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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러 오신 예수님(마가복음10:42-4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558 추천수:4 112.168.96.218
2018-12-22 15:06:32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10:42-45

 

시골에서 닭을 길러 보신 분들은 가끔 닭들이 서로의 벼슬을 찍으며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닭은 서열 질서가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투스 B. 드뢰셔가 쓴 <휴머니즘의 동물학>을 보면 야생닭은 서열 질서가 강하지 않는데 좁은 공간에서 두 마리의 닭이 동시에 한 알의 알곡을 먹으려고 할 때는 서열의식이 강하게 발동한다고 합니다. 대형 닭장이라고 해도 갇혀 사는 닭들은 서열 질서가 강하여, 만날 때마다 억압과 굴종을 강요한다고 합니다. 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동물은 권력욕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동물에 대하여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최형선 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일부 원숭이들은 유아살해를 한다고 합니다. 짖는 원숭이의 경우, 유아 사망의 40퍼센트 이상이 수컷의 유아살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암컷이 새끼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새끼들도 죽지 않으려고 어미에게 바짝 붙어 발버둥을 치지만 힘센 우두머리 수컷에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권력을 쟁취한 새 우두머리 수컷은 이전 우두머리 수컷의 새끼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수유 중인 암컷들을 임신 가능 상태로 유도해 제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 우두머리 원숭이의 폭력 앞에 권력에 밀린 수컷이나 힘에 밀린 암컷은 우두머리의 처분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에 밀린 수컷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우두머리 수컷이 늙어 힘이 빠지면 권력을 잡고, 자신도 선배 우두머리처럼 또다시 유아살해를 되풀이한다고 합니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이에나도, 사자도, 성충이 되어 하루 이틀 사는 하루살이도, 사회성이 발달한 벌도, 개미도 치열한 권력다툼을 합니다.

인간은 어떻습니까? 살벌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이며 그 밑바닥에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니체는 일찍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아들러 역시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원천을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은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습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끝없이 자기 지배권을 확장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호랑이는 그저 배부르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냉장고에 쌓아놓고 통장에 죽을 때까지 다 쓸 수없이 돈이 있어도 더 쌓기 위해 피를 튀기는 경쟁을 합니다. 그것을 극렬하게 보여주는 세계가 정치입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오로지 다음 선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인과 한 패거리가 된 정치 지향적 언론을 보십시오. 보기도 듣기도 싫을 정도로 얼마나 정치적 보도를 합니까? 지배욕이 강한 정치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보다는 오직 다음 선거에만 집착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갖가지 이슈를 만들어 '밀어내기(push)'와 '끌어당기기(pull)'를 통해 편을 가르고 차기 선거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 불리기에 몰입합니다. 모든 것을 권력 회득에 초점을 맞추고, 패거리나 시정잡배들처럼 옳고 그름은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되고, 사고는 흑백 논리의 감옥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국민과 나라에 무엇이 진정 유익한가 보다는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 국민으로부터 자신들이 환심을 사 지지도를 놓이는 데만 관심을 가집니다. 자기가 권력을 잡아야 하고, 자기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정치인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가복음 10:42)” 정치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 권력자 헤롯 대왕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잔인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아주 교만하고 교활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대단한 토건 사업을 하여 46년간에 걸쳐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습니다. 토목 사업을 벌여 성채와 수로, 극장, 공공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경제도 부흥하고 영토도 확장하고 유대 나라에 평화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폭력적이었습니다. 자신의 고모부를 처형한 김정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에서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인 것처럼 성격이 아주 잔인하였습니다. 10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정적으로 의심되는 아내와 장모, 동서 등 관계된 인물 45명과 함께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왕자 3명과 측근들을 처형하고 재산까지 몰수해 버렸습니다. 헤롯대왕이 죽자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40년 통치한 분봉왕이 된 헤롯 안디바 역시 잔인한 왕입니다. 이복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빼앗은 사람이고 그 잘못을 지적한 세례 요한을 잔인하게 죽인 사람입니다.

