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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5)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훈련(느3: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447 추천수:4 112.168.96.71
2017-03-12 08:19:46

 

훈련(5)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훈련

느헤미야3:1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좋은 교회로 소문난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씀도 좋고, 사회 유명인도 많이 나오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주변에 있던 많은 성도들이 그 교회로 몰려들었답니다. 큰 교회 건물을 짓고 주일날이 되면 수 만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11시 때 막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순간 총을 든 괴한 둘이 강대상에 뛰어 올라와 "예수를 위해 총탄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만 자리에 남고 모두 나가라!''라고 외쳤답니다. 기겁을 한 성도들은 혼비백산하여 급히 교회를 빠져나갔답니다. 찬양단도 부목사님도 뒤따라 빠져나갔답니다. 수많은 교인 중 남은 사람은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늙으신 성도 10여명만 남았답니다. 그러자 총을 든 괴한이 총을 치우면서 목사님에게 말했답니다. "이제 위선자, 가짜들은 모두 나갔소! 그러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시작하시오!"

만약 우리 교회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성도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벧허같은 영화를 통해 보다시피 초대 교회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것을 증거하다 원형 극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다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기도 하였고,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기도 하였고,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순교 당한 시체와 몸을 묶어 놓고 주님을 부인하게도 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끓는 가마솥에 사람을 넣어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자녀를 끓는 가마솥에 넣으며 살아계신 주님을 부인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순교자들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를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고 믿는 자는 반드시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삶보다 영원한 천국의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바람은 존재하고 수많은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나약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한 평생 헌신하겠다고 헌신한 목회자들도 조금만 힘든 일이 있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다가오면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좀더 편하고 대접받고 대우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는 목사님 이야기 들으니까 교육 전도사님에게 교회 일이 있어 평일에 나오라고 하니까 못나겠다고 하시면서 그러면 사례금을 올려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례금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고 합니다. 극히 일부 교역자이겠지만 교역자도 그런데 성도들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도전은 교회 밖 무신론이 아니라 교회 안의 무신론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나 그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다원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각자 대장이 되어 내가 복음을 믿고 있습니다. 절대 진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만연된 소비주의입니다. 신앙을 소비의 대상으로 봅니다. 자본주의를 통해 형성된 삶의 방식이 교회 안에서도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객 중심 교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도 백화점을 다니듯 취향에 따라 다니고 이익과 편리와 쾌락을 따라 취사선택을 합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초대 교회 순교자들은 사자들 앞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에 매달리면서도, 화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믿습니까? 보이지 않는 바람이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에 개입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해 놓으시고 그대로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사역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참새 한 마리(마10:29)와 머리 털(마10:30) 까지도 세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죄스런 행동까지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 요셉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하나님은 창조해 놓고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계획, 창조, 섭리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작정과 예정이 있습니다. 작정은 보편적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근거(엡3:9-11)하여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예정은 인간 구원에 대한 특수한 계획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습니다. 선택에는 선택은 주권적, 영원적, 무조건적, 불변적, 불가항력적입니다. 유기에는 간과와 정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방치한 것이 아니라 섭리하십니다.

섭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지속시키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시편 104편) 우주 만물과 작은 것까지도 섭리하십니다.

섭리에는 일반섭리와 특별 섭리가 있습니다. 일반 섭리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특별섭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섭리입니다.

통상섭리는 물질세계에서 자연법칙에 따라 섭리하는 것입니다. 정신세계에서 마음의 특성과 법칙에 따라 행하시는 섭리입니다.

비상섭리는 법칙이나 피조물 자체가 주체가 되지 않고 그들의 활동이나 작용 없이 제일 원인인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시어 이루어진 결과를 말합니다. 이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섭리하실 때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첫째는 보존입니다(창9:9-11; 신33:12; 시 136:25; 느9:6)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만물을 계속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통치입니다.

