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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가운데 성도에 대한 관심과 축복(빌립보서1)(빌립보서1: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412 추천수:8 220.120.123.244
2019-06-02 09:48:16

 

고난 가운데 성도에 대한 관심과 축복(빌립보서1)

빌1:1-2

 

이현주 작가가 쓴 <알게 뭐야?>라는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로 위에 밀가루와 시멘트가 실린 트럭이 나란히 달렸습니다.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두 트럭 운전사는 나란히 차를 세워 두고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다시, 운전하고 가는데 실수로 그만 차를 바꿔 탔습니다. 운전자는 가다 자기 차가 아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 두 운전기사는 똑같이 외쳤습니다. "알게 뭐야? 내 것인가?" 시멘트 운전기사는 공사장에 트럭을 세웠습니다. 인부들이 부대를 뜯고 반죽을 하였는데 좀 이상했습니다. 한 일꾼이 “아니, 무슨 시멘트가 이렇게 하얗고 보들보들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의 친구가 “이거 밀가루 아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운전사에게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시오, 이거 정말 시멘트 맞소?” 운전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분명히 시멘트요.” 일꾼들은 다시 일자리로 오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에라, 알 게 뭐야! 내 집인가?”

한편 밀가루 차 운전사는 단골 과자 가게로 갔습니다. 과자 가게 일꾼들은 밀가루를 받아 과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일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밀가루가 이렇지? 이렇게 시퍼런 밀가루는 처음 보았는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동료가 “아니, 이건 밀가루가 아니라 시멘트잖아?”라고 말하며 운전사를 찾았지만, 운전사는 벌써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두 일꾼은 중얼거렸습니다. “에라, 알 게 뭐야 내가 먹는 건가?” 어느 날, 두 개의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쪽에서는 집이 무너져서 그 밑에 깔린 불쌍한 아이들의 등뼈 부러지는 소리와 과자 가게에서 손님들의 이빨이 부러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습니다. 운전사들은 그 이후에도 열심히 일해서 달나라에 땅을 무지무지하게 샀고, 정부로부터 나라 땅을 넓힌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이현주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의 무책임하고 무관심의 실상을 꼬집은 것입니다. “내가 먹는 것도 아닌데, 내 집도 아닌데, 내가 알 게 뭐야?”라는 무관심과 무책임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난 29일 날 헝가리 다뉴브강에서 우리나라 여행객이 탄 유람선 침몰하여 많은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추돌사고를 낸 유람선 선장은 "살려달라" 소리쳐도 45분간 갈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남의 배가 전복되어 사람이 죽어가는데 구조를 하지 않고 “내 배가 아니고, 내 손님, 내 생명이 아닌데 알게 뭐야”라는 식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웃사촌이라고 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엔 ‘무관심’이 깊이 뿌리 박히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길을 가다가 봉변을 당하거나 아파 쓰러져도 못 본 척 지나가곤 합니다. 아는 사이가 아닌 이상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무관심은 방관자들을 대거 만들어내 주위에 칼을 맞고 쓰러진 위급한 상황을 보고도 그냥 지나칩니다. 길에서 여성이 괴롭힘을 당해도, 옆집에서 홀로 노인이 아무런 이유없이 보이지 않아도, 공원에서 중학생들이 집단 구타를 하여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기의 일이 아니면 애써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상관없다는 듯 지나쳐 버립니다. 우리가 아닌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요즘 집에 강도가 들면 '강도야'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불이야' 하고 외쳐야 된다고 합니다. '강도야' 하면 어떤 피해를 당할지 몰라서 신고를 안 하고,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 혹시 자기 집이 화재 피해를 당할까봐 신고를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는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노인이 숨진 지 몇 년 만에 발견된 경우도 있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친구를 보고도 모른 척 하는 경우는 다반사라고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도 남들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고 방어벽을 칩니다. 내가 교실에서 화장을 하던 잠을 자던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도, 부모에게도, 목사님에게도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장에서 옷을 벗고 광란의 퀴어 축제를 벌이던, 전철에서 키스하던 관심을 끄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강조하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누군가가 들어오려 하면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하면서 과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각자도생이라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극도의 경쟁주의와 결합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가족간에도 대화가 별로 없고 떨어져 있는 부모나 형제간에도 별로 왕래가 없습니다. 관심갖는 것을 귀찮아 하고 남이야 어떻게 살던지 이웃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습니다. 아파트에서 10년을 살아도 이웃집 사람들의 얼굴도 모르며 사는 시대입니다. 나대로 사는 것이 개성이고 남에게 간섭 받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너는 너 혼자 뿐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무의식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테레사는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무관심하면 정의도 없습니다. 모두의 무관심이 거대 악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만 잘 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사는 것입니다.

