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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4) 예고된 성탄의 의미(사61: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969 추천수:7 112.168.96.218
2017-12-24 19:31:34

 

성탄(4) 예고된 성탄의 의미

이사야61:1-3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지난주에 29명이 숨진 충북 제천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화재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학 4년 장학생으로 합격한 효녀가 알바 구한다며 센터에 갔다가 참변을 당했답니다. 수능을 마친 딸을 데리고 외할머니 집에 가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같이 사우나에 갔다가 할머니와 어머니 손녀가 모두 사망한 참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3층 사우나에 있던 남자들은 다 탈출했는데 2층 사우나에 있는 여성들은 20명이나 사망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3층 남성들은 이발사의 안내로 비상구로 탈출했는데 2층 여성들은 8초 만에 탈출할 수 있는 문을 5m 앞에 두고도 비상구를 찾지 못하여 탈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사우나를 한 황모(35)씨도 삽시간에 검은 연기가 사우나 안을 가득 채웠는데 누군가가 “비상구가 저기 있다!”라는 소리를 듣고 무조건 그쪽으로 가서 탈출하여 살아났다고 합니다. 5층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사람들도 관장이 “빨리 비상구로”라고 외치며 등을 떠민 덕분에 모두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참변을 당했답니다. 비상구 하나가 생사를 갈라놓았다는 것입니다. 비상구 하나가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누군가 하루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그 때 비상구를 자세히 알려주고 비상구로 탈출하라고 했다면 아마 이런 참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면 그곳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 말을 무시하고 갔더라도 불이 나면 비상구로 탈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불타는 지옥의 형벌에 들어가는 영원한 죽음에서 탈출할 비상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로 심판한 이 땅에서(계18:8)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는 비상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언제가 다가올 육신적 죽음에서 살아나는 비상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 생명을 살리는 비상구는 간단합니다. 믿고 그리로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간단한 진리를 안 믿으니까 하나님은 오랜 전부터 수없이 많이 예언을 해놓았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무당이 서너 가지만 맞추어도 신통방통하다고 믿으면서도 200번도 넘게 예언된 예수님은 안 믿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라고 예언하였는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 예수님이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메시아는 이상적인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11:1-5). 메시아가 여호와의 종으로 오실 것을 예언했는데 (사42:1-9; 49:1-6; 50:4-9; 52:13-53:12)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는 중보자로 오실 것을 예언했는데 (62:1-5; 65:19, 23; 66:10-14) 그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했는데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뿐 아니라 족보(사 11:1), 죽음(사 52:13-53:12), 부활(사 25:8), 재림(사 11:3-16, 33장) 등도 밝히 예언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기름을 부으사”라는 말씀은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은 성령을 말씀합니다. 그 성령이 누구에게 내리셨다는 말씀입니까? "내게"입니다. 이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를 말씀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나"가 누구인가 누가복음 4장 17절을 같이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늘 하시던 대로 성경을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 때 읽은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 읽으시고 두루마리 성경을 시중들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아 말씀합니다. "이 성경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고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아니라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는 700년 후에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메시아의 구원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탄생하셔서 하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1.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1).

"이는"이라는 말은 "야안"이라는 말로 이유나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바싸르"의 번역으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을 말합니다. 즉 복음입니다.(사40:9; 41:27; 52:7) 구원의 소식입니다. 이곳으로 오면 산다는 비상구입니다.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양의 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죽지 않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누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입니까? "가난한 자"에게입니다. 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겠습니까? 돈이 없어 가난한 사람도 물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8복을 말씀할 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라고 말씀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때때로 배부르고 풍족한 자들에게는 마구간 어린 아이로 오신 예수님은 초라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가난한 자는 마태복음에서 8복을 말씀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라고 하신 것처럼 육신적 배고픔 보다는 영적인 배고픔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영적 기갈로 말미암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영적 배고픔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가난보다는 절대적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궁극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와 권력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명예와 인기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 없으면 결핍되게 되고 공허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으로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쾌락으로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기로 명예로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아무리 채우려 해도 텅 빈 공허함과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자랑하는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습니다. 각각의 필요는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것입니다. 수분이 필요하면 물이 들어와야 합니다. 지진으로 갇혀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억만금을 준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산소가 필요한 사람에게 권력을 준다고 만족하겠습니까? 배고파 허기진 자에게 명예를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백질이 필요하면 단백질이 들어와야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잠이 필요한 자에게는 잠을 자야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대체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만족은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은과 금으로 명예로 쾌락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 5장 10절에 보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3:5)”

