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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신앙생활(9) 핍박과 싸움(단3:13-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871 추천수:5 220.120.123.244
2019-03-03 08:55:09

 

승리하는 신앙생활(9) 핍박과 싸움

단3:13-18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세계 역사상 나라마다 혁명운동이나 민족운동은 일어났으나 3.1운동처럼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궐기한 투쟁사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중심 세력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3.1절 날짜부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장례 일정에 맞춰 1919년 3월 2일에 거사를 하려고 했지만, 그 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인 반대하여 토요일인 3.1일로 잡았다고 합니다. 독립선언서 대표만 보아도 기독교가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인사였습니다. 목사 10명, 장로 2명, 전도사 3명, 집사 1명이었습니다. 당시 대다수 불교나 백만이 넘는 천도교에 비하면 기독교 인구는 2%도 안 되었습니다. 3.1운동이 있기 전 "중국에서의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신한 청년단의조직, 국내의 서울과 평양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 일본에서의 2.8 독립선언 등이 있었는데 다 기독교인 중심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의 불씨가 된 일본 유학생 중심으로 일어난 2.8 독립선언서를 한국에 몰래 가지고 들어와 퍼뜨린 분도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불리우는 신앙인 김마리아였습니다.

피해를 당한 수를 보아도 기독교인이 중심에서 3.1운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자가 기독교인이 2,039명, 천도교인 1,063명, 유교인 55명, 불교인 41명으로서 기독교인이 60% 이상을 차지했던 것이 역사에 남은 기록입니다.

물론 초기에는 천도교와 함께 중심적인 일을 감당하였으나 첫날 만세운동은 모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당일 독립 만세운동은 서울을 비롯해 평양, 선천, 원산, 의주 등 12곳에서, 모두 교회 내지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평양과 의주 만세 시위의 주동자는 김선두와 강규찬, 유여대 등 목사들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규모의 조직과 통신망을 가진 조직은 교회였고 교인과 기독교 학교 학생들을 통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는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이 독립만세 운동은 3월 4일 경이 되자 전국적인 운동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시위 방법도 기독교인이 주도했습니다. 투쟁방법인 “독립단 통고문”이 있습니다. ①일본인을 모욕하지 말 것. ②돌을 던지거나 주먹을 치는 등의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③매일 기도와 성경묵상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 3시에 기도하고 주일은 금식하며 월요일 이사야 10장, 화요일 예레미야 12장, 수요일 신명기 28장, 목요일 야고보서 5장, 금요일 이사야 59장, 토요일 로마서 8장을 읽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최남선은 선언서를 기초하면서 기독교 이념을 수용,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보편적 가치관과 인류 공존을 지향하며 비폭력 평화를 중심으로 작성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당시 미국 기독교 연합회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독립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은 지금 한국에서 동의어가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제는 대대적으로 기독교인을 핍박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것을 보면 손실액의 70%가 기독교였고, 47교회가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3월 3일 강서군 소재의 사천교회에서 송현근 목사님은 성도 13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했는데 강서 사건으로 63명이 죽었고 20여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심지어 제암리에서는 교인들을 예배당에 가두어 놓고 불에 태워 죽였고, 나오는 사람을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일제는 기독교인을 무지막지하게 핍박하고 탄압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20만이 넘는 성도와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 개의 집회소,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천 3백 여명을 거느린 교회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2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는 유혹이고 하나는 핍박입니다. 이것이 영적 전투에서 사탄이 사용하는 두 날개입니다. 사탄은 유혹과 핍박이라는 두 날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영적 전투에서 실패하게 만듭니다. 민족대표 33명 중 세 명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천도교 최린과 기독교 정춘수 목사와 박희도 전도사입니다. 정춘수 목사는 3.1운동으로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고문 앞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풀려난 후 일제의 유혹에 넘어가 감리교 황민화에 앞장섰습니다. 침략전쟁에 나간 일본군을 위한 특별기도는 물론 국방헌금과 무기제조를 위해 철문과 교회 종(鐘) 헌납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 그는 감리교 소속 일부 교회를 팔아 감리교단 명의로 비행기 3대를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그의 친일행적이 교단 내에서 논란이 일자 그는 자신의 죄과를 반성하기는커녕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1949년 천주교로 개종해버렸습니다.

사탄은 유혹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의 강력한 무기가 핍박입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권력구조를 통해 신앙인을 학대하고 핍박합니다.

