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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힘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1776 추천수:18 112.168.96.71
2014-11-25 13:45:44
1974년, 크리스마스 방학을 한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열 살 소년답게 신나는 방학을 보낼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낯선 사람이 다가오더니, 아버지를 위한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파티장 장식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를 아버지의 친구라고 생각한 나는 따라나섰다. 그가 우리 집안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감쪽같이 몰랐다. 그는 전에 집안 어른의 간병인이었는데, 술 때문에 해고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태우고 마이애미 북쪽의 외딴 곳으로 갔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송곳으로 내 가슴을 몇 차례 찔렀다. 그리고 차를 서쪽으로 몰더니, 차에서 내려 나를 숲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내 머리에 총을 쐈다.

다행히 총알이 눈 뒤를 관통해 오른쪽 정수리를 뚫는 바람에, 뇌 손상은 입지 않았다. 엿새 후 의식을 겨우 되찾았지만, 나는 총에 맞았던 일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길 한쪽에 쓰러져 있던 나를 지나가던 사람이 도와주었다고 했다. 2주일 후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나는 나를 데려갔던 사람의 인상착의를 말했다. 숙부가 그 말을 듣고 전에 일했던 간병인임을 기억해 냈다. 결국 그는 다른 혐의자들과 함께 불려왔다. 하지만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경찰에서는 그를 범인으로 지목할 물증을 찾아내지 못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나는 왼쪽 눈은 실명했지만, 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다시 학교에 다니며 정상적인 생활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 후 3년 간, 나는 심한 초조함을 안고 살아갔다. 밤이면 누군가 뒷문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무서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종종 부모님의 침실 바닥에서 웅크린 채 자기도 했다. 그러다 열세 살이 되면서 모든 게 변했다. 어느 날 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불현듯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사랑이 나를 기적적으로 살아 있게 했으며, 그것이 내 삶을 공고히 하는 기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나 분노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예쁜 두 딸이 태어났다. 1996년 9월, 경찰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과거 내가 다쳤을 때 사건 조사를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일흔 일곱 살의 범인이 드디어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녹내장으로 실명했고 건강도 나쁜데, 돌봐줄 가족이나 친지도 없이 북 마이애미비치의 양로원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를 찾아갔다. 나를 보자, 그는 그런 짓을 저질러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이미 용서했다고 말했다. 그 후 나는 여러 번 그를 찾아갔다. 나의 아내와 딸들을 소개시켜 줬고, 그는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며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내가 찾아가면 그는 늘 반가워했다. 우정이 고독을 덜어주고, 22년 만에 안도감을 주는 듯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끔찍한 비극의 희생자로 볼 테지만, 나는 나를 기적의 '수혜자'로 여긴다. 내가 살아 있고, 정신 장애가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보충하고도 남는다. 내겐 사랑하는 아내와 아름다운 가족이 있다. 나는 지금껏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장래성과 기회를 부여받으며 살아왔다.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어떻게 그를 용서했느냐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보면, 그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세월 그를 미워하거나 복수심을 키우며 살아왔다면, 나는 현재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 속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내가. -크리스 캐리어/쓰러지지 않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중에서-

해리 홀트

1955년 가을 미국 오레곤주 유게네라는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어느날 마을회관에서 종교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났다.그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돌보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그 영화를 보았던 한 농부 부부의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들은 그 고아들이 불쌍하기는 하나 가난한 농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마음 아픈 영화의 장면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이들 부부는 이 일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다.그것은 농장의 일부를 팔아 직접 한국에 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오는 것이었다.이 사실이 마을 신문에 기사로 나가자 여기저기서 이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고 어떤 가정에서는 고아를 양자로 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이 농부는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게 됐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홀트 양자회의 주인공인 해리 홀트 부부이다.우리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소멸치 않고(데살로니가전서 5:19) 순종할 때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될 수 있다.

-작은창/국민일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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