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존귀한 인생으로 살기(1) 하나님 존중하기(사무엘상2:3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370 추천수:4 220.120.123.244
2021-01-03 14:39:47

존귀한 인생으로 살기(1) 하나님 존중하기

사무엘상2:30

 

2021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존귀한 자로 살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야베스처럼 하나님 지경을 넓혀주심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하나님이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없게 해 주심으로 존귀한 자로 살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코로나19로 힘겨워하며 사는 올 한 해 비참하게 살지 말고 존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비열하게, 초라하게 살지 말고 존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업신여김받으며 조롱받으며 살지 말고 존귀하게 사시기 바랍니. 비겁하게, 졸렬하게 살지 말고 존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존귀한 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16편 3절을 통해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명예가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권력이 없든, 직장이 있던 직장이 없던, 건강하든 그렇지 못하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천국을 바라보는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 성도라는 말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남편과 아내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들과 딸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사야서 32장 8절을 통해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이사야 32:8)"라는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존귀한 자 뒤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보고 ‘그는’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올 한 해 존귀한 자로 부름을 받았으니 존귀한 일을 계획하여 실현하고 마지막까지 존귀한 일에 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 끝까지 존귀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존귀한 자로 부름을 받아 출발했다가 비천한 자로, 비열한 자로, 불행한 자로 인생을 마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존귀한 자로 부름을 받았다가 마지막 죽기까지 존귀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그 비결을 단순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단순하고 중요하며 핵심적인 원리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대단히 중요한 원리이지만 뭐 과외받고 배울 만한 것이 아닙니다.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연구해야 할 원리가 아닙니다. 단순한 법칙 단순한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관계의 황금률과 같은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존중한다는 말은 “가치 있게 여기다.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뜻입니다. 존중의 반대말은 “경멸하다. 멸시하다, 흔하게 취급하다. 천하게 취급한다”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를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자신도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존중히 여김 받으려면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 엘리는 존귀하게 부름을 받았으나 끝까지 존귀한 자로 살지 못하고 자신도, 자식도, 가문도 비천하게 끝나 버렸습니다.

그의 인생의 끝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성경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4장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전쟁터에 나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도 빼앗겨 버렸다는 소식을 어느날 갑자기 들은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가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안됩니다. 우리 일생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2주 동안 어릴 때부터 열심히 기도했던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 감사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사로 참 듣기 좋은 소식입니다. 본인과 부모들은 얼마나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엘리의 마지막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4장 1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존귀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마지막이 얼마나 비천한 자로 끝나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고 아들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즉사했습니다. 그것도 의자에 앉아 있다가 쓰러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이면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자식이 잘못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평생 섬겼던 하나님의 법궤가 빼앗겼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그런데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밴 며느리가 있었는데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되었습니까?(삼상4:19-20) 며느리 역시 아이를 낳고 죽고 말았습니다. 며느리는 죽어가면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가봇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말입니다. 한때 존귀한 가정으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던 가정이 졸지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고 하나님의 버림받은 비참한 가정으로 되었습니다.

2장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참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완전히 가문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구걸하는 가문으로 비천해지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 한해 존귀한 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올 마지막까지, 아니 우리 인생 마지막까지 존귀한 자로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 엘리와 엘리 가문에 하나님의 멸시를 받았습니까? 그 이유를 우리는 29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였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40년 동안 제사장으로 지낸 엘리 제사장입니다. 당시 존경받는 민족 지도자이며 대 제사장이었습니다.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스승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왕이 없을 때 40년간 사실 지금의 대통령처럼 이스라엘을 통치(삼상1:3,9)하였습니다. 자신도 들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 듣고 달려온 사무엘에게 시기하지 않고 올바르게 지도할 만큼 사심 없는 신앙이었습니다(삼상3:1-9). 슬픔에 찬 한나에게 하나님의 평안과 자비를 구할 만큼 사랑과 긍휼이 있는 지도자였습니다(1:17).

