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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이유(4)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막2:1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773 추천수:3 112.168.96.71
2016-12-25 15:56:47

 

예수님이 오신 이유(4)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막2:17

 

오늘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입니다. 우리 서로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merry는 '명랑한, 즐거운, 축제기분의'의 뜻입니다. Christmas는 Christ(크라이스트)+mass의 합성어입니다. Christ(크라이스트)는 예수님을 말하고 마스는 미사 즉 예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풀어서 설명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경배하자"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여 즐겁게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합시다.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경배합시다." 첫 번 예수님께서 아기로 탄생할 때 동방 박사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목자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백화점에 선물 사러 가는 날이기 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산타나 자선냄비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성탄절은 해외여행 가고, 스키 타러 가며, 산타크로스에게 선물받는 날이 아니라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예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경배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호화로운 산부인과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낮고 낮은 마굿간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초라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의 친구로 이 땅에 사셨습니다. 로마의 군홧발에 짓밟혔고, 알량한 힘을 가진 자들에게 조롱과 침 뱉음과 채찍을 맞으면서도 수모를 다 참고 견디었습니다.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고 남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왜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을까요?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왜 오신 것입니까?(마 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천사가 요셉에게 말씀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잉태될 때부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라고 했습니다.

구주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지옥 갈 인생들을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만드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시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죄인들을 싫어합니다. 국회청문회를 보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최순실씨에 대하여 아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고 합니다. 그 사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과거에 권력이 있었어도, 아무리 대통령과 친하다고 해도 지금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그 사람과 관련이 있으면 죄인취급당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같이 엮여서 감옥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그 죄인들의 친구가 되고 그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당시 지금의 최순실씨처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14을 보십시오. 알패오의 아들 레위입니다. 세리 마태입니다. 마태는 세무서에서 근무하는 세무공무원입니다. 지금이야 서로 세무공무원이 되려고 하고 죄인 취급받지 않지만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는 나라였기 때문에 매국노로 취급받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양심도 팔고 동족을 팔고 자존심도 팔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이나 창기와 같이 공인된 죄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변절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공공의 적입니다. 그들은 탐욕 덩어리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악착같이 거두어들였습니다. 일정한 금액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더 많은 세금을 착취했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세금들이 있었는데 인두세라고 하여 생존한 사람(14-65세 남자, 12-65세 여자)이 무조건 내야하는 세금, 토지세라고 하여 모든 곡물의 1/10, 그리고 포도와 기름의 1/5을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수입의 1%를 내는 소득세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종류의 의무세가 있었는데 주요 도로 사용로, 항만, 시장 사용료, 짐마차의 각 바퀴마다 매기는 세금, 마차를 끄는 동물에 매기는 세금(오늘날로는 자동차세), 구매세(상품 구매시), 수출입세도 있었습니다. 특정 상품에 대한 세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자를 불러 세워 짐을 풀게 하고 원하는 만큼 상품에 대해 세금을 물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세금을 낼 수 없으면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세금을 내도록 강요했습니다. 폭력배, 갈취범과 같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만큼 죄인도 없었습니다. 세리들은 항상 죄인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갈 수 없으며, 법정의 증인으로도 설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어울리는 사람은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 매춘부들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적 가르침 중 하나인 탈무드는 “언제든 원하면 세리를 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있다”고 말하며 유대인 문서에서는 ‘세리가 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를 향한 경멸과 분노와 비난의 눈길로 봤을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먼저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어떻게 했습니까? 지나가시다가 일부러 그에게 갔습니다. 피한 것이 아닙니다.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오물 취급한 것이 아닙니다.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 취급하며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 버렸습니다. 전염병 걸린 사람처럼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죄인을 아시고 죄인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고독한 마태, 소외된 마태, 죄인이 된 마태, 매국노가 된 마태, 정죄 받는 마태를 보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는 눈으로 보고 욕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라는 겉모습만 보고 오물 취급하였지만 예수님은 외로움과 고독, 갈등과 죄의식으로 신음하는 내면을 보셨습니다. 이기심과 경쟁심과 탐욕으로 깊이 병들어 있는 불쌍한 그의 영적 내면을 보신 것입니다. 돈은 있지만 삶의 목적도, 방향도 알지 못하고 허무와 절망의 병을 앓고 있는 그의 영혼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탐욕의 노예가 된 현재의 세리 레위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장차 변화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할 위대한 하나님의 종 마태를 보신 것입니다. 성탄절 우리 예수님은 마태 같은 우리를 보시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신의 외모나 성격으로 인하여 열등감에 사로 잡혀 따돌림을 받고 있습니까?