문명화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제 정세를 보십시오. 세계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은 치열하게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중국이 기술강국이 되지 못하도록 첨단기술 육성 정책인 ‘중국 제조 2025’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제성장 추세라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30년을 전후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하는데 전쟁으로 세운 미국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1870년대에 이미 경제와 군사력에 세계 1위의 자리에 오른 미국의 군사력은 2위인 중국보다 10배가 강한 나라이고 중국은 동맹국이 북한 하나이지만 미국은 45개의 동맹국 보유한 나라입니다. 중국이 해군력을 확산하고 있지만 미국 해군 2-17번까지 합친 것보다 강한 나라입니다. 200년 사용할 석유가 있고, 100년 사용할 천연 가스 보유한 나라입니다. 현재 채굴해서 쓸 수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총량이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이란, 중국과 석유생산국기구(OPEC) 소속 국가들의 석유와 가스 총량보다 더 많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시장 경제 이념 확산을 통해 패권을 확장해가는 미국이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세계화는 곧 미국화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록 미국의 패권주의는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시하다가는 우리나라처럼 IMF 같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화웨이 최고 재무책임자를 체포한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정보통신 기술에서 누가 지배력을 가지느냐입니다.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인 5G 상용화를 앞두고 지배권 확대를 위해 기술패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5G주력 장비로 기술력도 좋고 가격도 싼 중국의 화웨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미 135개국에서 상용하자 미국과 유럽 선진국이 국가 안보와 관련하여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패권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시장 점유율에서 화웨이가 28%이고 에릭슨은 27%, 삼성은 3%밖에 되지 않는데 중국이 5G를 선점해 버리면 미국은 중국에 발목이 잡힐 것이라고 합니다.

기업이나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이비드 L. 와이너는 그의 책 <권력중독자>에서 권력중독자는 "외면적으로는 순진하고 따뜻한 성품"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를 보통사람과 구분시켜주는 특성은 "좀 더 높은 수준의 지배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종종 도덕이나 윤리, 예의, 상식마저 무시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배력이 강한 권력중독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대 망상적 신념"을 가지고 있고 "역지사지"나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등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든지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울 방도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고 합니다. 권력중독자는 독특한 견해 내지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도전받거나 침범당할 경우 현실에 대해 맹목적이고 사나우며 포악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권력 욕구가 극단적으로 높은 상태의 사람은 강렬한 욕망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심각한 사람들은 으름장을 놓고 무례한 태도를 취하거나 괴로움을 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 밀로셰비치 등처럼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대상은 누구든 무엇이든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린다고 합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권력을 차지하고 하는 사람의 욕구는 대단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1대왕 사울을 보십시오. 자기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다녔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보십시오.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의 왕위까지 빼앗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권력을 차지하고 하는 사람의 욕구는 대단합니다.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모든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 즉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인간의 본성은 바로 우월함에 대한 열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얼마나 서열의식이 강합니까? 연장자 숭배문화는 절대적입니다. 출생 시기로 강고한 위계질서, 서열문화가 생깁니다. 신분의 서열 문화도 대단합니다. 대학도 서열을 매기고, 직장도, 심지어는 교회도 서열을 매깁니다. 국립묘지에 가면 죽어서도 서열이 있습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하며 나이, 짬밥, 학번, 인사년도, 시험기수, 근무년수, 직급 등에 따른 서열 문화가 인간관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연봉으로 서열화하고, 학벌로 서열화하고, 미모로 서열화하고, 심지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서열화하고, 학력도 출신 대학, 출신 고등학교, 출신 대학원, 학위도 국내 학위, 해외 학위로 구분하여 서열화합니다. 어느 모임에 가나 서열순서로 앉아야 합니다. 직원들이 식당에서 회식하러 가면 각자 머릿속에서는 서열 컴퓨터가 작동하여 자신이 앉을 자리를 추출해내 차질 없이 앉습니다. 사무실의 책상이나 의자 구조도 서열을 반영합니다. 같아서는 안 됩니다. 일반 사무원은 서랍 둘 있는 책상, 대리는 오른쪽에 서랍 두어 개가 더 붙고, 과장은 ㄱ자형, 부장은 ㄷ자형, 이사는 ㅌ자형이어야 합니다. 의자도 직각의자, 팔꿈치 받침이 하나 있는 의자, 양쪽에 둘 있는 의자, 돌리면 돌아가는 의자, 젖히면 젖혀지는 의자로 서열화되어야 모양새가 납니다. 그래서 승자독식 사회가 된 세상에서 지배하는 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합니까?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도 이 권력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12제자로 선택을 받아 오랜 세월동안 훈련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각가지 기적을 집적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권력자들이 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무엇을 예수님께 요구합니까?

3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형제가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혀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고보와 요한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의 이모입니다. 혈연이라는 연고로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청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지배의 자리, 섬김을 받는 자리에 나가는 지배욕 확장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집안만 유독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들도 똑같은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나의 왕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교회를 다녀도 자신의 지배권을 확대하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일 것입니다. 그래서 덜 된 교인들로 인하여 일부 교회가 세상처럼 자기 지배욕 확대를 위해 싸우다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식들에게 대형 교회를 물려 주는 것도, 교회 직분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도 결국 지배권 확대를 위한 몸부림입니다. 건강한 교회도 어느날 교회 운영과 재정문제를 놓고 육두문자를 쓰며 서로 비난하고 싸우는 것을 봅니다. 서로 의혹을 부풀리며 물고 물리는 폭로전을 하다 급기야는 어린이들 앞에서 몸싸움을 하고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서로 잘 못하겠다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잘 해보겠다고, 자신이 옳다고 싸우는데 그것 역시 결국 밑바닥을 보면 왜 목사가 독단적이냐 왜 장로가 독단적이냐 하며 서로 지배권 확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4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한센병자를 손을 내밀어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권력다툼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셨습니다.