무관심의 종착점은 결국 몰락이 될 수 있습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들어가기 전 300년 넘게 무굴제국이라는 이슬람국가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그런데 단 200명 밖에 되지 않은 영국군이 무굴제국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해 결국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번성을 누리던 무굴제국은 지방호족들이 득세하면서 단결력을 상실하게 되었답니다. 어느 지역에서 영국군이 그 지역의 태수를 잡아가는데 농부들은 그냥 농사만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무굴제국의 멸망의 원인은 무기나 군사의 차이가 아니라 “무관심”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세계를 지배했던 최강 제국 로마의 몰락 원인은, 외부의 침입이나 정치적 분열이 아닌,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도 풍요와 쾌락에 취해 무관심했던 로마 시민들의 이기심, 즉 무관심 때문이었답니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무관심은 우리를 몰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가정과 우리라는 사회와 우리라는 국가를 무너뜨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J.토퍼스는 “칼로 낸 상처보다 말로 낸 상처가 더 아프고, 말로 낸 상처보다 무관심의 상처가 더 아프다”라고 했습니다. 무관심은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은 “무관심으로 인해 인간은 실제로 죽기 전에 이미 죽어 버린다”고 극언했습니다.

 

문제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고, 이 땅이 전부라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죽은 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인 한 가족이 되었다고 믿고 사는 성도들도 세상을 그대로 닮아 무관심의 늪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습관처럼 교회에 나오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나 건강하고, 나 잘먹고, 잘 살고, 내 자식, 내 손녀 잘 먹고 잘사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무슨 기쁨과 위로와 유익을 주느냐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늘 내가 기준이 되어 받아들입니다. 기도해도 내 기도만 하지 이웃과 교회 민족을 위한 기도는 어색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광고도 교회에서 행사를 위해 무슨 말을 하여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새로온 신자들이 와도 관심이 없고 심지어는 이름조차 모릅니다. 전도는 목사가 교회 강단에서나 하는 이야기일 뿐 자신의 실생활에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기도도 식사기도 외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도 주일 낮 예배 한번 외에는 마음에 부담도 관심도 없습니다.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그런 경향을 뚜렸해지고 있습니다. 성경도 그저 좋은 말씀 정도로 생각할 따름이지 성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이나 죄의 심각성이나 회개의 필요성에도 역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 11:17; 눅 7:32)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이런 사람들은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상황에 매우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였습니다. 질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다가가 질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가난으로 굶주린 자에게 찾아가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상종하지 않고 왕따시킨 죄인들을 찾아가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강퍅한 유대 나라의 임박한 재난을 내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였습니다.

 

