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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다리(7) 희망을 향한 행진(열왕기하 7:3-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690 추천수:8 112.168.96.71
2016-08-21 10:44:41

 

희망의 사다리(7) 희망을 향한 행진

열왕기하 7:3-8

 

<노력의 분노(이성동, 김승회 지음)>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무엇인가 되었고 개척에서도 용이 나왔는데 지금은 노력도 우리를 배신한다고 말합니다. 땀도 배신한다고 합니다. 희망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출산, 내 집 마련의 희망을 포기한 3포 세대가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청년 실업이 심각해져 거기에 더해 꿈도, 직업도, 인간관계도, 연애도 포기한 7포 세대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조선, 흙수저란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100만여 취업준비생, 627만여 비정규직 근로자, 1,300만여 정규직 직장인들도 힘들다고 합니다. 2010~2014년 5년 동안 427만여 명이 직장을 떠나야 했고, 구조조정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년까지 다니는 직장인은 겨우 7.6%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음식점, 커피 전문점, 치킨 집과 같은 생계형 자영업을 하지만 자영업 창업자 10명 중 2명은 1년도 못 버티고, 7명은 5년 안에 폐업을 한다고 합니다. 대기업 입사 경쟁률은 35:1, 공무원 고시도 87:1, 서울의 한 국공립 어린이집은 200:1, 군 입대 경쟁도 5:1이 넘는다고 합니다.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허탈감으로 성취의욕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어지고, 경쟁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주역이 되는 앞으로의 세계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 전쟁은 더욱 심각해 질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 버스를 타면 “안 계시면 오라이~!”를 외치며 요금을 받던 버스 승무원 다 살아졌습니다. 전화 교환원, 다방 DJ, 타이피스트, 전차 운전사 등은 다 살아졌습니다. 지금은 건축 로봇이 나와 이틀이면 집을 한 채 짓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직업 수는 1만 1655개라고 합니다. 앞으로 수많은 직업이 없어지고 새로운 직업이 생길 것입니다. 건축에 관련된 수많은 일자리도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출 수 있습니다. ‘유엔미래보고서 2025’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현존하는 직업의 80%가 10년 내에 사라지거나 진화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1차 산업혁명 때도 마찬가지이고 예전부터 그래왔습니다. 어느 시대든 절망적인 것 같지만 희망은 늘 있습니다. 어떤 자세를 가지냐에 따라 “Dream is now here”가 될 수 있고 “Dream is nowhere”가 될 수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존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희망을 선택하느냐 절망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희망을 선택하면 희망은 절망을 이깁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 대하여, 우리 민족에 대하여, 우리 가정에 대하며, 우리 교회에 대하여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을 심으면 언젠가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연히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는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로 쫓겨 도망가 광야에서 머무는 모세를 하나님은 불러 노예 생활로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는 민족을 해방시킬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상 장사의 아들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는 희망을 주시고 그를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며 죽음의 길을 걸어가던 바울을 불러 그에게 이방임금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살리는 길을 가게 하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유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역사를 끌어가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900여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습니다. 북한의 핵 문제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사드 문제 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경제 침제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취업이나 진학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6장 28절 이하를 보십시오.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는 인육식을 할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이 도박 중독되고 영상 중독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질병으로 인한 절망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잡아먹는 때에 내일 이맘때가 되면 정상적으로 곡물을 매매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절망적인 상황인데 죽을 병이 낳고, 경제가 풀리고, 취업이 되고, 진학이 되고, 중독에서 해방되고, 가정에 기쁨과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희망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희망을 가지고 희망의 행진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4명의 나병환자들입니다. 당시 가족과 민족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절망적인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희망을 이루고 희망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한 시대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도 희망을 향해 행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절망적인 환경과 절망적인 삶의 조건 가운데서도 희망을 향해 행진할 수 있겠습니까?

 

1.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각을 희망적으로 바꾸면 희망을 향한 행진할 수 있습니다.

