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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백신(4) 회개(누가복음13: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095 추천수:6 220.120.123.244
2021-02-28 17:45:08

마음의 백신(4) 회개

누가복음13:5

 

우리 나라도 코로나 19 예방을 위한 백신 예방 접종을 시작하였습니다. 코로나 19와 전쟁에서 중요한 무기를 얻은 것입니다. 거리두기 손씻기 마스크 쓰기같은 것이 돌로 싸우는 것이었다면 백신은 대포로 싸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백신에는 홍역, 볼거리, 풍진, 천연두 백신처럼 한 번 맞으면 오래가는 약독화 생백신이 있고 독감, A형 간염과 같이 면역 받응 기간이 짧은 증식이 불가능하도록 죽인 병원체를 예방접종하는 사백신이 있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전통적인 방식의 백신이고 화이자와 모더나에서 개발한 코로나 19 백신은 짧은 시간에 개발한 유전공학 백신이라고 합니다. 예방접종으로 인한 감염 우려는 전혀 없지만 효능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고 합니다. 어떻든 인류의 평균 수명을 크게 늘린 가장 성공적인 의약품은 백신일 것입니다. 육신이 건강한 삶을 위해 백신을 예방접종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데도 마음의 백신이 필요합니다. 2월 들어 마음의 백신에 대한 말씀을 들였습니다. 첫 번째 죽음의 공포와 죽음에서 이길 수 있는 백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한 번 죽게 되는데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는데 예수님을 구제주로 믿는 우리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 땅 살면서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음의 백신은 예수님 안에서 자족하는 마음의 백신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지난 주 말씀을 나누었는데 우리는 평생 인간관계를 가지고 삽니다. 인간관계를 행복하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의 백신 한 가지를 들라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의 백신을 마음에 맞아야 어떤 경우도 행복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교하는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절대적 사랑,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무조건적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함께 사역하는 사랑의 백신을 마음에 맞으면 인간관계는 행복하고 건강하게 가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2월 마지막 주일로 마음을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하는 백신 네 번째입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지난 주 신문에 보니까 유명 축구 선수가 초등학교 시절 성추행 했느냐 안했느냐고 싸우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살고 들킨 죄인과 들키지 않은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의식 즉 일말의 양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부 정신질환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실수나 죄를 저지를 때 후회, 쑥스러움, 수치심, 양심의 가책, 죄의식 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추행이나 도적질, 거짓말, 간음, 살인, 불효 등의 행위를 저질러 놓고 마음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식을 마음 속에 깊이 꽁꽁 숨겨 놓고 없애려고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여 용서받지 못하면 자신을 평생 죄의식의 감옥에 가두고 자신을 고문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치유받지 못한 죄의식은 마음을 해치는 병원체가 되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마음의 병에 걸리지 않게하는 데 필요한 것이 회개라는 백신입니다. 회개(悔改)는 한자어로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를 뜻하는 통칭적 단어 “회심(메타노에오)”은 “마음이나 목적을 바꾸다. 뉘우치다. 개혁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마음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죄와 사망을 향해 달려가던 죄인이 의와 생명 그리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성적 요소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정서적 요소로 자신이 지은 죄와 관련해 발생하는 슬픔, 수치, 회환, 근심 등과 같은 통회가 있어야 하며, 의지적 요소로 다시는 더럽고 추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행동적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회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단회적인 회개와 반복적 회개입니다. 단회적 회개는 칭의와 관련되어 있고 반복적 회개는 성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단회적 회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 하는 최초의 회개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과거의 지은 원죄와 자범죄를 다 회개하고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회심의 회개입니다. 원죄가 해결되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주는 회개이고, 신분이 바뀌는 회개입니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는 사는 회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는 지성적 요소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정서적 요소, 완전히 새로운 순종을 결심하고 노력하면서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요소가 포함된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을 십자가에서 지셨다고 믿는 믿음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스스로 회개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회개의 은혜를 주셔야만 회개할 수 있는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하면 우리는 지옥에 가는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 회개의 백신은 생백신처럼 한 번 맞으면 다시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 회개하면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반복적 회개는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회개입니다. 