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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13; 빌립보서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712 추천수:11 220.120.123.244
2019-08-04 04:09:02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9)

빌2:12-13

 

지난주 일본은 우리나라를 27개 우방에 부여했던 백색국가에서 제외해 버렸습니다. 이제 무역에서 우방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대법원에서 강제징용에 대하여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군국주의자의 후손인 아베 총리가 '국제법 상식에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하며 사실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입니다. 1194개의 품목을 수출규제 영향권에 놓고 일본 정부가 한국 기업의 목줄을 쥐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총칼로 대한제국을 점령했듯 기술력의 우위로 경제 갑질을 한 것입니다. 경제력으로 대한민국을 무릎 꿇리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제 규모가 세계 3위로 GDP가 4조 8천 721억 달러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12위로 GDP가 1조 5천 308억 달러가 됩니다. 일본이 우리보다 세배가 큽니다. 물건 팔아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돈을 벌어가는 나라가 너희를 믿을 수가 없으니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고약한 갑질을 한 것입니다. 그 속내는 뻔합니다. 첫째는 자기들의 속국이었던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자신들보다 앞서가지 못하도록 미래 성장산업의 발목을 잡겠다는 것입니다. 과거 조선을 짓밟았던 군국주의자와 그의 후손들은 혐한 운동을 하며 아직도 자신들이 조선에 은혜를 베풀어 근대화시켜주었다고 착각하며 대한민국을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깔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식민지 보상은 다 끝났고 언젠가 있을 북한과의 배상문제에 쐐기를 박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강한 애국주의 지도자상을 부각함으로 앞으로 4선 연임 총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한일관계를 긴장시킴으로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을 전쟁 가능한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는 헌법으로 개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의도가 네 번째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베가 속한 일본의회는 패전 전 군국주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제가 주보에 써 놓았듯이 이들은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선민이라고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자들입니다.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면서 한반도 유사시 군대를 파병하여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지금의 헌법입니다. 아베 때 전쟁 가능한 헌법으로 고쳐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125년 전 일본 군국주의 시절 1894년 일본은 우리나라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빌미로 군대를 파병하였습니다.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파병하면서 “향후 모조리 살육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근세 일본으로는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는데 처음부터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일본군 4000여 명이 와서 무차별 학살로 숨진 동학 농민들은 3만~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청일전쟁 당시 전사자를 “일본인 약 2만명, 중국(청)인 약 3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이 우리 선조들이 희생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는 단 1명 나왔고,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진 자는 36명이었다고 합니다. 동학군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깃발을 흔들면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전쟁에 참여했지만, 일본은 서방의 최신식 라이플총으로 무장하고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의 직접 명령에 따라 무차별하게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 후 민비를 시해하고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당시 참전했던 일본 병사의 일기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시간상 다 소개할 수 없지만 이런 글이 나옵니다. “48명을 때려죽였고, 부상자 10명을 체포했다. 생포한 이들은 숙소로 돌아간 뒤 고문하고 불에 태워 죽였다. 잔당 7명을 붙잡아 성 밖에 있는 밭에 일렬로 세워 놓고 일제히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일제의 총칼 앞에 당한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 한 가정 한 가정의 불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지배하에 근로정신대로서 10세에서 40세까지 동원된 여성만 5-7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인으로 강제 징용 피해자는 1939-45년까지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이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이 약 200만 명으로 총 35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해방 당시 조선의 인구가 2500만 명가량이었으니 강제징용 피해는 조선 전체에 걸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는 지금도 살아남은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입니다. 조선인을 폭행하며 하루 17시간 씩 강제노동을 시킨 악명 높았던 아소광업은 지금도 유력 기업입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놈 되 나온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아직도 이렇게 뻔뻔하게 일본이 경제보복을 하는 것은 한국 경제의 일본 의존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도 경제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해방되어 미국은 대한 원조를 제공하면서도 일본 소비재 상품을 구입하도록 했답니다. 한일 경제전쟁을 하고 있는 지금도 미국의 태도가 그렇지만, 당시 미국은 미국 하부에 있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위계질서를 유지하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야 삼각 동맹 운영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패망하고 쫓겨난 일본이 아직까지 여전히 한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고 이번에 그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아베 정권은 12·28 ‘위안부’ 합의 파기,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그리고 해상 자위대 초계기 레이더 조준 시비, 후쿠시마 원전 사고 관련 일본산 수산물 수입금지 세계무역기구(WTO) 심의 패소 등을 거치며 한국을 은혜도 주제도 모르는 무례·무도한 나라로 몰아 붙이면서 원자재 수출 규제로 '너희가 먹고사는 경제구조를 상기해보라'고 안하무인 격으로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8.15 때 경제 종속을 끊어 버려야 했는데 1965년 한일수교 이후 53년간 한 번도 인본은 한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낸 적이 없습니다. 일본이 2005년부터 11년 동안 한국과의 무역에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흑자 총액은 3032억 달러(약 357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 경제가 얼마나 일본에 종속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당장 일본 제품이 없으면 주력 산업이 가동을 멈추고 나아가 경제위기를 걱정할 정도라면 얼마나 일본에게 경제가 종속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치적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해 이렇게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며 멸시당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값을 위해 십자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사탄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구원(소테리안)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 것도 구원이고, 경제적인 도탄에 허덕이는 사람을 도운 일도 구원이고, 난처한 처지에 있는 형편을 모면케 해 주는 것도 구원이고, 재해나 불행이나 외적으로부터의 구해주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구원은 죽음으로부터 해방, 죄로부터 해방, 사탄으로부터 해방을 말합니다.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 날 해방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죽음으로부터, 죄로부터, 사탄의 노예로부터, 지옥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은 이미 얻은 구원, 과거 시제의 구원, 과거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칭의, 중생,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순간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단회적 사건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불의한 악인에서 의롭다함을 얻어 의인이 된 것입니다. 불신자에서 신자, 성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됨으로 일본 시민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이 된 사람은 결국 대한민국 국민으로 죽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마지막 죽을 때 영화로운 몸으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영화라고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구원으로 미래적인 시제의 구원, 미래적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shall be saved)....”(롬5:9)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전서 5장 5절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살다가 영화로운 몸이 되어 천국가는 것을 궁극적인 구원, 영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사는 동안입니다. 우리가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종속되니까 수치와 멸시, 조롱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완전히 사탄으로부터, 죄의 지배로부터, 죄를 좋아하는 성질로부터 해방이 되지 못하면 사탄과 불신자들에게 수치와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진정한 해방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서로 싸우고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평안과 행복과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루라”라는 말은 의미로 현재 동사입니다. 지금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루어야 할 현재 구원, 현재 시제의 구원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성화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절에서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영어로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Already)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최종적인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기(Not yet) 때문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을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가 성화를 이루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성화는 단순하게 도덕적 성화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성화, 관계의 성화, 말의 성화, 성품의 성화, 사역의 성화 등 우리가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님을 닮아가야할 성화입니다. 칭의나 중생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으로 비유하면 이미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니 일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일제와는 상관없이 행복하고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까 사탄의 종노릇하지 말고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죽음과 죄의 노예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기심이나 자기 자랑, 자기 잘남 싸움으로 불화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풍성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중생 받은 이후 어떻게 성화를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그 비결을 단순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항상 말씀에 복종함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면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까?