죄의 문제로 발생하여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영적 기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위험에서 구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구원하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로 말미암아 펑 뚫린 인간의 공허, 텅빈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하나님께 나아가야 인간은 참 만족을 누리면 살 수 있는데 갈증을 느끼지 않는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지옥의 형벌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비상구는 예수님이십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유일한 비상구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는 진리가 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나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적당히 배고프면 돼지를 찾습니다. 진짜 배가 고프면 아버지를 찾는 것입니다. 내일이면 성탄절입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 예수님을 진정 나의 구주,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모시고 어떤 경우든 참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를 보라 또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였네 가시 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2. 예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상하다(샤바르)는 "깨뜨리다. 산산 조각내다"라는 말로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상처를 치유시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올 한 해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까?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치유받으시길 바랍니다. 나 혼자 꽁꽁 붙들고 암덩어리 만들지 마시고 치료자이신 예수님께 내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살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삽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부모 때문에, 자식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 때문에, 직장 상사 때문에, 직장 동료 때문에, 물질 때문에, 사업의 실패로, 상처를 받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깊은 상처를 받으면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분노를 품습니다. 상대방을 희생자로 만들어 원수 시 삼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수 시 삼고 하나님께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깊은 상처를 누가 치유시켜 주겠습니까? 스스로 잘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를 찾아가도 깊은 상처는 잘 치유되지 않고 만지면 만질수록 더 덫만 날 수도 있습니다. 대체물을 통해 잊으려 해도 잘 잊혀 지지 않습니다. 권력을 통해, 돈을 통해, 쾌락을 통해 망각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한 상처를 다 당하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치유받지 못할 상처가 없습니다. 마음에 숨겨진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상처투성이의 소녀였습니다.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 때 남자 친척들에게 성폭행과 성적학대 등으로 지울 수 없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14세 때 이혼모가 되었고, 마약 복용으로 수감된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절망과 열등감 속에 사춘기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고치게 되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았습니다. 이미 남편 다섯이나 두고 지금 새로운 남편과 살고 있었던 수가성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의 마음은 깊은 상처로 이미 찢겨지고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립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한 번 실수하면 재기 하지 못하도록 대못 질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유명 목사님이 간음죄를 졌다고 얼마나 언론과 신앙인들이 매장을 합니까? 10년이 넘었는데도 손가락질을 합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있을 때는 너무 수치스러워 우물가에 물로 길러가지 못합니다. 수치심과 거절감에 살았던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아무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깊은 상처를 치유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아픔 상처의 찌꺼기들을 다 제거 시켜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치유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쫓아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나병을 치유했습니다. 12년 동안 모든 것을 허비하고 상처투성이인 혈루증 앓은 자를 치유했습니다. 38년 동안 잃어나지 못하고 경쟁에서 실패하고 상처투성이인 베데스다 연못가의 환자도 치유해 주었습니다. 깊은 상처를 움켜 쥐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 내어 놓고 다 치유 받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 하소서 주의 길로 인도하사 자유케 하소서 새 일을 행하사 부흥케 하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34:16)”라고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자를 싸매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픈 자를 강하게 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상한 상처를 더 후벼 파지만 예수님은 상한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마어마한 상처를 받은 욥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5:18)”