만물의 존재 목적에 따라 통치하십니다. 작은 생명, 자연현상, 인간의 선악간의 모든 행동, 영계, 과거와 미래, 우연이라고 사람들이 일컫는 일까지도 다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셋째는 협력입니다(창45:4-5).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협력(協力)하시며, 피조물로 하여금 그들의 해야 할 일을 행하도록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일을 맡겨 사역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때 하나님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여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예레미야5:1)”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에스겔 때 하나님은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며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에스겔 22:30-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을 당할 때처럼 ‘의인’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이사야6:8)”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 전에 훈련시켜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받고 25년간을 기다리면서 여러 모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키우고 살면서 시내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고독 속에서 온유 훈련받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욕심많은 야곱은 기도 훈련과 성품 훈련을 받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는 가뭄을 통해 모든 것의 공급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훈련받았습니다. 요셉을 훈련시켜 애굽의 총리로 만들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과 함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비상섭리고 얼마든지 모세 없이도 홍해를 가를 수 있고 여호수아 없이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기기 위해 훈련을 시킵니다. 성경은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전사를 만들 때 그 전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인을 훈련시켜 참여하게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군인은 전쟁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게 하기 위해 체력훈련과 제식훈련, 정신훈련, 기술훈련, 전술훈련을 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 말씀 훈련, 기도 훈련, 공동체 훈련, 금식 훈련, 고난 훈련, 순종 훈련, 나누기 훈련, 침묵과 인내 훈련, 성품 훈련, 겸손 훈련 등을 시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느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디모데전서 4:8) 오늘은 훈련 다섯 번째로 분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훈련”을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었는데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불러 성벽재건을 하게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 느헤미야 3장은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훈련을 받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안지만 우리는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훈련을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자들은 협동(동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의 프로젝트을 감당하는데 홀로 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은 비상섭리를 통해 느헤미야 혼자 성벽 재건을 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는 사실을 본문은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벽 재건에 참여한 공로자 75명 이상의 지역 대표 이름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 9개 성읍에서 43개의 작업팀을 동원합니다. 15개 이상의 다양한 직종의 전문 기능인이 팀을 이룹니다. 성직자, 정치인, 상인, 각종 전문기술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1절에 보십시오. 일반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참여합니다. 금장색(8,31,32), 향품 장사(8,32), 문지기(29), 고귀한 딸들까지(12) 참여합니다. 이때가 안정된 때가 아닙니다. 포로에서 해방되어 자기 집 짓기에도 바쁘고, 나라 경기는 침체된 때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기브온 사람들 미스바 사람들도 참여합니다. 다른 지방 사람들입니다. 외적이 쳐들어 올 때 예루살렘 성벽의 보호를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14-19에 나오는 남동쪽 성벽을 중건한 자들 중에는 7지역가운데 6지역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방의 방백들이 책임을 담당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십시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계속 연결되어 협력하여 거대한 성을 완공하기 위해 함께 동참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할 수 있고 한 사람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 사람을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합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지만 하나님의 일은 여러 사람이 동참하여 협력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함께』라는 단어를 1,360이나 반복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지체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협력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대장만 되려고 하지 말고 손의 역할 발의 역할, 눈의 역할로 하나님 사역에 쓰임 받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장갑을 끼고 화장실 남자 변기를 청소하시는 권사님을 보았습니다. 제가 토요일이면 화장실과 교회 쓰레기 청소를 주고 담당하여 하는데 자꾸 냄새가 나서 물청소를 했는데도 계속 나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이 변기 안에 있는 덮여있는 것을 열고 그 밑을 닦아야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그것을 닦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에 들어가 보니 정말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여러 지체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함께 일하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똑똑하진 않습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해서 한 팀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머리가 되어 다른 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월부터 전도부에서 열심을 내어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한 팀이 되는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대심방 때 어느 권사님을 심방했는데 연말에 멀리 이사를 간다는 것입니다. 교인이 많이 나오는 큰 교회 같으면 부담 없이 가까운 교회로 가겠는데 교회와 목사님을 생각하면 멀리라도 와야 할 것 같아 고민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훈련을 우리는 받아 함께 사역하는 자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훈련이 안되면 함께 하지 못합니다. 홀로만 아는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안하무인의 개인주의 자가 됩니다.

