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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앞에 나오면(6) 큰 무리(마태복음13:1-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138 추천수:2 112.168.96.218
2018-06-24 08:50:55

 

예수 앞에 나오면(6) 큰 무리

마태복음13:1-9

 

예수님께서 활동하는 곳마다 그 주변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큰 무리입니다. 군중입니다. 이들 중에는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께 온 사람도 있고, 구경하기 위해 친구의 소개로 그냥 따라 온 사람도 있었고, 예수께 나와 질병을 치유를 받고자 한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께 배우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을 적대시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부류의 무리에 속합니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예수님께 오니까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해변에서 그들에게 오늘 우리가 읽은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큰 무리들에게 예수님께 나와 말씀을 듣고 믿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라고 교훈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이 시간 예수님께 나와 예배를 드리며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신앙인으로 일어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땅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8).

열매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맺은 땅은 어떤 땅입니까? 8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씨앗이 떨어져야 합니다. 밭은 무엇을 비유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말합니다. 씨는 무엇이겠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천국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4 종류의 밭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사람의 4종류의 마음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길가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자라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길가 자체가 단단하여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새들이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고정관념, 편견, 아집, 교만에 사로잡혀 마음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소신이라는 미명하에 때로는 고집으로 때로는 전통과 자기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아가 너무 강하여 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에고가 너무 강합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빗장을 쳐 놓고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 영적 세계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강퍅해 있습니다. 교만합니다. 단단해 있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 이기심, 욕심이 결국 인간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비판하고 흠을 잡아 십자가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행5:33, 행7:54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복음을 듭습니다. 그런데 반응을 죽이려고 합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 5:33)"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4)"

말씀을 듣는 군중 가운데는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복음이지만 행2:37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좋은 땅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합니까? 얼마나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까?(41-47)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떡을 나누고, 가난한 자를 도우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여 믿는 자가 3천명, 5천명, 수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군중 중에 말씀을 듣고 믿어 열 두해 피 흘리는 불치병을 앓은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군중과 함께 살지만 군중에게 외면 받던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고질병 환자가 치료받고 일어났습니다. 군중에게 구걸하던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군중들에게 외면 받던 문둥병 환자가 깨끗하게 치유를 받았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예배드리는 사람 중에서 예수님 앞에 나와 영적인 질병과 마음의 질병과 육체의 질병이 치유받는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똑같이 예수님께 나와 말씀을 듣지만 어떤 사람은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옥토 같은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말씀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따분하고 현실 감각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면 손해보고 머리에 쥐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어린 아이들처럼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실패하여 절망하고 있다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말씀하시면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는 말씀을 들으면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뭐 모든 것을 해라고 말씀을 우습게 여기지 말고 그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울 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라는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인생의 요단강이 갈라지고 인생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라고 말씀하시면 내게 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라고 말씀하시면 쓸데없는 염려의 늪에서 신음하지 말고 다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라고 말씀하시면 무식한 것같지만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면 조건 보지 말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맺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설교해“라며 귀를 닫지 말아야 합니다. 지루해 하며 못 견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말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의 백화점 왕입니다. 그의 별명은 '성경이 만든 백화점 왕'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1838년 7월 11일 태어난 이후 오늘까지 무려 30,026일을 살았다. 나의 인생에서 투자한 것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나의 투자 중 가장 성공적 투자는 열 살 때 2달러 75센트를 주고 구입한 이 성경이다. 바로 이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시카코 대학을 비롯해서 12개의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 대학 및 연구소를 지어 사회에 기증하고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그는 젊을 때 사랑하는 여인조차도 이 남자의 장래가 없어 보인다며 떠나버릴 정도로 처참했답니다. 아주 이기주의 자였습니다. 질병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붙들고 변했습니다. 그의 삶에 기적을 일으킨 것은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주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켰답니다. 성경을 매일같이 읽고서 하루를 시작했답니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 성경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성경 읽는 사람을 채용해 성경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성경을 읽으니까 헨델과 베토벤,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존 번연은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만나 천로 역정을 지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일고 진정한 구원을 받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마태복음 28:19,20절에 감동되어 선교사가 되었고 아프리카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사54:2 말씀을 보고 세계를 향한 선교의 비전을 가졌습니다.

