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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평가를 고려하는 삶(마25:21-3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273 추천수:5 112.168.96.218
2018-12-30 14:59:08

 

마지막 평가를 고려하는 삶

마태복음 25:21-30

 

지난 수능시험이 끝나고 참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 10명이 수능시험을 마치고 강릉의 한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3명이 숨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베트남에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간 학생이 물에 빠져 숨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세계인 중에서 지금 얼마나 죽고 있는가를 알려 주는 사망시계(world death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지금 몇 명이 죽고 있는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연간 사망한 사람은 56,000,000명이라고 합니다. 1년이면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매일 153,424명이 죽습니다. 기흥구 인구가 32만명이니까 반절 정도가 매일 살아지는 것입니다. 매시간 6,392명, 매분 106명, 매초 1.8명이 사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오늘은 2018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인생도 언젠가 이렇게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날까요? 그 후 또 다른 세계는 없을까요? 죽음에 대응하는 인간의 유형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 유형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 살아 있을 때 “먹고 즐기고 놀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략 4세부터 시간을 분간할 줄 알게 되면서 죽음의식도 생겨 죽음으로부터 초월하지는 못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죽음 대한 불안과 두려움, 죽음 앞에서의 상실과 고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유형입니다. 불가지론자들로 내세에 대하여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품지 않고 죽음 앞에 진지한 태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인정단계 앞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죽음 이후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유형입니다. 우리같은 신앙인들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고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과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 후에는 지옥과 천국이 있는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최종 지옥인 불못에 던져질 것이고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50).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인간이 이 땅에서 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애벌레가 고치에서 부화하여 나비가 되듯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과 영벌의 관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죽음도 눈물도, 질병도, 고통도, 걱정도 없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40)”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오늘 온 가족이 함께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초등학교 어린이들 그럴리는 없겠지만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죽어 천국에서 눈을 떴는데 하나님께서 너 어떻게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왔으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어여뻐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제주로 믿어 가는 나라입니다. 연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악하고 게으른 종(18, 26)

오늘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 셋에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여기서 달란트란 당시 화폐 단위로 금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까 금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월급 정도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30년 일하니까 평생 버는 돈과 비슷한 돈입니다. 어떤 종에게는 1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2달란트, 5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와서 그것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계산을 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인의 것을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를 말씀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이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것을 활용하라고 주었는데 주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돈을 맡기 주인을 잘 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굳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완고하고 거칠다는 말입니다. 눅19:21절에는 엄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인은 노동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완고한 수전노같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을 맡겼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패하면 엄하게 책망할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혹 장사하여 실패하면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종은 자신의 상상으로 주인을 판단하고 정죄해 버린 것입니다. 누가 판단해야 할 분인지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향하여 주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왜 악합니까? 남의 것 훔친 것도 아니고 그 돈을 가지고 술먹고 오락하고 노름한 것도 아니데 말입니다.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도둑맞지 않기 위해 가장 안전한 보관 방법으로 그 돈을 가지고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악합니까?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악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악한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바로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하면서

"안심하세요. 지옥은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즐기세요."라고 마음에 표어를 걸어놓고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주어진 것으로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라고 말씀합니다. 조금 성경을 읽었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공평한 하나님, 하나님을 폭군,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고,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는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만 집착하며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소득을 탐하는 파렴치한 인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남의 것을 빼앗아 치부하는 자로 본 것입니다. ‘헤치지’는 당시 타작 마당에 곡식을 늘어놓고 말린 후에 키를 헤쳐서 곡식을 모으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타작을 안 하고도 모으는 남의 것을 빼앗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물을 받아먹고 조금만 잘못하면 벌을 내리는 포악한 파렴치 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아 영안이 열리지 않고 영적 세계를 모르니까 그런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모른 것입니다. 주인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악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대한 게으름을 만들고 이것에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적었기 때문에 불만이 가득 찬 것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들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의 영, 질투의 영의 노예가 되어 버리니까 바로 보지 못합니다. 예일대학의 피터 살로비라는 교수님이 범죄를 연구한 결과, 사람들이 짓는 범죄의 20%가 시기 질투로 인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았을 때 이런 눈으로 보면 매사 안경을 쓰고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특성과 역할에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혜로 선물로 주었는데 양적 기준으로 비교하여 차별대우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 다 같이 지휘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방에서 소총을 들고 싸우는 사람도 있고, 후방에서 포를 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배치받는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배치시켜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주신 돈을 가지고 당신 것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빈정대고 있습니다. 우리도 회사에서 교회에서 일을 할 때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은 어떤 분입니까?