19세기까지는 개미의 근면 정신을 강조했다면 21세기는 거미의 네트웍 원리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유명한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는 21세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파트너십이라고 했습니다. "팀 빌딩"의 저자 윌리암 다이어는 현대 조직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바로 자율적으로 작업하는 팀의 출현이라고 말하며 팀 빌딩(team building)이 성공을 위한 중요한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업이다 정부도 팀으로 움직입니다. 21세기 최고의 기업을 경영하고 최고의 부자가 된 빌 게이츠는 어떻게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간단하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제가 저의 일을 도와줄 사람으로, 저보다 똑똑한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죠. 좋은 팀을 가진 것이 그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훌륭한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는 협동하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팀이 되어 봉사하고 예배하고 전도하고 교육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1은 2가 아니라 11의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같은 믿음, 같은 마음, 같은 방향, 같은 비전, 같은 열정, 같은 영성으로 함께 예수님의 손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팀으로 사역하게 하였습니다. 모세 혼자 일하게 하지 않습니다. 아론이 있고 여호수아가 있고 70명의 스텝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 홀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있고 디모데가 있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2제자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역을 분담하시려고 70명의 제자 팀을 만들었습니다. 전도하러 나갈 때도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내보내십니다. 기도할 때도 기본적으로 두 세 명이 함께 기도하도록 팀을 구성해주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한 명의 집사를 세워 일한 것이 아니라 7명의 집사를 세워 일하도록 했습니다. 협력은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가 협력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새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 일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12:25)" 전도서 4장 9–12절에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자들은 달란트와 은사 활용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1절에서 5절까지 기록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북쪽 성벽을 중건한 자들입니다. 양문으로부터 옛문까지 예루살렘 성벽의 북쪽으로 적들의 공격에 가장 큰 위험을 느끼는 곳입니다. 공동체로 일을 할 때 좀 더 쉬운 일을 감당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엘리아십 가문이 중심이 되어 이곳을 재건하는데 담당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는 양문이 있기 때문에 제사장 가문이 맡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들리러 갈 때 양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과 달리 성별하여 문짝을 달고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제사만 드린다고 노동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담임 목사가 무슨 화장실 청소를 하느냐고 회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유일하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야할지를 알았습니다. 상황 속에서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맞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에게 맞게 복음을 전한 것처럼 상황에 맞게 달란트와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훈련이 필요합니다.

6절부터 13절까지는 서쪽 성벽을 중건한 자들입니다.

이곳은 힘 있는 자들이 감당하였습니다. 북편 및 서북쪽 성벽은 파괴의 정도가 심하였기 때문에 재력과 노동력이 풍부한 유력한 가문이 주로 맡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순금과 금제구들을 취급했던 금장색과 향품 장사 이 두 직종은 예루살렘에서 전형적인 상공업 재벌들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가 나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또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아들이 없는 살룸의 딸들이 나옵니다. 20절부터 32절까지는 동쪽 성벽을 중건한 자들이 나옵니다. 대부분 자신의 집 근처를 수리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킬 때 각자에게 달란트와 은사를 주십니다. 달라트를 개발해야 합니다.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좋아하고 기도 잘하면 기도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면 됩니다. 기도회는 잘 참석 못하지만 가진 것은 돈 밖에 없으면 돈으로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면 됩니다. 다른 것은 없지만 남의 집 가서 봉사해 주길 좋아하는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 비판하지 말고 다른 사람 격려해주고 세워 주면 됩니다. 각자 받은 은사가 다 다릅니다. 각자 받은 재능이 다 다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10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황에 맞는 달란트와 은사 활용입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 중심입니다. 내 취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어제 강도사님과 창고를 정리하고 함께 과일 나무에 비료를 주었습니다. 강도사님이 짜증을 부리며 마지못해 그 일을 하였으면 제가 혼자 했을 것입니다. 강도사님은 나는 설교하는 사람으로 이 교회에 왔지 나무 비료나 주고 창고 정리나 하는 사람으로 온 것이 아니라고 불쾌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기쁘게 감당을 하였습니다. 은사와 달란트를 왜 주었는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자각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직분을 주고 은사를 주고 달란트를 주었습니까? 성경은 명쾌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결국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달란트를 가지고 어떤 일도 기쁨에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자들은 헌신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는 남동쪽 성벽을 중건한 자들입니다.

7지역으로 나누어 중수합니다. 17절에 나오는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을 제외하고 6지역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방의 방백들이 중건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분문이 나옵니다. 오물을 나르는 문입니다. 누가 냄새나는 곳을 담당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벧학게렘 지방사람이 담당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샘문은 미스바 사람들이 담당했습니다. 16절에는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17절 중반절에는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19절도 미스바를 다스리는 자가 재건했습니다. 그들은 지방의 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성도 아니 예루살렘 성 재건에 참여합니다. 성이란 외적이 침범했을 때 방어하기 위해 쌓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 성을 쌓는다고 아무런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자신에게는 이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바울처럼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적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뜻과 생각에 내가 조정되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엡2:20-22). 금을 세공하는 사람들은 당시 고급 직종에 속한 자로 그들의 손이 곧 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을 성벽 재건에 드렸습니다. 관리들도 '열외 의식'을 가지지 않았고, 시간이 돈인 상인들도 주님의 시간과 주님의 일에 맞추어 헌신하였습니다.