말씀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우리 인생의 구원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3)“

 

2.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환난과 핍박을 견디어야 합니다(21).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씨가 뿌려져 뿌리는 내렸지만 뿌리가 견고하게 박히지 않아 햇볕이 내리 쪼이면 나무가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수분을 빨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 왜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밑에 암반이 있고 그 위에 얇은 흙이 있는 땅입니다. 암반이 따뜻하기 때문에 곧 싹은 나오는데 수분이 충분하지 못하여 결국 햇볕이 내리 쪼이면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20-21절에 이것을 설명하기를 말씀을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 말씀으로 오는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곧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당히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금방 달구어졌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핸드릭슨은 이러한 마음을 “충동적인 마음”(Impulsive heart)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들어오시니까 왕의 입성을 축하하듯 종려나무 잎사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왕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 법정에 예수님이 서니까 빌라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조롱하고 침을 뱉습니다. 이런 무리에 속하면 안됩니다. 바울의 제자 데마(골4:14; 딤후4:10 몬1:24)가 그랬습니다. 부자 청년(마19:16-22)이 그랬습니다. 환난과 핍박은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신앙 성장의 필수인데 이것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은 더욱 견고해지지만(욥23:10; 시66;10; 사48:10; 히12:11; 벧전1:7) 돌밭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심정적으로 아주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으로 살면서 잘되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살다가 말씀 때문에 조그마한 문제만 있으면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원망하고 배신하고 등을 돌립니다. 이 환난과 핍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하느냐입니다.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을 견디어내면 가을이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환란과 핍박을 잘 견디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군중 속에 있다가 예수님의 장례위원장이 되어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했던 아리 마대 요셉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무덤이 부활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군중 속에 있다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환난과 핍박을 많이 당하였습니까?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무덤에 숨어 지내야 합니다. 때로는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환난과 핍박도 이겨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 3:13)“

조그마한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가정을 포기하고, 공부를 포기하고, 직장을 포기하고, 사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세상에서 믿는 사람으로 성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승리하고 사업도 성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어려운 일 피하는 사람은 결코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작은 어려움을 만나면 직장을 옮기면 결코 그 직장에서 이사가 될 수 없습니다. 적진에서 수많은 고통을 참고이긴 사람이 장군이 되는 것입니다. 거목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모진 풍파를 겪은 나무가 거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난과 핍박을 받았습니까? 수많은 선교사들과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의 수고로 이렇게 한국 교회는 풍성한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근대 교육의 선구자입니다. 경신 중,고 등학교의 전신인 영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15년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던 형으로부터 5만 2천 달러의 기부금을 받아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국내 대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입니다. 31년 동안 수많은 환난과 핍박을 견디며 하나님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아무도 조선 땅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을 때 그는 이십대의 약관의 나이로 한국에 와서 갖은 핍박과 환난가운데서도 견디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도 환난과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면 풍성한 열매들을 맺힐 수가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으로 쓰러지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을 견디므로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능히 이길 수 있도록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383장 1절)"

 

3.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7,22).