희망의 행진은 생각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바뀐다고 희망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각이 희망적으로 바뀌어야 희망을 향한 행진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 때는 사람은 자료신념과 규제 신념에 의해 결정합니다. 자료 신념으로 타당성을 검증하고 사고의 틀인 규제 신념에 의해 선택을 합니다. 나병환자들은 어떻게 선택을 합니까?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병환자들이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라는 생각입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죽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병이기 때문에 성문 어귀에서 성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적들이 포위하고 있으니 적들에게도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때 그들은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에 가도 죽고, 여기 있어도 죽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00%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아람 군대에게 항복을 하면 그래도 50%로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살려주면 살고, 죽이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100%의 절망보다는 50%의 희망을 택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의 희망 행진을 위한 첫 번째 출발점입니다. 100%의 희망에만 희망행진을 출발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100% 희망적인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다 위험부담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100% 지지하는 세상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100%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희망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반대 세력이 많았습니다. 밥 한수가락 먹을 때도 수많은 세균이 있는 것입니다. 세균 무서우면 밥도 못 먹습니다. 변기에도 수많은 세균이 있습니다. 세균 무서우면 용변 못 봅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좋은 일을 하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은 1%에도 희망을 걸어 보는 것입니다. 어차피 100%가 망하는 길이라면 그래도 1% 흥하는 길에 희망을 걸어 보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절망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인 사고로, 소극적인 사고를 적극적인 사고로, 비관적인 사고를 낙관적인 사고로 바꾸어야 희망의 행진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나를 통해 그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가데스 바냐에 서 있는 12명의 정탐꾼을 보십시오. 똑같은 땅과 강과 사람과 나무를 보고 왔습니다. 절망적인 10명의 정탐꾼의 생각은 자신들은 메뚜기라는 생각입니다. 거인들과 비교하여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입니다. 소극적입니다. 비관적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향한 행진을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우리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희망을 향해 행진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것입입나다.

블레셋 골리앗 앞에 절망하면 떨고 있는 백성들 앞에서 다윗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5-47)” 얼마나 희망적 생각입니까?

요나단이 나라가 블레셋 의해 망할 절망적인 위기에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부하 한 명과 함께 적을 물리칩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라였습니다. 희망을 향한 행진을 하려면 믿음의 생각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사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우리 마음을 불신에서 믿음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할 지라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믿음의 사고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 계시는 동안 산 아래서 벙어리 귀신이 들려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절망적인 삶을 사는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좀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고쳐 주지 못했습니다. 때 마침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 달라.”고 말합니다. 부정적입니다. 절망적입니다. 제자들도 못했으니 뭐 예수님도 별수 있게냐는 것입니다.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마음을 고쳐먹고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그 지긋지긋한 절망적인 질병에서 벗어나 치료받고 희망으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향한 행진을 하려면 “나는 부족, 나는 약해, 나는 안되, 나는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는 안 되어도 주님이면 할 수 있어, 주님께서 해 주실 것야, 믿으면 되, 할 수 있어. 해 보자.”라는 식으로 마음을 바꾸어야 희망을 향한 행진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마음을 믿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무화과를 맺지 못한 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하자 뿌리부터 말라버린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막11:20) 그 때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어 보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래도 되리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라고 하셨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의 행진을 하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절망적 늪도 해쳐 나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불신의 생각을 믿음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타락하여 사생아를 낳고, 이단에 빠졌을 때도 모니카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결국 아들을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 걸으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2.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행동을 희망적으로 바꾸면 희망을 향한 행진할 수 있습니다.

