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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남(3)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한복음5:2-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580 추천수:2 220.120.123.244
2020-01-19 15:06:34

일어남(3)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한복음5:2-9

 

새해가 시작되어 일어남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제목으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복음서 중 다른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면서 그냥 “일어나라”라고 해도 될 텐데 예수님은 세 가지 명령을 합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가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계속 38년 누워있어 완전 근력이 빠져 버린 그에게 이제 누워있는 것을 끝내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 시간 저와 우리 성도님들에게 주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스쳐 가는 소리가 아니라 살아서 우리 성도님의 인생에 전환점을 주시는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가 자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안식일날 자리를 들고 갈 수 없는데 ‘네가 지금까지 의지하던 네 침상을 이제는 거두어서 메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성도님들을 붙들고 있었던 침상은 무엇입니까? 올해 그것에 의지하여 노예로 사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부리는 삶으로 들고 일어나 참된 안식을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가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현재 명령형입니다. 계속해서 돌아다니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붙들었던 죄의 노예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올 한 해 이 세 가지를 기도 제목으로 삼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1. 올 한 해 하나님 크신 은혜를 받아 불구에서 일어나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크게 3가지 불구를 앓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육신적 불구입니다.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8년이나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일어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38년이라는 긴긴 시간을 한 번도 일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마 그 당시 평균수명으로 보면 평생 누워있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찾아온 불구는 인생을 참으로 불행하게 만듭니다. 선천적인 불구나 후천적인 불구나 어떤 불구가 찾아오면 자신뿐 아니라 온 가족이 불행해져 버립니다.

둘째는 정신적 불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그를 찾아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경쟁의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그 실패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형제가, 친구가 자신을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주지 않아서 이렇게 38년을 패배자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남 탓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 때문에 가난하게 살고, 목사님 때문에 은혜 못받고, 교회 때문에 신앙이 냉랭해졌고, 대통령과 정치인 때문에 경제가 이 모양이고, 자식들 때문에 노년에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인 불구도 육체적인 불구처럼 참으로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셋째는 영적 불구입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유대인이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때 그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그가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알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영적 불구자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상징하겠습니까? 과거 38년 광야에서 죽었던 이스라엘 백성, 당시 유대교에 심취해 있는 유대인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런 영적 불구에 대하여 사람들은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이 불구가 얼마나 심각한지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나고 죽어 지옥에 떨어지면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명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8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참된 명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는데 양문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수문도 있고 골짜기 문도 있고 미문도 있고 동문도 있고 어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으로 가지 않고 양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곳에는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 있는 못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전설에 의하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 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병자 중에 누구에게 주목하십니까? 많은 병자 중에 38년 된 병자입니다.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중증환자입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그에게 가고 있습니다. 누운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병이 오래된 줄 알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무도 자신의 처지, 자신의 아픔, 자신의 눈물, 자신의 고통, 자신의 사정을 몰라 준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그의 아픔을 보고 계셨고, 예수님은 그의 고통과 눈물과 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가, 혹은 두 가지가, 혹은 세 가지가 동시에 찾아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와 은혜를 주시면 기적적으로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적인 불구, 정신적인 불구, 영적인 불구를 앓고 있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혹시라도’ 하는 일말의 기대 속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진짜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도, 마음의 문제도, 죄의 문제도 정확히 해결하는 방법을 모르고 막연히 살아가는 이 사람에게 진짜 해결 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막연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진짜 행복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막연한 자유를 원하는 자들에게 진짜 자유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막연한 천국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진짜 천국 가고 싶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어쩌면 병자에게 대답이 필요 없는 어리석은 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를 가지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는 베데스다에 누워있기는 하였지만 이미 38년 동안 한 번도 그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입니다. 학문적 용어로는 “학습성 무력감”입니다. 패배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냉소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뭐 올해도 되겠어,”, “뭐 이 사람 변하겠어”, “뭐 잘 되겠어”, “뭐 사람 다 그렇고, 그렇지” 남편과 아내와 자식을 바라보면서 “뭐 올해도 뻔하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에 나와 은혜받았다고 하면 “너도 교회 오래 다녀봐”라고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일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 걷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많은 동네 중에 예루살렘, 많은 문 중에 양문, 많은 환자 중에 38년 된 환자에게 찾아와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올 해도 문밖에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인생의 한가운데 모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38년 묵은 불구를 해결할 분으로 믿고 일어나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는 역사가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38년 된 육신적 불구가 있습니까? 38년 된 정신적 불구가 있습니까? 38년 된 영적 불구가 있습니까?

