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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2) 고난을 받는 자세(이사야53:7-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023 추천수:6 220.120.123.244
2019-04-14 08:06:53

 

예수님의 고난(2) 고난을 받는 자세

이사야53:7-12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왕이 역사학자들을 불러 모았답니다. 왕은 "세계사를 한 권으로 압축하라"고 명령했답니다. 역사학자들은 열심히 세계사를 한 권으로 요약했답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결국은 한 권으로 요약했답니다. 왕은 그 책을 다 보고 난 후에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줄여 보라."고 했답니다. 역사학자들은 고민 끝에 이렇게 기록했답니다. "인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생로병사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과학사는 어쩌면 인생의 고난을 풀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기쁨과 환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살이가 수고와 슬픔쁜이라고 할 정도로 고난이 멈추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욥기에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욥 14:1)라고 말씀합니다. 4복음서에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예수님에 대한 기록도 고난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시다고 말하면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했다는 증명을 해 보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과학적 사실은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은 실험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 자료를 통해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다는 증거 자료는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종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이미 예언해 주였는데 고난에 고난받는 종으로 오실 것을 여러 곳에서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42장 1-7절, 49장 1-6절, 50장 4-9절에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특히 52장13-53장 12절까지 자세히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 두 번째로 예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어떤 자세로 받았는가를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1. 예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어떤 자세로 고난을 받았습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고문 받고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진 고문 앞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첫째, 곤욕과 괴로움 속에서도 반항하지 않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7)

떨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2회).

합당하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부당한 고난을 받는대도 불구하고 참고 인내하신 것 입니다.(벧전2:21-23) “곤욕을 당하여(닉가스)”라는 말은 강제권을 발동하여 억지로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당하게 학대하고 압제하는 것입니다(3:5,12, 9:3; 14:2,4). 예수님은 폭력적 방법으로 부당하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다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를 당했습니다. 죄목은 신성 모독죄 및 성전모독죄였습니다(마26:59-66).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해 내지 못했지만(마27:18; 요18:38)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부당하게 채찍질하고 온갖 부당한 학대를 가하도록 명령했습니다(마27:26-30).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야에게 부당한 죄를 뒤집어씌워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온갖 모독을 가했습니다(마26:67), 그러나 잘못된 재판과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울 때에도 결코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이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어졌는지 마태복음 27장 12-14절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묵묵히 구원받아야 할 백성이 당해야 할 대속의 고난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이지만 사지로 끌려가는 양이 입을 열어 울지 않는 것처럼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입을 열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7,9)예수님은 예루살렘가면 잡혀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로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눅9:5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아무 저항 없이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마26:46-55).

 

둘째, 심판대에서 곤욕과 심문을 당했는데도(8) 강포를 행하지 않았습니다(9)

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여기서 곤욕은 “오체르”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완전히 억압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완전히 억압당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강제로 포박당한 상태에서 오히려 심문을 당하여야 할 사악한 인간들에게 메시아가 법정에서 심문을 당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과 헤롯 왕의 심문, 그리고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강제로 끌려간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8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끊어짐은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이 마땅히 형벌 받을 하나님의 백성의 허물 때문이었지만 이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억울한 처형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죄로 인해 곤욕을 당하고 심문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참 의미를 몰랐습니다(요16:4-6).

