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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교회 (yeolin) 조회수:2879 추천수:17 112.168.96.71
2014-11-20 16:38:50

노래하는 전도사 박재란

세상이 온통 무지개 빛으로만 보이던 18세 때. 유난히 나를 귀여워 해주시던 형부의 친구 분 중에 경찰 악대장 한 분이 계셨습니다."재란아, 너는 목소리가 꾀꼬리 같구나. 가수가 되지 않을래? 지금까지의 대중가요하고는 좀 색다른 경쾌한 템포의 노래를 부르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겠다." 나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면서 형부 친구분의 손에 이끌려 가수가 되었습니다. 데뷔곡은 <럭키 모닝>. 경쾌한 리듬에 발랄한 율동을 곁들여
부른 노래는 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어서 <산너머 남촌에는>, <밀짚모자 아가씨> 등 국내 최초의 율동 가수가 되어 주가를 날로 높이는 인기 가수가 되었습니다. 저의 삶은 찬란했습니다. 인기! 돈! 일하는 기쁨! 어디를 가든 공주처럼 떠받들어 주는 달콤한 맛! 이런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이란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 그러나 세상의 인기는 물거품 같은 것.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는 듯이 떠받들던 가요계에 새로운 가수가 계속 등장하면서 박재란의 인기는 계속해서 하향 곡선 일변도였습니다. 신혼의 단꿈마저, 딸 하나를 얻은 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의 집념은 어떻게 하면 그 옛날의 인기를 다시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한가지뿐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가자! 그 넓은 땅에서 다시 재능을 펴고 다시 인기와 부를 누리자!' 그러나 미국 땅은 상상을 초월하는 바닥 인생의 되풀이였습니다. 언
어 장벽. 국내에서 얻었던 기회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바늘 끝만한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한 실패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고국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화려한 재기의 무대를 거쳐, 보란 듯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집념은 병이 되어 나를 쓰러뜨렸습니다.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더니, 급기야는 악성 위궤양이 되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발병 초기에 딱하게 여기고 도와주던 이웃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갔습니다. 6개월, 1년, 다시 반년...그렇게 2년이 되면서 얼굴은 새까맣게 기미로 뒤덮히고, 스타킹을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는 가늘어져서 일어서서 걷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생각하던 어느날, 무심중에 TV를 켜니, LA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TV선교 프로그램 방송 중에 어느 선교사 한 분의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그 한마디가 갑자기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수없이 들어 왔고 무심히 지나쳤던 그 한 말씀! 갑자기 '성령! 성경!' 성경을 찾아 온 집안을 뒤집어 놓아 가며 성경을 찾고 보니 오래된 포켓용 성경 한 권이 찾아졌고, 그 길로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실감할 수 없었던 대목 대목들이 생명수처럼 가슴으로 가슴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눈물, 콧물, 엎드려 통곡하다가 자신의 죄를 자복하다가, 어릴 적 소꿉동무에게 행한 거짓말까지 낱낱이 떠올라 회개, 회개로 밤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날이 밝았습니다. 엎드려 울던 자리가 눈물로 질펀하게 젖어 있었으나 시장기까지 느껴져, 냉수에 밥을 말아 김치를 반찬으로 먹었습니다. 먹다가, '아니 내가...김치하고 냉수말이 밥을 먹고 있지 않아?' 깜짝 놀랐으나 몇 시간이 지나도록 멀쩡했습니다. 오히려 활기와 힘이 솟구쳤습니다. 너무도 신기하여 그때부터는 감사의 눈물이 다시 봇물...이래로 15년 동안 병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건강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책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 말씀으로 병든 영혼을 치료받아 육신의 갖가지 병이 흔적도 없이 지워진 것입니다. 세상의 부요는 무엇이며 인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삶의 비밀한 기쁨을,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으로 밤낮없이 노래하고 삽니다. 이제 저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노래하는 전도사! 찬양! 찬양! 찬양의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주시어서, 허황된 꿈을 좇기 쉬운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딸 박성신까지 청소년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 한 분 만으로

임성숙(시인)

