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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게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요16:20-2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937 추천수:6 220.120.123.244
2020-09-06 17:21:11

기쁨게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요16:20-24

 

코로나 19가 일상의 기쁨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 노는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연인들은 카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담을 나누는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코로나 19는 놀이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해외여행을 다니던 사람들은 자유롭게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가 풍경을 즐기던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꽃이 필 때 꽃구경하는 기쁨도, 야구장에, 축구장에, 박물관에 가서 구경하는 기쁨도 빼앗겼습니다. 코로나 19는 가정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신랑 신분의 결혼식의 기쁨을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평범한 가정의 돌잔치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아이들의 졸업식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코로나 19는 사업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가계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자유롭게 손님을 맞이하는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직장인들은 자유롭게 출근하며 거래처를 다니는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코로나 19는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웃을 만나 나누었던 소소한 기쁨들을 몽땅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코로나 19는 신앙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신앙인들은 아무런 제한 없이 만나 예배드리고, 교육받으며, 교제하고, 전도하며, 봉사하는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 코로나 환자인지 모르니까 마스크로 무장하고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며 멀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는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코로나 19는 많은 자유를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코로나 19 식민지가 된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2천 6백 8십만이 넘게 감염되었고, 사망자는 88만명이 넘었습니다. 사망률은 3.30%입니다. 우리나라는 2만 천 명이 넘었고, 333명이 사망해 사망률 1.58%입니다. 당사자들과 가족, 일가친척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슬프겠습니까? 여기저기에서 깨어진 일상으로 인하여 고통의 소리, 한숨의 소리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고통받으며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나누어 보면 대강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유형은 코로나로 인한 분노형 유형입니다. 우환 코로라라고 하면 정부가 잘못해 이 지경이 되었다고 정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고, 신천지 때문이라고 신천지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일상과 비교하면 반의반 토막으로 떨어진 매출로 분노가 가득 차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장사가 되지 않고, 월세를 내기 어려워져 코로나 19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빚이 늘고 돈을 벌지 못해 죽겠다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정지로 말미암아 분노가 커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코로나로 인하여 타인을 혐오하며 원망하는 유형입니다. 광화문 집회 발, 교회 발, 신천지 발, 방문판매 발 몇 명이라고 계속 보도하니까 “거기 사람들은 왜 그러냐. 왜 그것을 국가가 그렇게 두냐. 우리가 몇 사람 때문에 모두 손해를 봐야 하냐?”라고 그들을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혐오하며 마녀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통제하지 않는다고 국가 기관을 비난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셋째 유형은 코로나로 인하여 불안해하는 유형입니다. 조금만 열이 나도 자신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는가 염려하는 상상 코로나 형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이 감염되지 않을까 감염 불안, 감염 공포에 싸여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염되면 온 가족이 감염되고, 나이 드신 부모님은 사망할지도 모르고, 후유증이 오래 남아 결국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상상하며 염려하며 사는 유형입니다. 실적이 악화로 인하여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유형은 코로나 블루 유형입니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은 ‘코로나 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입니다. 코로나 19 세계적 대유행이 계속되다 보니 코로나로 인해 사람도 안 만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다 보니 점점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흥미가 없어지고, 기분은 침체되고,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이유 없이 불안해지고 슬퍼 쉽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언론이 매일 코로나 상황을 중계방송하듯 보도합니다. 어떤 방송은 코로나 19 특집이라고 온종일 코로나에 관한 이야기를 해댑니다. 제가 볼 때는 그것은 언론의 폭력입니다. 알 권리라고 하지만 어느 국민이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온종일 매일 듣고 싶겠습니까? 언론을 통해 문자를 통해 매일 쏟아지는 코로나 정보는 자극의 질이 강할 뿐 아니라 양적으로 어마어마합니다. 코로나 19의 스트레스 강도는 사상 유례없이 세고 강합니다. 사람은 공감 능력이 있어 좋은 소식을 들으면 기쁘지만 나쁜 소식을 들으면 슬프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혐오하고 배제하며, 희생양 찾기를 합니다. 부정적인 상황이 계속 반복적으로 이어지면 지나친 건강염려증, 죄책감, 의심, 절망, 공허함, 불면,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어디에 가나 웃음이 없고 무엇을 하나 즐거움이 없는 우울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1절 말씀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장기화되고 세계화된 코로나 19 상황일지라도 슬프게 살고, 우울하게 살고, 분노하며 살고, 자책하며 살고, 불안하게 살고, 혐오하며 살고, 염려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즐겁게 사시길 바랍니다. 가족 식구끼리 서로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무리 힘들어도 즐겁게 살자”