온전히 이루어야 할 성화적 구원을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항상 복종하여”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무엇으로 꾸며지고 있습니까?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입니다. 이미 빌립보 교인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원문에 있는 “...하는 것처럼(as)”라는 “카도스”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항상 복종하였던 것처럼”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신앙생활이 퇴보하여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항상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복종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그러므로”라는 말을 통하여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복종하여(휘페쿠사테)”라는 말은 “손종, 복종”이라는 뜻도 있지만 “듣다. 청종하다(행12:13)”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듣는 것에서 더 나아가 행하는 것까지 의미하는 동사입니다(살후1:8). 성화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늘 들으며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여성과 남성이 살다가 어느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남자의 말이 들리고, 사랑하는 여자의 말이 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서로 말을 잘 듣고 그 말대로 살려고 하면 성숙한 부부가 되어 집니다. 결혼을 했지만 말이 들려오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성숙한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숙인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면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처럼 길 가 같은 마음, 돌밭 같은 마음,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면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거부하는 수많은 정보로 마음이 가득차고, 환난과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을 듣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면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는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잘 될 때마 잘 되지 않을 때나 상관이 없습니다. 내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이나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나를 위로하는 말이나 책망하는 말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복종하면 우리 인생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성화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진 만큼 자유를 누립니다. 평화를 누립니다. 행복을 누립니다. 사탄의 종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립니다.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능력이 없다고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없어 힘의 노예가 되었을 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힘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미래의 불확실 앞에 두려워 떨며 사탄의 노예가 되고 있을 때 고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라는 말씀이 내게 들려 주는 말씀으로 들려지고 그 말씀에 복종하면 두려움은 어느새 살아지고 희망과 기대가 생겨 미래의 두려움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됩니다.

