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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이유(3)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요10: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8231 추천수:8 112.168.96.71
2016-12-18 15:04:05

 

예수님이 오신 이유(3)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10:10

 

국회 청문회에서 박대통령이 ‘태반주사’와 ‘백옥주사’, ‘신데렐라주사’를 맞았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주사는 미백과 주름 개선 같은 노화 방지와 미용에 효능이 있는 것처럼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건만 주어지면 누구든지 아름답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은 아방궁에 살며 오래 살기 위해 3천명으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하게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오래 살기 위해 갖가지 보약을 먹고 10대의 어린 소녀들을 침소에 들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무병장수 건강연구소’를 만들어 산삼꽃 향기를 마시고 32가지 각종 한약재가 들어 있는 신선베개를 베고 잤다고 합니다. 이불은 참새의 턱밑 잔털만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 덮고 잤고, 기쁨조를 만들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했답니다.

권력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아름답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을 것입니다. “99 88 234 1000”이란 말이 유행했습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만 앓은 후 천국가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어떤 가정이 명절날 가족과 친척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갔답니다. 같이 간 이모가 5살 조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께 절 드리면서 한마디 해!"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5살 먹은 아이가 절을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아름답게 장수해도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었지만 49살 6개월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병장수를 위해 좋다는 것만 먹은 조선의 왕들의 평균 수명은 47.07세였고, 비슷한 시기 중국 명·청조 황제의 평균수명 47.03세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때에 평균 수명은 19세, 16세기에 21세, 18세기에 26세, 19세기에 34세, 20세기 초에 45~50세 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로 하지 않습니까? 어제 신문 보니까 미국 ‘소크 연구소’ 동물실험을 했는데 세포를 초기 상태로 되돌려 젊음을 되찾고 수명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생쥐의 수명도 30%가량 연장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이면 인체실험도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회춘해도 역시 인간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죽게 되는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통계청의 ‘2015년 사망원인통계’자료를 보니까 지난해 우리나라 사람의 사망자 수는 총 27만5천 895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망 원인 1위는 암이었습니다. 총 7만 6천 855명이 각종 암으로 죽었습니다. 33년째 부동의 1위랍니다. 10대와 20대, 30대는 자살이 1위였습니다. 사람이 노화되는 것은 아직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유전 30% 정도, 나머지는 환경 및 행동(생활방식) 요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음의 이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나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뇌사나 호흡사나 세포사나 심장사로 말씀하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분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된 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영혼과 육체가 있는데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육적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죽어 영원한 지옥에 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영원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였습니다. 흙을 빗어 인간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하였습니다. 짐승들과 달리 영혼이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에덴에 살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위한 한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기 위해 다 모든 것을 먹되 그것 한 가지만 먹지 말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 결국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죄의식이 생겼습니다. 도피합니다.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역겨워 합니다. 두려워합니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잉태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노동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살기 힘든 척박한 환경으로 바뀌었습니다. 땅이 가시덤불을 냅니다. 아름답기만 했던 자연이 재앙으로 다가옵니다. 자연도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 이웃과 관계, 자신과 관계, 자연과 관계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담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로마서 4:12절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단절로 영적사망, 육적사망, 영원적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로 영적소경, 죄의 지배, 친죄 성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 예수님 스스로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죽음을 정복하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생명(life)은 ‘프쉬케(ψυχη)’, ‘비오스(βιος)’, ‘조에(ζωη)’라는 말이 주로 쓰입니다. 프쉬케는 목숨, 사람을 주로 말합니다. 비오스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을 말합니다. 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지옥 가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8절을 보세요. 그런데 예수님보다 먼저 온 절도 강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왔습니까? 10절을 보세요. 도둑이 온 이유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정치지도자인 빌라도나 헤롯이 도둑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 바리새인들, 거짓 교사들이 도둑입니다. 오늘날 말하면 이단 사이비들이 다 도둑입니다. 성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배만 채우려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바로 사단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사단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영혼을 도둑질하는 자요, 살인자요, 파괴자입니다. 고소자이고 거짓의 앞잡이입니다.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휘어 잡아 버립니다. 유다를 보십시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라고 했습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하와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니까 아무렇지도 않던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고 남편도 주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멸하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8).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마귀를 영원히 이기셨습니다.(엡 2:16; 골 2:15; 히 2:14).

