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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댄 동산 같은 인생이게 하소서(이사야 58:11-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0200 추천수:10 220.120.123.244
2019-03-31 08:03:50

 

물 댄 동산 같은 인생이게 하소서

이사야 58:11-12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척하여 교인들이 많아져서 교회를 건축하게 된 목사님이 있었답니다. 목사님이 직접 혼자 관리 감독하며 건축하여 몸은 녹초가 되도록 피곤하였답니다. 일주일 동안 건축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주일날 아침에는 더욱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졌답니다. 예배가 은혜롭게 시작되었는데 대표 기도자가 기도하는 동안 목사님이 그만 강대상 뒤에서 푹 잠이 들어버렸답니다. 기도가 끝났는데도 목사님은 좀처럼 강단 위에 나타나지를 않자 참다못한 한 성도가 강대상에 올라가 목사님을 깨우셨답니다. 그런데 나오시자마자 두 손을 번쩍 드시더니 축도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충만히 있을지어다!” 그러자 성도님들이 평소와는 달리 “아멘, 아멘, 아멘”을 큰 소리로 3창 하고 기쁘게 나가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을 평생 설교를 들으며 살지만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골교회에서 나이 많이 드신 목사님이 설교를 길게 했지만, 교인들은 길다고 말을 못 했답니다. 에어컨도 없는 시골교회에서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설교를 했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할머니가 목사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답니다. "목사님, 더운 날 설교하려니 힘들죠?" 목사님이 웃으며 대답했답니다. "아이고, 그래도 제 걱정 해 주시는 분은 할머니 밖에 안 계시네요. 오늘은 정말 덥네요."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이런 날은 설교 좀 짧게 하이소. 우리도 다 힘들어요."라고 했답니다. 아마 모두가 설교는 은혜롭게, 유익하게, 재미있게, 무엇보다 짧게 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주부들이 밥과 반찬을 하지만 늘 맛있게 잘하지 못하는 것같습니다. 어느 날 30년 같이 산 어느 사모님이 실수로 진밥을 해 미안한 마음으로 목사님에게 가져다드렸답니다. 목사님은 밥상을 받아들고 사모님에게 밥투정을 했답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나도 당신 설교 그냥 듣고 있으니 아무 소리 말고 밥 잘 드세요”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는 성도님들에게 참 영양가 있는 영적 양식을 주어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삶을 살게 만들기 위해 늘 설교 준비를 하고, 설교를 합니다. 제가 2019년 0시 예배 첫 설교로 이사야서 32장 8절을 주제로 “항상 존귀한 자로 살게 하소서(이사야32:8)”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성경 구절을 외우자고 했습니다. 외웠습니까? 우리가 어떤 일이 다가와도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질병에 걸렸다 해도, 나이가 들었다 해도, 장애가 있다 해도, 가난하다고 해도, 실패했을지라도, 많은 것을 알지 못 한다 하여도, 무엇인가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도, 홀로 살고 있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로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귀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 한 해 존귀한 자로 존귀한 계획을 세워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지 같은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품위 있는 존귀한 계획을 세우고, 그 존귀한 계획을 견고하게 이루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존귀한 자로 삶의 각 영역에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자는 의미로 승리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12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등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데 그 싸움에서 꼭 승리하는 생활을 하자고 12가지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승리하는 신앙생활 12편의 결론으로 이사야 58장 11절의 말씀을 통해 “물 댄 동산 같은 인생이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면 우리의 삶은 자동적으로 물 댄 동산 같은 인생이 되어질 것입니다. 저나 우리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한평생 이 땅에 살아가는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막같은 인생이 아니라 물 댄 동산 같은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한번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 말씀 ‘너’에 우리 성도님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 ‘너’에 우리 성도님의 자녀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물 댄 동산이란 언제나 물이 풍부한 지역의 정원이나 동산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언제나 푸르름을 잊지 않으며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게 됩니다(시1:3).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아 누리는 삶의 모습을 그림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이어서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물 댄 동산의 물은 외부적으로 들어오는 물로 인해,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은 내부에서 솟아나는 물로 인해 풍요를 축복을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물 없는 동산(사1:30-31)이 되어 잎사귀가 마르고 불타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하겠습니다. “물 댄 동산 같은 인생이게 하소서 ·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은 인생이 되게 하소서”

 

1. 물 댄 동산같은 삶은 어떤 삶일까요?

첫째, 하나님과 관계에서 여호와가 우리를 항상 인도하는 삶입니다.