중병으로 죽음의 공포에 있을 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편 118:17)”라는 말씀이 내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죽음의 노예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라는 말씀이 내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고 그 말씀에 복종하면 염려과 근심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항상 말씀에 복종함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항상 신전의식을 가지고 삶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온전히 이루어야 할 성화적 구원을 위해 두 가지 조건 중 첫째는 “항상 복종하여”였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 바로 앞을 보십시오. “두려움과 떨림”으로입니다. “두렵고(포부)”라는 말은 ‘공포심, 놀람, 존경, 경외’를 의미하는 낱말로 ‘누군가의 앞에서 두려워하며 혹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 앞에서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떨림(트로무)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떨림 혹은 전율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성화의 구원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사는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성취해 갈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신전의식이라고 합니다. 자신이나 타인이나 물건이나 사건을 보고 두려워하고 떠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함께 있을 때나 바울과 같이 있지 않을 때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이 있든 보는 사람이 없든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면 우리는 성숙하게 성화될 수 있습니다. 신전의식을 가지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내적으로 자아의 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꾸 시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신전의식을 가지면 외적으로 자기의 무능력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과 영적 무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신전의식(神前意識, Coram Deo)을 가지고 살면 점점 모든 부분에 있어 성숙해지고 성화가 되어집니다. 말에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신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다 듣고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람 앞에 두려워하면 비굴해 집니다. 일 앞에 두려워하면 무능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면 도덕적으로는 정결해 집니다.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일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담대해 집니다. 홍해 앞에 서있는 모세처럼 됩니다.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를 가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앞에 서 있는 여호수아처럼 됩니다. 말씀에 복종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립니다. 사역의 성화가 일어납니다.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라고 고백했는데 우리가 이런 신전의식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면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평안을 누리고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어디 가서나 누구에게도 조롱과 멸시를 받지 않습니다. 성화되면 성화된 만큼 빛과 소금이 되어 가정을 행복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하며 풍성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항상 신전의식을 가지고 삶으로 성화의 구원을 풍성하게 이루어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 뜻을 행함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항상 복종함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 이유를 13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본래 원문에 있는 “가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가르라는 말은 “이유나 원인”을 의미하는 접속사로 “왜냐하면”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3절이 12절의 이유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은 그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셔서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행하시는(에네르곤)”은 문법적으로 현재 분사형으로 지속적으로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에너지(energy)의 어원으로 힘, 능력을 말합니다. 성도 안에서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일하시는 분은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을 이루는 성화의 근거가 바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성화를 위해 일하십니까?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입니다. 소원을 두고는 “델레인”을 번역한 말인데 “의지를 발휘하다. 하고자 하다. 기꺼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시고 행하게 하십니다. 강압적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 속에 원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입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쁘신 뜻(유도키아스)”은 “선한 뜻, 선한 의도나 의향, 소원이나 바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따라 각자에게 소원을 두고 성화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품의 성화인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려면 내 사상, 내 신념, 내 옳음, 내 잘람 만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붙들고 행해야 합니다. 내 신념, 내 옳음, 내 잘남을 실현하려고 하면 교회를 10년을 다니고, 20년을 다니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여전히 그 모습이 그 모습인 삶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그가 가는 곳에 불화가 없어집니다. 갈등이 없어집니다. 분열이 없어집니다. 화평과 평강이 넘쳐 흐릅니다.

