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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럼 엄마 안죽어 ?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3081 추천수:21 112.168.96.71
2014-11-25 16:38:37
뭐? 그럼 엄마 안죽어 ?

?가족이든, 친구이든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줄 유언장을 쓰면 됩니다. 장난식으로 썼다간 에프 학점이니까 알아서들 해요.??뭐야,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유언장이래? 하여튼 똘아이 교수님이라니깐.?같은 과 동생이 볼멘소리를 합니다. 은근슬쩍 맞장구를 쳐줬지만 마흔 두 살에 늦깍이 여대생이 된 내게는 유언장을 써 보는 게 흥미롭게 여겨졌습니다. 그날 밤 남편이 잠든 사이 나는 유언장을 쓰기 위해 주방으로 왔습니다. 하얀 백지에 큼직한 글씨로 ?유언장?이라고 쓰니 왠지 성스러운 의식을 지루는 양 진지해 지더군요.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남편과 하나뿐인 딸 신아였습니다. 나는 우선 ?사랑하는 당신?이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했습니다.?사랑하는 당신과 가장 아끼는 딸 신아에게 이 글을 전할까 합니다. 여보,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웠던 날들이 많았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바로 당신과 함께 한 20년의 시간이랍니다. 아웅다웅하며 보낸 그간의 삶이 때로는 고단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당신이 곁에 있어 기댈 수 있었고, 웃을 수 있었어요.… 요즘 부쩍 늘어가는 당신의 흰머리와 주름을 보며 참 많이 울었지요. 지금까지 남편과 아빠로서 아낌없이 내어 준 당신의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당신이 내게 준 사랑만큼 당신을 더 많이 사아하지 못한 후회들이 오늘밤 눈물이 되어 흐릅니다. … 당신 곁을 떠나지만 하늘나라에서도 당신 위해 날마다 기도할게요. 당신,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소중한 딸 신아야, 네가 태어나던 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엄마로서 네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에 때론 매를 들면서도 마음은 아플 때가 더 많았지. …엄마의 빈자리가 네게 너무 큰 고통을 주지 않을까 염려되는구나! …신아야, 엄마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
한 줄 한 줄 써 내려갈 때마다 터진 수도꼭지마냥 주르륵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 없으면 우리 가족들 어쩌나 생각하니 슬퍼지더군요. 긴긴 유언장을 쓰고 나니 어느 새 새벽 세 시. 긴장감이 풀리면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식탁에 엎드린 채로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지요.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꿈속에서 누군가 자꾸 서럽게 울어대는 통에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만 늦잠을 자버린 것입니다. 허둥지둥 거실로 나오는데, 안방 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딸애 목소린 듯싶어 뛰어 들어가 보니 신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고, 남편 역시 손에 종이 뭉치를 쥔 채 훌쩍이고 있었습니다.?무슨 일이야? 왜 그래???엄마!? 순간 신아가 와락 안기더니 울음을 터트렸습니다.?잘못했어. 나 걔랑 헤어질게. 그러니까 죽지마. 어엉엉?
????당신 무슨 병에 걸렸길래… 난 당신 남편인데,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유언장만 덜렁 써 놓고 가버리면 다야? 당신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순간 어젯밤에 쓴 유언장이 생각났습니다. 남편과 딸애가 어젯밤 내가 과제물로 써 놓은 유언장을 보았던 겁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슬프게 우는지 정말 내가 곧 죽는 듯한 착각까지 들더군요. 도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스러웠습니다.?저기 두 사람 다 진정 좀 해. 죽긴 누가 죽는다구… 실은 그 유언장, 어제 학교에서 우리과 교수님이 내 주신 과제물이야.??뭐?? 두 사람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그럼 엄마 안 죽는 거야???당신 그럼 진작 말을 했어야지. 아침부터 사람을 이렇게 놀래키면 어떻게 해.?남편의 목소리가 화난 듯 굵어졌습니다.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저기…이러다 늦…늦겠어요. 어서들 출근하고, 학교 가요, 벌써 8시야.?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잔소리를 해대는 두 사람을 간신히 밖으로 밀어내고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남편과 딸을 놀라게 한 건 잘못이지만, 유언장을 통해 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얻었습니다.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고 지나온 삶의 여정을 돌아보는 기회였을 뿐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요.
-낮은 울타리 2002년 11월 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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