열매를 맺지 못한 씨앗은 어떤 곳에 떨어진 씨앗입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땅도 좋습니다. 습도도 적당합니다. 잘 자라납니다. 그런데 가시덤불이 있습니다. 가시에 찔려 신음하게 됩니다.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해 줍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가시덤불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는 하나를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눅 8:14)" 일락이라는 것을 하나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려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염려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염려란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복잡하게 합니다. 단순하게 갖지 못하게 합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니까 자신도 죽을까봐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망갑니다. 예수님을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염려의 노예가 되면 무엇을 하던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5)” 질병에 걸리면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풍성한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는 말씀을 믿으면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용기있게 살면서 주어진 인생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말씀대로 살면 시간도 손해고, 돈도 손해되고, 인생도 손해된다는 염려가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쓸데없는 염려의 늪에 갇히게 되면 평안을 잃고 불안해집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합니다. 역기능적인 염려, 비정상적인 염려, 병적인 염려는 사람을 소심하고 지나치게 예민하게 만들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합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라고 했습니다. 잠언 17장 22절에서는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염려는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정신적 독약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걱정과 염려는 안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걱정은 사치스런 한가함에 불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비신앙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염려는 불필요하고 불신앙적이고 불유익한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 거리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염려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전적으로 믿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차를 타고 머리에 짐을 올려놓고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바꾸고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거리가 있으면 더 적극적으로 우선순위를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흐린 날도 구름 위로 오르면 창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살다보면 어느새 염려 거리는 없어지고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재물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재물의 유혹은 재물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보다는 필요 이상의 재물을 구하는 욕심을 의미합니다. 재물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질적 가치에 대한 집착과 추구입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돈 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돈 때문에 웃습니다. 돈 때문에 슬퍼합니다. 돈 때문에 결혼하기도 하고 돈 때문에 이혼하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자살하기도 하고 돈 때문에 살 힘을 얻기도 합니다. 돈이면 스타도 될 수 있고 돈이면 인기인도 될 수 있고 돈이면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돈이면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질식시킵니다. 숨 막히게 합니다.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부자 청년은 그 재물의 유혹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가 버립니다. 이것이 신앙생활하면서 인격의 열매, 사역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은 돈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서 헌금 이야기만 하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죽으면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내게 있을 때 가장 가치 있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나의 작은 헌금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게 쓰이는 돈은 헌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데 쓰임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외에 100개의 교회를 건축하여 섬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권사님의 가정이 중국에 교회를 2개 건축하였습니다. 한 달 전에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아주 부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작은 물질이지만 그 물질이 생명을 구하는 대단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그 물질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만만만 생명 운동을 통하여 최빈국 나라에 학교를 세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잠10여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파키스탄에 자그마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제가 2주 동안 방문하여 단기간 내에 건물을 사서 비품을 마련하고 컴퓨터를 설치해 놓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나라는 국교가 회교인 나라입니다. 믿는 것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닐 수 없고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잘 못 전했다가는 팔이 잘리고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학교를 세우는 비용 중에 일부인 2천만원을 천국에 가신 조 권사님이 헌금하였습니다. 