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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음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1840 추천수:19 112.168.96.71
2014-11-25 13:56:58
길다 래드너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코미디언이었던 그녀가 난소암으로 투병하던 몇 달 동안 나는 그녀에게 성악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길다의 친구인 앤 또한 내가 가르쳤는데, 앤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는 뭔가 즐거운 일이 필요하다고 길다에게 말하곤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우리는 길다의 피아노 의자에 함께 앉아 발성 연습을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는 ‘원더풀 타운’의 ‘오하이오’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진지한 음악이든 재미있는 음악이든 모든 음악을 다 좋아했다. 길다가 힘껏 노래를 부를 때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실로 놀라웠다.

물론 노래를 부르다 말고 쉬어야만 하는 때도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말했다. “선생님은 매주 여기에 와서 내 가슴에 피하정맥 주사를 꽂는 것을 지켜보고, 내가 토해야 할 때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지요.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라-라-라’ 하고 발성 연습을 계속하죠. 이런 것들이 ‘괴롭지는’ 않나요?”“길다, 우리 어머니는 간호사예요. 이런 일이 괴로울 리가 없죠. 그런데 당신이 부른 마지막 음 말인데요, 반음 내려 불렀어요. 다른 게 아니라 ‘그 소리가’괴로운데요.” 길다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 둘은 폭소를 터뜨렸다. 길다는 족히 5분 동안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노래 부를 때는 정말 뿌듯해요!” 길다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길다는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풍성히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되돌려 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그녀에게 보내셨음에 나 또한 뿌듯하다.

높은 음/캐서린 스커틸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러스
-가이드 포스트 2002년 2월 호 중에서-


트리 나누기

-메이러 애브루, 뉴욕 주 뉴욕

남편 호세는 1988년 강도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호세와 나는 마약 중독자였으니 말이다. 나와 세 아이들은 무주택자 보호소를 들락거리며 3년을 보내다가 마침내 허름한 아파트에 정착하게 되었다. 호세에게서 온 편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남편이 ‘교도소 친목회’라는 단체의 인도를 받아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적어 보냈기 때문이다.

이전에 내가 알던 호세 같지가 않았다. 호세가 보내서 왔다며 곧 그 단체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쫓아냈다. 마약을 끊을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찾아와서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1989년 겨울, 호세는 ‘천사 트리’라는 프로그램에 우리 가족의 이름을 등록했다고 편지를 보냈다. 자원 봉사자들은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수감자들의 가족을 위해 선물을 사 준다고 했다.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누군가 찾아와 문을 열었더니, UPS 택배 직원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해 주지 못했던 모든 일들이 마음속에 가득 떠올랐다. 그날 밤 침상에서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마약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제겐 기적이 필요해요.’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바로 그날 밤 이후 시작된 일을 새삼깨닫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약을 복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세는 1990년에 석방되었고, 오늘날 나는 뉴욕 시의 천사 트리 담당자로 자랑스럽게 일하고 있다.

-3월호 중-


사랑의 담요
- 헬렌 멀맨,
몇 해 전 여름, 나는 어느 잡지에서 담요에 둘러싸인 여자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기사를 읽어 보니 그녀는 프로젝트 리누스의 설립자였는데, 그곳은 중환자들이나 빈곤한 아이들에게 담요를 보내 주는 기관이었다. 가정 과목 교사였던 나는 내 정든 싱어 미싱을 좋은 일에 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가게에 가서 알록달록한 무늬의 천을 산 뒤 작업에 들어갔다. 금세 다섯 장의 담요가 만들어졌다. 물론 우리 마을에는 내 일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더 있었다. 먼저 프로젝트 리누스에 전화를 해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들은 후, 하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든 자원봉사자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지부가 시작되었다. 현재는 ‘담요꾼들’이라고 불리는 6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지역 사회의 병원과 보호소에 1,700장 이상의 담요를 만들어 주고 있다. 모두 수공예로 말이다! 각각의 담요에는 우리 단체의 이름과 담요를 만든 사람의 이름을 써 붙인다. 우리가 만든 담요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원할 때마다 언제고 따스한 포옹을 전해 준다고 생각하면 기쁘기 그지없다. 담요를 받은 어느 십대 아이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바늘 한 개와 실 조금, 그리고 약간의 시간을 투자한 덕분이다. 사랑의 담요를 만드는 일은 가정 과목의 필수 과정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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