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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요13: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174 추천수:3 220.120.123.244
2020-10-25 18:16:32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요13:1-2

 

제가 성도님들에게 아침에 보내는 [열린편지]에 지난주 금요일 “사랑하면 건강해집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은 건강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클리블랜드의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연구팀에서 기혼남녀 만 명에게 "아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합니까?"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하여 건강의 척도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이 질문을 던진 결과, '예'라고 답한 사람들은 협심증 발병 위험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배 정도 낮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랑받으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배우자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배우자가 오래살기를 원하면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를 16년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 최고의 행복은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는 현대인이 건강을 위하여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는 것입니다.

앨런 룩스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이 사랑으로 봉사할 때 봉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희열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험해 보니까 봉사자의 90%이상이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Helper's High(봉사자들의 희열감)를 경험했고, 봉사 후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통증과 불편함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는 것보다 웃어주고 포옹하고 악수하며 사랑으로 친밀한 정서적 교류를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훨씬 건강에 이롭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읽고 둘째 딸이 “아빠 사랑해용... 좋은 하루 보내시와용”이라고 답신을 해 왔습니다. 딸의 짧은 답신이지만 그 편지를 받으니까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우리는 모두 사람 마음속의 사랑을 찾아 인생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기는 것이 사랑이듯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인생 최고의 행복은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라고 말했는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머리로 느낄 때 비로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우리를 언제나 어느 때나 끝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영원히 사랑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추해도, 병들어도, 가난해졌을 때도, 배신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죄를 지었을 때도, 돈이 없을 때도, 피해를 주었을 때도, 피해를 주었을 때도, 자존심을 상하게 할때도, 싫은 소리를 할 때도, 마음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할 때도, 큰 손해를 끼칠 때도, 원수처럼 취급할 때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실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 중에 없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아멘입니까? “자기 사람들을”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죄 많은 000”, “가난한 000”, “못 생긴 000”, “늙어 병든 000”,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하는 000”, “무식한 000”, “남 비난하기 좋아하고 허물 드러내기 좋아하는 000”, “욕심 많은 000”, “나밖에 모르는 000”, “불효하는 000”, “돈만 아는 000”, “게으른 000”, “이중적인 000”, “중독된 000”, “우울한 000”, “실패한 000”, “시험당한 000” 등을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여기서 사랑한다(아가페사스, 아가페센)는 말은 아가페적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헬라어에서는 이성적 사랑을 말하는 에피투미아, 감성적 사랑을 말하는 에로스, 가족간의 사랑을 말하는 스톨게, 친구의 사랑을 말하는 필레오,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 등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다만 상대방을 위하여 주는 무조건적 사랑을 말합니다. 기분이나 감정, 육체적 조건이나 정열을 뛰어넘은 초월적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돌아오는 보상이나 댓가가 없는데도 상관하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으로 우리를 지금까지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있으면 앞으로도 영원토록 사랑해 주십니다. 믿습니까? 여기서 “끝까지(에이스 텔로스)”는 시간적 의미로 끝까지입니다. 영원토록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끝까지는 강세적인 의미로 최대한으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오늘 성경은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냥” 끝까지 사랑하십니다(무조건적 사랑).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예수님도 편애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편애가 아닙니다. 남편이 이 여자나 저 여자나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편이 날마다 “나는 모든 여자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아내가 감동이 되겠습니까? 아내가 이 남자나 저 남자나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내가 “나는 모든 남자를 사랑하다”고 말하며 나의 자류로운 사랑을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 아내가 감동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 내가 택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버리면 그 사랑은 끝이 나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되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택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누가 우리를 택했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를 택했습니다. 요한일서 4:10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이 먼저 사랑한 사랑입니다.

 

언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했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이 있어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선택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조건을 보고 자신이 선택하여 사랑하니까 끝까지 사랑하기가 힘들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잘나고, 명예가 있고, 돈과 권력이 있고, 목적을 달성할만하고, 잘 생겨서, 건강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도, 성품도, 가치도, 능력도 없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그냥 우리를 선택하여 사랑하는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저녁에 잠을 잘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따돌림을 당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 때, 실패할 때, 병들고 늙어 존재감이 점점 살아질 때, 돈없고 힘없다고 소외될 때 이 사랑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얼마나 힘이 납니까?

지금도 우리 주님은 “자기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우리를 그냥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2.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변치않는 사랑).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이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사람은 끝까지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할 때 대부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어 때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겠다”고 서약을 합니다. 그런데 그 서약은 쉽게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자신의 조건에 따라 사랑을 포기해 버립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데, 자기 목숨이 중요한데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사랑할 만한 에너지가 고갈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지속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사랑합니다. “한 사람과 살기에 지루하다고, 성격에 차이가 난다고, 무능력하다고, 병들었다고, 부모와의 동거에 따라 주지 않는다고,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활비를 주지 않는다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바람났다고” 사랑을 지속할 수 없다고 쉽게 사랑을 접어 버립니다. 아무리 환상적이고 열정적인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 변질되고 식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은 조건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변치않는 한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극한의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유월절 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있으면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소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예수님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녁 기도하시다 잡히십니다. 밤새 주무시지도 못하고 끌려가 새벽 공회에서 심문받습니다. 채찍을 받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씨우고, 손발에 못을 박히고 9시에 십자가에 달리고 허리에 창을 찔리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비난과 수모 가운데 오후 3시면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아시면서도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12 제자 중 하나였던, 돈을 맡았던 유다가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회계를 맡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래나 사람은 돈에 대하여 예민하기때문에 아무에게나 돈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유다에게 회계를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이 유다를 신뢰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유다가 돈 몇푼에 자신을 그렇게 신뢰해주고 사랑했던 예수님을 팔아먹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이 행해지는 동안 마귀가 이미 시몬 가룟의 유다가 그를 넘겨 주도록 마음을 향하여 제안하여 그 유혹에 넘어간 것을 예수님은 다 아셨습니다. 아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고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특히 유다가 자신을 판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마지막 밤,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유다에게 어떻게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유다의 발을 맨처음 씻겨 주었다고 말합니다. 헌신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중에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뿌리 깊은 증오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다 부인하고 도망갈 것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을 다 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제자들을 종처럼 섬기는 사랑을 끝까지 하신 것입니다.