11절의 상반부를 보십시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물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내려 주어야 동산은 물댄 동산같게 되는 것이고 샘물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어야 최상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풍성한 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돈의 인도나, 권력의 인도나, 쾌락의 인도가 아닙니다. 그것들의 인도를 받으면 물 댄 동산 같지 못합니다. 오늘날 언론을 통해 그것에 뿌리를 내리고 산 사람들의 비극적인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모든 좋은 것과 풍요와 부요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샘물같은 하나님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풍성함을 잃지 않고 나그네에게 넉넉한 물을 제공하여 무성한 나무를 만들어 풍요로운 과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되 일시적인 인도가 아니라 항상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골짜기에서도, 정상에서도, 초장에서도, 돌밭에서도 인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동안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니까 안전하게 거하며 가나안 땅까지 인도를 받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먹는 문제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때도, 형들의 미움을 받을 때도, 인신매매를 당할 때도, 종살이를 할 때도, 유혹을 받을 때도,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도,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도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니까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놀라운 새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풍성한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신령한 복을 누리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영육간에 만족한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항상 받으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입니다. 둘째가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항상 인도함으로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의 만족함과 네 뼈를 견고하게 하는 축복이 나타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라는 축복이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던지 바울처럼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12)”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늘 불평하고 불만족하고 원망하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영육 간에 만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샘의 근원되는 예수님이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 잔치에 계시니까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일곱 귀신들린 여인이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 굶주린 수많은 백성이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고 12 바구니를 남기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 이하에 보니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기근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대인 관계에서 화평이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6-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대인 관계에서 8가지를 말합니다. 6절에 나오는 4가지는 형제를 자유케 해 주는 것입니다. 막힌 닮이 무너지는 정상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흉악한 세력에 의해 결박당한 형제를 풀어주는 것이고, 무거운 멍에를 지고 고통당하는 이웃의 줄을 끌러주는 것입니다. 돈 없다고 억울하게 착취당하고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간 사람의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고통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 이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말씀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자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한 형제자매로 불러 모든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부른 받은 신앙인은 대인 관계에 있어 물 댄 동산처럼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짓눌려 노예 되고, 죄와 질고의 무거운 멍에를 메고 허덕이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자유케 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7절에 나오는 4가지는 형제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음식을 식물을 나눠 주는 것, 유리하는 걸식하는 빈민이 있으면 내 집에 영접해서 그를 접대하는 것, 벗은 자가 있으면 내 옷을 입히는 것, 그리고 일가친척의 어려움을 외면하며 숨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되기만 바라며 대인 관계에서 상대를 착취나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실천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8-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5가지 약속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정상적 대인 관계를 통해 누리는 물 댄 동산 같은 축복입니다.

 

넷째는 후손들이 잘 되는 삶입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라는 말씀입니다. 후손이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후손들이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후손들이 파괴자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동안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가문을 다시 세우고, 무너진 교회, 무너진 민족을 다시 세우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물 댄 동산은 자녀 문제뿐 아니라 인생 문제로 근심이 없습니다(렘31:12)

 

다섯째, 대물 관계에 있어서 업적을 남기는 삶입니다.