생각만 희망적으로 바꾼다고 희망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으면 그 믿음에 따른 행함이 따라야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청년이 주일날 목사님으로부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설교를 들었답니다. 그리고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타날 수 없다”는 설교를 들었답니다. 그래서 10억 로또 복권에 당첨될 것을 굳게 믿었답니다. 그리고 100일 작정기도를 하였답니다. 정성을 다해 로또 당첨을 위해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매주 당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100일 째 새벽에 하나님께 항의했답니다. “하나님 기도하면 다 된다면서요 왜 로또가 당첨이 안 됩니까?” 그 때 환상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답니다. “애야, 복권이나 사놓고 기도해야지? 내가 복권까지 만들어 당첨시켜 주랴. 그러면 내가 사문서 위조범이 된다.”라고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다면 희망을 이룰 행동을 해야 합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은 생각만 하고 멈추어 있지 않았습니다. 희망적 생각을 가진 후에는 발걸음을 아람 진영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첫째가 모험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곳으로 가는 모험적인 행동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행해 행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벤처 신앙입니다. 리스크, 위험을 감당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험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길만 생각하면 절망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00% 죽음의 길이 있다면 거기에서 절망하고 죽지 말고 1%의 희망의 길로 위험이 있다고 해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6.25 당시 불과 사흘 만에 서울 함락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 때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모두의 반대 속에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습니다. 성공확률 5000:1이었다고 합니다.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참모들과 함께 연구한 결과 역사적으로 바다에서 육지로의 상륙하여 성공한 경우는 단 한 번 노르망디 상륙작전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을 때 맥아더 장군은 "그가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작전을 실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모험적 행동, 벤처 행동입니다. 창조적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이런 믿음으로 행동하면 희망의 문은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9:29)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마 21:22)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믿음은 기도응답의 열쇠입니다. 믿음은 성취의 통로입니다. 믿음은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줍니다. 믿음은 기적의 기초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역경을 이기게 합니다. 믿음은 장애물을 뛰어 넘게 합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믿음이란 저수지 물을 집으로 끌어다주는 수도관과 같다. 즉 하늘의 보물을 지구에 날라다주는 수송 파이프인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둘째가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성취의 기술을 알려주는 <심리학, 성공의 비밀을 말하다(주디스 조이스 지음)>책이 있습니다. 수많은 상담과 임상사례 연구분석, 심리학적 고찰을 통해 지속적으로 목표를 성취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이룰 수 있었는지를 밝혀놓은 책입니다. 끊임없이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Serial Achiever)은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목표를 하나하나 정복해가면서 자신들의 기술과 재능을 여러 방식으로 이용한다고 합니다. 성취를 향해 전진할 때 개인의 중압감을 형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개인적인 사고방식과 좌우명 둘째가 익숙함, 셋째가 인생의 압박인 의무감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중도에 포기해 버립니다. 중도포기를 잘 하는 학생이 있었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해보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기를 밥 먹듯이 했답니다. 선생님이 물어 보았답니다. “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꾸준히 한 게 하나라도 있나?” 그러자 “저는… 중도포기를 평생 꾸준히 해왔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포기는 배추를 셀 때 쓰고 실패는 바느질할 때 쓴다.”라고 말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 보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자녀교육을 시킬 때도 부모가 중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고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인생을 압박하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가지고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벽돌 하나하나가 쌓여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구슬 하나하나가 역어져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총 금메달 23개를 목에 건 수영 황제 펠프스를 이기고 금메달을 건 조셉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8년 전 13세 때 싱가포르 수영장에서 연습 중에 펠프스를 만나 사진을 찍고 그와 같이 되려는 희망을 품고 살았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셉이 펠프스를 0.75초 차이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고 합니다. 싱가포르 역사상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이었답니다. 혼혈아여서 어릴 적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난 13세 때 펠프스를 만났고 "펠프스처럼 되겠다"는 꿈을 갖고 이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답니다. 그는 금메달을 따는 순간도 꿈은 "펠프스처럼 되는 것이다"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펠프스처럼 되겠다고 다 그렇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결실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신중하게 계획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해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진영 끝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무작정 기계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한 연습도 만찬가지입니다. <1만 시간의 재발견>에서 저자 에릭슨이 말하는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작정 기계적인 연습이 아니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집중(Focus), 피드백(Feedback), 수정(Fix it)의 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심적 표상이 생길 때까지 의식적 연습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어느 날 위대한 음악가가 되겠다고 생각만 고쳐먹었다고 위대한 음악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며 연주자였던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세 살 때부터 아들에게 작곡과 연주 훈련을 강도 높게 시켰답니다.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은 골프광으로 7개월 된 타이거 우즈에게 골프채를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우즈를 곁에 두고 몇 시간이고 자신의 골프 연습을 지켜보게 했고 두 살이 되기 전부터 골프장에서 꾸준히 연습시켰다고 합니다. 그는 4살 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훈련을 받았고 전문 코치를 통해 체계적인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프 콜빈은 『재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에서 위대한 성과는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들의 성공 비결은 준비된 지도자에 의한 조기교육,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 반복 훈련, 결과로부터의 피드백이라고 말합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의 노력’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21살 때 작곡한 첫 번째 작품 피아노 협주곡 9번은 모차르트가 18년 동안 의식적 연습을 한 결과물입니다. 한계 앞에 포기하면 위대한 작품은 나오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는『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데 8년이 걸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최후의 만찬』을 그리는 데 10년이 걸렸답니다. 루소는『에밀』을 20년간 구상하고 3년간 집필했으며, 괴테는『파우스트』를 23세에 쓰기 시작해서 82세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희망을 향해 행진한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에스더를 보십시오. 민족이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부림절 날 다 죽어야 합니다. 누군가 왕 앞에 나아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민족은 유대인들은 다 학살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이 때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하고 왕 앞에 나아갑니다. 그냥 믿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왕이 나오라고 하지 않은 사람이 나아가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을 각오를 하고 가니 왕을 그녀를 기쁘게 받아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살아나게 되어 아름다운 날, 희망을 성취한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포로로 잡혀갔지만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만약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30일 동안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지자는 조서를 왕에게 받습니다. 다니엘도 이 사실을 다 알았습니다. 그 때 다니엘이 어떻게 합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모세가 위험을 무릎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홍해를 행해 지팡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위험을 무릎쓰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여리고를 미친 사람들처럼 매일 도는 것입니다.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위험을 무릎쓰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고 나아가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됩니까?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임재했다는 말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적들이 네 명의 걸어오는 소리를 큰 군대의 소리로 듣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북쪽의 헷 왕과 남쪽의 애굽 왕에게 값을 주고 용병을 고용하여 연합군으로 자신들을 치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려 놓고 살기 위해 다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희망을 성취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먹고 마시고 은금 의복을 챙겼습니다.