이것은 어느 날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어떻게 이 말씀을 이룰 것인가를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십자가에서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 자체가 바로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예수님 생명을 구원하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이라고 했습니다.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세 명의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을 살렸습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인 청년을 살렸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어린 소녀와 청년과 장년 각 연령층의 대표를 살리므로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러 오신 분인 것을 명백하게 증거해 주었습니다. 에베소서 2:1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연의 일치이겠습니까?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 역사 속에 그 어느 누군가에게 여덟 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은 1만조분의 1이다.”라고 합니다. 이 확률은 미국 텍사스 주(한반도의 세배 넓이) 전체를 은화 동전으로 덮는데, 그냥 덮는 것이 아니라 동전을 60cm 높이로 쌓아 덮고, 그 중에서 미리 표시한 단 한 개의 동전을 단 한 번에 정확하게 집어낼 확률이라고 합니다. 수학자 피터 스토너는 어떤 한 사람에게 총 48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은 1조의 13승분의 1(1/1조¹³)이라는 거의 측정 불가능한 통계 수치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구약성경에 약 300개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들은 단 한 가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재림 예언만 제외하고 모두 2000년 전 다윗의 동네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승천하셨으며, 언젠가 이 세상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둘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천국만 가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삶이 생명은 붙어 있는데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고 있는 환자들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날마다 근심과 걱정의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날마다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병들어 절망하고 무기력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풍성이라는 말은 ‘페릿손’의 번역으로 실제로 필요한 이상이라는 말입니다. 기대하거나 예상했던 것을 초월하여 엄청나게 크거나 훨씬 많아져 넘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단지 영혼 구원만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로 행복하고 풍요로우며 만족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가 오시면 좋은 꼴 살진 꼴을 넘치도록 먹으며 평안히 눕게 된다는(겔34:12-15)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오시면 행복하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으로 삶의 질이 변화될 것이라고 예언해 주셨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삶을 인류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슬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파를 잠재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홀로 욕심부리며 고독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경험하고 만끽하도록 오셨습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산 떡이고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통해 풍성한 새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악으로 인한 고통의 멍에가 벗겨지고, 병든 몸도 건강해지며, 빈궁한 살림도 부해질 것이며, 하늘의 풍성한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도록 오셨습니다. 시기와 질투를 벗어버리고 사랑과 용서와 화평의 삶으로 삶을 풍요롭게 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쟁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삶의 장애물 앞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어 응답받고 회복된 삶을 살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생명을 건강한 생명으로 바꿔 주고,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무기력함 대신 의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절망 대신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전쟁 대신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 대신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불행 대신 행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질투 대신 사랑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정죄 대신 용서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갈등 대신 화해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비판하는 삶 대신 칭찬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어마 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라하게 사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부자 하워드 휴즈라는 사람은 제조업, 호텔, 방송국, 항공사, 영화사, 도박장 등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부를 오랫동안 누리면서 오래 살기 위해 병 걸리지 않고 세균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호텔의 끝 방에서 혼자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고 음식도 잘못 된 것을 먹게 될까봐 깡통음식만 먹고 자기가 스스로 음식을 해먹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심했는데 71세에 호텔에서 죽을 때 사인이 영양실조였답니다. 영양실조 신앙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호화 여객선을 타고 세계 여행을 떠났답니다. 비싼 배표를 사느라 돈이 부족해 약 2주일 동안의 여행을 위해서 빵, 라면, 과자, 캔을 준비하고 배를 탔답니다.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뷔페를 즐기기도 하고, 고급 음식을 마음껏 먹고 즐겼답니다. 그 때마다 이 사람은 빵과 라면으로 끼니를 이어갔답니다. 여행이 다 끝나고 선장이 나와 인사를 했답니다. “행복한 여행이 되셨는지요?” 그러자 이분이 말하기를 “네, 좋은 구경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 돈이 모자라서 라면과 빵으로 식사를 하느라고 배가 좀 고팠습니다.” 그때 선장이 깜짝 놀라면서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배 안의 모든 뷔페와 고급 음식 값은 당신의 배 삯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는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너무 초라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실패 앞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사람으로 풍요롭게 사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단순하게 말씀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풍성하게 나누어줄 만큼 풍성함과 윤택함을 주십니다(잠언11장24절) 푸른 초장에서 여유롭게 살만큼 풍요로움을 주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 가장 풍요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이 오실 때 하나님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토록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미친 것 전혀 없네”

 

