핑계를 대고 대열에서 이탈하여 자신의 이익을 찾아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으로서의 유기적 조직체인 교회는 한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여 사명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초점은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내 이익이나 편리나 즐거움이 없다고 해도 사명이면,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같이 협력하여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서로 협력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 서로 도와 주고 위로를 주고 유익을 주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협력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 협력하여 좋은 구역 좋은 마을교회를 이루고, 서로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고, 서로 협력하여 세계 선교를 감당하고, 서로 협력하여 시대를 변화시키는 주인공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기 위해서는 복음을 위하여 담대하게 살아야 합입니다(1:28).

두 번째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톤 안티케이메논)”는 문자적으로 ‘반대편에 놓인 자, 맞서는 자’라는 뜻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생활은 영적 전투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수많은 안티들이 있습니다. 이 영적 전투의 근본적인 대적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수많은 사건과 사람을 이용하여 우리를 대적합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는 유대인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를 말합니다. 이들을 사탄이 이용합니다. 즉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틈만 나면 가져다 주는 마음은 일차적으로 두려움입니다. 떠남에 대한 두려움, 체면 손상에 대한 두려움, 명예와 권력, 재산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안될 것이라는 두려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손해 볼 것이라는 두려움, 피해볼 것이라는 두려움을 쏟아붓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사람은 교회 안에도 있고, 가정 안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습니다.

이런 대적자들이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프튀로메노이)”란 말은 깜짝 놀란 말이 우르르 도망치는 모습을 나타내는 낱말로 대적자들을 만났을 때 놀라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어떻게 담대해야 하겠습니까?

무든 일에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유혹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수많은 일을 당합니다. 그럴 때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권세를 가지고 담대하게 맞서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10:28)…"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에게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 2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사들에게, 룻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선지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적자를 담대히 맞서서 싸우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의 믿음을 고수하고 대적자들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는 것은 곧 대적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를 통해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많은 선진들이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에스더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에스더 4:16).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앞에서(단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였습니다.

다니엘 사자굴 앞에서도(단 6:10)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믿음으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담대하게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삼상 17:45)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였습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 합당하게 사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일에 담대하게 나아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29-30).

대적자들에게 담대히 맞서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 말씀은 ‘호티(왜냐하면)’ 로 시작합니다. 대적자들에게 담대히 맞서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이라고 번역되어서 주어처럼 표현되고 있지만, 정확히 번역하면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너희에게 값없이 주어졌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빌립보교인들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그 은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이 은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피스튜에인)”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파스케인)”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게 만듭니다(29a).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결코 학습되거나 나에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 3장 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했을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예수를 내 구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창조, 구원, 기적, 내세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찬송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주님께 나와 헌금하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예배시간에 세상 재미나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닌데 지루한 줄 모르고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고 깨우침받고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게게 은혜를 주셔서 고난도 받게 만듭니다(29b)

천국 시민으로 합당한 생활은 여기에서만 머물면 안 됩니다.

바로 뒤에 보십시오.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고난도 함께 받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도 은혜입니다. 믿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싸움입니까? 내 안에서 본 바, 내 안에서 들은 바 싸움입니다. 바울이 겪었던 영적 전투가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선교를 할 때 귀신들린 아이를 고친 것 때문에 투옥되고 얻어맞았습니다. 피하고 싶은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바울이 당한 고난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간수가 예수 믿고 그 가족이 세례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로마 선교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고난이 무슨 은혜냐고 반박하며 고난은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조금 편한 교회, 조금 편한 가정, 조금 편한 직장이 은혜지 초라한 교회, 작은 직장, 가난한 집에서 사는 것이 무슨 은혜냐고 '은혜라고 말할 것이 없어서 고난받는 것이 은혜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그날에 십자가를 진 사람은 구레네 사람 시몬 한 사람이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재수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괜히 결혼하고, 괜히 자식 낳고, 괜히 고생하는 교회 나와 힘들게 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 대게 재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시몬과 그의 가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온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훌륭한 가문이 되었습니다(롬16:13)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고 그 루포의 어머니를 바울 사도는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이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나를 보십시오.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라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사무엘을 낳아 민족 지도자로 만든 것입니다. 고난을 거치지 않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어디 있습니까? 고난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받음으로 내가 주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기에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아니면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과 구별할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들과 대립할 필요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오늘날 너무나 십자가 없는 복음을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실패의 고난나 절망의 고난이 아닙니다. 소망과 미래가 보장된 고난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있는 고난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썩지 않는 멸류관,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보장된 고난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천국 시민으로 기꺼이 그리스도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빈센트(Vincent)라는 사람은 "고난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약혼할 때에 받은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플랫의 <래디컬> 존 패튼이라는 인물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한창 성장하고 있던 교회를 10년 넘게 섬기던 목회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식인종들이 우글거리는 뉴헤브리디스 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담을 주셨답니다. 패튼은 특별한 한 섬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답니다. 20년 전에 두 선교사가 상륙했다가 잡아먹힌 곳이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패튼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은 한 노신사는 나를 붙들고는 소리 내어 우셨다. '식인종이 살고 있다니까요! 목사님도 잡아먹을 거라고요!'" 이 때 존 패튼은 노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딕슨 씨, 머잖아 선생님도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남겨 둔 채 무덤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벌레들이 주검을 뜯어먹겠지요. 주님만을 섬기다 죽는다면 벌레가 먹든 식인종이 먹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선생님처럼 저도, 그리스도처럼 깨끗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겁니다."

노인은 눈물을 닦고 방을 나가면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서른세 살 때, 존 패튼은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디스 군도로 들어가 도착한 지 얼마 뒤에 아내와 갓난아이는 세상을 떠났답니다. 패튼은 맨손으로 땅을 파헤쳐서 그들의 시신을 묻었답니다. 그 뒤로도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은 끝없이 벌어졌답니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수많은 식인종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였답니다.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와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많은 서방세계가 복음 전도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2절에 사도 바울은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8복 강해를 하실 때 마지막이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들에게 하늘의 상급이 큼이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영광스런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2) 예수 믿고 이익만 보려고 혈안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내가 손해본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목숨까지 주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손해 본 것이 무엇이고, 주님 때문에 얼마나 달았으며 주님 때문에 중요하고 귀한 것 얼마나 소모했습니까? 고난을 통해 성도는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고후 1:6)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롬8:17-18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고난을 받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 앞에 가서 못 자국과 가시관을 보이시면 나는 무슨 낮으로 대할까?

감옥생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오는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까? 주님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의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했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까?”라고 묵상하며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하였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를 17명이나 낳아서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늘 질문을 했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누구니?" 아이들은 말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너희는 무슨 일을 하는 거지?" "우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희들을 보냈지?" "하나님이 우리를 보냈습니다."

목자로 구역장으로 교사로 성대 대원으로 식당봉사로, 전도 봉사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아버지로, 어머니로 자녀를 기르면서, 직장에서 맡을 일을 감당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천국 시민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기 위해서는 복음을 위하여 협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27b).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기 위해서는 복음을 위하여 담대하게 살아야 합입니다(1:28).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29-30).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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