1. 우리는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인생이 바쁘고 고달프며, 힘겹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에게 서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믿고 실천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종으로 늘 사람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사역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보내었다고 하여 옥중서신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서신을 보낼 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매임”이라는 말은 감옥에 있다는 말입니다. 14,17절에서도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감옥은 형벌의 하나로서 교정과 교화를 목표로 하지만, 바울 당시는 범죄자를 재판하여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가두는 장소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감옥은 굴욕과 수치를 감내해야 하는 곳입니다. 시설이 좋은 곳이 아닙니다. 당시 지하는 칠흑 같은 어두움과 지독한 악취로 생긴 독 때문에 수많은 수감자가 죽어가는 야만의 장소였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상존하는 곳입니다. 자유가 없고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인권은 사라지고 삶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미래의 희망과 꿈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감옥에서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통받는 상황에서 빌립보 교인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유럽의 최초의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개척 성도는 자주 장사 루디아였습니다(행16:14-15, 40).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디아의 집이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유대교에 입교한 아시아계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신기하게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기꺼이 받고 세례를 받아 유럽의 첫 그리스도인이 되게 된 것입니다. 루디아는 재산도 있었습니다. 집도 넉넉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집을 바울의 일행이 전도하는 전도의 처소로 제공을 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비용을 루디아가 전담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교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자였습니다(행16:16-18). 귀신들린 여종이 점치는 일로 인하여 그의 주인집을 큰 부자로 만들어 주었는데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온전해져 헬라인으로 빌립보 교인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로마의 간수장이었습니다(행16:33-34). 부자가 귀신들린 여자가 온전해지자 돈을 못 버니까 바울이 로마의 풍습에도 맞지 않는 종교를 전함으로 민심을 요란케 한다고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바울은 흥분한 주민과 관원들에 의하여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나 옥문에서 나왔고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면서부터 전통적 로마인 가족이 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 로마 옥에 갖혀 있을 때 이 교회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1장 15,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기과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바울이 감옥에 가 있는 틈을 타 시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장 28, 30절을 보십시오. 빌립보 교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위협이 있었습니다(빌1:27-30; 3:2, 18-19). 3장 2절을 보십시오. 손할례당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의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빌 4:6, 19).

상호 불신과 자신을 내세우는 교인이(빌2:1-4) 있었습니다.