육신적 불구가 있다고 인생의 불구가 아닙니다. 사람 중에 한가지라도 불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내 마음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술중독, 담배중독, 영상 중독이 있습니까? 부채와 질병, 고치지 못하는 성격으로 절망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생명의 한계,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불구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지요. 얼마든지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면 불구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소망과 간절한 바람, 견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육신적 불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눈은 빼앗겼지만, 나는 밀턴의〈실락원〉을 기억합니다. 내 귀는 빼앗겼지만, 베토벤이 나를 찾아와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내 혀도 빼앗겼지만,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내 영혼이 빼앗기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헬렌 켈러는 3중 장애를 극복하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우등으로 졸업했고, 장애인을 위한 학교, 도서관, 병원을 건립하며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페니 크로스비는 생후 6주 만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평생 만여 편의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부이치치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니까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를 다니면 희망전도사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외치고 다니지 않습니까? 팔다리는 없지만 대학에서 회계학과 재무관리를 복수전공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이라는 장애인 비영리 단체를 만들고 세계를 무대로 강연하고 있지 않습니까?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경, 헬렌 켈러, 마하트마 간디, 테레사 수녀,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위대한 지도자 3백 명을 분석해본 결과 그들 중 25%는 심각한 심리적 장애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 중 50%는 유년 시절에 학대를 받았거나 빈곤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구는 있습니다. 닐 루덴스타인의 아버지는 교도소 경비원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종업원이었답니다. 그런데 닐 루덴스타인 박사는 하버드 대학의 26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찾아 오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일어나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면 예수님이 은혜만 주신다면 어떤 불구도 극복하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한센 씨 병 환자가 일어난 것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 외아들 하나를 의지하고 살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만나 일어난 것처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질병으로 죽어갈 때 예수님을 만나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은 "나는 소생할 가망성이 없다."라고 절망하지 말고 예수님이 은혜를 주시기만 하면 "나는 아직도 소생할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라고 희망을 가지고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일지라도 "새벽이 다가올수록 어둠은 짙어진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하고 슬퍼하는 자도 "꽃은 봄이 되면 다시 핀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깊은 수렁에 빠져 좌절한 사람도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은혜만 주시면 38년 풀리지 않던 숙제가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집에 와서 무자비한 삶을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편16:3)” 우리는 어떤 불구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존귀하게 생각하는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불구로 인해 아무리 무능력해도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4:13)” 우리는 못해도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얼마든지 모든 불구를 떨쳐 버리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9:23)”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기만 하면 38년의 육신적 불구, 정신적 불구, 영적 불구를 극복하고 일어나 행복해질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올 한 해 예수님을 만나 올무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참 안식을 누리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가 두 번째 주신 명령이 “네 자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구태여 했을까요? 그냥 일어나라고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구태여 왜 문제가 될 만한 말씀을 했을까요? 9절을 보십시오. 그날이 안식일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들이 시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은 것이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그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4계명인 안식이를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철저히 지킨다고 총 39개 조의 안식일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죽어가는 사람도 치료하지 않고 간단한 응급조치만 했습니다.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침을 뱉어서 땅이 파이면 밭을 간 것으로 간주해서 안식일을 어긴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굳이 침을 뱉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바위에다 침을 뱉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천 보 이상을 걷지 못했습니다. 손수건도 나르지 못했습니다. 병자를 침대에 누인 채 운반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침대만 운반하는 것은 노동이라 생각하여 안식일 법을 어긴 것으로 죄로 취급했습니다. 39번째 규정이 물건을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에게 안식일 법을 어기게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줄 알고 어떻게 합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디오코'라는 말은 사냥개를 앞세워 범법자를 추적하고 그를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괴롭게 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안식일 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시하며 안식일의 주인인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마12:8) 그리고 안식일의 본질은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병든 자를 고침으로 그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참 안식은 바로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 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씀합니다. 그 안식일의 실체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인생의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길 원할까요?