내가 요즈음 가장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해주십시오."란 기도이다. 이 기도는 나의 새 어머님이 되신 김권사님으로부터 배운 기도이다.
이십여 년 전 나의 어머님이 심장병으로 오 년 동안이나 투병하시다가 소천하시고 홀로 되신 아버님을 모시고 내가 친정에서 살림을 돌봐드리고 있을 때였다. 어머님이 다니시던 교회에서 아버님을 위로해 주시려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몇 분이 우리집을 방문하셔서 예배를 드렸다, 그 때 김채운 집사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정말 은혜스러운 기도였다. 그 중에 내 가슴에 화살처럼 꽂힌 기도가 바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란 기도였다.
나도 늘 기도 드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를 들었지만 그 기도처럼 나를 감동시킨 기도는 없었다. 혹시 다른 분들은 이미 그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내가 꼭 드리고 싶었던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들은 것이다. 그 후 오래지 않아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였는지 김집사(지금은 권사님이심)님을 나의 새 어머님으로 맞아 들였다. 교회 어른들께서 추천하셨을 때 처음엔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을 땐지라 나는 무척 당황하였지만 홀로 계신 아버님을 생각하고 또 다른 분이 아닌 김 집사님이라면 그런대로 마음이 끌려 딸인 내가 새 어머님을 모셔들일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해내며 슬픔을 달랬다. 그분은 20대 초반에 결혼하셨지만 몇 달만에 홀로 되신 후 내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같은 교회의 젊은 집사님으로 신앙 좋고 얌전한 분으로 알려져 있어 어차피 새어머니를 모실려면 그분이 적격이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라 여겨졌다. 새 어머님도 처음 혼담이 있을 때 완강히 거절하셨다가 하나님이 맺어 주시는 인연으로 믿고 허락하셨다고 했다. 그분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란 기도
대로 2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한 점 혈육도 없이 온 젊음을 주님만을 섬기며 봉사와 기도로 사신 분이셨다. 가슴 아프게도 새 어머님이 우리집에 오셔서 겨우 1년도 안되었을 때였다.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식사를 못 드신다는 기별을 받고 친정에 달려갔더니 듣기보다 심각하여 서울 큰 병원으로 모셔 진찰한 결과 위암 말기라는 진단이었다. 현대 의학으로는 절망인 것을 안 나와 새 어머님, 믿음 좋은 고모님이 기도원으로 모셔 가서 전폭으로 매달려 기도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신유의 은사를 받으신 은혜자를 모셔서 집중적으로 기도드렸다.
삼개월을 못 넘긴다던 아버님께서 완치는 아니지만 4년간이나 생명을 연장하시는 큰 은혜를 입으셨다. 그 4년 동안 새 어머님의 기도는 눈물겨웠다. 어떤 때는 아버님의 간호보다 교회 출석, 봉사에 더 열심이셔서 아버지와 나를 섭섭하게 하셨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이고 아마도 그분의 믿음 생활이 옳았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결국 내 새 어머님은 재혼 하신지 4년 몇 개월만에 다시 홀로 되셨다. 그야말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란 기도대로 그 응답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살아갈수록 느낀다. 이제 고희를 넘기셨는데
내가 멀리서 생활을 도와드리고 있지만 모시고 살 수 없어 죄송하고 가슴 아프다. 어머님은 아예 거처를 교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옮겨 사시면서 오직 주님만을 섬기며 모든 것에 감사해 하시고 만족해 하신다. 나도 요즈음 부쩍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해주세요" 기도하지만 아직도 그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온전히 내 탓이라는 것을 안다.
나 자신이 주님보다 자식으로부터의 만족, 남편으로부터의 만족, 그리고 재물과 명예. 이 세상 헛된 것에 마음을 뺏겨 온전히 주님만으로 만족치 못하는 삶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세상 것에는 만족은 커녕 허망 밖에 없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욱 간절히 기도 드린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해주세요" 죽기 전에 이 기도의 응답을 받아 하늘의 평강을 누리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다. 평생 주님만 의지하고 감사드리며 만족해 하시는 새 어머님처럼.