시편에도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렘 30:17)"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렘 33:6)"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부수어지고 깨뜨려진 마음을 고쳐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깊은 상처를 치유시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3-5)”라고 말씀합니다. 믿습니까? 죄로 인한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 고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4절에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 아픈 상처 누구도 치유할 수 없다고 절망하며 우울해 하면 자살의 길로 걸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긴 침묵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마지막 대심판의 날에 수많은 사람이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대인 여자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서 지옥같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냐는 것입니다. 어느 흑인 남자는 목에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매맞고 고통을 당할 때 어디 계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아픔과 배고품과 전쟁과 질병이 없는 저 높은 천국에 홀로 계시니 자신들의 고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 고통, 절망, 죽음을 당하지 않으시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대표, 흑인 대표, 관절염 환자 대표, 암 환자 대표, 기형아 대표, 심지어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휴유증 환자 대표를 선출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할 자격을 가지시기 전에 하나님도 우리가 겪은 고통을 한번 맛보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되 고난을 많이 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하나님은 왕족이나, 귀족의 집안이 아니라, 농촌의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사생아 비슷하게 태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고생하며 땀 흘리며 노동을 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도 친한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아픔도 겪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공정치 못한 재판관을 만나 억울한 판결을 받아보며, 우리처럼 매 맞고, 고문의 고통도 겪어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도 우리처럼 죽음의 외로움과 두려움도 맛보아야만 할 것이다.” 원망과 불평으로 입이 불거진 사람들은 하나님도 자신들처럼 고통과 아픔, 배고픔, 환란, 절망을 맛보아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긴 침묵 속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으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 수모와 고통, 배반과 아픔, 모욕과 수치를 다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상처에 비하면 우리의 상처는 초라할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라고 예언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상처든, 어떤 고통이든, 어떤 낙심이나 절망이든, 주님은 치유하셨습니다. 괴로운 기억, 좌절된 꿈, 극복할 수 없는 죄책감, 원망, 자기 부정, 우울증, 두려움, 슬픔, 미움, 열등감, 무가치함, 대인관계를 통하여 받은 상처, 일을 이루지 못하여 받은 상처, 감정적 자극을 통하여 받은 상처, 죄로 말미암아 씻을 수 없는 아픈 상처, 영혼의 상처 모두를 예수님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기 위해 오실 것을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전쟁에 패해 포로(쉬브임)가 된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갇힌 자(에수림)는 “묶다 감금하다”다는 말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죄의 지배하에 사탄의 종노릇하여 자유가 없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전 관습과 중독에 벗어나지 못하고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심으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회복이 됩니까?

슬퍼하는 시온의 백성들에게 재 대신 화관 씌워 주십니다.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십니다. 근심 대신에 찬양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재는 고통, 슬픔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화관은 기쁨, 영광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재를 조금 덜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화관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슬픔을 조금 완화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근심을 조금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찬양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완전히 회복시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 질의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독의 감옥에 갇히면 조금 중독에서 덜어진다고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며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사면 완전히 중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이렇게 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 노예가 되지 못합니다. 죽음도, 죄도, 율법도, 양심도, 가난도, 질병도 우리를 노예로 삼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라고 했습니다. 죽음 후에 천국이 있다는 진리를 알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알면 죄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진리를 몰라서 결혼식도 날짜를 잡고 이사하는 것도 날짜 잡아 이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왔다는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정죄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진리를 알면 우리는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진리를 알면 우리는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과 죄와 율법의 노예로부터 벗어난 풍성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하여 직접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구원만 받고 끝나는 삶이 아닙니다. 더 풍성한 삶을 이 땅에 살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회복된 삶을 4절 이하에서는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기업의 회복입니다(4,5) 둘째는 세계 만민에 대한 제사장 신분의 획득(6)입니다. 셋째는 풍부한 물질적 축복과 영광의 획득입니다(7-9) 이 말씀은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이고 2차적으로 메시아를 통하여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 교회 공동체에 대한 예언입니다. 뿐만 아니라 3차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회 구원받은 우리와 우리가 가서 살 영원한 천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은혜의 해인데 동시에 보복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노예로부터 해방되고 잃었던 땅을 다시 찾는 희년을 말합니다. 언젠가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자는 영원한 천국에, 보복을 받는 자는 영원한 지옥에 가는 날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들에 대한 적용입니다. 6절에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변하였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무엇이라고 말씀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여호와께 복 받은 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 주십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열방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만 구원받고 복된 삶을 살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열방이 구원받고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의 나무가 되고 기업이 회복되고 신분이 상승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들러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나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옥 갈 인생이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지처럼 살 인생이 이 땅에서 왕자처럼 사는 인생으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비상구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비상구로 가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내일이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로 오신 것은 예수님은 통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 난 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갇힌 자를 풀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과 근심에 빠진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람들이 멀쩡한 것 같지만 깨어진 마음, 상처 난 마음이 뒹굴어 다니는 시대입니다. 중독으로 감옥같은 인생을 사는 시대입니다. 진정한 위로도 기쁨도 없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린 시대입니다. 우리는 나만의 성탄절이 아니라 이웃에게 성탄절의 주인공 예수님을 비상구라고 전해 주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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