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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처럼 찾아온 기회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2939 추천수:22 112.168.96.71
2014-11-25 16:31:20
?왜 나만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나.? 한동안 난 이런 생각을 씁쓸히 곱씹으며 산 적이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외상 레슨?을 받아야 했던 어두운 고3 시절, 연이은 두 번의 입시 낙방, 대학 4년을 걸고 준비했던 성악 콩쿨 탈락, 그리고 군 입대… 2년여의 시간을 노래도 못하고 그대로 흘려보낸 후, 내세울 만한 학벌도, 이렇다 할 수상 경력이나 무대 경험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 목소리는 그리 흔치 않은 하이바리톤 음역이었다.

제대 후 테너도 베이스도 아니어서 합창단 시험에 번번이 떨어질 때는 나의 그 ?독특한? 목소리도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라면 한 번쯤 욕심을 냈을?팬텀?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잖아요. 그것도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좋은 기회인데… 배역을 맡게 되든 떨어지든 좋으니 오디션에 참가만이라도 해 봐요.? 영국 제작팀이 순전히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뽑고 있으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아내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나를 설득했다.

아내는 언제나 그랬다. 나보다 더 나를 믿어 주는 사람. 나보다 더 내 목소리를 아껴 주는 사람. 내가 버릇처럼 마음을 접고 기대를 버릴 때마다, 늘 할 수 있다고 용기와 확신을 심어 주는 이가 바로 아내였다. 아내를 만난 것은 내가 보수도 없는 아마추어 합창단을 전전하며, 밥벌이도 안 되는 음악을 포기하고만 싶던 때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내는 나를 믿어 줬다. 나도 잘 모르겠는 잠재력을 내 속에 보았다 했고, 내 목소리에 빛나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꼭 기회를 주실 거예요.

재능을 주신 분도 그분이시니 당신의 보석 같은 목소리가 빛을 발할 날이 올 거예요.?자신감도 패기도 다 잃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세빌리아의 이발사? 오디션을 보도록 격려해 준 것도 아내였다. 생각지도 않던 주인공 ?피가로? 역을 따내고 우린 서로 얼싸안으며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번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 소식을 먼저 알고 달려온 사람 역시 아내였다.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도전해 보자.? 아내의 흔들림 없는 믿음 앞에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최소한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윤영석 씨!? ?예.? 마른침을 삼키며 오디션 장에 들어서니, 제작진 몇 명이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얼음장 같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준비해 간 아리아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내와의 약속대로 그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으니까. 얼떨떨한 마음으로 연습실 피아노 앞에 앉아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부족한 저에게 기회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결과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세요.?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연습실과 공연장을 바쁘게 오가는 동안 한 달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그동안 오디션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없었던 일처럼 마음을 접고 있을 무렵, ?오페라의 유령? 제작팀에서 연락이 왔다.

최종 합격 통보였다. 그것도 앙상블 파트가 아닌 ?14대 최연소 팬텀?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는 월등히 나은 많은 응시자들을 두고, 협상 중이던 미국인 배우와의 계약도취소된 채, 내게 그 엄청난 역할이 주어진 것이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내가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나중에 들은 소식인데, 그날 내 노래를 듣고 난 제작진들은 ?이제까지 오디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팬텀 역에 적합한 목소리?라고 나를 평가했다고 한다. 유별나게 높은 음역의 내 목소리에 꼭 맞은 배역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비워 두고 나를 위해 예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2002년 6월 30일, 그날은 ?오페라의 유령?마지막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공연을 하는 내내, 그리고 공연을 마친 후 커튼콜을 기다리며 나는 울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 뒤를 따라 맨 마지막으로 무대로 나가 객석을 바라본 순간, 나는 그간 참고 참았던 모든 아쉬움과 감사함을 눈물로 한없이 쏟아 내고야 말았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끝없는 박수로 격려를 보내 주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나를 인도하신 그분을 신뢰하자.? 혹독한 비평 속에서 내 역량 부족을 절감하며 무너지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 벌써 7개월.

몸무게가 14kg나 빠질 정도의 강행군을 해 왔음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매일매일 내게 위로와 새 힘을 주었던 기도 덕분이었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차마 다 표현 못할 감격이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되어 가슴속에 밀려들었다.?저 어딘가에 아내도 서 있겠지.? 나는 다시 객석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고마운 아내에게, 그리고 내 삶을 변화시킨 놀라운 기회와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웠고, 아내와 함께 앞으로 펼쳐질 믿음의 여정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겨우 시작인 셈이다.

유령처럼 찾아온 기회 /윤영석
- 가이드포스트 2002년 10월 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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