우리 신앙인의 성화는 성격이나 도덕적 성화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인격적으로 경제, 사회, 정치, 문화, 교육 등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소원과는 관계없는 욕심과 세상 풍속을 통해 우리의 성화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심께서 주시는 구원과 관련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을 행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시행하고 있는 최빈국에서 기독교 지도자를 양육하기 위해 후원하는 곳에 참여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어 온다면 꾸준히 참여해 보십시오. 경제 부분에서 성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관심 부분에서 성화가 점점 이루어질 것입니다. 장애아이를 두고 있는 성도님을 조금이라고 도와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면 조금이라도 도움의 손길을 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 헌신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면 작은 시간이라도 내어 기도해 보십시오.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0:42)”라고 했습니다.

전인격적 성화를 이루려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을 따르면 성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본 총리 아베의 행동을 보십시오. 사람의 행동은 결국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자신의 신념이 근간을 이루는데 이것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는 일본제국은 절대로 틀릴 수 없고 항상 올바르다는 야스쿠니 역사관과 제2차 세계대전과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오히려 일본이 아시아를 해방시켰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 우월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그런 정신 체계는 어디에서 온 것이겠습니까? 아오키의 <일본회의의 정체>에 의하면 자기 나름대로 믿는 그의 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아베가 고문으로 있는 일본회의는 대표적인 우파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하면서 결성된 조직이라고 합니다. 일본회의 뒤엔 막강한 금력과 동원력을 지닌 전국 8만개의 신사를 거느린 국가종교인 신도라는 종교집단이 있다고 합니다. 신도의 대표는 천황이고 800만개의 신이 있고, 8만개의 신사가 있는데 그중 최고의 제사장이 일본 천황입니다. 특히 지키는 모임은 1930년대에 “일본정신의 현현”을 내세우며 창설해 한때 신자 수가 300만이 넘었던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 교주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사상을 교의로 삼아 1974년에 결성된 종교 우파조직이랍니다. 아베 내각의 85%, 자민당의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회의 지방의원연맹 소속 의원 수도 17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일본회의의 ‘기본운동방침’은 황실 존숭(천황제 부활, 국민주권 부정), 헌법 개정, 국방의 충실(재무장), 애국 교육 추진, 전통적 가족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메이지의 정치제제와 이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즉 전쟁 전 체제로의 회귀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베 정권의 탄생으로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 오랜 염원인 개헌을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키는 모임의 정신적 지주였던 다니구치는 “전세계 인류가 행복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날 때부터 신이 지도자로 정한 일본 황실이 세계를 통일해야 한다.”, “시작부터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며, 일본인은 세계의 지도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쳤답니다. 이렇게 신을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 이데올로기 만들어 버리면 그들은 보편적 인간성을 잃고 과대 망상적인 집단이 되어 버립니다. 기독교도 과거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신전의식을 가지고 박애나 평화,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한 것입니다. 종교가 이데올로기가 되면 정치 권력의 수단이 되어 폭력을 정당화시키게 됩니다. 사이비 이단에 빠진 사람들처럼 어떤 사람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해도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지 않고 양심이 마비되어 버립니다. 침략적인 자민족중심주의 신앙과 사상이 종교 신념화되면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처럼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면서도 자기 정당성을 자랑하며 웃을 수 있습니다. 종교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바꾸면 일본회의 사람들처럼 침략을 해방이라고 하고, 수탈을 근대화를 위한 은혜라고 하며, 정당한 주장을 배은망덕이라고 하며 과거의 잘못을 미화시켜 신의 뜻이라고 포장해 버립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이런 식으로 하면 결코 성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의 이용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내 뜻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비교하여 크고 작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아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 그것은 성공이고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우리가 성화의 구원을 이루려면

1. 우리는 항상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항상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 뜻을 행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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