-주부 편지에서 발췌-

다시 부르는 노래

한 미 순
13년 전, 서른 살.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서였습니다. 꿈에 부풀어, 혼수를 장만한다, 웨딩드레스를 맞춘다하여 남편 될 사람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꿈결처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저는 결혼식 날짜를 훨씬 지내 놓은 한 달 반 동안을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누워있었습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저는 내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목 위의 얼굴만 살아있을 뿐, 손도 발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수가... 이것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백 번을 고쳐 생각해 보아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저는 한도 끝도 없이 자살만을 궁리했습니다. 부모, 형제, 누구라도 나타나기만 하면 증오하고 학대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한없이 학대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장애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망과 증오와 절망, 죽음에의 집착이 서서히 벗겨졌습니다.' 목숨이 무엇인가. 전신마비가 되어서도 이 치열한 감정과 절망이 이토록 무섭게 깊어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수그러지지 않는 정신으로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언젠인가 내가 정상인으로 아름다운 처녀임을 구가할 때, 전신장애를 극복하고 입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김준호씨의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우선 입으로 글을 쓰자.' 펜을 입에 물로 한 획, 한 획 긋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집념을 지켜보던 치료사 선생님이 어느 날, 타자기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입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쉬웠습니다. 선생님이 감격하여 박수를 쳐주셨습니다. "야아! 한미순 자매님 훌륭해요! 훌륭해요! 드디어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승리의 새 생활이 시작된 거예요. 정말 상상치도 못했던 승리예요!" 병원생활 1년 6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올 무렵, 저는 입으로 타자를 쳐서 편지도 쓰고 일기도 썼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나의 생각과 뜻과 감정이 글로 정리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저는 기뻤습니다. 그 기쁨은 내가 정상인일 때 느껴본 일이 없는 기쁨, 하늘나라의 기쁨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길로 구필화가 김준호씨를 찾아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세계 구족 화가협회가 한미순 자매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림 실력이 협회 심사기준에 통과되면 매월 교육비가 나오고 여러 가지 창작 활동을 위한 혜택을 받을 수가 있어요.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앞으로 한없이 발생할 이런 불행에 대비하여 우리 같은 장애인들의 길잡이가 되라고 자매님을 부르신 겁니다." 돌아오는 길로 저는 방송사
를 통하여 나에게 그림을 지도해줄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저의 애절한 호소에 당장 대답하며 달려온 분은 이화대학 입구에 화실을 둔 화가 박진환 선생님이었습니다. 무료로 매주 한 번씩 출장 지도를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대낮, 우리들의 현실 속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입에 붓을 물고 시작된 나의 그림공부는 피를 흘리는 전투였습니다. 입안이 헐어서 밥은커녕 물도 넘기기 어려웠고 붓을 입에 물 때마다 상처에서 진물 섞인 피가 흘렀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내 목을 조여왔습니다. 그러나 천사 선생님의 그렇게도 여상한 사랑을 바라보면서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습니다. 나를 견뎌주는 이웃의 사랑을 바라보며 거기서 삶의 심오한 뜻을 다시 찾고는 했습니다. 마침내, 1989년, 저는 세계 구족화가협회 학생으로 등록하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6년 후에는 정회원이 되었고, 같은 해 7월, 꿈에 그리던 개인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 개인전을 찾아주신 손님들께, 저의 이름으로 출간된 시집을 나누어 드릴 때, 저는 하늘을 둥둥 날고 있었습니다. 저는 전신마비 장애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세 권의 시집이 출간되었고, 금년에도 시집 출판 제의와 개인전 전시회를 갖자는 제의가 밀려들고 있습니다. 아아, 이 세상은 고통을 이기는 천사들과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감싸 안아주는 천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크나큰 선물인지요. ♥

 