가난과 삶의 복잡한 문제로, 화목하지 못한 가정과 복잡한 가정 문제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깊은 병에 들어 있습니까?

원치 않는 전공, 원치 않는 직업, 원치 않는 관계로 패배감과 실패감으로 병들어 있습니까?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는 습관 때문에 절망하며 낙심하고 있습니까?

원치 않는 만남으로 깊은 상처를 받고 사람과 만나는 것을 회피하며 사람과의 관계성 문제로 내면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까?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여 똑같은 죄를 수없이 지며 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다 아시고 그 심각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 예수 나의 힘 되니 겁낼 것 없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예수님은 그를 대리고 어디에 갑니까? 그의 집에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사를 같이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정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버림받은 사람이고 마땅히 심판받고 비난받을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면 안 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 정결규례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아주 명료하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의사는 병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죄에 대하여 말하면 내 이야기 한다고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왜 교회에 오면 죄인, 죄인하며 죄를 지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기 싫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이 난무한 시대입니다.

미국의 젝 카일 목사님은 매주일 설교 때마다 날카롭게 인간의 죄를 지적했답니다. 인간은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기 힘든데 교회에 와서는 힐링 설교 듣고, 성공 설교 듣고, 위로 설교 듣기를 원하지만 그것으로 인생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암세포는 어루만져 주고 덮어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위치를 알고 도려내던지 방사선이나 항만제로 죽이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듣기 싫어하던 한 청년이 권총을 발사해 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가고 목사님은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가서 "목사님 이제는 죄를 그만 말씀하시지요?" 권면을 했더니 젝 카일 목사님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 후에도 설교를 마치고 나오다 권총으로 저격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회개하라고 죄를 지적하며 설교를 하였는데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과 사회가 변화되기 시작했답니다. 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120대의 버스가 운행을 할만큼 성장하는 대형 교회가 되었답니다. 사도행전 교회가 부흥된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를 싫어합니다.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못 견뎌 합니다. 위장하고 숨기고 변장하기 좋아합니다. 속에는 더러운 죄가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위선을 떱니다. 하나님의 청문회에 서면 얼굴 들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죄를 설교하면 직접 권총을 들이대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열 번 이상 방아쇠를 당겨댑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그것이 숨겨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시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참된 행복과 만족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최순실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것이 암덩어리가 되어 발목을 잡고, 그것이 지뢰가 되어 가정을 파괴하고, 그것이 핵폭탄이 되고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그것이 칼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자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지옥가는 인생이 됩니다. 믿지 않는 신학적인 죄나, 법적인 죄나 양심적인 죄나 윤리적인 죄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사는 것은 다 죄입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영적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영적 교만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처럼 무서운 독소는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깨끗하고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은 악한 사람이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고 매도당해야 할 사람이고 마땅히 지옥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 죄인을 불러 천국 가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인과 죄를 분리해서 예수님은 보시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지, 사람 자체가 몹쓸 인간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음란하고 거짓말하고 흉악한 사람일지라도, 죄 문제만 해결되면 의롭고 거룩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2.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을 은혜로 변화시켜 새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에게 가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첫마디가 “나를 따르라”입니다. 그는 거룩한 주님을 따를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가장 나쁘냐고 말할 때 "산에서는 곰과 사자요, 시가에서는 세리라"고 할 만큼 백성에게서 냉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로마 정부의 고용된 관리이기 때문에 아람어나 헬라어, 히브리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회계 업무도 볼 만한 실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물 취급받는 그를 제자로 삼으면 예수님의 명예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지식과 돈과 권력이 있어도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과 어울리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수준에 맞는 옷을 입고, 수준에 맞는 차를 타고, 수준에 맞는 집에 살고, 수준에 맞는 백화점에 다니고, 수준에 맞는 친구를 사귀고, 수준에 맞는 교회에 다니길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어느 국회의원이 다니는 교회, 어느 재벌, 어느 유명인, 어느 연예인, 어느 교수, 어느 유명한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어느 정도 수가 많이 모이는 교회에 다녀야 신앙생활도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 괜찮은 사람들이 나와야 교회도 부흥도 되고, 신앙생활도 재미있다고 생각들 합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교양 있는 교회, 품위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교회, 재벌이나 권력자들,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교회, 부담 없는 교회에 다니고 싶어 합니다. 늘 비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하고 흠잡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교회를 누가 다니고 싶어 하겠습니까? 교회에서 신앙 생활할 때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이런 사람과 같이 밤낮으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상종하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 마태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런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사람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람 잘 변하지 않습니다. 염소 새끼들은 자라도 염소입니다. 아무리 좋은 풀을 먹이도 여전이 염소로 순종도 하지 않고 뿔로 받습니다. 뿔이 나있는데 어떻게 양이 되겠습니까?

