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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다리(12) 희망을 주시고 마침내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창세기12:1-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249 추천수:5 112.168.96.218
2018-09-16 08:26:23

 

희망의 사다리(12) 희망을 주시고 마침내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12:1-4(구14쪽)

 

이번 주에도 제가 <잡초>라는 쉬운 시 한 편을 썼습니다. 다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이 이름을 모르니까 그냥 잡초라고 불러주는 들풀에 대한 시입니다. 화려하고 잘 생긴 꽃들은 태풍이 불면 꺾이지만 잡초는 태풍에 뽑히지 않습니다

“모진/ 태풍 밀려와도/ 잡초는 뽑히지 않고// 긴긴/ 가뭄 목조여도/ 잡초는 질식하지 않으며// 아무리/농부가 귀찮아해도/잡초는 토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름/붙여주는 이 없어도/잡초는 이름을 잃지 않고// 흔하다고/보아주지 않아도/잡초는 억울해하지 않으며// 아무리/

짓밟아도/ 잡초는 씨앗을 맹렬하게 퍼뜨립니다.// 모를 뿐/ 저마다 가치가 있어/ 잡초는 뿌리로 흙의 숨통을 열고// 병든 땅에/생명을 부어/ 잡초는 죽어서도 땅을 살리며// 아무리/태풍이 강력해도/잡초는 뿌리를 내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쩌면 역사 속에서 잡초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입니다. 겨우 가족이나 친구 몇이 알아줄 뿐이고 어디 역사책 한 모퉁이에도 이름이 적힐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라 주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태풍 가운데도 꺾이지 않게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잡초같은 우리 인생이지만 우리를 통하여 메마른 이 땅의 숨통을 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진 태풍에도 뽑히지 않게 하시고 긴긴 가뭄에 질식하지 않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그 희망의 이루어 가실 하나님이 십니다. 제가 매주 주보에 금주의 외울 말씀 한 구절을 올려놓습니다. 이번 주 외울 말씀이 무엇인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3-14)”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누구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행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희망을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희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희망과 아래에서 만든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희망과 자신이 만든 희망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주신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을 누가 이루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희망을 심어주시고 그 희망을 품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 각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그 희망을 마침내 하나님이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1.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희망을 주시고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세 분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인류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입니다. 둘째는 홍수로 모든 인류가 다 죽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와 그 가족입니다. 셋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수24:2).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름은 데라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부인인 밀가는 달 신의 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은 달 신을 숭배하는 지역입니다. 그는 셈족의 후예였지만 우상을 섬겼고 탈무드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성경에 기록된 만한 이름이 아니라 잡초 같은 집안에서 아브라함은 태어났습니다. 희망의 사다리가 끊긴 집안입니다. 그 땅에서 그냥 이름 없는 잡초처럼 우상 섬기며 아버지가 우상 장사였다면 우상이나 팔다 죽을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아브라함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우리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잡초같은 우리 인생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희망의 사다리가 사라진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선택받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람은 비천하고 쓰레기장 같은 더러운 곳에 들어가길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죄 많고 속 좁은 우리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13:5)”.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사44:21)”. “너는 내 아들이라(시2:7)”

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볼품없고, 문제 많고, 이기적이고 교만한 내 안에 거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질병의 자리에도, 부도의 자리에도, 억울함을 당하는 자리에도, 홀로 신음하는 자리에도, 실수의 자리에도 결코,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희망적입니까?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어떤 희망을 주십니까? 2절 3절을 보십시오. 요약하면 세 가지의 희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상속자(후손, 씨, 아들)와 땅(기업)을 주시고 복의 근원(유업의 축복, 관계의 축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첫째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75세 나이에 지금 아들 한 명도 없습니다. 땅 한 평도 없습니다. 그런데 큰 민족을 이루는 씨앗이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름 없는 자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유명케 하여 그 이름이 길이 회자(膾炙)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열국의 아비(17:4, 5), 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5, 6) 하나님의 벗(약 2:23)으로 살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로서,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 단지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희망은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현실성이 없는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비현실적이며 허황한 꿈일 수도 있습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아브라함에게 부어주신 희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희망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골에서 양을 기르며 사는 목동 요셉에게 신분 상승에 대한 희망의 사다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형들이 아버지가 자신을 섬길 만한 지위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희망의 사다리를 붙들었습니다.