그러나 시대마다 어떤 핍박에도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고 승리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앙인 유관순 열사는 수많은 핍박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당시 17살 고등학교 여학생인 유관순 열사를 일제는 고문으로 핍박하였습니다. 머리에 콜타르를 발라 가발 벗기듯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고, 벤치로 손톱과 발톱을 강제로 뽑았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상자 안에 3일간 감금하고, 입과 호수를 연결하여 물 주입하고, 달군 쇠로 몸을 지지고, 다른 독립 열사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합니다. 상체를 벗겨 공중에 매달고 밤낮없이 채찍으로 후려칠 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에 개 줄을 묶은 채 네발로 기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헝겊을 얼굴에 덮고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전기고문은 물론 관에 넣고 물을 부어 질식시키도 하였답니다. 알몸으로 성고문을 하였답니다. 일제가 공공연히 떠든 말 가운데 하나는 “조선 사람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고문을 견디지 못하면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그 모신 고문과 핍박을 견디어 냈습니다. 기도의 사람 유관순 열사는 만세 운동을 하기 전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그 모진 핍박을 견디며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순교하였습니다. 결국, 유관순 열사는 사단이 사용하는 핍박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 도마 안중근 의사도 그 모지 고문 앞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핍박 앞에서도 끝까지 승리한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죽는 날까지 핍박과 싸우면 삽니다. 크고 작은 어떤 핍박에서도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핍박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1. 핍박을 받기 전부터 말씀의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12,18).

금광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용광로에 들어가 보아야 압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신앙인인지 가짜 신앙인인지를 핍박을 받아 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핍박을 받기 전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만 십자가를 만나자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진짜 신앙인이 되러 죽음 앞에서 부인하지 않고 담대하게 승리하였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핍박 앞에서 어떻게 승리합니까? 당시 도를 맡은 고위 공무원입니다. 지금 말하면 도지사쯤 되었을 것같습니다. 모든 나라 공무원들이 모여 왕의 신상 앞에 절을하는데 자신들도 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만약 절을 하지 아니하면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 문화에서 조직문화의 법칙을 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직장을 잃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명예와 권력 재산을 잃느냐 얻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인생 전체가 달린 문제입니다. 이런 위기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결과를 예측해 봅니다. 만약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용광로에 들어갈 것이고 그리고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하다 죽게 될 것이고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이들을 역적의 가족이 되어 비참하게 생활할 것이다라고 예측을 합니다. 그저 한 번 모른 체하고 절을 하면 권력도 명예도 부도 잃지 않고 대대로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머리만 한 번 숙이면 되는 일입니다.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12절을 보세요. 절하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세요. 어떤 경우도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칙을 붙드는 신앙입니다. 상대적 원칙이 아니라 절대적 원칙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상황을 초월하여 붙드는 원칙입니다. 결과를 예측하고 원칙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말씀의 원칙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들 셋은 한 사람도 배반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원칙을 붙들었습니다. 출20:3-6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원칙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관현악단이 신상에게 절을 하라고 연주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였지만 이 세 사람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성적인 예측대로 되어 졌습니까? 아닙니다. 원칙을 붙드니까 원칙에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측하는 것은 반드시 예측한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던 집사님의 아버님은 6.25 때 월남하면서 공산당에게 잡혔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 나오라고 했답니다. 당당하게 예수를 믿는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군인이 자신만 살려주고 다른 사람을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내 시간이 아닙니다. 미래의 시간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개연성에 따라 일반적으로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있으면 개연성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 법칙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모든 명예와 권력, 부를 잃어야 할 사람이 잃지 않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분노한 왕은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하여 그들을 결박하여 풀무 가운데 던졌습니다. 죽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합니다. 결박된 것을 풀어졌는데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이성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앙적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오늘날도 핍박 앞에서 말씀의 원칙을 붙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축복을 신비한 방법으로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핍박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원칙 없는 인생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삶의 원칙을 무엇으로 세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삶의 원칙을 성경적 원리에 의해 세워 보고 싶지 않습니까? 핍박 앞에서는 예측된 결과보다 하나님의 명령, 이성보다 신앙, 상황보다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2. 핍박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인내해야 합니다.(17)

이들은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인데 바벨론 나라에 와서 도지사가 되었다면 대단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왕은 심히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 있는 아까운 인재였기 때문에 당장 풀무불 속에 집어 넣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들을 회유합니다. 다시 기회를 줄 터이니까 관현악이 울리면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것입니다. 이들도 왕이 자신들을 얼마나 아끼는 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왕은 그들을 설득합니다. 너희들이 믿는 신이 너희 나라도 구원하지 못하여 이렇게 멸망되었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그 불꽃 가운데 너희를 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희 나라가 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느브갓네살의 힘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의지하지 말고 인간 느브갓네살을 의지하여 생명도 건지고 명예와 부와 권력을 함께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때 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왕이 풀무불 속에 집어넣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네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입니다. 그분은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풀무불 가운데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핍박의 현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핍박을 받으면 우리와 함께 핍박받고 있는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인내하며 승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핍박은 십자가의 핍박에 비하면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을 조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직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핍박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면 다 핍박과 싸움에서 실패하고 변절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으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엘리 비젤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그가 강제수용소에 있을 때의 수용소에 발전소가 폭파되는 사건이 있었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유대인 세 사람이 잡혀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답니다. 두 어른은 금방 죽었지만 가벼운 한 소년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 30분 이상 몸부림쳤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이때 비젤 박사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릴 들었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바로 여기에 있지.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바동거리고 있지.’라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핍박에 현장에서 같이 십자가를 지시고 있는 것입니다.