기쁘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신앙생활의 3대 원리가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로 기뻐하고 살 때 환경을 초월한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약 9시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즐겁게 주님을 따라다녔는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난다고 하니까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기쁨이 없어졌습니다.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우울해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가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6절을 보십시오. 마음에 근심이 가득찼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러나 내가 다시 너희를 계속해서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리니”로 번역된 “옵소마이”는 일반적 의미로 “눈으로 보다” 이지만 비유적으로 지적, 영적인 지각 작용 즉 “주목하다. 관심을 가지다” 등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며 관심을 가지겠다는 말씀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주체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입니다. 육체로는 계속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계속 그들과 함께 하여 관심을 계속 가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함으로 누리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누릴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기쁨은 순간적인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해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약 9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형하여 목적을 성취한 세상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했고, 흩어졌고 기쁨을 빼앗겼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해서 기뻐하는 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소유해서 기쁘고, 합격해서 기쁘고, 사랑받아서 기쁘고, 승리해서 기쁘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에 넣어서 기뻐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돈을 벌어서 기쁘고, 선거에 당선되어 기쁘고, 명예를 얻고 기쁘고, 연구 성과를 얻어 기쁘고, 장난감을 얻어 기쁜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어 기쁜 것은 빼앗길 날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가 말하는 생리적욕구, 안전욕구, 사회적 욕구(소속감), 존경욕구(인정받으려는 욕구, 사랑의 욕구), 자아실현 욕구 등이 충족되어 기뻐하는 기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쁨의 특징은 욕구가 실현될 때만 즐거운 것입니다. 욕구를 실현하지 못하거나 받은 것을 상실하면 금방 슬픔에 잠기고 기쁨이 큰 만큼 슬픔도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의 특징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통한 기쁨은 경험을 통한 기쁨보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님이 좋은 자동차 한 대를 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기쁨은 가면 갈수록 줄어듭니다. 그러나 그 돈으로 해외 어려운 나라에 가서 교회 건축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경험에 의한 기쁨은 오래 갑니다. 늙어서까지 그 생각만 하면 즐겁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 기쁨은 감각적인 기쁨입니다. 아주 좋지 않은 것은 도덕성 윤리성이 없는 것입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기뻐하고, 남을 죽이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승자와 패자가 같이 누리는 기쁨은 아닙니다. 약자는 고통받고 고통 위에 서서 승자는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소유와 승리의 기쁨이 원시적이고 육체적이고,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이고 잘못 나가면 동물적이고 파괴적인 가학적인 기쁨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구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는 기쁨은 승자나 패자나, 가난한 자나 부자나, 배운자나 못배운 자나, 여자나 남자나 전라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야당이나 여당이나 흑인이나 백인이 함께 누리는 기쁨이고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대상인 예수님은 누구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데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분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을 통해 누리는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잠깐 근심합니다. 코로나 19 영원한 것 아닙니다. 잠시 잠깐이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 우리를 짜증 나게 하는 것, 우리를 혐오스럽게 하는 것,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깐이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3일 후면 예수님이 부활합니다. 그러면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픔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라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제자들에게는 처음에 슬픔의 원인이 되나 나중에는 기쁨의 근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기쁨은 해산한 여인이 아이를 보는 순간 지난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 해산할 때 육체적 고통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불안도 겹쳐 고통의 무게는 가중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이런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창세기 3:16절을 생각나도록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와가 형벌로 받은 해산의 고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근본적으로 슬프게 하는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주는 사단의 머리를 완전히 짓밟아 버리고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누리는 기쁨은 질적으로 완전한 기쁨이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기쁨입니다. 도덕적으로 충만한 기쁨입니다. 승리하여 얻는 기쁨, 소유하여 얻은 기쁨, 남에게 주어서 얻는 기쁨 그 기쁨의 수준이 아닙니다. 승리해도 기뻐할 수 있고 실패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병들어도 기뻐할 수 있고 건강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감옥에 가도 기뻐할 수 있고 핍박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단순한 육신적 기쁨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적인 기쁨이고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언제든지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근심에 쌓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뻐합니다. 그 기쁨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20장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들은 예수께 경배를 드린 후에 기쁨에 넘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눅 24:5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6)"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 8:8)"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 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쫓겨가면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능욕을 받아고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기뻐합니다.

