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마을 열린이야기

열린이야기

게시글 검색
가스펠 싱어 레나 마리아 클링밸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2088 추천수:21 112.168.96.71
2014-11-25 13:56:04
‘도대체 우리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서른네 시간의 진통, 안타까움으로 가슴을 죄던 사흘간의 기다림. 그 끝에 부모님은 그분들의 첫아기 레나 요한슨을 볼 수 있었다. 의료진의 말대로 아기에겐 정말… 팔이 없었다. 대신 그곳엔 작은 돌기가 흔적처럼 남아 있었고, 왼쪽 다리도 훌쩍 줄어든 것처럼 오른쪽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병원에선 그 정도의 중증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양육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친지들도 모두 침통한 분위기에서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신생아실 창문을 통해 입을 오물거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아기를 보는 순간, 부모님은 탄성을 질렀다. “와, 너무 예뻐요!” 생각보다 아기는 밝고 건강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분들은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 주셨다. “팔이 없어도 우리 아기에게 필요한 건 가족이요.” 아버지의 이 말은 내 삶을 축복으로 들어서게 했던 결정적인 것이었다.

“여보, 이것 좀 보세요. 레나가 엄지발가락을 빨고 있어요.” 정상 길이의 내 오른발은 보통 아기들의 손이 하는 기능을 대신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내 모습에 아주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갔지만, 사람들은 어머니께 늘 이렇게 질문하곤 했다. “이 아이 지능은 정상인가요?” “우유는 마실 수 있어요?” “정서가 불안정할 것 같은데….” 모두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다. 보통 아기 엄마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아기 이름이 뭔가요? 누굴 닮았나요?” 같은 질문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처음엔 그것이 어머니를 힘들게 했지만, 그분은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기에 사람들에게 당당히 이렇게 말했다. “우리 레나는 호기심 많고 똑똑한 아기랍니다. 오른발에 우윳병을 매달아 주면 혼자 잘 먹고, 팔이 없으니 오히려 몸을 뒤집는 것도 더 빠르지요.” 어머니의 그런 태도가 이후 내가 살아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세 살 때 내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짧은 왼쪽 다리에 의족을 끼우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리 길이가 같아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휠체어에 앉아 보낼 수도 있었던 내가, 앞으로 삶의 문제들에 더 적극적으로 부딪힐 수 있게 됨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걸음마였다. “자, 아빠가 뒤에서 이렇게 잡고 있으니 한번 걸어 보자.” 아버지는 손수 만든 벨트를 내 몸에 채우고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하나둘 하나둘… 어…” 몇 발자국 가는가 싶으면 곧 기우뚱하고 넘어지고, 아버지가 얼른 뒤에서 벨트를 잡아 주면 가족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레나가 꼭 낙하산에 매달린 것 같아. 하하하.” 쉽진 않았지만 가족들과 하나가 되어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은 내게 고통스런 훈련이 아니라 큰 축복이었다. 물론 연습하다 넘어져 생긴 상처로 내 턱은 성할 날이 없었지만, 나는 마침내 혼자 힘으로 걷고야 말았다.

두 발로 일어서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양 발을 이용해 그림 그리기며 오르간 연습, 바느질 등 정교한 동작들을 하나하나 익혀 나가는 것은, 조금 더디고 섬세함이 떨어지긴 해도 보통의 아이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두 팔이 없다는 사실을 한 번도 불편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런 경험들 덕분에, 세상의 모든 것은 아주 사소해 보일지라도 작은 노력들이 모여 이뤄지는 것임을 일찍이 알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난 참을성이 많고 용감했으며, 그런 내 뒤엔 언제나 우리 부모님이 계셨다. 부모님은 ‘뭐든 레나가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내가 태어난 후 어머닌 물리치료사 일을 그만두셨고, 경찰이었던 아버지는 교대근무로 쉬는 날이면 나에게만 매달렸다.

그분들의 삶은 온통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그 관심과 사랑 속에 절대로 동정심이나 과잉 보호는 포함되지 않았다. 어릴 적 내가 뛰어다니다 넘어져 엄마를 부르면, 엄마는 바로 달려와 일으켜 주는 대신, “레나, 저기 울타리까지 기어가 보렴. 거기에 기대면 일어설 수 있겠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울타리까지 기어가는 동안 뒤에서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던 그 안타까움을. 하나님께만 고백하는 나에 대한 염려와 그분들의 눈물, 그 골 깊은 사랑을.“아가야, 기분이 어떠니?” 처음 어머니가 나를 수영장에 데려갔을 때, 난 물 위에 누워 코르크 마개처럼 동동 떠다니며 환호했다. 본격적으로 수영을 배우게 된 건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난 후였지만, 물 속에선 움직임이 훨씬 부드러웠고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근육을 훈련할 수 있어 성장에도 좋았다.

도통 스포츠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내가, 그 후 꾸준히 연습을 거듭해 국가대표로 ’88 서울 장애인 올림픽에 나갔던 것은 나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일이다. 어쨌거나 당시 수영복을 입은 팔 없는 꼬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엄마, 왜 사람들이 날 쳐다봐요?” 혹여 내가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상처받지 않을까 어머닌 염려를 많이 했지만, 난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사실이 그저 기분 좋았다. “레나야, 넌 왜 팔이 없어?” “불편하지 않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반 친구들은 내 주위에 빙 둘러서서 신기한 듯 말을 걸어 왔다. “음… 난 팔이 없는 대신 이렇게… 발이 자유롭거든. 그러니까 내 손을 잡고 싶으면 발을 잡으면 돼. 반가워.”“야, 외다리!” 때로 짓궂은 남학생들이 나를 놀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땐 이렇게 말해 주면 효과 만점이었다.

“안녕, 양다리!”나에게도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엄마, 난 왜 친구가 없지?” “레나 친구 많잖아.” “아니, 그런 반 친구들 말고 단짝 친구 말야.” 또래끼리 그것도 사이좋게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이 내겐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시무룩해 있는 나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레나, 너에겐 아직 여러 가지 도움이 필요하단다. 같은 반 친구들은 힘이 없어서 너를 잘 도울 수 없어. 대신 레나의 모든 걸 다 아시는 하나님이 계시잖아. 그분은 언제나 너와 함께 하시고, 또 레나의 가장 좋은 친구란다.”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어도 왠지 엄마의 그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말대로 내 가장 좋은 친구가 늘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뒤를 돌아보면 부모님이 계셨고, 내 옆엔 사랑하는 남동생 올레와 친구들이 있었다. 내 삶은 물 흐르듯 매일매일 평안하고 사랑으로 따스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하든 난 행복했다. 스톡홀름 음대에 진학한 후 남편 비욘을 만난 것, 세계 곳곳을 다니며 노래로 나의 삶을 나누게 된 것 모두 넘치는 축복이다.

가끔 다음의 시편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더욱 감사한 마음이 밀려온다.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시편 139편)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가 아니라, 이미 그분의 완벽한 계획 안에서 지음 받은 귀한 존재인 것이다. 그분이 앞서 준비하신 모든 것 안에서 나는 한 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당신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외치고 싶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노래, 내 삶 전체를 통해.

가스펠 싱어 레나 마리아 클링밸 /가이드 포스트 2002년 1월 호 중에서-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