 

어느 정도 섬겼습니까?

죽기까지 섬겼습니다. 그 생명을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심으로 섬김을 완성하였습니다. 섬김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섬김받는 자리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해 주십니까? 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섬김의 방법으로 예수님이 택한 목숨까지 버리는 그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일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남자 성도님들이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어 섬기고 싶은 비전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장로님에 대한 직분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십자가의 섬김을 외면합니다. 기도로 섬기지 않습니다. 교인들을 위해 새벽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섬김, 전도의 섬김, 봉사의 섬김도 하지 않으며, 입만 열면 교회 지도자를 험담이나 교회 비판만 하고 다니며 장로님이 되겠다고 하면 얼마나 모순된 비전이겠습니까? 제가 1년이면 천여명씩 전도하는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만약 임직자가 되었는데 새벽기도회를 교회에서 정한 기준 이하로 나오면 바로 시무에서 명예직으로 바꾸어 버린다고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서약하고 그렇게 시행한다고 합니다. 일 년에 장로님은 25명 전도를 해야 하고, 권사님과 안수집사님은 20명씩 전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전도를 못하면 장로님은 전도헌금을 일 년에 250만원, 권사님 안수집사님은 200만원씩 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것을 못하면 시무에서 바로 명예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지론은 희생과 봉사, 섬김이 없는 직분은 명예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과한 것 같은데 그것이 자신의 확고한 목회 철학이라며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섬겼습니다. 섬김을 인생의 목적으로 삶았다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4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44절에서는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섬김을 위해 희생을 감당하였습니다. 섬김을 위해 수치를 감당하였습니다. 섬김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섬김을 위해 비난과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종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발을 씻긴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섬김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섬김은 머리에서만 있으면 효력이 없습니다. 실행될 때 빛이 되고 향기가 됩니다. 우리도 주어진 것으로 예수님처럼 섬김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섬김의 비전이 다시 회복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끝까지 섬기는 자들로 살았습니다. 자기 출세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섬김이 비전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섬기다 순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랑으로 죽기까지 사랑으로 섬기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섬기다 순교를 하였습니다. 모든 제들이 순교의 자리에 내려가기까지 섬기는 자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결혼한 목적, 정치하는 목적, 교회 다니는 목적, 사업을 하는 목적, 공부 열심히 하는 목적이 무엇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기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사탄은 계속 우리를 유혹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처럼 되라고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할 때도 사탄은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사탄에게 엎드려 경배하라" 그러면 어떻게 해주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사탄은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최고가 되라고 말합니다. 섬김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한 번 사는 세상인데 멋지게 권력과 돈을 쥐고 섬김 받으며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고 사는 삶이 훨씬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유혹에 초대왕 사울이 넘어졌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왕들이 넘어갔습니다. 수많은 세상 권력자들이 넘어갔습니다. 아간이 넘어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넘어졌습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니골라가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섬김의 도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나에게 준 건강, 나에게 준 지식, 나에게 준 미모, 나에게 준 경제, 나에게 준 달란트는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원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었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2:20)"입니다. 도와주라고 만든 것입니다. 지배하고, 다투고, 서열 경쟁하고, 권력욕을 가지고 다스리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섬기라고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 섬기라고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가족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교회 직분 왜 주었습니까? 계급으로 주었습니까? 서열로 주었습니까?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2)"라고 했습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개척하여 행복한 목회를 하시는 한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900여 명이 출석한 교회를 이루어 행복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 자기 교회 간증을 했습니다. 대형교회 부목사로 섬겼는데 교회에서 100여명과 함께 개척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장로님이 개척 맴버로 따라 나왔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이 얼마나 교회를 잠 섬기는 지 목사님 험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 야단을 치고, 돈을 풀지 않는다고 말하면 내가 교회 재정이 어려우니까 절약하자고 했다면서 총대를 혼자 다 멨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온갖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것 다 자신이 그랬다고 하며 목사님을 방어하며 교회를 섬겼다고 합니다. 100여명이 나와 개척했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교회에서 대장노릇하려고 하는 직분자들이 있었답니다. 오직 장로가 되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교인들을 포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금이라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으면 목사님 대신 장로님이 가서 야단을 쳤답니다. 7년 동안을 그렇게 교회를 섬겼답니다. 그래서 교회가 2400평의 땅을 사고 1000여평의 교회를 건축하고 900여명 나오는 교회로 부흥되자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왔답니다. “목사님,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저는 섬기기 위해 목사님과 함께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제가 이교회 계속 있으면 대장노릇할 것같아 다시 본 교회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 교회로 다시 돌아가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진 섬김입니까? 개척교회만 찾아다니며 섬기는 어떤 돈 많은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어려운 개척교회를 찾아다니며 교회를 섬기다 어느 정도 교회가 부흥이 되면 또 다시 어려운 교회, 또 다시 어려운 교회를 가서 섬긴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섬김을 받으려고 다니는 곳이 아니라 섬기려고 다니는 곳입니다. 인사도 섬김을 받으려고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인사를 하여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로 섬기는 것입니다. 작은 섬김, 다른 사람의 명예를 보호해 주는 섬김, 보편적인 예절로 섬김, 대접하는 섬김, 들어 주는 섬김, 서로 짐을 져 주는 섬김,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섬김 등 각종 섬김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누가 더 섬김은 받느냐로 경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누가 더 잘 섬기느냐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물결로 세상을 섬기는 세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섬기면 됩니다. 경제력이 있으신 분은 경제력으로 섬깁니다. 지식이 있는 분들은 지식으로 섬기면 됩니다. 권력이 있으면 권력으로, 건강이 있으신 분들은 건강으로 섬기면 됩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쓰임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고 기쁜 일입니까?