이런 부당하고 폭력적인 대우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바다를 잔잔케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을 해치는 자들에게 천군 천사를 동원하여 보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폭력적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죽음 앞에서 방어나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수모와 고통을 다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정당성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인류의 대속사를 성취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0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면서 변명하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의 입에는 속임수나 사기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만을 선포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항상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23절에서는 그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만을 선포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라는 말은 예수님이 악인들과 같이 매장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 행악자들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예언한 것입니다. 원래 행악자들과 함께 같은 무덤에 매장될 상황이었으나, 예수님은 부자와 함께 매장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형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흉악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그냥 들판에 버려져 짐승의 밥이 되는 처절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억울하게 죄인으로 선고되어 비참하게 죽으셨으나 부자의 무덤에 매장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실제 예수님은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눅23:32-33).,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부자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두었던 새 동굴에 매장되었습니다(마27: 57-60).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된 것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예언입니까? 메시아의 대속적 죽음이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태초부터 수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반드시 역사 속에서 이루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 왜 예수님은 부당한 고난인데도 불구하고 그 수모와 고통과 고난을 아무 말 없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종함으로 다 감당하였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감당케 하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감당케 하신 고난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고통과 죽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세상 권력자들과의 투쟁에서 밀려 고난당하고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 그 죄의 대가를 지고 처형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무관심하여 버림을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목숨을 세상 권력자들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라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18:37). 빌라도가 자신이 풀어줄 권한이 있다고 예수님을 회유할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19:11)”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그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원하사(하페츠)’라는 말은 즐거이 원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민14:8; 신25:7; 삼상18:22). 여호와께서 의로운 독생자 메시아로 하여금 부당한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를 통해 구원하시고 하시는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그 고난이 속건제로 드리는 대속적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영혼(나프쇼)’은 목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메시아의 무죄한 생명을 죄인들의 죄과를 대신 치르는 값으로 사용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속건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죄인들이 행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대속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속건제는 원래 죄를 지은 자 자신의 피와 생명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창9:5.6). 하나님은 노아에게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물 희생을 통해 인간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레위기를 통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물의 피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대신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는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원한 고난의 문제를 단번에 속죄제물을 드림으로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이니까 히브리서 9장 26절을 찾아 읽어 보기시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바로 밑에 있는 28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여호와에 의해서 이미 작정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도 그 사실을 알고 설교할 때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라고 설교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난을 감당함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당하게 고소되고, 억울하게 수난을 당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함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2절 중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여기서 ‘씨’에 해당하는 ‘제라으’는 ‘씨앗’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후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당함으로 이루어진 대속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자신의 대속사역을 감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합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그의 영적 후손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그의 영적 왕국을 확장시킬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뿐만아니라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적 고난을 묵묵히 순종함으로 감당했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고난당하다가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인간들을 그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님처럼 아무런 고난을 받지 않은 인간 이단들이 자신이 구원자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성취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는 최후의 기도를 드렸고, 십자가상에서 7마디의 말씀을 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였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대속적 고난을 감당한 결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실컷 고생하고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메시아의 수난과 대속 죽음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수고한 것’은 수고롭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매우 쓰라린 고통’(신26:7), ‘곤고’(삿10:16), ‘환난’(욥3:10), ‘고난’(욥5:6), ‘고통’(잠 31:7) 등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메시아가 당한 고난은 고생을 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속이 다 타 버리는 쓰라린 고통이고 단지 육체의 고통으로 멈추지 않고 영혼의 고통으로까지 전이된 고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결국 만족케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매우 가치 있는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고서 과거의 모든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기뻐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메시아의 대속적 고통은 고통 자체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맺어지는 열매가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만족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고 세상은 그들에 의해 살만한 세상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산 인물 중에 예수님 만큼 영향을 끼친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역사의 구분점은 예수님이시고 인생의 분기점도, 가정과 국가의 분기점도 예수님이십니다. 위대한 예술은 예수님 없이 말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작품도 위대한 음악도, 위대한 미술도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산모가 고통을 당하지만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면서 만족함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는 이 사실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넷째는 죄의 대가로 인간이 당해야 할 고난을 지심으로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1절 중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도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절에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예언이고 얼마나 정확하게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로운 종’으로 칭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의 수난과 죽음이 스스로의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메시아를 신성모독의 죄로 고소했습니다(요19:7). 가장 치욕스런 형벌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자가 당할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기 위해서라고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합니다(엡2:3).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동을 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메시아를 통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대가인 고난을 다 받게 만들어 의롭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사실을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마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킨 것입니다. 끝까지 순종함으로 인류 불순종한 아담을 대신하여 인류 구원 사역을 완성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지식으로’에 해당하는 ‘빼다으토’는 메시아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정확히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 경륜에 따라 자기 자신을 대속 제물로 내어 주는 일련의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야다가 원형인데 지성적으로 아는 것 뿐 아니라 마음으로 그 아는 바에 대하여 동감하며 삶에 그 아는 바를 적용시키는 것까지 포괄하는 전인적인 앎을 말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메시아를 믿고 그가 행한 모든 의로운 행위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롬3:22). 자신의 힘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로 자신의 영혼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보고서 그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입니다(롬 3:24). 거듭나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거듭이 납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물은 말씀을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한8:47)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요5:38)” 믿는다는 근거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메시아는 그의 구속 사역의 결과로 그가 의롭게 한 사람들과 더불어 승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여 나누게 됩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 몫을 받게 하며’라는 말은 기업을 분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수13:7; 14:5 ; 18:2). 메시아가 고난에 순종함으로 그의 구속 사역을 완성함으로 그가 의롭게 한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여 나누게 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것을 혼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의롭게 한 자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는 말씀은 ‘강한 자’는 힘이 세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창18:18; 민14:12; 신26:5).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방의 여러 통치자들을 지칭합니다(49:7). 여호와께서 메시아로 하여금 최후 승리자가 되게 하여 그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사49:7; 빌2:9-11)

왜 그렇습니까?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영혼(생명)을 사망에 이르도록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열정적으로 순종하며 고난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못해 고난의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기꺼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 자리에 이르렇지만 그 고난의 현장에서 무엇을 합니까?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가 ... 버려’, ‘헤아림을 받아’, ‘담당하며’, ‘기도하였느니라’ 등 네 개의 동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중 앞의 세 개는 완료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동사 기도는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문맥적으로는 이 네 개의 동사 모두 기록된 시점으로부터 미래에 일어나는 일을 예언하는 동사입니다. 완료 시제로 되었다는 것은 미래 발생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예언적 완료입니다. 예언적 완료는 반드시 일어날 것을 확정적으로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 행동들이 그 때의 사건으로 완료될 것을 암시합니다. 즉 메시야가 자기 영혼(생명)을 사망에 이르도록 쏟아 붓는 사건은 십자가상에서 완료되었고, 그가 범죄자 중 한 사람으로 헤아림을 입은 것도 그 당시의 상황으로 완료되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한 것도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범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행위는 물론 십자가상에서도 있었지만(녹 23:34), 천상에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하실 일이기 때문에(롬 8:34 ; 히 7:25), 완료 시제가 아닌 미완료 시제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경이 정확하게 예언하시고 성취하시는 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의 고난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한 고난이 아니라 죄인을 대속하기 위한 의로운 대속적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영적 후손들이 생겨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대속적 구원사역으로 예수님 스스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롭게 한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살면서 수많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럴 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고난을 받을 때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용광로입니다. 금을 품고 있는 돌이라고 그대로 버려지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련소 용광로에 들어가면 금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버려진 돌도 조각가의 손에 붙들려 쪼아지고 부서지면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비 오는 날도 구름 위를 오르면 파란 하늘이 있습니다. 감은 서리를 맞으면 맛은 더 깊어집니다.

마땅히 거쳐야 할 고난이라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라고 말씀합니다. 진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내라는 것은 단순히 참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망을 바라보고 참는 것입니다. 고난이 어린아이를 인간답게 만듭니다. 모세는 40년, 아브라함은 25년, 다윗은 17년 인내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인내하면서 고난을 슬기롭게 이기기 위해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신 예수님처럼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여 가정을 일으키고 교회를 세우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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