유오디아나 순두게의 지도력으로 교회의 분열 위기(빌 2:14-16; 4:2-3)가 있었습니다. 4장 2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사람들은 상대에게 이런 문제가 있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의 유지와 단절을 사회적 교환이론(Social Exchange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인간관계의 존속 여부는 서로가 투자한 노력이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투자한 시간, 금전, 정신적 노력에 대하여 보상이 이루어지면 인간관계는 유지되지만 보상이 이뤄지지 않거나 적게 일어나면 인간관계는 약화되거나 해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상은 물질적, 비물질적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결국, 인간관계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교환과정이며 남는 것이 있을 때 인간관계는 지속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손해가 되면 관심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회사도 떠나고, 교회도 떠나고, 가정도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교리적, 윤리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관심을 가지고 상대하면 이익이 없고 편리가 없고 기쁨이 없다해도 계속 관심의 끈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교인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관심을 두고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자신도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평상시 사정이 급하고 어려울 때 오비삼척(吾鼻三尺)라는 말을 하듯이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석자나 되게 흘러내려 남을 돌볼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상세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권면했는데 빌립보 교회와 교인들에게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왜 우리는 나의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종이기 때문에 성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입니다. 종은 빚진 것 때문에 팔린 사람입니다. 종은 코를 꿰놓은 소처럼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종은 주인의 목숨이기 때문에 목숨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주장도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주인을 위해서 일하다가 죽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는 종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주인은 예수님이고, 바울의 모든 결정권은 예수님께 있고, 희노애락의 주관자가 예수님 이시기에 이제는 사람들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실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일반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주님께서 관심을 두는 곳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바울을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우리도 예수님의 핏값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니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주님이 관심을 두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관심은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관심을 외면하여 이웃에게 천국의 문을 닫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편지를 보내는 빌립보 교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감독도 있고 집사도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조직교회가 된 것을 봅니다. 조직교회가 되면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시기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돈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도 있고, 경쟁심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믿음이 연약하여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손할례당같이 자신의 아집과 편견,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면 우리는 관심을 끊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떠나 가나안 교인이 되려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회의를 갖고 어떤 신문처럼 교회 비리만 깨내어 보도하고 싶어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싶은 사람만 끼리끼리 어울려 자신들만 특별한 사람이라고 선민의식을 가진 교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역, 학연, 혈연에 따른 패거리 문화가 심합니다. 교회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데이비드 버커스가 지은 <친구의 친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 친구의 친구가 당신의 미래라고 말합니다. 실제 사람들은 친구보다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 도움을 받고 취업도 되고 결혼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끼리끼리 모이고 유유상종하는 호모필리를 피하라고 말합니다. ‘호모필리(Homophlily)’라는 말은 끼리끼리 모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질성보다 유사성에 의해 인간관계를 갖는 호모필리에 한번 빠지면 점점 더 깊이 빠져 ‘나선형 하향 국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커다란 인맥을 가진다해도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없고 비슷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 때문에 더 나은 의사 결정과 더 좋은 기회를 찾는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심각한 편견에 사로잡혀 재앙을 초래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고 가말리엘 문화생이며 바리새인이었지만 호모필리에 빠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모두 성도로 부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헬라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자든 종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가 성도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사람" 또는 "구별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 땅을 창조하기 전에 선택하여 구별된 사람입니다. 비록 인간 보기에는 죄로 얼룩져 있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신분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이 비슷한 것같지만 성도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사람으로 나뉘어진 천국 백성입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출신, 같은 혈연, 같은 지연, 같은 동문, 같은 아파트가 아닐지라도 성도라는 한 가지 사실로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위로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13)”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으로 소외된 이웃과 마음 상한 자, 불신자, 이방인, 장애자, 환우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자신에게도 손해가 아닙니다. 미국 카네기멜론대학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은 과연 무엇인가를 조사했답니다. 설문조사 대상은 자기 자신이 실패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사람 1만여 명이었으며, 질문 내용은 ‘본인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였답니다. 그 결과 85%가 선택해 첫 번째 이유로 꼽힌 것이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였답니다. 나머지 15%의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지능 및 재능 등을 실패 이유로 지목했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추적한 통계 결과에서도 이와 똑같은 결론이 도출되었답니다. 미국 퍼듀대학에서는 졸업생을 대상으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던 그룹’ 및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 못했던 그룹’ 그리고 ‘대인관계가 좋았던 그룹’의 세 부류로 분류한 후 연봉 수준을 추적 조사했답니다. 그 결과 연봉이 가장 높은 부류는 ‘대인관계가 좋았던 그룹’인 것으로 드러났답니다. 그들은 학업 성적이 우수한 그룹에 비해 평균 15% 이상,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 못한 그룹보다는 평균 33% 이상 연봉이 많았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비결은 인간관계라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성도에게 축복을 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무엇을 합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이것은 일반 기도와 달리 축복 기도라고 합니다. 종결어미가 "있을 지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간구합니다. 기원합니다.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는 다릅니다. 축복기도는 바울 서신 첫머리와 끝 부분에 빠짐없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의 13서신 중 26문장이 있습니다. 축도할 때 보면 어느 목사님은 "축원하옵나이다."로 기도하고 어느 목사님은 "있을 지어다라"고 기도합니다. 기원문으로 할 것인가 명령문으로 할 것입니까 문제입니다. 성경 헬라어에 “지어다”를 나타내는 동사가 없는데 우리말 번역에 성경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씀을 첨가시켜 번역한데서부터 이런 번역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도는 길흉화복 모든 것에 다하는 것이지만 축복기도는 좋은 것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지만 축복기도는 자신을 위해서는 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은 사람의 구체적인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지만 축복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보편적인 복을 내려 줄 것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축복기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여(창1:22-28), 레위지파들에게 이 축복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신10:8,신21:5) 공중예배에서 행해졌습니다(레9:22-23; 대하30:27).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를 안고 안수하고 축복했습니다(막10:16).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와 그들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눅24:49-51). 우리는 이 축복기도의 형식을 논하기보다는 서로 축복하고 축복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감옥에서도 성도를 위해 축복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축복하였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축복 기도를 하였습니다. 편지를 쓸 때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을 위해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 세상이 잘 되려면 다른 사람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복받으려면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자꾸 나만 복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축복이 아니라 상대를 저주합니다. 정치 언론도 상대를 향해 날마다 저주를 쏟아 붓는 것같습니다. 상대를 축복하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합니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것처럼 상대를 저주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도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저 집사가 망신을 당하고 저 집사가 망하고 저 집사의 허물이 드러나야 내가 장로가 되고 내가 안수집사가 되고 내가 권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 목회자의 허물을 드러내야 내가 의로운 자라 되고 나의 정당성이 입증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하고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편 한 식구입니다. 미국에서 시집가면 성 바꾸지 않습니까? 미국에 이민 간 분년이라는 자매가 있었답니다. 이씨 집에 시집을 갔답니다. 이분년이 되는 것입니다. 나씨에게 시집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길년이 이씨 집에 시집가면 이길년이 되지만 주씨 집에 시집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편에 서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믿고 다 "하"씨 집에 입양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족보가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제로섬 게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로 힘을 합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게 이익이 없고 내게 편리가 없고 내게 기쁨이 없다하여도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이 이웃이 잘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서로 축복해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곳에 모인 주의 거룩한 자녀에게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충만하게 넘치기를"