바울은 죽을 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고후7:4).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아들이 되면 영원한 아들이고 천국에 이르도록 그 어떤 것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충만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있습니까? 신앙 생활하면서도 이 기쁨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되어서도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단테의 < 신곡>에 보면 지옥 맨 밑바닥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안내하는 사람의 말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하더랍니다. 신앙인이란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한평생을 산 슈바이쳐 박사는 "물 없는 강처럼 기쁨 없는 그리스도인, 기쁨 없는 신앙, 기쁨이 없는 사랑이 세상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공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라고 말합니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 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인생에는 지와 호와 낙의 3단계가 있는 데 이 중에서 최고의 단계는 낙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아무리 코로나 19로 슬프고 우울하다고 해도 예수님 안에 주님 때문에 부부가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자녀와 함께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즐겁게 신앙생활하고, 즐겁게 가정생활하고 즐겁게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음악을 아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은 다릅니다. 진정 음악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천지자연을 즐기고 우리의 생활을 즐기고 우리의 일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려운 피난 생활에서도 여호와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다윗이나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하박국 선지자나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 등은 모두 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6:8-9)”

느헤이미야는 말합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헤미야8:10)” 이 사실을 믿습니까?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승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욕구 충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평생 누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는냐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제 선택의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쁨으로 살 것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는 만났지만 계속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살 것인가입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한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을 믿고 기도함으로 이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24).

 

예수님은 이 땅에서 승리하고 필요를 채움받고 성취를 통해 기뻐하는 기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필요를 채움받아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뜹니다. 혈루증 여인이 낫게 됩니다. 굶주린 자들이 빵을 먹고 12 바구니나 거두었습니다. 연약라고 죄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비난으로 보호받았습니다.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 주님 만나 자아실현을 합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연인이 사랑을 받고 인간 대접을 받습니다. 주님 만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제 주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지상에서 주님이 그들과 육신적인 모습으로 함께 있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이 약속을 믿습니까? 24절을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며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기쁨을 충만히 채울 수 있습니다. 명예가 없고 물질이 없고 건강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기쁨을 빼앗는 장애물을 넘을 수 있도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특권으로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무나 사용하는 것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님을 메시아로 구주로 모신 사람들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기도를 통해 응답받을 때 기쁨을 누려보고 있습니까? 저는 목회하면서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정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인간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하나 하나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면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합니다.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 12-14절을 보십시오.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합심으로 기도합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습니다. 그들의 기쁨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사도행전 12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풀려납니다.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도합니다(행16:25).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사라집니다. 구약에 나오는 한나를 보십시오.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남편이 첩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밥맛이 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한나는 번민하고(삼상1:6), 울고(삼상1:7), 마음이 괴롭고(삼상1;10), 슬퍼했다고 했습니다(삼상1:15),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슬픔을 이기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선물로 받습니다. 한나의 고백을 보십시오(삼상2:1). "내 마음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에스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앞에 높여있습니다. 인종청소를 당할 위기입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에9:22)" 문제가 있다고 복잡하다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예수 믿는 사람은 너무나 울상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웃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여 한나와 같은 기쁨을, 에스더와 같은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여 꼭 이루어져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아니오로 응답할 수도 있고 다른 것으로 응답해 줄 수도 있고 기다리라는 응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꼭 내 마음의 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그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그것이 가장 좋은 하나님의 방법인 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짐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을 최선으로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때로는 기도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받지 못할 때도 있었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가 가장 족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상실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롬8:18)"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 만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의 장애물을 기도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미 받은 기도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유명한 악성 베토벤이 서른두 살에 가장 슬픈 편지 한 장을 썼다고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미리 써 놓은 유서였다고 합니다. "나는 6년 동안 나아질 거라고 희망 속에 살았다.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잠시 후면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나 불우한 존재여." 자기가 작곡한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청각장애인 작곡가, 절망적입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그는 다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불우한 일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 내가 작곡한 이 음악을 단 하루만이라도 깨끗한 귀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24년 동안을 청각장애인으로 살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교향곡 제9 번의 작곡은 쉴러의 '기쁨의 송시'라고 하는 시를 가사로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이 교향곡 9번이 초연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하고, 기립박수를, 아우성을, 환호로 이렇게 박수를 할 때, 그는 저 뒷전에 앉아서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환호성도 들리지 않고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듣는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하늘의 노래를 혼자서 들으며 혼자서 즐기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아무리 우울하고 슬퍼도 이것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과 기도의 능력을 누림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 영원한 기쁨, 충만한 기쁨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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