 

그런데 그의 아들들은 어떠했습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알다’는 체험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들었겠지요. 그런데 실제적으로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합니다(13). 습관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13). 사환을 시켜 불법적으로 제사 음식을 갈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책망해도 듣지 않고 멸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8:13)”라고 말씀했는데 오히려 악을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겨 주십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 믿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1장 3절을 보세요. 제사장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이해타산적 관계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이신론자, 실천적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으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같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산전수전 격어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압니다. 사업의 실패, 절망적인 인생살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고, 고침받고, 위로받고, 성령의 은사체험을 해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존경하며 하나님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런데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어떠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 자식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게 합니다. 백성들도 하나님을 멸시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결국 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가 가버립니다. 아니 하나님이 빼앗는 것보다는 스스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 스스로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주어진 축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축복도 같이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때 그 신분에 걸맞은 축복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직 내려놓으면 대통령에게 주어진 혜택도 모두 살아지는 것이고, 이등병도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고 이 땅에서 족함을 받고 재앙에서 벗어나 생명과 영광과 건강과 재물을 받는 비결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시대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배당 물건만 손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우리 교회 화단에 열리는 열매를 보면 주변 사람들이 마구 따갑니다. 올해 모과를 보니까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다 따갔습니다. 예전같으면 교회 다니지 않은 사람들도 두려워서 교회 물건 훔쳐가지 못했습니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대놓고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신앙은 천연두 바이러스에 비견할 만하지만

그보다 더 근절하기 어려운, 세상의 큰 해악 중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없으니 낙태를 합법화하고, 남자끼리 결혼하고 여자끼리, 남자 둘에 여자 하나 결혼해도 인권을 위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좋은 것이니 그것 죄라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세포 덩어리에 불과하고, 유전자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인데 무슨 영혼, 영생을 이야기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 과학이 하나님 없다고 입증했다는 과학주의, 모든 길은 똑 같이 유효하다는 다원주의, 인간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인본주의, 당신에게 진리가 내게는 진리가 아니라는 상대주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좋다는 쾌락주의, 모든 것을 물질이이라는 물질주의 등 수많은 사상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성만능에 빠져 과학적 무신론, 심리학적 무신론(프로이드의 투사 이론), 사회적 무신론(마르크스 유물주의), 도덕적 무신론(니체 철학), 인간학적 무신론(실존주의)이 하나님을 인간의 마음 속에서 추방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신론이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인간의 마음을 점령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심하게요. 천국도 지옥도 없습니다. 안심하고 즐기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파스칼은 "무신론은 일종의 질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믿지 않을 뿐입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이 별을 만들지 않았듯이, 식물학자가 꽃을 만들어 낼 수 없듯이 신학자가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으로 세상을 흔들고 있는 코로나19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인간의 오만과 교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2-14)”

그 택한 길을 저에게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영혼을 평안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해주시고 있습니다.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약속해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있다고 약속해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9-10)” 믿습니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3:7-8)”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건강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우습게 하는 시대입니다. 겁 없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민족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멸시를 받습니다. 잘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우리나라 최고위 공직자 100명의 종교를 조사한 내용이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최고위 지도층 100명을 조사해 보았더니 개신교 42명 천주교 20명 불교 9명 무종교 26명으로 나타났습니다. 매 회기 국회의원 당선자의 종교도 거의 30% 이상이 기독교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면 잘 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한꺼번에 두 아들이 고시에 합격한 분이 신문에 났왔습니다. 작은 시골 교회 장로님인데 남자만 6형제를 두었답니다. 한 해에 다섯째 아들은 행정고시와 공인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하고 막내는 사법 고시에 합격했답니다. 기자가 자식들이 그렇게 잘된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때 장로님은 “어려서부터 자식들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고 재촉해 본 적이 없어요. 그저 주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 열심히 할 것만 당부했고, 우리 부부는 아이들 앞에 기도의 본을 보이려 힘썼을 뿐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제목은 자식들이 꾸준한 신앙생활로 모두 장로 직분을 맡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29).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존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열등감, 죄의식, 낮은 자존감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참으로 예배를 통해 존귀한 자로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멸시하면 안 됩니다.