 

3.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이룸으로 희망적 환경을 만들면 희망을 향한 행진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희망을 향한 행진의 마지막 단계는 절망적 세상을 희망적 세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끝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이 희망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고에는 관련적 사고와 최종적 사고가 있습니다. 최종적 사고는 그것을 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련적 사고는 지금 이런 한 일을 늘 궁극적인 것과 관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생명 구원과 관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 4명의 나병환자가 죽지 않고 살아 난 것은 무엇이 때문입니까? 이 전쟁은 누구를 죽이기 위한 전쟁입니까?

6장 31절을 보십시오. 왕은 엘리사를 죽이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6:31) 그리고 여호람 왕은 자객을 보내었습니다. 왕도 같이 왔습니다. 이 때 왕과 여러 장로들 앞에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7장 1절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모두 똑똑히 들어라 내일 이맘때에는 성문 안의 장터에서 밀가루 한 말이나 보리 두 말의 값이 겨우 은 한 세겔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값싸게 음식을 사먹을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왕을 수행하는 경호대장이 즉각 반박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당장 소나기를 내려 쏟으신다고 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16절 17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절망적인 나라가 희망의 나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절망적인 나라를 희망적인 나라로 바꾸는데 쓰임 받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4명의 나병환자입니다. 어떻게 쓰임 받았는지 이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알리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왕궁에 알리자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결국 성문 문지기에 아람군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나 홀로만 그 아름다운 날을 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들은 성안에 거하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든 사람들입니다. 복수하기로 하면 그대로 방치해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만 먹고 누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밝은 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벌이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왕궁에 고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성문지기에 가서 아람 진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백성에게 살기를 제시해 줍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나병 환자가 정상인을 만나는 것은 금해 졌고 만약 그들 앞에 다가서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먹을 것 생겼다고 그들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여전히 문둥병 환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백성에게 아름다운 날을 알려 주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육적으로 죽어가는 사람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경제가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희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야 공의와 사랑이 하수같이 흐르게 됩니다. 이 예수님을 절망하는 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셔야 진정한 희망이 있게 되고 절망에서 희망을 가지게 되는 세상이 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인생과 세상이 희망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찬미 예수 946장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 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가면, 백낙준 박사님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분은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셨고, 문교부장관을 지내셨고, 목사안수를 받으셨습니다. 이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가 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수무당하면 자식이 망한다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과거를 정리하고 선교사 집에 와서 허드렛일 도우며 살았는데 선교사님이 아들을 미국에 유학을 시킨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 교인인 서상륜이라는 분 예수를 믿으니까 그의 가문과 그의 고향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31살에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의 절망 앞에서 메킨타이어 선교사님은 정서을 다한 기도와 치료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번역인 로스 성경을 로스 선교사님과 함께 번역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가 세워집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서울에 새문안 교회를 세웁니다. 처음 14명이 세례를 받습니다. 모두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황해도, 평안도 할 것 없이 부산까지라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평생 평신도로 살며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집을 헌납하여 교회를 지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님께서 그가 헌납한 집과 똑같은 기와집을 노년에 사주었다고도 합니다. 예수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가정이 바뀝니다.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는 이런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장례 행렬이 멈춥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용서를 받습니다. 도끼로 인간을 죽인 살인만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절망과 실패 가운데 자살을 결심한 사람도 예수님 만나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한센씨병 환자가, 혈루증 앓는 여인이, 앉은뱅이가, 나인성 과부가 예수님 만나 새롭게 됩니다. 행복해집니다. 병든 아들, 죽은 아들 만나 지옥 같은 인생 살이었는데 천국으로 화하였습니다. 세상에 누구를 만난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인생의 모든 풍랑을 단번에 잠재울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설교만 듣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성경공부만 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봉사만 전도만 친교만 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 만나지 못하면 헛된 것입니다. 예수 만나 봉사하고 전도하고 친교해야 샘솟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나를 치료하시는 예수님, 나를 도우시는 예수님, 나를 위로하시는 예수님, 부활하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만난 그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 말씀을 이루는 아름다운 날이 되기 위해 말씀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희망을 향한 행진을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믿음에 근거하여 희망적으로 바꿉니다. 둘째는 행함있는 믿음으로 위험을 무릎 쓰고 과감하게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희망을 이루면 나만의 희망이 아니라 모두의 희망이 되도록 절망하는 세상을 향해 진정 희망이 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가정을, 내 교회를, 내 직장을, 내 나라를 희망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6.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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