국화꽃 베개

차 우 영

아버지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고 바로 집으로 내려갔다. 세 시간을 차를 타고 집에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병원으로 가신 다음이었다. 한 달 전 출산을 했던 나는 혼자 계신 아버지가 늘 걱정되긴 했었지만 몸조리를 핑계로 찾아 뵙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얼어붙어서 눈을 끔뻑이기가 어려웠다. 바람이 얼마나 차갑고 매섭던지 병실에 들어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아버지..."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다. 산소 호흡기는 아버지의 몸 속으로 끊임없이 맑은 공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펌프질 소리가 아버지의 심장 소리같이 느껴졌다.
무남독녀인 나를 위해 평생 힘들게 펌프질을 해야 했을 아버지의 심장. 몇 해 전부터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의사의 지시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위해 국화꽃 농사를 지으셨다. 중환자실이라 면회 시간이 길지 않아 아버지를 뒤로하고 병실 밖으로 나온 나는 아버지의 옷가지라도 몇 개 챙기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늦은 밤인데도 동네 예배당에서 찬양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아버지가 내게 늘 성탄 선물로 주시던 국화꽃 베개를 올해는 받지 못하리라."내년에는 베개를 세 개 만들어야겠구나... 하하..."하고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꽁꽁 얼어붙은 길을 한참 동안 걸어 집에 도착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늦가을이 면 망울망울 매달려 나를 반겨 주던 국화가 추하게 말라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릴 적 몸이 유난히 약했던 나를 위해 아버지는 국화꽃 베개를 만들어 주시곤 했었다. 저 국화 꽃잎을 하나하나 따서 커다란 대야에 담아 이파리 한 장 날아갈새라 곱게 말려 베갯속으로 넣어 주시던 아버지. "일찍 에미를 잃어 냄새를 모르니께, 니는 이 베개를 쓸 때마다 국화 내음을 에미향으로 여기면 되여. 하긴 이 냄새가 니 엄마의 미모를 따르진 못할 것이지만 말여...."
겨울 바람이 매서워질 때면 어김없이 국화꽃 베개를 건네주시며 어머니를 떠올리시던 아버지. 아버지에게 국화는 젊을 때 잃은 아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극한 정성으로 국화꽃을 키우셨을 게다, 12월인데도 아직 국화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아버지의 몸이 오래 전부터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전화로 안부를 묻는 딸에게 '난 잘 있으니께 걱정 말고... 니 신랑이나 잘 챙겨... 국화꽃 베개도 이내 보낼꺼여.'라고 안심시키던 아버지.
'아버지를 위해 올해는 내가 국화꽃 베개를 만들어야지.' 그리고는 국화꽃을 하나하나 대야에 담기 시작했
다. 국화를 톡 하고 떼어 낼 때마다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 엄마의 미소.시간이 지나자 손끝이 시려오기 시작했고, 근육이 굳어질 만큼 얼굴에 한기가 몰려들어 와 잠시 쉬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베갯잇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려고 장롱을 열었는 데 갑자기 진한 꽃내음 아, 세 개의 국화꽃 베개....
나는 차디찬 손으로 뜨거운 눈물을 닦아 내야 했다, 거기엔 향기만큼이나 진한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히 번져 오르고 있었다.♥
-낮은울타리9712 발췌-

 