 

20절부터 32절까지는 동쪽 성벽을 중건한 자들이 나옵니다.

군기고가 위치한 성 모퉁이로부터 양문까지입니다. 가장 많은 작업 인원 투입되었습니다. 길이가 길고 파괴 정도가 심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미 다른 공사 구역을 맡아서 자기 책임을 완수한 바 있는 자들이 동쪽 성벽의 중건에도 참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자기 책임을 다 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아도 누가 비난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맡아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바룩이 나옵니다. 바룩의 헌신은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힘써 중수했다고 했습니다. "힘써"(헤라)라는 단어는 "맹렬하다, 타오르다, 불이 붙다"라는 의미입니다. "열심을 품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룩의 아버지 삽배는 이방인과 결혼했다가 회개한 자(스 10:28)입니다. 아마 자신의 가문의 수치를 씻기 위해서도 힘써 헌신했을 것입니다. 21절의 므레못도 이미 4절에 중수한 자이며, 핫숩(11,23), 드로고아 사람들(5,27), 하나냐(8,30), 므술람(6,30) 등도 갑절의 헌신을 한 사람들입니다. 31, 32절을 보십시오. 금장색과 상고들이 다시 갑절로 헌신합니다. 이미 그들은 어렵고 힘든 지역을 맡아 수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멈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경제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헌신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드고아 귀족들은 주의 역사에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주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와 그를 돕는 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헌신하는데 권세와 재력이 있는 귀족들이 무관심과 이기심, 교만으로 의도적인 방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넘어가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헌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헌신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전생애를 하나님께 드릴 정도로 훈련시켜 출애굽이란 위대한 사역에 동참시켰습니다. 예레미야가 헌신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들을 드릴정도로 헌신할 때까지 훈련을 시켰습니다. 한나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이 민족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도와준 다윗의 세 용사 같은 헌신자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유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 베드로를 위해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감옥에 풀려나 하나님의 사역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 스스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헌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헌신 훈련을 시키시고 있습니다. 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건강, 시간, 물질, 재능 주님의 나라를 위해 드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락 하나를 바친 어린아이의 헌신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배부른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만큼 하나님 마음에 맞는 교회가 된 것은 보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에 학교를 세울 때도 지금은 천국에 가셨지만 한 권사님이 많이 헌신했습니다. 우리가 해외에 13 교회를 건축했는데 그 때마다 보이지 않게 헌신한 성도님들이 있었습니다. 3개의 교회를 단독으로 건축하신 집사님 가정도 있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지배인이던 세브란스의 헌신을 통해 이 일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주 예수병원을 통해 수많은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병원은 여선교사인 마티 잉골드의 헌신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녀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지만 모든 영광을 버리고 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녀의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그 곳에는 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한 헌신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초대 한국교회의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 캐나다 출신 펜윅은 홀로 전국에 250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결코 헌신은 낭비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있는 예수님께 향료를 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을 기념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14: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는데 쓰임 받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면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헌신은 기회입니다. 때가 지나면 헌신하려해도 할 수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멋진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객관적인 드러나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벳새다 들녘에서 한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헌신이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 그 중 한 명은 배신했지만 헌신의 훈련을 받고 목숨까지도 헌신한 11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로마의 권력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바울의 헌신은 유럽의 정신세계와 문명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헌신의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몸으로 헌신할 기회가 있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기도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재능으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물질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다윗은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떠날 때 다 놓고 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재능 다 살아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 끝날 때가 옵니다. 찬송으로, 물질로, 재능으로, 시간으로, 예배로, 섬김으로, 전도로, 아름다움으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직장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남편과 아내를 위하여 자식과 부모를 위하여 기회 주어졌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도 훈련되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 헌신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 만들어진 수많은 하나님의 교회들, 하나님의 병원과 학교들, 수많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헌신에 의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깨끗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 좋은 교회, 탁월한 교회, 부흥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 안에는 사실 그 이면에 더 희생하고 더 헌신한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훈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손해가 아니라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매사 동참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훈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매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달란트와 은사를 활용하는 훈련을 받음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받은 것으로 헌신하는 훈련을 받음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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