원죄가 해결되었다고 우리의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자범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반복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 회개는 성화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를 바꾸게 하는 회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죄를 사하여 주옵서”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지은 죄를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백신은 사백신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맞는 마음의 백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에 어떤 회개의 백신을 맞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망하지 않는 회개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다시한 번 크게 읽겠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똑같은 방식 혹은 역시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망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죄가 없음을 과시하려 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회사도, 국가 망한다고 말씀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도 죄 때문에 망했고, 가인도 동생 아벨을 죽인 죄 때문에 망했고, 바벨탑도 죄 때문에 무너졌고, 소돔과 고모라도 죄 때문에 망했고, 노아 시대 때도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죄 때문에 망했고, 유다도 죄 때문에 망했고, 북 이스라엘 나라도, 남 유다 나라도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성경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공동체나 다 죄 때문에 망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망하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망하지 않고 흥하고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죄로 인해 죽음도 오고, 불행도 오고, 전쟁도 오고, 갈등도 오고, 불안도 오고, 슬픔과 고통도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첫 번째 말씀이 짧은 회개의 메시지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라고 했고,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회개해야 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고쳐야 할 실수나 교육이 부족해서 저지르는 잘못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연약성, 결핍, 스트레스, 압박감 정도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애써 죄를 말하지 않으려 하고 심각성을 고의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 경향성이라고 말합니다. 드라마에서 애인하나 두고 사는 것 무엇이 문제냐고 미화시킵니다. 죄가 재미를 주고, 죄가 밥먹여 준다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폭력과 간음, 거짓을 가미시켜야 재미가 있다고 그저 인생을 즐기고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도 죄 때문이고, 인간에게 죽음과 고통, 불행, 질병, 근심이 찾아 온 것도 근본적으로 죄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 죄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음란, 도둑질, 살인․간음․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 등 이 모든 것들이 마음 속에 있는 죄입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사람의 유전자는 이기적 유전자로 자신의 생명보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이 죄가 결국 인간을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며 회개해야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살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백신을 맞아야 마음이 살아납니다. 회개해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말씀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박혔습니다. “김필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너 회개하지 않으면 너가 가장이 너희 가정도, 너가 잘되기를 바라는 너의 자녀들도, 너가 목회하는 너의 교회도, 너가 몸담고 있는 너의 나라도 망한다” 조금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돈 들어가는 것 아닙니다. 물론 회개에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죄를 좋아하는 마음, 고집과 교만, 자존심, 불신과 불신앙,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 체면, 무감각, 정직하지 못한 마음, 진지함 결핍, 세상에 대한 사랑, 주제 넘는 생각, 미루기를 좋아하는 나태함 등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병들지 않고 영혼이 살고 인생이 행복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보십시오. 효심도 지극했고 키도 헌칠하고 잘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삼권을 가진 왕입니다. 무엇 부족함 없는 망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왕족으로 후손들이 대대손손 사울의 혜택을 받을 가정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그의 가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 나라가 쳐들어와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예배드리기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제사를 드려 죄를 범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무엘이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질문하며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때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자존심 내려놓고 모든 교만 내려놓고 회개하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변명하고 자신의 제사행위를 합리화 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무엘이 늦게 왔다는 것입니다. 세째는 블레셋 사람들이 믹마스에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그는 계속해서 범죄합니다. 죄의 중독에 걸립니다. 아말렉과 싸움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했는데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 진 것, 어린양 모든 좋은 남겨 놓고 또 자신이 정당하다고 합리화합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났다고 말씀해도 오히려 고의적으로 불순종합니다.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살기가 마음에 가득차 있습니다. 점을 칩니다. 결국 그는 회개하지 못하고 불안과 질투, 저주와 분노 속에 평생 살다가 자신 뿐 아니라 가문이 망해 버렸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가 우리의 온갖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는 마음이 병들지 않는 백신 우리 인생이 망하지 않는 백신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금 망하지 않아도 죽음 후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감으로 망해버립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있지 않다고 그 죄를 회개해야 망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이라(벧전2:24)”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고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될 것입니다(사1:18)

 