 

섬기면 어떤 결과나 나타납니까?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올라가려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4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자리는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차지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법칙입니다. 43, 44절에 섬기는 자가 오히려 크게 되고, 종이 되는 자가 오히려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가 사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박탈이나 손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돈 들여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간들여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존심 상하며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섬김이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손해라고 생각하는데 섬김이 오히려 복이라는 것입니다. 섬기면 커진다는 것입니다. 종이되어 섬기면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가 5천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같습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음식이지만 그것이 섬김의 도구로 쓰이니까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 목자로 있을 때 쓰던 것입니다. 익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섬김의 도구로 쓰이니까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 수많은 생명을 살려냅니다.

몇 년 전 아는 목사님을 만나 아들 결혼시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혼 날짜를 잡나 놓았는데 며느리 될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검사하였는데 폐암 말기 진단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앞당겼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이틀 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교회 장로님이셨는데 딸 결혼식 때 온 교인들이 참여하여 축하해 주었는데 장례식에도 온 교인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장로님으로 얼마나 교회와 교인들을 잘 섬겼는지 딸보다 교인들이 더 울더라는 것입니다. 특히 청년 대학생들에게 장로님 늘 밥을 사주며 용기를 주고 신앙을 지도했는데 청년 대학생들이 많이 울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우리가 섬겼던 추억들이 남게 됩니다.

Warren Wiersbe 목사님은 "오늘날 교회 속의 슬픈 현상은 유명한 사람들은 많지만 종들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이라고 했습니다.

D. L. Moody 목사: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데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가에 따라 판가름 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김의 도를 가르쳐 준 후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4-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섬김의 도를 알고 행하면 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꾸 사람들이 섬김이 손해이고 박탈이라고 생각하니까 섬김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보면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1)" 언젠가는 상급받을 날이 오고야 맙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7)"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때로는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호된 비판을 받지만 우리의 섬김의 눈물을 다 씻어 줄 날이 오고야 맙니다.

세상에서도 섬기면 손해되고 박탈되며 없어지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도 서비스가 우수한 회사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서비스"라는 책을 쓴 발 지(Val Gee)는 "고객의 68%가 단골이 되지 않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나쁜 서비스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만 고객이 10-20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서비스도 상품이다 "를 쓴 칼 알브레히트는 "우수한 제품을 미흡한 서비스로 제공하느니, 차라리 평범한 상품을 우수한 서비스로 제공하는 편이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서비스의 황금률을 "당신이 고객일 때 받고 싶은 대접 그대로 고객들을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섬김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회사가 잘되고 섬기는 가정이 행복하고, 섬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섬기는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1등만이 기억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닙니다. 1등도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들은 오래도록 기억됩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주어진 인생 섬기지 않아도 썩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후회 없이 섬기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섬기면 섬긴 만큼 행복해지고 신이 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섬기기 위해 공부하십시오. 돈을 버는 것도 섬기기 위해 돈을 버십시오. 사업도 섬기기 위해 사업하고, 직장도 섬기기 위해 다니십시오, 권력도 명예도, 지식도, 지위도 섬기기 위해 추구하십시오. 교회 올 때 섬기기 위해 교회에 나와 보십시오. 예배드릴 때 섬기기 위해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말씀을 들을 때 섬기기 위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찬양할 때 섬기기 위해 찬양을 드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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