권사님은 천국에 가셨지만 그 헌금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떠나지 말고 물질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한 달 만원의 헌금을 최빈국 아이들 중 1만 명의 기독교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 땅 모든 것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물질이 가장 가치 있게 쓰임 받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이 하나님이 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재물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재물을 벌어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오늘 가족 예배드리는데 우리 자녀들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그 물질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멋지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한 앤드류 카네기(1835∼1919)는 공립도서관을 미국에 2,500개, 영국과 캐나다에 500개를 건립, 무상 기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 박물관, 음악 홀 등을 지어 각 시에 기증한 사례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가치 있는 삶입니까? 우리 자녀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거지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아들답게 물질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치 있고 멋지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풍성한 결실을 맺는 일에 쓰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좀도 동록도 해하지 못한 곳에 쌓아 놓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법칙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셋째는 쾌락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쾌락 지상주의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고 그 기쁨은 감정의 기쁨으로만 그칠 수 있습니다. 말초적 기쁨을 쫓기 위해 불나방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인생은 열매도 맺기 전에 시들어 버리고 꽃도 피기 전에 꺾여 버립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멋진 외모와 힘을 선물 받았는데 그것으로 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 사용하다 비참하게 인생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쾌락은 허무한 것입니다. 눈만 뜨면 "욕망을 채워줄 터이니 나를 선택하라."는 광고가 널려 있습니다. 모든 유혹한 달콤하고 매혹적으로 다가 옵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고후11:14)로 가장하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속임수의 명수입니다. 거짓의 아비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세상의 풍속이라는 두 날개를 이용하여 유혹을 합니다. 그 중에 특히 성적 유혹은 강력하고 파괴적입니다.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갖게 만들고 신비감에 사로잡히게도 하고 로맨틱한 감정을 주기도 합니다. 끌리게 하고, 쏠리게 하고 홀려 버립니다. 신앙의 용장이라는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도 용감하게 이기고, 사울의 핍박도 용감하게 견뎠지만 성적 유혹 앞에 꺼꾸러져 간음하고 살인하였습니다. 삼손같이 위대한 장수도 드릴라라는 여인의 유혹에 넘어져 자신에게 주어지 위대한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만약 요셉이 유혹에 넘어갔다면 요셉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당시 문화로 사형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유혹을 이기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류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은 "아니요"라고 말하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죽을까 하노라” 했지만 유혹의 길로 가면 “정녕 죽는 것”입니다. 유혹에 덫에 걸리면 결국 망합니다. 유혹은 확장성이 있어 한 번이 여러 번으로 되고 결국 중독에 빠져 버립니다. 심리학자 제임스 맥가우(James L. McGaugh)는 인간이 감정적인 자극을 받게 되면 그 인상이 아드레날린 호르몬과 에피네프린에 의해 '두뇌에 각인되면서' 기억이 형성되는데 그렇게 형성된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연구 자료를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면 점점 빠져들어 중독의 길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더 큰 자극을 받아야 만족을 하기 때문에 중독에 빠집니다. 중독이 되면 그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 확대된다고 합니다. 게임중독에서 포르로 중독으로 도박중독으로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더 강렬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점점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양심과 도덕적 신념이 마비되어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사단이 유혹으로 주는 것은 결국 불행과 파멸, 죽음입니다. 오늘 가족예배를 드리는 우리 자녀들 명심하길 바랍니다. 남들도 다 하는데 하면서 유혹에 빠져 버리면 순결도 잃어버립니다. 추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도 잃어버립니다. 사명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공하지 못합니다. 가정이 파괴됩니다. 명예와 권력을 잃습니다. 가난해집니다. 질병에 걸립니다. 따돌림을 받습니다. 인생 초라해집니다. 그러니 그 유혹에는 단호히 아니라고 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보십시오. 사탄이 유혹합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예수님께 먹는 것으로 시험을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다니엘을 보십시오. 뜻을 정하여 단호하게 우상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오늘 한 번만 먹고 내일 먹지 말자라고 하면 그것 실패합니다. 남들이 마약 먹고, 술 먹고, 담배피우며, 포르노 즐기고, 컴퓨터 게임 즐기며, 놀음하니까 나도 젊은 날 한 번 해 보아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이 망하는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혹은 독약과 같지만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왜 사람이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까? 유혹은 매혹적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손해될 것 같고 재미없고, 지루하고, 무섭고 싫증나게 하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스릴 있고, 낭만적이고, 새롭고 즐거움을 줄 것 같으니까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재미를 줄 것 같고, 인정받는 것 같고, 사랑을 보장해 줄 것 같고, 참 만족과 부귀영화를 줄 것같이 보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의 시선을 끌기 위해 유혹의 언어들이, 유혹의 그림들이, 유혹의 영상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욕망의 그물로 낚기 위해 감각과 본능에 미끼를 던져 놓고 있습니다.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순진한 듯하면서도 교활하게 다가와 관심과 욕망을 자극하며 허영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호수에 낚싯대를 던져 놓고 있습니다. 그것을 물으면 색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매일 매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유혹에 넘어가 쓰레기장을 만들어 스트레스 쌓이고, 질병에 걸려 빨리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순간의 쾌락을 맛볼 줄 모르지만 수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깁니다. 