① 은혜로 엄청난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한 달란트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벌어야 가질 수 있는 돈입니다. 달란트는 화폐도 되지만 각 개인에게 부여한 특유의 재능, 성격, 지성, 감성, 의지, 체격, 환경 등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선물을 말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10억원을 주고 만는 컴퓨터보다 좋은 성능들이 있습니다. 눈과 심장과 허파와 각 기관을 보십시오. 100억원을 주고도 가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제자들에게 맡긴 복음전함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복음이 들어가면 강도가 성자로 변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가난한 나라가 부한 나라로 변합니다.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면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옵니다. 증오가 변하여 용서와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가 물러갑니다. 참 자유를 얻게 만들어 줍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이 달란트입니다. 이것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각 개인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적합하게 주신 것입니다(15). 편애나 차별이 아니라 각기 재능대로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고유의 능력과 재능이 다 다른 것을 다른 단위로 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리도전도 13장에 나오는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은사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지혜로 나누어 주시고 종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관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계발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계발하면 2달란트, 다섯 달란트, 10달란트, 60달란트, 100달란트로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신 분의 뜻과 계획에 맞게 살아야 할 책임은 있지만 하나님은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② 종을 친구처럼 선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종을 식탁에 참여하게 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③ 더 많은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남긴 달란트를 하나님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다시 줍니다. 큰 보상을 해 주십니다.

 

결국,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① 무익한 종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준 것은 땅에 묻어 놓고 자기 것만 가지고 일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 이익만 위해 일하다 죽으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② 악한 종이 되어 결국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③ 게으른 종이 되어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됩니다(28). 한 달라트 받은 자는 주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주인은 재능대로 맡기셨습니다(14,15).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주인입니다. 주인은 기대하고 맡기었습니다. 주인의 그의 재능을 잘 알고 그 재능에 맡는 일과 양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시간을 기회로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낭비해 버렸습니다. 비교하고 원망만 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에 무관심하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바람직하지 않는 상태 정도가 아닙니다. 죄악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일곱 가지 대표적인 큰 죄악을 말할 때 게으름을 포함 시켰습니다. 게으름은 성격문제가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악입니다. 본래 의미는 "돌보지 않음"입니다. 무책임하고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엘리 제사장처럼 자녀를 방치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명감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사회신학자 Harvey Cox는 "인간의 원죄 출발은 게으름(나태함)에서부터 왔다"고 지적합니다. 게으름은 성격이나 기질상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입니다. 결국, 주어진 것도 스스로 빼앗겨 버립니다. 결국, 이들은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받았지만 자기 것만 추구하고 살다가 죽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한 음악을 남긴 바흐는 "나는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할 의무를 다한 것뿐이오. 누구든 나처럼 부지런하게 살면 나와 같은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에 한 사람이 지미카터 입니다. 2002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사랑의 집짓기 해비타트운동으로 신앙의 귀감이 되는 인물입니다. 이분이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부대 배치를 받았을 때 제독이 "지미카터 자네는 생도 시절에 성적이 어느 정도 되었나?"라고 물었답니다. 자랑스럽게 "예. 820명 중에 39 등 이었습니다." 자신을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제독은 " 여보게 왜 자네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텐데, 20등도 할 수 있고 10등도 할 수 있었는데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 후 그는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던가?'를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모든 일이든 최선을 다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퇴직 이후에 최선을 다해 살다보니까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을 믿고 소명을 받고 청지기로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2. 착하고 충성된 종(16,17)

돌아온 주인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잘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맡겨준 일을 잘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착한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달란트 맡은 자는 26절에 악한 종과는 정반대의 평가입니다. 상식적이나 윤리 도덕 규범이나 법에 의해 선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인의 의도를 알아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고 주의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위대하고 화려한 일을 했더라도 그것은 선한 일이 아닙니다. 주인을 믿고 주인의 뜻에 맞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배반한 게으른 종이 아니라 충성된 종이라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달란트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합니까?

①전적으로 주인을 신뢰하고 주인의 의도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16절 17절을 보십시오. “바로 가서”(16절) 또 “그와 같이하여”(17절)라고 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전적 신뢰가 바탕이 되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지금 자기가 받은 달란트가 누구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분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서 받은바 그것을 동원해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헌신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②충성스럽게 맡은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주인이 없을 때도 주인이 있는 것처럼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아야 합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잘 될 때나 잘못될 때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충성을 말할 때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종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③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가지고 와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합니다. 주인이 주신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주인을 향하여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어느날 주인 앞에 가져갈 것을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 일한 것입니다. 주인을 향하여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착하게 사는 것이고 믿음으로 충성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종으로서 종의 자리를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망각할 때 반역자가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관련시켜 살아가는 것입니다.

④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가치 없게 여지기 않는 것입니다.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 가치 없게 보지 않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직장, 내 교회, 내 나라, 내 남편, 내 아내 가치 없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 중에는 교회를 다니면서 늘 다른 교회를 부러워하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오랫동안 하다보니까 실증이 나서 농장은 팔고 좋은 농장을 구입하기 위해 부동산에 내 놓았답니다. 며칠 후 다른 농장을 사기 위해 광고를 보았는데 신문에 아주 멋진 농장이 광고가 나왔답니다. 이 농장은 좋은 위치에 있고, 넓고 기름진 땅 위에 있습니다. 좋은 농가가 있고, 큰 곡식 창고가 있고, 그리고 최신식 농기구를 갖추고 있는 아름다운 농장입니다. 이 농장을 구입하실 분은 연락주세요. 그것을 살려고 주소를 보니 자기 농장이더라는 것입니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데 내게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 내와 함께 사는 아내와 남편 아이들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다섯달란트 받은 자는 작은 것에 충성하였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착하고 충성된 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라고 합니다(21,23). 두 달란트 받는 사람도 동일합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되어 존귀와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종의 자리가 아니라 아들의 자리에서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②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십니다.