엔도 슈샤꾸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보면 박해받는 성도를 바다에 십자가를 세워 묶어 놓습니다. 이제 밀물 때가 되어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이윽고 물 속에 그들은 잠겨서 죽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신도드를 보면서 화란 신부는 그들을 살려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에 그의 심경 깊은 곳에 고요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에 우리 주님도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 주님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무수한 핍박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남은 고난은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3. 핍박 앞에서 핍박이 끝나면 죽음을 초월하는 내세가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18).

사드락과 메사, 아벳느고는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왔지만 출세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핍박 앞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현세의 행복을 위해 신상에게 절하고 살 것인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내세를 보며 절개를 지킬 것인가입니다. 이때 어떻게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같이 일어 보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구원해 주지 않고 그 풀무불 가운데 타서 죽을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현세에서는 죽고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신앙이 없으면 극심한 핍박 앞에서 변절하고 굴복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국가 권력 앞에 수많은 신앙인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리비아, 파키스탄, 수단, 에리트레아, 예멘, 이란, 인도, 중국 등 73개 국가에서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1년이면 신앙 때문에 9만여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6분에 1명꼴로 순교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은 국가의 모든 것이 김 씨 일가를 우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성경만 소지하고 유포해도 사형을 당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핍박 앞에서 어떻게 변절하지 않고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천국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고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에서 사랑하는 예수님과 영원토록 산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핍박과 싸움에서 승리한 우리 신앙 선배님 중에 가장 존경받은 목사님은 아마 주기철 목사님과 49세에 공산당에게 순교한 손양원 목사님일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의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조선 사람을 일본화시키기 위해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궤변으로 이것을 반대하면 기독교 학교도 문을 닫게 하고 교회도 문을 닫게 하였습니다. 일제의 핍박 앞에서 1936년에 가톨릭이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가 차례로 굴복했습니다. 침례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교단이 강제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1938년 9월 10일에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이미 일본의 회유에 굴복했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솔선해서 이행하겠다.'는 결의안을 발표합니다. 강대상 앞에는 경찰 간부들 수십 명이 긴 칼을 차고 앉아 있고, 양편 좌우에는 무장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결국, 장로교도 신사참배에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일제에 의해 목사직이 파면되었습니다. 일제는 감옥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 절개를 꺾기 위해서 잔인한 고문을 했습니다. 가족을 불러다 놓고 그 앞에서 공중에 매달아 놓고 매를 쳐서 그네처럼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습니다. 주 목사님은 20회가 되기 전에 기절했답니다. 다시 찬물로 정신이 들게 하고 목사님을 책상 위에 눕혀 물에 시뻘건 고춧가루를 탄 주전자를 목사님 입에다 붇기 시작했답니다. 배가 농구공처럼 부풀어 오르자 일본 경찰들은 부풀어 오른 주기철 목사의 배 위에 의자를 올려놓고 히죽거리면서 두 사람이 갑자기 앉았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너무 충격을 받아 실어증이 걸렸다고 합니다. 모친은 그 전에 기절했으며, 사모님은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오, 주님' 하면서 기도만 하셨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마지막 전기고문으로 쇠약해져 간수 등에 업혀서 면회실로 온 주 목사님에게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절대 살아서는 이 문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때 주 목사님은 "그렇소. 내 오래지 않아 주님 나라에 갈거요. 거기서 교회와 조선을 위해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 교회를 구해주기 바랄 뿐이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밤 9시 경, 목사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고는 47세 나이에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무지막지한 핍박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주님을 만날 그날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핍박과 싸움에서 지조를 지키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목사님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할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감옥의 갇힘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라고 고백하며 핍박과 싸워 이겼답니다.

핍박과 싸움에서 승리한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29)"

설령 이 땅에서 핍박 가운데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하나님이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해 주실 것이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아갈 때 그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자신과 자신의 백성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영원한 천국 우리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친구를 풀무 불 가운데에도 천사를 보내어 보호해 주십니다. 왕이 그들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해 줍니다.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 대충 목숨만 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완벽하게 지키고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2-5)"

핍박과 싸움에서 이기려면

첫째, 핍박을 받기 전 말씀의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12).

둘째, 핍박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13-17)

셋째, 핍박이 끝난 후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18).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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