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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이유(2)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눅19: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868 추천수:10 112.168.96.71
2016-12-11 08:30:54

 

예수님이 오신 이유(2)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눅 19:10

 

지난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개인적으로 참 불행한 일이고 국가적으로도 힘겨운 일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총탄에 쓰러졌는데 자신 역시 탄핵의 총탄을 맞았으니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에게 탄핵이라는 돌을 던졌겠습니까? 결국, 대통령으로서의 법을 지키지 않아 윤리적으로 대통령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따를 만한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닉슨이 미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도 능력보다는 윤리성 때문이었습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지도자들이 무너지는 것도 대부분 도덕성 때문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2002년 한 때 세계적인 회사였던 엔론을 필두로 월드컴, 제록스, JP모건 등 거대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진 것 역시 도덕성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 경영대학원이 세계 1500명의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21세기형 최고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에 대해 설문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조사에서 88%가 꼽은 첫 번째 항목은 '윤리성'이었답니다. 다른 연구기관이 미 전역의 평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85% 정도의 응답자가 자신의 리더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정직성'과 '윤리성'이라고 답했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 2천 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 추출된 것이 "정직"이었다고 합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는 '정직한 사람이 손해보고, 정직한 사람은 경쟁력이 없고, 정직한 사람은 무능력하고, 정직한 사람은 출세할 수 없다'는 생각이 사회 통념으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지수가 높은 사람이 결국 존경받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욥8:6)" 도덕성이 높아지면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 저울이 있는 가게에 사람이 많이 모입니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단지 국민소득이 높아진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이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도덕성이 높아지지 않으면 국민의 삶의 질은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그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탄핵 촛불시위를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분노와 불안입니다. 최고 권력자로서 도덕성을 지키지 못한 대통령에게 분노의 표출로 국회에서 대통령이 탄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권력자들이 바뀌었는데 연고와 이해타산에 의한 집단 심리, 군중심리, 쏠림현상, 냄비현상으로 죄 지은 자에게 돌을 던진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후가 문제입니다. 이제 미래에 대한 불확실에서 오는 불안이 남아 있습니다. 촛불은 밝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를 둘러쌓고 있는 세상은 잿빛이 가득합니다. 북한은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발 찬스만 찾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 미국 대통령이 바뀌어 긴밀하게 대처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새정부와 협상할 지도력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측 방위비 분담액을 올리라고 요구한 뒤 안 들어주면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협박할 지도 모릅니다. 중국의 사드 배치로 보복성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상처투성이로 심각하게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도덕이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합법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OECD 나라 중에 자살률 1위입니다. 산업재해 사망률 1위입니다. 가계부채 1위입니다. 노인 빈곤률 1위입니다. 청소년 흡연율 1위입니다. 자동차 접촉 사고율 1위입니다.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낮은 순위 1위입니다. 이혼 증가율 1위입니다. 낙태율 1위이면서 저출산 1위입니다. 15세 이상 술 소비량 1위입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국민이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10년의 침체가 아니라 결국 이정도 수준에서 끝이 나고 10년의 후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인간끼리 되어지는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고작 의인 10명이 없어 망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잠11:11)" 하나님은 이 민족 가운데 의인을 찾고 있을 줄 압니다. 악한 자의 입만 무성하면 성읍은 무너집니다. 돌던지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들들에 의해 공동체가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기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발견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축복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위기는 늘 기회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 신앙의 영웅이 나오고 비전을 분명하게 가진 신앙의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 한사람으로 민족이 해방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에스더 한 여인 때문에 유다 민족이 살아났습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 한 사람으로 인해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보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비전을 가진 대안자가 되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 바나라는 리서치 센터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성에 있어서 불신자보다 40% 이상 격차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적어도 40% 쯤 앞서가야 신앙인들이 세상의 빛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의 '2012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에 따르면 비종교인의 개신교 신뢰도는 18.9%로, 천주교의 26.2%, 불교의 23.5%에 비해 현저하게 낮게 나타났습니다. 제20대 국회, 3명 중 1명은 기독의원입니다. 300명 중 102명이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각 분야 지도자들 중에 기독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국회의원장 정세균 집사님은 주일학교 때부터 시골마을 개척교회를 다녔고 지금까지고 아무리 바빠도 매 주일마다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닌 기독교인입니다. 이 나라에서 기독교 신자 출신 장로 대통령이(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3명이나 나왔습니다. 이번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은 황총리는 신학을 하신 분이고 전도사 생활도 하신 분입니다.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검사 임용 이후에도 줄곧 전도사로서 교회에서 봉사했고, 사명감이 뜨거웠던 시절 새벽 2시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황교안 총리의 사모님은 복음성가 가수로 '아름다운 유산'이라는 복음성가 앨범을 발표하며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신신할 기독교인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위태로운 때 신앙 지도자들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위기의 시대는 늘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건졌습니다. 노예생활로 핍박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해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기드온과 다윗과 사무엘과, 다니엘과, 느헤미야와 에스더 같은 사람을 통해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에 성취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을 하나님이 왜 그들을 시대 속에 세웠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 뜻을 초지일관 실천하여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4일에 2차 대국민 담화를 하면서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내가 대통령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신이 왜 대통령이 되었는가?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가? 자신이 왜 장로가 되었는가? 자신이 왜 권사가 되었는가? 자신이 왜 교사가 되었는가? 자신이 왜 사장이 되었는가? 자신이 왜 부모가 되었는가? 이유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초지일관 관철시켜야 어떤 분야에서든지 성공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최고의 스승이고 지도자이신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아시고 이 땅에 사셨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탄생하였습니까?