빕살 며느리

최 순 희

얼마 전 둘째 며느리가 손자를 낳았다. 첫 인사를 왔을 때부터 난 그 애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난 얌전한 아이가 좋은데 짧은 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그 아이는 얼굴은 예쁘장했지만 앉아 있을 때나 움직일 때 조금도 다소곳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그 애를, 둘째는 너무나 위하는 눈치였다. 첫째 며느리는 참하디 참해서 몰랐었는데, 솔직히 잘 키운 자식 하나를 시원찮은 아이에게 빼앗겨 버린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했었다. 영감이 살아 있었더라도 그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구헌날 갖은 애교를 부리며 날 설득하는 아들 녀석에게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끝내 결혼 허락을 하고 말았다. 지난 내 생일날이었다. "어머님, 저희 왔어요. 저 예쁘죠?" 첫째 내외는 직장 일로 먼 지방에 내려가 있기 때문에 자주 볼 수 없었고, 집이 조금 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내와 단둘이 살고 있는 나를 명절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건 둘째, 그 애들이었다. "어머니, 저 잘했죠? 와, 진짜 맛있다 그죠? 영진 씨, 이것 좀 먹어 봐. 내가 한거야." 접시를 들고 거실로 막 뛰어가는 둘째 며느리 싹싹한 건 좋은데 시금치나물 하나 무쳐 놓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게다가 시금치를 사와서 씻고 다듬고 삶고 헹궈 건져내는 것까지 모두 내가 했는데 말이다. 조미료 통이 뚜껑이 열린 채 여기저기 널려 있고 바가지, 접시, 냄비, 조리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평소에 이 애들이 어떻게 해먹고 사는지 눈앞에 훤하고, 내가 만든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을 둘째가 가여워 기분이 울적해졌다. 부엌뿐만이 아니었다. 그 애가 들어갔다 나온 화장실은 더 엉망이었다. 쓰고선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축축한 수건하며 물이 흥건한 변기, 세면대, 바닥 타일.... 머리카락까지 이곳 저곳에 떨어져 있었다. 더 화가 나는 건 둘째 녀석이 며늘아이 뒤를 따라다니며 수건도 접고 물기도 닦는다는 사실이었다. 둘째가 결혼하기 전, 난 와이셔츠를 새하얗게 손빨래한 뒤 빳빳이 말려 말끔하게 다림질해서 입혔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목둘레, 손목 둘레의 찌든 때가 빠지지도 않은 옷차림으로 다니는 게 아닌가. 분명, 세탁기에 이것저것 한꺼번에 넣고 쓱쓱 돌렸으리라. 이런 것들 말고도 속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엄마, 내 방에 혁이 기저귀가 있었나봐. 냄새가 장난이 아니야' 막내가 투덜거렸다. 같은 여자로서 얼마나 창피했던지.... 종이기저귀 쓰는 것도 싫은데, 젊은 애가 그렇게 건망증이 심하니.... 그래도 어쩌리. 시간이 지나면 저 애도 점점 나아지겠지 하며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모두들 들떠 있는데 막내아인 늙은 제 에미가 이제 재미없는지 M.T다 뭐다
해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아 요즘엔 거의 혼자서 집을 지켜야만 했다. TV를 켜 놓은 거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적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난데없이 먼저 간 영감이 생각나기도 했다. 게다가 밤이 깊어지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한기까지 났다,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한기가 점점 심해져 솜이불을 겹겹이 덮고 움츠려도 여전히 춥고 식은땀이 났다.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좀 나을텐데.... 이상하게도 그 밉던 둘째 며느리가 재잘대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머님, 혹시 몸이 이상하거나 뭐가 드시고 싶으면 저를 부르세요, 만사 제쳐놓고 곧장 달려올게요.' 빈말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다이얼을 돌렸다. "아가야... 에미다. 내가 낮에 윌 잘못 먹었는지..."
"어머! 어머님, 많이 아프세요? 혁이 아빠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갈텐데... 하필이면 오늘 그이가 당직이라서..." '그래, 니가 그렇지 뭐 기대한 내가 바보지'큰애들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서글픔과 아픔을 달래며 겨우 잠이 들었다. 쾅쾅쾅. 새벽 한 시쯤 되었을까. 누군가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벨을 계속 눌러도 나오시지 않길래.... 몸은 좀 어떠세요, 어머님. 혁이를 재우고 오느라고 좀 늦었어요. 지하철이 끊어져서 택시를 타고 왔죠. 저 예쁘죠?" 저 예쁘죠? 란 말이 다른 때는 그렇게 밉살맞더니 그 순간엔 얼마나 예쁘게 들리던지.... 며느리는 마다하는 나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더니 얼른 무겁게 들고 온 보따리를 풀어 보온병을 연다.
"어머님, 제가 끓인 죽이에요. 저녁 안 드셨죠? 빨리 드셔야 해요. 하나는 호박죽이고 또 하나는 깨죽이거든요. 어떤 거 먼저 드실 거예요? 둘 다 맛있지만.. 사실호박죽이 조금 더 맛있어요. 아참, 어머님, 꿀물 타 드릴까요?" 밤새 며늘아이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고. 난 그런 며느리를 보며 행복해 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행동은 비록 신세대이지만 마음은 한없이 고운 그애의 진실을.... 한밤중에 아이를 업고 죽을 끓여 애타는 심정으로 달려왔던 그때부터 그 애는 밉살 며느리에서 예쁜 며느리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 낮은 울타리 97년 12호에서 발췌 -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도시의 어느 조용한 거리를 키 작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가을 오후였다.
낙엽들은 그에게 지나간 다음 여름들을 생각나게 했다.
이제 이듬해 유월이 올 때까지 그는 또다시 길고 고독한 밤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때 고아원 근처의 낙엽들 사이에서 종이 쪽지 하나가 그의 눈에 뛰었다.
노인은 몸을 숙여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주어들었다.
어린아이의 글씨체로 쓰여진 그 글을 읽으면서 노인은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단어들이 하나씩 그의 마음을 울렸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이 필요해요.
난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노인은 눈을 들어 고아원을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노인은 창틀에 코를 누른 채 밖을 내다보고 있는
외로눈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노인은 마침내 자신에게 친구가 생겼음을 알았다.
그래서 노인은 소녀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았다. 그들이 그 겨울을
웃으며 보내리라는 것을

그들은 실제로 그 겨울을 웃으며 보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얘길 나누고,
서로를 위해 만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노인은 그 어린 소녀를 위해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소녀는 노인을 위해 크레용으로 초록색 나무와
햇빛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부인들을 그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많이 웃었다.

이윽고 여름이 오고 유월의 첫째날이 되었을 때
어린 소녀는 노인에게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담당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노인은 그곳에 없었다.
그리고 어린 소녀는 알았다.

그가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소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크레용과 종이를 꺼내 써 내려갔다.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이 필요해요.
난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3권 중에서-

노인과 소년

키작은 소년이 말했다. "전 이따금 숫가락을 떨어뜨려요." 키작은 노인이 말했다. "나도 그렇단다." 소년이
속삭이듯 말했다. "전 이따금 바지에 오줌을 싸요."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나랑 똑같구나" 소년이 말했다. "전 자주 울어요"
노인이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종종 운단다."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건 어른들이 나한테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저자 그 키작은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소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누가 이것을 발견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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