엘리와 엘리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처소에서 제물과 예물을 밟았다고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1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소녀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예배의 핵심 가치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존중히 여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신성한 제사 제도를 문란케 합니다(2:14),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합니다(2:14), 제물로 자기 배를 채웁니다(15,16).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16). 예배가 먹고 마시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적이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예배 위기에 대하여 A.W. 토저는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순결한 예배가 쇼 기획 방식으로 기획되고 있다. 계산된 멘트, 감정을 조장하는 찬양, 입맛에 달콤한 설교... 껍데기 예배는 가라, 예배가 변질되면 모든 것이 망한다.” 일부 예배가 오락 쇼처럼 변해 예배의 본질과 정신이 흐려져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가 시장이나 사교장이 되어 자기 의를 드러내고 인간 이익의 수단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 예언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예배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호6:6; 사1:10-17; 미6:6-8 등). 예레미야는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존귀함을 잃어 버리고 멸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항변합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제단에 더러운 떡을 드리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고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르게 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말1:6 이하; 2:1-9). 말라기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만군의 여화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10).”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경외,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이 즐기는 예배가 인기가 있는 시대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없고 사전에 철저하게 기획되고 연출되어 인위적인 예배꾼들의 놀이터가 되어져 감정을 자극받고 즐기는 예배가 있는 곳에 종교 소비자들이 모이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임재와 회개, 거룩과 품위, 질서는 예배보다 거짓된 신비주의와 다양한 볼거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버라이어티쇼 같은 예배가 인기를 누리는 시대입니다. 오늘 이 시대 코로나19를 통해 대면예배를 전 세계적으로 제한받고 있는데 우리는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할 때 사용하는 4가지 도구가 있습니다. 첫째는 질병이고 두 번째는 기근이고 셋째는 전쟁이고 넷째는 지진과 같은 자연환경의 경고입니다. 당시에 전쟁을 통해 경고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도 변화되지도 많습니다. 오늘 이 시대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예배에 대한 기대가 살아진 시대입니다. 예배는 짧을수록 좋고 단순할수록 좋고, 예배는 재미있는 공연일수록 더욱 좋다고 생각하며 예배는 단순한 의식과 형식, 요식 행위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배 중에 드려지는 신앙고백, 찬양, 기도, 헌금, 축도 등은 의미 없는 것이고 단지 내게 필요한 설교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유튜브를 뒤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은 성삼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인데 만남은 없고 구경만 있는 예배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초청한 분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복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교훈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만져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배 시간을 통해 성삼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코로나19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공익을 위한 방역을 무시하고 사적 모임인 예배를 강행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예배라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사람들마저 예배를 멸시하면 안 됩니다. 역사를 보아고 개인사를 보아도 예배를 멸시하면 존귀하게 대접받지 못합니다. 예배를 멸시하면 인간 삶은 짐승처럼 변합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들은 예배를 귀중히 여기며 드리는 자들입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때에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100 m 달리기가 주일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그 경기의 강력한 우승 후보인 영국의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출전 포기를 선언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메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졌답니다. 특히 영국 국민들은 그를 가리켜 `조국을 배반한 자'라고 했고, `옹졸한 광신자'라고까지 몰아붙였답니다. 며칠 후 에릭 리델은 100m 경기 대신 4백m 달리기에 출전했답니다. 중거리는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답니다. 그는 예상을 뒤엎고 끝까지 완주하여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답니다. 기자들이 우승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처음 200m를 뛸 때는 내가 뛰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친히 뛰어주셨습니다" 영국인들은 에릭 리델의 용기와 투철한 신앙에 박수를 보냈답니다. 올 한 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배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는 멸시하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을 예배로 존중히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30).

30절에 보면 하나님은 2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노니 말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어 바로의 집에서 택하여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분향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주었고 제물을 먹을 수 있도록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고를 하는 대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말을 무시하면 아버지는 존중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을 보십시오. 22절을 보십시오. 성전에서 간음합니다. 아버지가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무시합니다. 돌이키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무시하고 멸시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멸시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담도 그랬습니다. 가인도 그랬습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존귀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왕위를 잃어버렸고, 포로가 되었고, 자살하였습니다.

사사기 시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는 것입니다(삿17:6, 18:1, 19:1, 21:25).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 그 문화를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그 시대를 이어받은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삼상13장). 40살에 왕이 된 후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려 하는데 7일을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기 맘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버립니다. 사무엘이 잘못을 지적하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여 드렸다며 핑계만 늘어놓습니다. 사무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삼상 13:13)”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해도(삼상15장) 그 말씀을 무시해 버립니다. 부분적으로 적당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멸시해 버립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존중하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1㎏도 안되는 그 녀석들이 78억 인류는 1년 내내 시달렸다”제목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여전히 코로나19로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코로나19를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죄이고 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죽음입니다. 깊은 죄의 늪에 빠져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졌을 때 시대마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 죽음을 통해, 전쟁을 통해,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을 통해 경고하였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 소돔과 고모라 때도, 엘리 시대에도, 세례 요한 때에도 하나님은 경고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대는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손해라고 낭비하고,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조롱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이 시대입니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이 시대를 향하여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평생 존귀한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은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3.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