사단은 끊임없이 이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무엇으로 방해합니까? 사울을 보십시오. 용맹스러웠습니다.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습니다. 효정이 지극정성이었습니다. 적들을 물리치고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렇게도 훌륭했던 사울왕이 하루아침에 사단이 사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질투의 괴물이 되어 다윗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정확하게 답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삼상18:10)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다윗도 얼마나 성군입니까? 그런데 인구 조사를 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나라가 잔치집이 아니라 초상집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유다가 예수님 안에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스승을 인신매매하고 자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오늘 제가 주보에도 칼럼을 썼지만 마음 단속이 중요합니다. 마음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생각에서 나옵니다. 도둑이 들지 않기 위해서는 문단속을 해야 하듯이 인생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는 사탄이 노리는 생각단속을 해야 합니다. 코타르 증후군(Cotard‘s syndrome)이란 정신질환이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신경과학자 쥘 코타르에 의해 "부정 망상증"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코타르의 여성환자는 지극한 자기혐오증에 시달렸고, 자신이 지옥에 떨어졌으며, 자연적인 사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런 이유로 먹을 이유가 없다며 결국 굶었다고 합니다. 걷는 시체 증후군(walking corpse syndrome)으로 알려진 이 병의 환자들은 그들 자신이 죽어서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끝없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병은 처음 단계에서는 막연한 불안과 우울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증상이 악화되면 지나친 죄책감과 심각한 망상, 만성우울증이 발생하고 완전히 왜곡된 세계의 시각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합니다. 심하면 자해를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사탄이 좋아하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이는 생각, 죄짓은 생각, 초라한 생각, 낙심하는 생각, 포기하는 생각, 걱정하는 생각 등은 사탄이 넣어주는 죽이는 생각입니다. 복음적인 생각, 살리는 생각, 풍성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이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은 결코 단순한 추상적인 에너지가 아닙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에 따라 걸음걸이 태도, 말, 옷 입는 맵시, 장래, 직업 등이 달라집니다. 생각은 인생길의 안내자입니다. 생각은 인생의 씨앗이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에너지입니다. 사탄이 이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단속에 실패하면 결혼생활도 실패합니다. 고트만은 부부관계가 만족스럽게 유지되려면 부정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건이 부정적인 사건보다 5배는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생각을 말씀으로 단속하지 못하고 사탄에게 방치하면 더러운 오염덩어리 인생이 됩니다. 가정을 파탄나게 하는 것은 사탄에게 부부가 마음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인생을 초라하게 하는 것은 생각을 사탄의 놀이터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인생 망치는 비결은 생각을 사탄의 노략거리로 허용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죽이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은 시내를 내려놓을 때 바다가 됩니다. 나무는 꽃을 버릴 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농경 시대에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 되었습니다. 경쟁우위가 토지에 있었습니다. 산업시대에는 경쟁우위가 생산성에 있었습니다. 정보시대에는 정보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후기 정보시대라고 합니다. 전략적 포지션이 경쟁우위를 차지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차별화하고 두드러져야 부자가 되고 풍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상품과 고객과 틈새를 전략적으로 두드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품은 적합(필요한 것, 충족시킬 수 있는 것)하고 섹시(감성 자극)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다 호소력이 있고 보다 쿨하고 보다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고백에게 맞춤 써비스를 하고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력한 영향력, 지정한 가치를 드러야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에서 나온 것입니까? 생각입니다. 시대를 읽고 시대에 변화에 따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인공위성도 생각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주보에 칼럼으로 실었듯이 IBM을 세계적인 회사로 만든 토머스 J. 왓슨은 생각으로 위대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철물점 주인에게 빌린 싸구려 마차에 피아노와 재봉틀을 잔뜩 싣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불경기로 하루아침에 망하고 남의 집 지하실에서 생활했던 사람입니다. 정육점 동업하다 동업자에게 사기 당해 망한 사람입니다. 세일즈를 했지만 결국 1년의 징역형을 받고 40살에 해고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C-T-R’에 들어가 총책임자가 되어 650만 달러(당시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가 약 8874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의 빚을 다 청산하고 세계적인 기업을 만든 비결은 사훈을 ‘Think’로 바꾸고 ‘Think’하면서 일어났고, ‘Think’하면서 출근했고, 임직원들과 함께 ‘Think’를 외치며 하루 업무를 시작했고, ‘Think’하면서 먹었고, ‘Think’하면서 쉬었고, ‘Think’하면서 잠든 결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IBM 앞에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세 명의 직원과 함께 아주 작은 회사를 힘겹게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IBM을 꺾고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그는 IBM과 전쟁을 치르기 전에 IBM의 성공 요인을 철저하게 분석했고, IBM을 쓰러뜨리기 위해 선택한 무기가 ‘Think Week' 였습니다. 그는 작은 통나무집에 들어앉아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2주 동안 오직 ‘Think’만 하는 ‘Think Week’를 보냈습니다. 냈다. 아예 회사의 시스템으로 만들어 직원들에게도 ‘Think Week’를 요구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IBM을 꺾고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빌 게이츠입니다. 빌 게이츠가 ‘Think Week’를 통해 컴퓨터 기업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을 때 ‘Think’나 ‘Think Week’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Think Different'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스티브 잡스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복음적 생각 창조적 생각을 하면 미래가 밝아지지만 마귀의 생각, 죽이고 파괴적인 생각을 하면 인생이 망합니다. 소리는 1초에 340M를 움직이고, 빛은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돕니다. 그러나 생각은 1초에도 광활한 우주를 수십 바퀴나 돌 수 있습니다. 사탄에 생각을 빼앗기면 인생 순식간에 망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샬 로사다와 에밀리 히피는 고성과 팀과 중간 성과 팀, 저성과 팀의 커뮤니케이션 특징을 분석했습니다. 각 팀의 긍정과 부정을 비율로 조사해 보니 고성과 팀은 5.8:1, 중간 팀은 1.8:1 저성과 팀은 1:20 비율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교회가 부흥되는 생각, 자식이 잘되는 생각, 기업이 흥왕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강건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만든 후 최초의 말씀도 복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복을 주어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신을 소욕을 이용하는 사탄의 노예가 되어 신앙생활 초라하게 하지 말고 성령의 소원에 순종하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고 성령의 사역이 풍성하게 나타나고 성령의 은사가 넘치도록 부어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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