예수님 스스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를 몇 가지로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그래서 지난주에 제가 설교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도 섬김의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섬기의 비전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불행해진다고 했습니다.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섬겼던 예수님처럼 섬김의 수준을 높이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섬김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 유익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가 살고,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주는 자가 받는 것이 섬김의 역설적 진리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오신 두 번째 이유입니다.

본문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길에서 삭개오를 찾아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에게 돌을 던지고, 무시하고, 적대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왕이 되고 제자들에게 한 자리씩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성공하여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형제들에게 한 자리를 주어 정치 헌금을 받아 회사 하나씩 차리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막강한 하나님의 권세로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헬라원어의 뜻은 “완전히 파괴하다”, “죽다”, “멸망하다”, “손상시키다”입니다. 자신에게 행동의 결과로 멸망한 자, 죽는 자를 말합니다. 양떼 중에서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떨어져 나오게 된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찾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멸망당하게 됩니다. 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가시덤불이나 웅덩이에 빠져 결국은 죽게 됩니다. 삭게오도 그대로 놓아두면 인생의 종착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입니다. 삭개오가 바로 양떼를 떠남으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사람입니다. 2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삭게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한 도시입니다. 가이사랴와 가버나움과 더불어 3대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의 세무서장입니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 월급이 따로 없고 지시된 금액만 징수하면 나머지는 자기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부당하게 착취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부자가 되었고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삭게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전하다, 정의롭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낳고 순전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뜻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민족의 배신자, 부정 축제자가 되어 자기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돈은 있고, 권력은 쥐었지만 백성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유대 동족들은 세리들을 매국노와 같이 멸시하고 상종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창기처럼 죄인 중에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뭇 사람들입니다. 탄핵 국면에 있는 대통령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이 5%만 지지를 합니다. 80% 넘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타락한 본성에 의해 욕심과 유혹에 따라 돈과 명예와 쾌락, 의미와 가치 등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마치 당뇨병에 걸린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명예의 단맛을 빨아 먹습니다. 권력의 단맛, 돈의 단맛, 쾌락의 단맛을 빨아 먹습니다. 그것을 먹을 때는 순간적으로 좋습니다. 재미가 있습니다. 살맛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가면 합병증이 찾아옵니다. 영적 당뇨병에 걸리면 교회 다니는 것이 피곤합니다. 매사 귀찮아집니다. 하나님의 일에 의욕이 없어집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나 쾌락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힘 있을 때 자신을 지지해 주는 것이지 힘을 잃어버리면 같은 편도 탄핵 찬성표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합병증이 생겨 짐 덩어리 되면 처자식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셨습니다(1).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입니다. 5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삭개오에게 갑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보고 "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삭개오를 찾아갔고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으며 그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결코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거나 의롭지 못합니다. 요한복음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오늘도 진정한 행복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시22:10)"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가운데 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 3:7)"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우리의 사정, 우리의 형편, 우리의 아픔, 우리의 슬픔, 우리의 상처 모르고 외면할 것같지만 우리 주님의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고통 다 보고 계십니다. 아무도 들어주실 것 같지 않던 우리의 부르짖음 다 듣고 계십니다. 아무고 알지 못할 것같은 우리의 사정 다 아십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비난거리만 있으면 소문내고, 비판하고, 수군거리고, 정죄하고 따돌립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 자신을 차별화합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드러냅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고, 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고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입니다. 남을 비판할 만큼 그렇게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너무 사람 의지하고 사람에게 매달리지 마세요. 교회 일을 하려면 요즈음은 사람이 없습니다. 손자들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딸만 둔 엄마는 외손자 업고 싱크대 앞에서 죽는답니다. 딸네 집 살림 챙겨주고, 손자 손녀 봐주다가 선 채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들만 둘 둔 엄마는 길에서 죽는답니다. 큰아들 집에 가니 대문 잠겨 있고, 작은아들 집도 잠겨 있어 왔다 갔다 하다가 길에서 쓰러진답니다. 아들딸을 둔 엄마는 응급실 문 앞에서 죽는답니다. 아들은 누이 눈치 보며 미루고, 딸은 오라비 눈치 보며 미루다가 때를 놓쳐 병원 응급실 가는 도중에 운명한답니다. 아들도 딸도 없는 엄마는 독방에서 라면 끓이다가 죽는답니다. 아무도 거둬 주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최후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다 해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들어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께 나와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시어머니 무거운 짐 피한다고 아파트 이름 어려운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딸을 데리고 찾아옵니다. 시어머니도 버거운데 시누이까지 덤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다시 쉬운 아파트 이름으로 짓는데 며느리들이 싫어해서 그런답니다.