내가 축복받으려면 먼저 상대를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저주하기 보다는 축복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라고 말씀합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잠11:11)"라고 말씀합니다. 자녀가 잘 되는 길도 하루에 한 번씩 자녀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목회자와 성도를 축복해야 합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지도자를 축복해야 합니다. 사람은 16세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9.6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에 겨우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입니다. 의도적으로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저주스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하루에 한 번 자녀를 축복하라>를 쓴 롤프 가복은 "자녀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의 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 트렌트ㆍ게리 스몰리는 <축복의 언어>에서 축복은 말로 표현할 때에 효과가 발휘된다고 합니다. 축복을 받는 자에게 높은 가치를 심어주고, 축복을 받는 자의 특별한 장래를 말해주라고 합니다. 축복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헌신을 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축복합니까?

첫 번째 은혜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고 말씀합니다.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믿기만하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호흡의 한 줄기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미세하게 뛰는 맥박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고전15:10)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강도도 은혜를 받으면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불치병 환자도 은혜를 받으면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도 은혜를 받으면 부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깡패도 은혜를 받으면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낙엽도 바람을 타면 강을 건너듯이 은혜를 받으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성과 과학과 경험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비늘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마담 귀용이나 존 웨슬리나 어거스틴처럼 회심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어거스틴 같은 사람도 성자가 됩니다. 기독교는 학문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의 수준 낮은 사변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타락하여 십대에 흑인 노예를 첩으로 취해 불우한 아들을 낳고, 병적인 성욕에 불타서 심각한 타락의 길을 걸은 그였지만 은혜를 받으니까 회개하고 돌아와 성자가 되었습니다. 은혜 떨어지면 천사도 악마로 변합니다. 은혜 떨어지면 성자도 사기꾼으로 변합니다. 은혜 떨어지면 대단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 달란트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20세기 지성인이라는 버트란트 러셀은 "왜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가"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을 무신론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할머니는 독실한 청교도였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 안에서 자랐습니다. 7살 때 라틴어를 끝내고 헬라어에 능통하여 성경을 원문으로 거침없이 읽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뛰어난 그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하루에 보통 거의 고칠 필요가 없는 3,000 단어 분량의 글을 썼다고 합니다. 1950년 노벨 문학상도 받은 사람입니다. 캠브리지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지 못하니까 11살 때 이미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니체,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니까 그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은혜 외에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1차원의 세계(점의 세계), 2차원의 세계(선의 세계, 평면의 세계), 3차원의 세계 (입체적인 세계), 4차원의 세계(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과학으로 4차원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개가 어떻게 인간의 아파트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차원이 다른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4차원의 세계는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림받은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각종 병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스물네살 때부터 13년동안 거의 침대에 누워 질병과 고독과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한가지 병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암, 파킨슨씨병, 척추카리에스 등이 계속 그녀의 육체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은혜를 받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77세까지 그 무수한 질병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질병은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평강입니다.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평강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은혜의 원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우리가 출세하여 권력을 잡아, 잘되어, 돈을 많이 벌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의 소설, <마음의 평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청년이 어느 노인을 찾아가 자기 소원을 부탁하였습니다. 노인은 무엇을 갖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즐길 수 없다네." 이 모든 것이 있다하여도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도 평안이 있을 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쌓여진 명예도, 재물도, 성공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답니다.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죄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평안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이 있으므로 평안한 평안입니다. 그 조건이 있으면 평안하지만 그 조건이 사라지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있을 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지면 불안해집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신을 비워서 이루어지는 평안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수도나, 마음의 수양 등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런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안에서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바울과 실라는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의 고통에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평안은 참 평안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은혜로 주시는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죄사함 가운데 주시는 구원의 평안입니다.

감정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평안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평안입니다. 기도로 누리는 평안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축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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