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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발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2058 추천수:19 112.168.96.71
2014-11-25 13:23:56
하루 종일 비가 왔습니다. 무성한 빗줄기로 봄은 한층 가까이 다가왔지만 조금은 싸늘한 저녁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TV 앞에 모여 앉아 허구의 세계에서 삶의 느낌들을 주워 담기를 한참... 어디선가 들리는 낮은 한숨 소리에 돌아본 아이의 시야에 아버지의 발이 가득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살기' 위해 기웃거리는 편리함들은 알지도 못하는, 바보스러울 만큼 소심하고 우직스러운 아버지. 그 연세의 어른들이 다 겪으셨을 법한 우울한 시절들을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불우하게 보내느라 사랑에 굶주린 아이 같은 어른.

당신이 그리도 고파하던 사랑을 마음껏 풀어 내고 싶어, 생의 전부를 자식들에게 집착하였던 어리석은 사람. 아이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속된 말로 가방 끈이 너무도 짧은 노동자였습니다. 사랑하던 한 사람과 수저 두 벌이 전부였던 시절, 어렵사리 구한 방직 공장의 염색 일을 천직으로 알고 30년을 하루같이 무던히 일해 왓습니다. 새 학년이 되어 가족사항 기입란에 부모님의 학력을 적어 넣을 때마다, 그리도 무던하던 아이의 아버지는 남몰래 눈물을 씻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그런 일들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까봐. 그래서 당신에게 등을 돌리게 될까봐 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의 욕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아이는 독한 화공약품 때문에 언제나 반쯤은 상해 있는 아버지의 발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정갈한 양복 차림에 출퇴근이 규칙적이었던 친구들의 아버지와는 달리, 일주일 단위로 출근 시간이 바뀌는 작업복차림의 아버지의 모습도, 영화 관람이나 박물관 견학 등의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의 생각들도 아이에게는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누구의 생각이 어떠하든 시간은 너무도 정직하게 흘러 아이를 어른으로, 아버지를 어른의 어른으로 키워 내었고, 그러는 동안 너무도 많은 변화들을 경험케 했습니다. 우선 아이는 사람들이 최고의 학부라 부르는 만큼의 학력을 갖추어 아어지의 아픈 곳을 채워 드렸고, 아버지는 30년을 지켜 온 자리를 그만두고 새일터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젊은 날에 그랬던 것만큼이나 어렵게 구한 자리는 아파트 경비. 세상은 인정하지않았지만, 아직은 당신의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그래도 아버지는 기뻤습니다.

아이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아버지의 모습들 때문에 마음을 볶아대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들 속에서 아이는, 마음과 몸이 유달리 약했던 자신을 어른으로 키워 내느라 남몰래 눈물을 삼키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열에 들떠 괴로워하는 아이보다 더 아픈 마음으로 오래 자리를 지켰던 아버지, 문화생활의 여비를 아껴 아이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매년 허리가 휘청거리셨을 아버지, 어른이 되어 감기로 아파하는 아이의 뒤에서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어 괴로웠을 나의 아버지... 이제 아이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야 함을 압니다.

지쳐 구부정한 어깨와 희어진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싐을 얻으실 수 있도록. 그러나 아이는 아직도 아버지의 어깨에서 쉬는 일에 더 익숙한가 봅니다. 아버지 역시 아직은 자신의 아이에게 기대는 일이 낯설어 보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는 아직도 조심스레, 줄어든 수입과 늘어난 지출을 생각하며 한숨을 쉽니다. 하지만 아이는 내심 마음이 가볍습니다. 비록 형편은 많이 불편해졌지만, 어린 시절 내내 아이의 마음을 누르던 아버지의 상한 발. 그 발의 형상이 요즘은 비교적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 저녁에 당신의 딸이 당신의 발을 보며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아버지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건 분명 행복이었습니다. 당장 내일의 먹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삶이어도 아버지의 발이 깨끗한 것이 더 좋은 아이를 세상은 철이 없다 꾸짖을지 모르겠지만...아이는 목슴을 걸고 그건 분명 ;행복;이었노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요즘 어른이 되어 가느라 많이 아픕니다. 이 다음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섰을 때 당당한 어머니가 되고 싶어 충분히 앓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이에게 오늘, 또 하나의 가르침을 자신도 모르게 내어 줍니다. 물질적인 풍요함이 행복의 필수 조건일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시련이 아플수록 서로를 향한 사랑의 깊이는 더욱 깊어져 가는 삶에 대한 모순된 진리들을.... 삶에 대한 배움으로 눈시울이 적잖이 뜨거웠던 그 저녁을 회상하며, 아버지만큼이나 무뚝뚝한 아이는 이제껏 한 번도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한마디를 자신의 아버지께 부끄러이 고백하려 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라고..

아버지의 발
리더스 라이프 2001년 1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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