결혼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유혹에 넘어가 같이 잠을 자다보면 아이가 생깁니다. 그 때부터는 인생이 지옥이 됩니다. 낙태를 합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설령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결혼했다고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성욕의 노예가 되어 산다면 결코 가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유혹은 늪과 같아 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사냥할 때 얼음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피를 묻힌 칼을 거꾸로 세워놓는다고 합니다. 계속 피를 묻혀 놓으면 칼 위에 피 묻은 얼음이 쌓이게 되고 늑대들은 피 냄새를 맡고 칼날이 숨겨진 피를 계속 핥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차가운 얼음으로 혀에 감각이 없어지고 감각이 없어진 혀는 칼날에 계속 베여 자신의 피인지도 모르고 칼날을 계속 핥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이 유혹의 기법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딱 한 번만" 할 때 단호하게 "안돼"라고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짜 딱 한 번만"이라고 말하면 "그래도 진짜 안돼"라고 거절하는 용기, "이번 한 번만"이라고 말하면 "이번에 역시 안 돼"라고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거절 장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행복하게 살려면 '아니요'라고 말하는 용기, 거부하고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행복한 인생의 훼방꾼들에게 큰 소리로 '아니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의미 없는 인간관계로 당신의 진을 빼는 사람들, 그 사람과의 관계로 가족 관계가 파탄 나는 사람들, 그 관계로 당신이 집중해야 할 일을 못하게 하는 사람들, 당신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 통제하려는 사람들, 그 관계로 당신을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람들, 당신을 바보로 만들려는 사람들, 당신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원하지 않는 일에 '아니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인터넷을 하다가 유혹하는 눈길이 있으면 당장에 "아니요" 하고 페이지를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클릭하고 들어가면 그 때부터 그 유혹의 늪으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음란물은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거부해 버려야 합니다. 모든 중독은 유혹에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로 단호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5:12)에도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쾌락의 유혹, 성적 유혹 앞에 단호하게 "아니요"라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유혹을 이기려면 신전의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폴 블룸저)>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성에 빠지고 음악에 빠지고 물건에 집착하고 음식, 예술, 쇼핑, 영화, 스포츠에 빠지는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단순히 감각기관의 반응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쾌락은 대상의 심오한 본질이나 본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신전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책상위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인터넷을 하는 것입니다. 둘만 있고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지금 나를 cctv로 찍고 있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라고 유혹합니다. '뭐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데'라고 유혹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라고 유혹합니다. '이번 한번뿐이니까'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을 이기려면 하나님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뭐 사랑하니까 결혼 전에라도 육체적으로 즐겨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결혼 전에 순결하라고 말씀합니다. 젊은 날 불장난을 하다 비디오로 찍혀 인터넷에 올라와 인생 망해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젊은 날 한 순간의 쾌락을 쫓다 인생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신앙인들이 남들이 다 보는데 하면서 태국의 나체쇼를 보는 것처럼 남들이 다 하는데 하면서 쾌락을 쫓으면 인생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는 신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요즈음 미투 운동을 보십시오. 그렇게도 인기 있고 유명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쾌락을 쫓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데이트 폭력을 보십시오. 신문에 보니까 서울시 여성 10명 중 9명이 데이트 폭력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데이트폭력 사범은 1만 303명을 기록했답니다. 여자가 해어지자고 하니까 칼로 죽입니다. 여자의 아버지가 만나지 못하게 하니까 칼로 죽이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데이트폭력으로 한 달 평균 8명 숨지고 있습니다. 잘 못된 쾌락을 쫓다 자신도 망하고 자신을 길러준 부모도 지옥 같은 삶을 살고, 가정도 불행해져 버립니다. 쾌락의 유혹에 넘어가면 인생은 비참하게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염려와 탐욕과 쾌락의 유혹을 이기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큰 무리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길가같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겠습니까? 돌밭 같은 마음으로 나오겠습니까? 아니며 가시떨기가 무성한 밭으로 나오겠습니까? 좋은 땅으로 예수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옥토에 떨어진 씨앗처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눅8:15). 내적인 모든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외적으로 다가오는 핍박과 환난을 인내로 이겨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 희락 , 화평, 온유, 절제, 인내, 양선, 충성 의 열매가 풍성이 맺혀야 합니다. 전도를 통한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야 합니다. 내게 주신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통한 사역의 열매가 많이 맺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왔다 망한 군중이 되지 말고 예수님께 나와 군중 속에서 선택받아 말씀 받고, 치료받고, 일어나고, 사명으로 쓰임 받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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