그가 들었던 자리, 들 거, 침상은 그가 38년 동안 누워있었던 안식일로 대표되는 율법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38년 동안 율법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불구가 된 유대인, 그 율법에 노예가 되어 있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우리 성도님들에 네 자리는 무엇입니까?

신앙생활 잘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제도 형식입니까?

예배의 대상이 예수님께 초점을 두지 않고 교회마다 다른 예배 형식에 초점을 두면 어디에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인 나의 절대적 가치관입니까? 같은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가치관도 다 다릅니다.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하기 위한 가치관을 절대시 삼으면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 가치관은 늘 갈등과 충돌이 생깁니다. 그것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표준화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자꾸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식일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처럼 살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우리가 믿는 분도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모델로 삼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자꾸 사람을 보고, 제도를 보고, 부수적인 것을 보면 냉소적이되고 학습 무기력증에 빠져 버립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변하는 것을 초점을 두고 살아가면 참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옳은가 그른가? 맞는가 틀린가? 지켰느냐 안 지켰냐?”에만 관심을 가지면 참 안식이 없습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면 안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심판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사람이 많이 나오는가 적게 나오는가? 주차장이 넓은가 좁은가? 유명인이 나오는가 안나오는가? 전라도 사람들이 있는가 경상도 사람들이 있는가? 누가 알아주는가 안 알아주는가? 시설이 좋은가 안 좋은가?” 등에 초점을 맞추면 자신이 심판자로 살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가정 생활하면서도 “돈 잘 버는가? 공부 잘하는가? 잘 생겼는가? 성격 좋은가?” 같은 것 초점을 맞추며 38년 동안 시비거리로 삼고 가정의 심판자로 살면 살면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가면 갈수록 행복해지고,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할 텐데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위험합니다. 사람의 정상 체온은 36~37.5도라고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36.5도로 살고 이 온도가 몸의 신진대사와 혈액순환, 면역체계 작동 등이 가장 활발한 온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1도만 떨어져도 면역력은 30%, 신진대사 12%나 떨어진다고 합니다. 1도만 올라가면 면역력이 최대 5-6배 높아진다고 합니다. 0.5도만 떨어져도 당뇨병이나 골다공증, 암, 알츠하이머병(노인성 치매) 등과 같은 질환에 걸리기 쉽게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는 하루 5,000개의 암세포가 생기지만 면역력에 문제없다면 암세포가 종양으로 성장하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1.5도 낮아 35도가 되면 암세포가 증식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체온이 33도로 내려가면 근육이 딱딱해지고 환각상태에 빠지고, 30~31도가 되면 의식이 없어지고, 29도가 되면 맥박과 호흡이 느려지고, 28도 이하로 떨어지면 반사 기능이 없어지고, 27도가 되면 사망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영적 신앙으로 대비해 보십시오. 우리 성도님의 영적 온도는 몇도입니까? 체온이 떨어지면 두통이 생긴답니다. 기침, 구토, 어깨결림, 초조, 불안, 분면, 가슴 두근거림, 설사, 변비, 빈뇨, 요통, 무릎 통증, 수족냉증 등이 생긴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이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체온을 높이기 위해서는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반신욕과 족욕을 하라는 것입니다. “부추ㆍ생강ㆍ쑥ㆍ계피”와 같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신 예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유산소 운동인 기도를 하십시오, 회개의 메시지가 들려 올 때 분노하고 회피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와 뜨겁게 회개하고 목욕을 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먹어 보십시오. 예수님께 나와 부르짖어 찬양해 보십시오. 스트레스가 떠나갑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참된 안식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의지해야 할 것이 아니라 들고 다스리여야 할 들거가 무엇입니까? 행복을 줄 것라고 생각하는 물질입니까? 미래를 활짝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입니다. 바른 판단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입니까? 자신을 왕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윤리적 삶입니까? 38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붙들고 있는 침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안락을 줄 것이라고 붙들고 매달린 침상이 무엇입니까? 베데스다 연못입니까? 어떤 교회가, 특별한 목회자가 참 자유와 신앙의 행복과 진정한 안식을 주는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기업만 우리 가정에 경제적 자유와 행복과 진정한 안식을 주는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류 대학만 우리 자녀들에게 자유와 행복 진정한 안식을 주는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지금 내가 누워있는 내 침상입니다. 다른 곳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거운 짐을 다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만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라고 말씀했습니다.