이 땅 사는 날 동안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맡김받는 복을 받습니다. 작은 일이 자기에게 맡겨졌을 때 충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전체를 움직이는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싶어하고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기 싫어합니다. 주인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이 되는 일만 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해도 주인에게 유익이 되면 그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잠 20:6)"

충성하기는 충성하되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하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람 보이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죽는 것은 간이나 위, 심장 같은 보이지 않는 곳이 병들므로 죽는 것입니다. 손발 다친다고 쉽게 죽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많을 때 가정과 교회에 세상은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피자헛’으로 성공을 거둔 성신제씨는 <창업자금 칠만 이천원> 책에 이런 내용을 써 놓았습니다. “수많은 아르바이트 학생을 써봤다. 이 중에는 나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꺼야, 공인회계사가 될거야, 이까짓 아르바이트는 용돈벌이니까 대충 시간만 때우다 가자면서 건성건성 일하는 학생이 아주 많았다. 그들 중에서 단 한 명의 디자이너, 단 한 명의 공인회계사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로 접시 닦는 일을 하더라도 여기에 미치는 사람이 본업에 돌아가서도 그 일에 미치고 결국 성공하게 된다.”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억지로 한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당신의 목구멍은 평생 포도청으로 남아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설 것을 믿고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간신열전>에 보면 역사상 간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주 밝고, 생각이 민첩하고 눈치가 빠르다. 마음 씀씀이가 여간 아니며,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하다. 또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주선하고, 기꺼이 도박(모험)을 하며, 말을 교묘하게 잘한다." 간신들은 혼자의 힘만으로 부족할 때는 "은혜를 베풀어 지지를 얻는다든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해 패거리를 긁어모으고 살인으로 권위를 세워 존경과 두려움을 얻는 치밀한 수법까지 병용한다. 또 상대를 제거할 때는 이간질을 밥 먹듯 하고 사람을 해치며 겉으로는 치켜세우지만 속으로는 끌어내리고 일부러 사건을 일으켜 남의 손으로 상대를 죽이고 잘못을 폭로하고 못난 점을 떠벌리며 기회를 엿보아 사람을 조종하기도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간신의 뒤에는 예외 없이 혼군(어리석은 임금)이 있다고 합니다. 왕조의 창업기엔 간신이 드물다가 수성기로 접어들면서 간신이 급증하는 것입니다. 창업 군주들은 대개 맨주먹으로 태어나 고생고생하면서 성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있지만, 수성기 이후의 군주들은 부귀영화 속에서 자라 말 한마디면 무엇이든 가능한 지엄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간신들이 파고들 허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는 지도자들은 재능만으로 뽑아서는 안되고 잘 따른다고 기용해서는 안되고 가깝다고 뽑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충성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는 사람의 조건을 한 가지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카네기가 후계자를 지명할 때 탁월한 중역 중에서 후계자를 뽑지 않고 쉬브라고 하는 무명의 인물을 택했습니다. 쉬브는 학력이라고 해야 국졸 정도이며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카네기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충성스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쉬브는 카네기의 회사에 입사할 때 청소부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원만 쓰는 것이 아니라 공장 전체를 구석구석까지 쓸었습니다. 평상시의 이러한 근무태도를 보고 간부들은 그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해 주었고, 직원이 되어서도 남달리 충성하므로 그는 사무직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물샐틈없는 충직함이 인정되어 일약 사장의 비서실에 근무하였습니다. 그 후 카네기가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가 있었으며, 그의 손에는 늘 메모지와 펜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가 공장의 확장과 생산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느라고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가려고 밖에 나와보니 그때까지 쉬브 씨는 카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네기는 놀라며 "쉬브!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쉬브는 조용히 웃으면서 "사장님에서 저를 언제 부르실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당연한 듯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25:21)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계2: 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눅19 : 17)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앞으로도 보다 큰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이번 주일을 지나면 2018년은 우리 생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하나님 앞에 가면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언제가 다 끝나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하게 살았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실 때 시작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각각 재능에 따라 맡기 달란트 비유도 하셨지만 포도원 일꾼의 비유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오후 5시에 와서 성실하게 일한 품꾼에게도 12시나 3시에 온 사람과 똑같이 품삯을 주는 것을 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는 것입니다. 늦게 예수 믿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 못 살았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의 시간을 주시고 있습니다. 연말에 다시 한번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많은 경건 서적을 쓴 토저는 “나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서 결산해야 하네. 내가 한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왜 그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말일세”라고 말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악한 종으로 살겠습니까? 착한 종으로 살겠습니까?

주어진 시간, 주어진 재능,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충성된 종으로 살겠습니까? 불충성한 종으로 살겠습니까?

주어진 인생 게으른 종으로 살겠습니까? 부지런한 종으로 살겠습니까?

주어진 것을 통해 유익한 종으로 살겠습니까? 무익한 종으로 살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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