목동인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살인하고 도망가 장인 집에서 처가살이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희망을 주었습니다. 들풀과 같은 어부인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찾아가 사람 낚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자식도 없고, 농사지을 땅 한 평도 없이 남의 집 이삭을 주워 먹고 살아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모시는 룻에게 하나님의 보아스를 통해 희망을 주었습니다. 욥은 동방의 큰 부자였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10명의 자녀를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돈독했던 신앙도 잃고 회의적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절망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도 않았으면 그에게 희망을 주시고 그를 회복시켰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희망의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을 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 사회를 떠받쳐온 “상승의 사다리”가 고장이 나 그 작동을 멈추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전 근대화 시대에는 “하면 된다”는 생각이 통했지만 이제는 노력해도 가난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지배하는 새로운 신분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육이 희망의 사다리가 되었는데 이제는 교육도 희망의 사다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하방에서 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은 끝났고 한 해 학비가 많게는 2천만 원에 달하는 로스쿨을 다녀야 법조인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득 차이가 교육 격차로 이어지고, 부의 대물림으로 귀결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성인 70%는 "인생은 '수저 색'이 결정"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도 포기하고 내 집 마련의 꿈도 포기하고, 꿈도, 직업도, 인간관계도 연애도 포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때나 지금이나 희망과 절망은 공존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희망을 선택하느냐 절망을 선택하느냐입니다. 그 희망도 “땅의 희망이냐 하늘의 희망이냐” 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상황과 조건을 맞추어 가진 희망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안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신 희망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고 포기하지 말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희망을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에게 우리의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 희망을 이루어 가게 하십니다. 사업하면서 희망을 잃으신 성도님이 계십니까? 집안의 가난의 대물림의 희망을 접어 버린 성도님이 계십니까? 자녀를 양육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아 절망하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질병으로 절망하고 포기하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신앙생활 잘해 보려다 부조리한 교회와 불공평한 세상을 보면서 희망의 사다리를 접으신 성도님이 계십니까? 아브라함을 찾아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야곱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도망가 벧엘 광야에서 돌베개하고 잠을 잘 때 사다리 위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희망이 약속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말씀해 주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이 음성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희망의 음성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에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2.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침묵하시거나 주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원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원 하나님이 하시는데 우리를 통하여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 가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 불가능한 것 같은 희망을 주시고 그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품고 떠나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고향을 떠났지만, 아버지를 모시고 국경도시인 하란까지 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아버지를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 하는 아버지를 떠나야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고 아버지가 205세에 죽자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자식같은 조카 친척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 75세였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조카와 함께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기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지시한 땅이 아니라 애굽 땅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자신 목숨 살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여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는 희망을 그에게 부어주었는데 그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불순종으로 바로의 씨가 그 아내 몸속에서 태어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실 희망이 결단 날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바로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조카 롯을 떠나지 못하고 같이 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13장에 보십시오. 소유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게 됩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13장 1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땅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자손을 티끌처럼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희망을 이루어 주시는데 너는 그 희망을 이루어 주겠다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철저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붙들고 우리가 살아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참 순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15장 2절을 보십시오. 상속자를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5장 4절을 보십시오. 네 몸에서 날 자란 것입니다. 15장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희망을 이루기실 원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나이 85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번에는 어떻게 합니까? 16장 3절을 보십시오.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 13년 동안 침묵하십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17장 16절을 보세요.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믿음을 통해 희망을 이루어 주십니다. 21장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희망을 이루어 주어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22장을 2절을 읽어 보십시오. 결국 순종을 통해 희망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망은 믿음과 순종은을 통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어 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길을 걸어갈 때는 원망과 시비 대신 믿음과 순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희망은 믿음과 순종으로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희망을 이루는 데는 5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건강 역량입니다. 건강은 모든 성취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둘째는 전문역량입니다. 어떤 것을 성취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수단 역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루만한 전략적 사고, 계획적 사고, 자기 관리 능력 등이 있어야 합니다. 이론을 아는 것과 그 이론을 실제 이루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수단역량은 교실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전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넷째는 사회 역량입니다. 홀로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협력을 얻고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심리 역량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역량, 마음의 태도를 성공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관점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관점은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엇이 주어질 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관점을 가질 수도 있고 부정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은 행동과 의사소통을 좌우합니다. 태도는 행동과 말로 나눠집니다.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이루려면 이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은 평생 싸워야 할 우리들의 전투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답니다. 다행히 도중에 나무뿌리를 잡았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나무뿌리를 잡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두 손을 놓아라!” 그러자 "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물었답니다. 하나님은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하자 "Oh, my God!!! 거기 다른 사람 없어요?!!!" "여보세요! 거기 그 위에 또 다른 분은 없나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한 사람은 절대 손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이룬 사람들은 과감하게 손을 놓고 순종을 합니다. 이 순종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리챠드 할버슨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하나님께 승복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모세에게 홍해를 가르는 희망을 주시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홍해는 갈라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희망을 주시고 하나님은 법궤를 메고 돌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여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희망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희망을 이루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우물쭈물하고, 주저할 때 빨리 결단 내리고, 한발 앞서가고, 용기 있게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있는 베드로에게 희망을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품은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여주인이 하룻밤 같이 자자고 유혹합니다. 이때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희망을 마침내 이루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밭을 갈며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와서 "나를 따르라" 고 합니다. 이때 어떻게 합니까? 그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고 엘리야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끝까지 따라 다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하나님이 버리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버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이루는 첩경입니다. 한 번 순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는 순종을 원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도박이 가정 행복의 희망을 해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절단하는 것입니다. 스마트 폰 중독이, 컴퓨터 게임 중독, 텔레비전 중독이, 화면 중독이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희망을 꺾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단절하는 것입니다. 과소비와 낭비가 하나님이 주신 경제적 풍요에 대한 희망을 죽이는 것이라며 미련 없이 버려버려야 합니다. 술 중독과 게으름이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대한 희망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악한 습관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희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신에게 준 희망이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데도 하나님을 철저히 믿습니다. 22장 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고, 신앙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도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희망을 역사 속에서 결국 성취하십니다. 이삭을 통한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아가 나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희망을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성취했는지 갈3:16절을 찾아보십시오(신약 305쪽).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의 백성 많아지고 예수님을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갈3:8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3:8)” 하나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여호와 이레의 신앙으로 그 희망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한 점 의심없이 믿으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이 희망을 눈 앞에 보게 하고 그 순종이 희망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수없는 고통과 절망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고단한 인생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우리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바라보고 순종으로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복음 찬양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2)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의 뜻 알게 하소서 하루를 살아도 기쁨으로 가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후회도 염려도 온전히 맡기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어떤 힘들고 고달픈 절망적 상황이 다가와도 중도에 인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픔과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태풍은 일 년 내내 부는 것이 아닙니다. 먹구름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흐르며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희망의 사다리에 대한 설교를 12번째로 마감을 합니다. 다 잊는다고 해고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꼭 마음에 새기고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붙들고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과 순종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100% 믿고 순종하여 평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주신 희망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삶의 현장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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