 

26절 보십시오. 유다에게 떡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이 하는 일을 수행하십니다(4,5). 일곱가지의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② 겉옷을 벗고 ③ 수건을 가져다 ④ 허리에 두르시고 ⑤ 대야에 물을 담아 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⑦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용서와 섬김의 사랑을 끝까지 실천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물과 피는 정결케하는 도구로 나옵니다. 물로 씻는 것은 용서와 거룩을 통해 정상적 관계를 갖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주시기 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하셨는데 변치 않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한 사람을 끝까지 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이 바로 앞에 있는데고 불구하고, 제자들이 배신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신 매매하는 데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차원이 다르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는 죄인이고, 원수이며, 더러우며, 먼지이고, 재이며, 벌레이고, 안개이며, 불결하고, 불경하며, 어리석고, 비천하고, 쉽게 유혹에 무릎꿇고, 허물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끄러워 예수님을 전하지도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멀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루 종일 돈벌이에 바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다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39)”라고 고백합니다.

 

3. 우리 주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살게 하기 위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왜 예수님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겠습니까?

왜 이제 12시간이 지나면 잡히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처형을 당할 것을 다 아시면서 이런 세족식과 성찬식을 하시는 것입니까?

14-15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이렇게 마지막 밤에 유언적 행위를 통해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를 주님이 친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족식을 할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감격하며 눈문을 흘리면 나고 주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해야하겠다고 다짐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22장 24절에는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에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안중에 없고 자리다툼만 하던 사람들입니다. 부모의 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사는 자식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주심의 사랑의 헤아리고 삽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다고 하지만 나 살기에 급급하지, 주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배신하는 그들에게, 서로 누가 높냐고 다투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습니까?

34절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시간적으로 다른 새 계명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새 계명입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준이 되는 사랑입니다.

3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 내 사람, 하나님 나라 백성,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받고 사는 사람인 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바로 그리스도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떤 외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격이며, 그 인격과의 인격적인 관계다.”라고 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사랑”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가득 체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100번 이상 사용하면서 강조합니다.

요한1서 4장 7-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았습니다(갈3:13), 모욕과 수모를 당하고, 창에 찔리고 슬픔과 질고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사53:4)

이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다시 고기잡으로 갔습니다. 그 때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고기를 먹이고 예수님이 물어봅니다. 무엇을 물어 봅니까?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문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냐?”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은 아시나이다” 다시 예수님을 물어 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을 사랑하느냐?” 세 번째 물어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을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는 너무 사람의 사랑에 목말라 허우적 거리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끝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도 행복하게 살기에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주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주님의 이 끝없는 사람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심을 보류하고 서로 신뢰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주 대신에 축복을, 경쟁 대신에 섬김을, 공격 때신에 격려를, 비판 대신에 감사를, 섭섭함 대신에 위로를, 탐욕 대신에 베품을, 정죄 대신에 먼저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받으면 행복해지고, 사랑하며 사람받으면 건강해집니다. 의사이며 심리학자 에멧트 팍스는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은 만큼 행복하고, 사랑한 만큼 행복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고,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하고, 갈수록 더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십자가가 없다는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상처도 받고, 사랑하면 갈등도 생기고, 사랑하면 손해도 보고, 사랑하면 수모도 당하고, 사랑하면 자존심도 상하고, 사랑하면 수치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훈장이 되고, 우리를 고결하게 하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들입니다. 십가가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갈로의 시 가운데 “말없이 사랑ᄒᆞ여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한 것처럼 아무 말 말고 자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잠자코 사랑하여라.

사랑이 깊고 참된 것이도록 말없이 사랑하여라.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봉사하고 눈에 드러나지 않게 좋은 일을 하여라.

그리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말없이 사랑하여라.

꾸지람을 듣더라도 변명하지 말고, 마음 상하는 이야기에는 말대꾸하지 말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네 마음을 사랑이 다스리는 왕국이 되도록 하여라.

그 왕국을 타인에 대한 자상한 마음으로 채우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사람이 너를 가까이 않고 오히려 멀리 떼어버려 따돌림 받을 때,

말없이 사랑하여라.

도움을 주고 싶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

오해를 받을 때 말없이 사랑하여라.

사랑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으면서…

네 침묵 속에 원한이나 인내롭지 못한 마음,

또는 심한 비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여라.

언제나 형제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말없이 사랑하여라.”

 

내 남편, 내 아내가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 내 딸이 그래도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 교회가 그래도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사는 곳이 천국이고 사랑할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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