2. 우리는 불행한 사건을 보면서 회개의 백신을 맞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건입니까?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빌라도가 성전에 제사드리려고 나온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사건입니다.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군이 이렇게 항거하는 유대인을 죽이는 것이 비일비재했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이기도 했답니다. 권력에 의한 인위적인 불행한 사건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두어 사람이라고 나와 있는데 아마 시대를 분별하고 화해하라는 설교를 들은 바리새인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그것을 산헤드리 공회에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올무에 매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갈릴리 사람 몇 명만 그런 불행을 당한 것은 그들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 그런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죄가 없어 심판을 받기 않았다고 잘난체 하기 위해 그랬을 것입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죄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상대를 정죄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오늘날 법률주의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조그만 법을 어기면 그것을 올무로 삼아 상대를 제거합니다.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합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데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의 대형 참사가 일어나는데는 29가지 경미한 부상 사고가 있었고 그 앞에는 300건의 인명 피해가 없는 사고 징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1:29:300 법칙입니다. 단순하게 인과응보적으로 해석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이 그런 불행을 당한 것은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그들이 죄가 더 많아서 그런 불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불행한 사건을 보면서 인과응보적으로 단정하면서 그들의 죄를 정죄하기 보다는 그것을 교훈 삼아 너희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가 지금은 망하고 있지 않지만, 너희도 그들과 같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재앙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경고와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자연적인 재해로 불행한 사건이 벌어진 것을 예로 들어 말씀합니다. 실로암 망대는 기혼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를 지키기 위해 빌라도가 성전 자금을 유용하여 세워 놓은 망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모든 재난을 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로 본 것입니다(요9:2). 그 사건을 통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교훈받고 너희도 늦기 전에 기회 있을 때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사비라 사건이나, 아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그런 불행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처럼 재앙을 당했는데도 더욱 마음이 강퍅해지면 비참한 꼴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우연처럼 보이는 자연적인 재해와 사람들에 의해 발생하는 인위적인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재해와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그럴 때 바리새인들처럼, 욥의 친구들처럼 선한 사람 상급받고 악한 사람 벌받는다는 인과응보론 적으로 상대를 대하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상대를 정죄하며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일반법칙은 인과응보가 작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그렇게 기계적으로 섭리하고 통치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는 인관응보적 고난도 있지만, 훈계적 고난, 계시적 고난, 시험적 고난, 미혹적 고난, 일시적 고난, 영광을 위한 신비적 고난 등 갖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 고난을 받고 있는 당사자라면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면 회개하면 되고, 요셉처럼 훈련을 위해 고난을 받고 있다면 그 훈련을 잘 받아 인물이 되면 됩니다. 바울처럼 겸손을 위한 질병이라면 그 질병 붙들고 평생 겸손하게 하나님 의지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되고,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면 더욱 믿음으로 간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됩니다. 타인의 고난이라면 그것을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아 회개하면 됩니다. 코로나 19를 상황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보며 무슨 죄 때문에 일어났다고 억지 부리고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하면서 우리 죄를 회개할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모든 재앙은 집단적, 개인적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잠시 피한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재판을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지금 나는 안전하다고 방심하면 안됩니다. 더디지만 확실한 형벌의 집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요엘2:13)” 회개를 미루면 위험합니다. 파멸이 오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연기된 형 집행으로 하나님의 인내를 남용하면 안 됩니다.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6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렇게 망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고 3년 기다렸는데 무화과가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지기에 이르되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1년만 기회를 주라고 사정하는 내용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포기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 항구적인 생백신을 맞아 원죄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본성적인 부패로 인하여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주 죄에 빠지다 보면 무각해져 버립니다. 그럴 때 코로나 19같은 큰 사건이 날 때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망해가는 사람들을 볼 때 비난만 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19 백신을 맞게 되는데 사람들은 맞을 수도 있고 안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입니다. 