우리 예수님께 진정한 행복과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인생 문제는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시네”

우리는 그 예수님께 나아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길에서 삶으로 달려가는 길로 방향을 전환되게 되어 있습니다. 불행의 늪에서 행복의 동산으로 탈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우리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려면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분의 장애물을 제거 해버립니다. 삭게오는 세리장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체면, 자존심, 아집, 편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열등감의 장애물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키가 작으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보다 커질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해, 배워야 해, 예뻐야, 똑똑해야 등으로 자신을 감옥에 잡아 처넣으면 안 됩니다. 말츠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면 95%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약점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력 때문에 괴로워하던 링컨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대통령이 됩니다. 소아마비의 약점을 가졌던 루즈벨트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실력을 갖추어 대통령이 됩니다. 가난이라는 약점을 가진 록펠러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는데 나쁜 직업, 신체적인 조건, 가정적인 불행이 장애물이 아닙니다. 삭게오는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즐겁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삭개오처럼 기뻐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한분만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된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2.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구원이 임했다”와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빗나가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세리 같은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같은 의인에게 임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의 바리새인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민족을 억압하고 로마정부를 도와주는 세리, 로마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보다 지나치게 많이 부과하여 자신의 배만 불리는 세리는 절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의 몸을 입고 탄생할 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뜻이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아멘”

 

예수님은 삭게오는 어떻게 구원해 주십니까?

죄인으로 정죄받는 삭개오를 먼저 예수님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에게 다가가 그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죄를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영접해 주심으로 임하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밀려왔을 때 그 은혜에 자기를 맡겼습니다. 이로 인해 일생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알아가며, 예수님의 영향 속에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구원받은 삶이 나타났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는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달라졌습니다.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내어놓고, 속여 빼앗은 사람에게는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이렇게 달라진 것은 그가 정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예수님을 내게 가장 소중한 분으로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재물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 역시 누가복음 12장이나 16장에 나오는 부자나 18장에 나오는 큰 부자였던 관리와 마찬가지로 그저 재물을 믿고 의지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쓰는 차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와 같은 죄인을 영접해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도 그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재물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삭게오를 향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하나님의 백성에서 떨어져 나와 마치 양떼를 떠난 길 잃은 양과 같았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일지라도 결국은 멸망당하게 될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그를 영접해 주셨을 때, 그는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때 어떻게 됩니까? 그에게 있는 죄와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덮어 주시고, 용서 받게 해 주십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모든 것은 삭개오의 것이 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은혜와 진리의 새 삶을 살며,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죽음 이후의 이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의 영광으로 살게 됩니다.

삭게오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이제까지는 돈으로 행복을 얻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예수님으로 행복을 얻는 삶을 사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진정 회개합니다. 법을 어기고 강탈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고 말합니다. 삭개오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말 국어사전에 구원이란 “① 위험이나 곤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하여 줌. ② 기독교에서,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 내는 일.”이라고 해석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선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얻어지는 영생이 구원입니다.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지옥의 형벌에서 받지 않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가 정상화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 집니다(롬 5:1)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롬 3:24). 죄와 율법에서 해방됩니다(롬 8:2).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일 3:10).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 됩니다(벧전 2:5). 영원한 천국의 처소를 갖게 됩니다(요 14:2).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을 얻습니다(요 14:27).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됩니다(고후 5:15). 믿는 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게 됩니다(엡 4:4). 구원 받은 삭개오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9절). 구원 받으면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원 받으면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원 받으면 행동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원 받으면 관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는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만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합니다. 전에는 자기만 알던 사람이 이웃을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남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착취하는 자였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저히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변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또한 이웃들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 버린자를 찾다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은 왜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97년에 세계를 슬픔에 잠기게 했던 두 여인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다이애나 왕세자 빈과 테레사 수녀입니다.

다이애나는 귀족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찰스 황태자와 결혼하여 궁전에서 살았으며, 호화찬란한 생활을 했지만, 가정 불화로 인해서 다섯 번 자살을 시도했고, 대식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는가하면, 국적을 초월해서 수많은 남자들과 연애 행각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교통사고로 애인과 함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서만 3만 6천명의 부랑자들을 돌보았으며, 어린이집을 세워 버려진 고아들과 미혼모들, 그리고 불구아들과 정신박약아들을 돌보았으며, 나환자촌을 세워 150명의 나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고, 어떻게 살았는가보다는 어떻게 죽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얼마나 부자로 살았는가보다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일평생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죽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잃어버린 찾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셨으며, 먹을 것을 주셨고,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였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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