어릴 때 놀기 좋아하고 화장하기 좋아하는 한 여성이 결혼을 하였답니다. 임신을 하여 자식은 자신보다 잘 잘 키워보겠다고 희망을 가지고 아이를 낳았답니다. 첫 아이의 출산으로 비명을 지르며 힘들어하던 산모가 분만을 끝낸 후 간호사에게 물었답니다. "이제 다 끝났나요?" 그 때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산모에게 말했답니다. "끝나다니요. 이제부터 시작이죠. 앞으로 20년 정도는 계속 힘들 거에요." 그런데 딸이면 편할 줄 알았는데 딸아이를 기르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답니다. 아이가 자라 미용실에 머리를 해 주러 갔는데 아이가 제 맘대로 머리를 자르려고 하니까 엄마가 그렇게 하면 보기 싫다고 스타일을 고쳐 주려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이건 내 머리야!"라고 소리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도 지지 않으려고 "이거 내 돈으로 자르는 거야!"라고 야단을 쳤답니다. 치사하지만 돈을 무기 삼아 딸을 마음대로 다스려 보려고 했지만 딸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럼 난 머리 안 해."하고 나가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딸이 자라 사춘기가 되니까 공부는 안하고 맨날 멋만 부렸답니다.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 "도대체 제 딸이 누굴 닮아 그런 걸까요?"라고 물었답니다. 무당이 눈을 지그시 감더니 "혹시 집안에 외국인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더랍니다. "아뇨. 왜요?"라고 하자 "이상하다. 따님이 외국인을 닮았다는 환상이 보이는데…."라고 하더랍니다. 어머니가 "제 딸이 닮았다는 그 외국인 이름이 도대체 뭡니까?"라고 하자 "따님이 그렇게 공부도 안 하고 화장하고 멋만 부리는 것은 Jiemy(지에미)라는 사람과 닮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시군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 잘 변하지 않습니다. <바른 마음(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가 인류학·심리학·뇌과학·진화론 등의 다양한 연구를 바탕으로 '왜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밝힌 책입니다. 아이들을 연구하는데 아이들 앞에서 똑같은 유리컵 두 개를 준비해 거기에 똑같은 양의 물을 붓고 이 두 유리컵에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아이들은 "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런 다음 길쭉하게 생긴 유리컵을 하나 가져다 아까의 두 유리 컵 중 하나의 물을 붓고, 이번에는 길쭉한 유리컵과 물을 그대로 둔 유리컵에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지 물었답니다. 그러면 예닐곱 살이 채 안 된 아이들은 물 높이가 더 높기 때문에 길쭉한 컵에 물이 더 많이 들어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유리컵에 물을 옮겨 담아도 총량은 그대로라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물의 양이 그대로라고 어른들이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아무 소용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살 짜리 아이에게 물의 총량이 보존되는 원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정 연령(인지능력이 생기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했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준비만 되면 아이들은 유리컵에 물을 담으며 노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그 이치를 깨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물의 양이 보존된다는 사실은 선천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요 어른에게서 배우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그 이치를 깨치는데, 다만 그러려면 반드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고, 더불어 거기에 맞는 적절한 경험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나쁜 놈은 영원히 나쁜 놈입니다. 내가 하면 로멘스고 타인이 하면 불륜입니다. 대부분 선거 때 여당 찍는 사람은 계속 여당 찍고 야당 찍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야당 찍습니다. 그 교수의 견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를 보십시오. 변화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들이 만든 기준으로 적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진영논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합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이 있을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죄인 레위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 마태로 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죄인 마태를 부를 때 마태는 어떻게 합니까? 세관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이것은 세리 레위가 제자 마태로 변화되는 인생 변화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종자 계량을 한 것입니다. 죽어야 종자 계량이 되는 것입니다. 죽어야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 다 버려버리고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달라지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왕이 되어 내가 살아가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하니까 염소 노릇하며 매사 불순종하고 들리 받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변화되고 싶은 사람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모방하는 것입니다. 세리 마태는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새로운 차원에서 천국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과거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상처로부터 치유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용서해 주고 용서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가정이 행복해 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민족이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좇아가면 죽음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위로를 받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평화를 증거하는 주인공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탄의 종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충만한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영원한 친구가 되어 말씀과 기도로 영적 식탁을 함께 하면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드리려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대속물로 예수님의 생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읽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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