코로나 19로 고통받으면 심지어는 죽는 사람을 보며 그 백신 맞아야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는 무관하고 맞으면 부작용이 이다고 생각하면 안맞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두 강도도 같이 달렸습니다. 한 강도는 회개하고 천국에 갔고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하면 지옥에 갔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도 십자가 상의 사건을 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부인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인신매매 했습니다. 다 죄를 저질렀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후회는 하였지만 진정한 회개는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라고 양심의 가책으로 후회는 하였지만 통회 자복하며 인생이 방향을 바꾸어 주님께 돌아오지 않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해하지 못할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따지고 불행한 사람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불행한 사건을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의 백신을 맞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3. 우리는 회개의 백신을 맞으면서 백신의 부작용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몸이 병들지 않도록 백신을 맞지만 모든 백신에는 크고 작은 부작용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맞는 회개의 백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는 목적은 첫째는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둘째는 생명과 구원에 이르게 하며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 셋째는 그리스도의 의를 성도들의 것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넷째는 성화되어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회개하면 용서받고 회개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고 회개하면 살아납니다. 그러나 회개한다고 흔적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백신인 회개의 백신도 부작용이 있습니다. 모든 죄에는 형벌과 징계가 따르는데 회개하면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어 내리는 형벌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여 징계하듯이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징계를 통해 더욱 성숙하고 성결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정의를 보호하고, 죄를 범하는 것을 억제하며, 죄의 심각성을 깨닫도록, 겸손을 가르쳐주고, 거룩한 삶을 위해 때때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방임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징계합니다. 계속적으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끊임없는 악과 고통을 경험하며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 안게 하기 위해, 죄의 포로가 되어 미움과 분노와 같은 정신적 고통, 그로 인한 불안과 뼈아픈 고통을 계속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8)”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였습니다. 남편을 죽이게 하는 살인을 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단 선지자 책망합니다. 그때 다윗은 왕이었지만 자신의 극악무도함을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그 내용이 시편 51편에 그 당시 그의 회개에 대한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통회 자복하면서 회개하는 다윗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징계는 거두지 않았습니다. 칼이 다윗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눈 앞에서 백주에 다윗 아내가 겁탈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애에 그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용서는 해주셨지만 하나님은 징계까지 거두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가 그래도 자신의 눈 앞에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삼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울처럼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징계가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방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하지 못하게 합니다. 다시는 과거의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살아계심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였습니다. “나이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메시아 언약을 성취할 성군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겪었던 징계를 일부러 받기 위해 불륜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징계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불행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는데 10명의 정탐꾼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다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빕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주었지만, 그들을 징계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하다가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회개하고 용서받는다고 징계까지 하나님이 다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 백신이 좋다고 하지만 마구 백신을 맞으면 안 되듯이 회개의 백신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회개의 백신을 맞기 위해 죄를 즐기며 반복적으로 지어서는 안 됩니다. 벽에 박을 못을 빼면 못을 없어질 수 있지만, 흔적은 남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백신을 맞으면서 백신의 부작용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죄로부터 자유함 받는 회개의 백신을 맞았다면 이제는 자범죄 때문에 마구마구 회개의 백신을 맞으려고 하지 말고 성령 충만하여 회개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죄로부터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마음의 백신은 회개의 백신입니다. 그 회개의 백신은 단회적 회개의 백신이 있고 반복적인 회개의 백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구제주로 믿은 회개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지는 죄가 있다면 뭐 그것쯤 괜찮겠지 하며 회개의 기회를 잃지 말고 죄에 민감성을 가지고, 화를 쌓아 두지 말고 반복적인 회개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회개의 백신의 부작용을 망각하며 늘 회개의 백신만 맞으려고 하지 말고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는 인생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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