12절에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우리가 이 땅을 떠난 후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날 청문회 앞에 설 때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파괴된 기초를 쌓는 자,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 이런 물 댄 동산같은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9절 중반절 “만일”부터 10절 “하면”까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만일-하면”이라는 조건절입니다. 버릴 것 3 가지와 취할 것 2가지를 말씀합니다. 버릴 것은 멍에, 손가락질, 허망한 말입니다. 취할 것은 주린 자에게 심정이 동하는 것,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를 말씀하는 것같지만 물 댄 동산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데 인간이 해야 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순종을 통해 물 댄 동산같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모든 필요한 것들을 충족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 것같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알기를 즐거워합니다.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잘 지키는 것같습니다. 의로운 판단을 구하고 하나님 가까이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같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금식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알아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금식하면서 오락을 합니다. 온갖 일을 시킵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금식하면서 논쟁합니다. 다툽니다. 폭력을 행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실제적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같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입니다. 순종하는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진정한 순종이 없이 형식적 순종을 하면 알곡이 되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어 버립니다. 길가 밭이나 돌밭이나 엉겅퀴밭에 뿌려진 씨앗같이 되어 버립니다. 진정 순종해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형식적으로 멍에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멍에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이 종이 되어 무거운 멍에를 지고 고통당하는 멍에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잘못된 독재정권이나, 조직에 의해서 압제당한 자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6절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특정한 대상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방이나 경멸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허망한 말을 제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모함하기 위해 공허한 말, 사악한 말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할 형제를 향해 차별하고 비방하고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제적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주린 자를 상대방의 처지에서 이해하고 상대의 아픔과 어려움을 같이 느끼라고 말씀합니다.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 주라고 말씀합니다. 다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인생을 물댄 동산처럼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권위가 상실된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뿐만 아니라 모든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파괴하는 것이 마치 문명인 같고 개화된 사람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인권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의 말씀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부모들도 어릴 때부터 아이들의 창의력을 길러주고 기를 살려준다고 순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상대화시키고 말씀을 애써 무시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식들이 잘 되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의 미래를 사라>의 저자 존 S. C. 애보트는 “아이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 가장 우선돼야 할 과제이다.”라고 말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그녀는 순종 교육을 철저히 시켰답니다. 두 살 전에 순종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순종 교육은 모든 교육의 기본이고, 인성 교육의 근간입니다. 순종이란 말 속에는 신뢰, 긍정, 수용, 모방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순종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입니다. 심장이 뇌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허파가 뇌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호흡이 멈춥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명령을 불순종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9:26). 노아 홍수 때 순종치 않은 자들은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벧전3:20).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거꾸러진 것도 불순종 때문입니다(민14:26-39). 요즈음은 권위를 너무나 우습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을 미개인 취급하는 시대입니다. 창의성과 자율성, 개성을 살리는데 순종은 독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J.S. 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선은 순종 속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고, H. 자일스는 "진정한 순종보다 더 거룩한 것이 없고, 더 고상한 원리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순종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옛날 중국의 순 임금이 신하들을 다 불러 모았답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큰 항아리 하나를 주면서 "이것을 왕궁 뒤뜰에 있는 우물곁으로 가지고 가서 그곳에 있는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어서 항아리를 가득 채워라"고 명령했답니다. 중간에 구멍이 난 항아리였답니다. 꾀 많은 신하들은 구멍 난 항아리를 보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 자리를 다 떠났답니다. 그런데 신하 중에 우직하고 신실한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물론 그도 구멍 뚫린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임금님이 말씀을 하셨으니까 그 말씀을 어찌 이행하지 아니하리요."하면서 계속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부었답니다. 아무리 부어도 항아리에 물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임금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온종일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는 계속해서 물을 담았답니다. 마침내 우물물이 바닥을 드러내었답니다. 바닥난 우물에는 큰 황금 덩어리 하나가 있었답니다. 깜짝 놀란 신하는 그 황금 덩어리를 꺼내어 임금에게 갖다 바쳤답니다. 그러자 순 임금은 그것을 보고서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것은 임금의 말에 순종하는 충신에게 주기 위해서 하늘이 내린 상급이니 그대가 그것을 가지도록 하게."

순종은 때로는 손해가 되는 것 같고, 순종은 때로는 우둔하게 보일 수 있으며, 순종은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청명한 하늘에 거대한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노아(창 6:22)를 보십시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홍수를 모르는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미친 짓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한 아브라함(창 22:1 이하)을 보십시오. 이성과 상식에 맞지 않는 아버지의 지시에 묵묵히 순종하는 이삭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고 내가 보기에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죄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통치라면 가정에서, 나라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순종의 질은 축복의 질이 됩니다. 순종의 크기가 믿음의 크기입니다. 순종은 자신의 의지에 합하는 것을 따르는 동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 그 자체가 최고의 성공이고 순종이 최고의 복이며, 순종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이해되고 길이 보여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고 길이 보이지 않아도 온전히 신뢰하고 순종하면 길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탈출시킨 후 계명을 주었습니다. 그 계명을 순종하기만 하면 열국 중에서 하나님께 소유된 자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는 축복을 누릴 것을 약속해 주었습니다(출19:5,6). 하나님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이사야 1:19-20)”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은 축복을 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 사울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불순종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패가 무엇입니까? 결국 순종의 실패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울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8장을 통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순종을 강조해 주시고 있습니까?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에게 주신 물 댄 동산의 복을 다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율법서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가서인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복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삶의 축복은 순종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만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산상 수훈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부분에 순종하는 자들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자 같아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이 견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면 가장 고상한 삶, 가장 영예로운 삶, 사단과 싸움에서 이기게 하는 삶,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삶, 위기와 고난이 다쳐도 흔들림 없이 견고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삶이 있습니다. 부한 인생, 가난한 인생, 장수하는 인생, 단명하는 인생, 건강한 인생, 병든 인생, 아름다운 인생, 추한 인생, 풍성한 인생, 초라한 인생, 행복한 인생, 불행한 인생, 깨끗한 인생, 더러운 인생, 베푸는 인생, 움켜쥐는 인생 등등 다양한 인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하고, 장수하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행복하고, 깨끗하고, 베푸는 인생을 사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순종에 있습니다. 순종하면 불행한 인생에서 행복한 인생이 되고, 순종하면 저주받은 인생에서 축복받은 인생이 되며, 순종하면 불통하는 인생에서 형통한 인생이 됩니다. 행복은 순종에 비례합니다.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물 댄 동산 같은 형통한 인생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누려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물 댄 동산 같은 인생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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