올 한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 모든 올무에서 벗어나 참 안식을 누리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안식을 주십니다. 아무리 화려한 침상에 누워있다 해도 예수님 없는 인간은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사랑은 끝없지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결핍으로 갈등과 다툼과 전쟁을 치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결핍을 극복하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만든 올무로 자유를 제안하고 평안을 내팽개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올 한 해 예수님을 만나 모든 올무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3. 올 한 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죄의 노예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참된 자유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걸어가라”고 세 번째 명령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계속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계속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떤 교훈을 포함한 내용이겠습니까? 율법의 속박에 사는 사람에게 이제는 율법의 속박이 아니라 이제는 죄 용서받고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복음 안에서 살라는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갑니까? 명절에 성전에 한두 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시 성전에서 누구를 찾아갑니까? 38년 병에서 고침 받은 그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는 38년 동안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의 집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케티 하마르타네" 이 말은 "더 이상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 38년의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이 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다 그 원인이 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겸손하게 하기 위해 주신 질병도 있습니다(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걸린 질병도 있습니다(요11:4). 욥처럼 사단의 시험으로 질병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욥2:7). 때로는 영적으로 훈련시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부주의로, 잘못된 습관으로, 전염병으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센씨 병에 걸린 모세의 누이 미리암처럼(민 12:1-16), 교만하다 발에 불치의 병이 든 아사가 왕(대하 16:12-14)처럼, 제사장만이 하는 제사를 드리다가 한센씨 병에 걸린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걸린 질병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6장 14-16절에서는 질병의 원인에 대하여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찐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은 죄로 인하여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청소년 사망원인 중 1위인 질병이 에이즈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매년 약 200만 명이 신규로 감염되며, 약 120만 명이 사망한다고 합니다. 이 질병에 걸리는 가장 큰 이유가 문란한 성생활입니다. "에이즈의 감염경로가 밝혀진 사례 중 99%가량은 성접촉으로 인한 감염"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사람의 질병도 죄의 결과로 발생된 질병이었습니다. 죄가 인간을 비참하게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38년의 인생을 완전히 짐승취급도 못받는 인생을 살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행복해지고 참 만족을 누리려면 육신의 질병만 고쳐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는 단절을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단절을 만들고, 인간과 단절을 만들고, 자신과 단절을 만들어 버립니다. 진정한 행복과 단절을 만들어 버립니다.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중독이 되어 그 감옥에 갇혀 가두어 버립니다. 작은 불씨라고 놓아 두면 온 산을 태워 버립니다. 죄의 심각성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1:29:300의 법칙입니다. 눈을 치우지 않았을 때 중상자가 1명 나올 경우 경상자는 29명, 경미한 경우는 300명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1:10:100의 법칙이 있습니다. 물건의 불량이 생길 경우 즉시 고치면 1의 원가가 들지만 문책이 두려워 문제를 숨기고 그대로 회사를 나서면 10의 비용이 들고, 고객으로부터 클레임이 들어오면 100의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죄로 말미암아 질병에 걸려 38년 동안 인생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 그 죄를 누가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 양문을 통과하여 영원한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어떤 죄라도 용서함 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구원시키려도 오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넘어졌던 그 죄가 우리의 숨통을 끊으려고 올가미를 메고 있는데 그 올가미를 끊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죄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구멍 난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진정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살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의 문제, 죄의 삯으로 주어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그래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 누구도 정죄하지 못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3)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롬8:38)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죄로부터 해방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24절을 같이 읽에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실 때 걸어가라는 말은 계속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한 번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올 한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죄의 노예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은혜로 선택해 주시는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1. 올 한 해 하나님 크신 은혜를 받아 불구에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올 한 해 예수님을 만나 올무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참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3. 올 한 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죄의 노예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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