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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날 자격이 있다
열린교회 (yeolin) 조회수:2087 추천수:18 112.168.96.71
2014-11-21 17:53:36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슬이 비친 것이다. 예정일은 이틀 후지만 이것은 분명한 출산의 징조라고 했다. 우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일 주일 정도 씻지 못할 테니까. 반찬도 몇 가지 더 만들어 놓았다. 당분간 남편 혼자서 챙겨 먹어야 하리라. 분주한 시간이 지나 오후 6시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곧 아기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몹시도 흥분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30분, 10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다가 새벽 1시경부터는 5분 간격으로 진통이 왔다. 밤잠을 설치고 나서 아침 일찍 병원으로 출발했다.

하필 담당 의사는 휴가였고 다른 의사가 초음파 검사를 해 보더니 아기가 탯줄을 감고 있다고 한다. 자연분만을 시도해 보다가 안 되겠으면 그때 가서 수술을 하자고 했다. 나 역시 자연 분만과 모유 수유를 다짐하고 있었기에 약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병원과 의사를 믿기로 했다. 정오가 되어 나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진통이 2, 3분 간격으로 왔기 때문이다. 고통은 생각보다 심했다. 게다가 아기의 머리가 커서 중간 골반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난산이 될 거라고 했다. 점점 진통은 심해지고 급기야 나도 모르
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더 이상 자연 분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 오후 5시 30분. 의사는 남편을 불러 수술 동의서를 작성해 달라고 했다. 밖에서 나의 비명을 들으며 혼자서 맘 졸이기를 다섯 시간 반. 남편은 얼굴이 핼쓱했고 나를 보는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그의 눈물을 본 것은 11년 동안 그를 알아온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혼한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같은 과 동기로 만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사귀어 왔다. 그간 그의 면모를 충분히 보고 알았던 나였지만, 그의 눈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울다니…. 수술실로 들어가는 중에도 그의 눈물 생각만 났다.

“3.1㎏의 건강한 사내아기예요.”혼미한 정신으로 의사와 간호사의 축하를 받았다. 탯줄을 감고 있다는 이야기가 걸려 마음껏 힘을 쓰지 못했는데도 갖은 뼈마디가 모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도 그가 분만실에서 보인 눈물 생각이 났다. 통증이 차츰 가라앉고, 가족들의 방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남편과 둘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여보, 아까 왜 울었어요?”그가 잠시 머쓱해했다.“당신이 꼭 죽을 것처럼 아파하는데 나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잖아. 결혼 서약할 때 아픔까지 함께 한다고 약속했었는데….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나왔을 때, 아들이냐 딸이냐 묻지 않는다고 구박하더라구. 오히려 너를 그렇게 아프게 한 녀석이라는 생각에 얄밉기만 하다. … 우리, 아기 그만 낳자. 두 번은 못 보겠다.”

정말 그랬다. 아기는 나 혼자서 낳은 것이 아니었다. 긴 시간을 혼자서 애태운, 하루 사이에 반쪽이 된 그의 얼굴에서 그도 나 못지 않은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었다.그로부터 일 주일 간, 출산을 위해 쓰지 않았던 여름 휴가를 받고, 정말 고군 분투, 분골 쇄신하며 그이는 나와 아기의 뒷바라지를 했다. 마침 그 병원이 아기와 엄마를 같은 방에 두는 곳이어서 낮에는 산모를, 밤에는 낮 밤이 바뀐 아기를 돌보느라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유 먹이기, 우유병 소독하기, 기저귀 갈기는 물론 산모 화장실 데려가기, 전신 마사지 해주기, 팔다리 주물러 주기 등 그는 눈코 뜰 새 없었다. 게다가 찾아오는 손님 맞으랴,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랴, 데려오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의 소관이었다.

퇴원 후에도 그의 활약상은 눈부셨다.밤에 자주 깨는 아기를 위해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우유병을 여섯 개나 삶아 놓고,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고, 뜨거운 물과 섞을 수 있게 찬물도 주전자에 담아 놓고, 가습기를 틀어 건조한 공기를 완화시키고, 수퍼마켓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한 아름 사다 놓고…. 회사 다니랴 집안 일 하
랴… 그렇지만 그는 그 모든 일을 힘든 기색 한번 없이 해내고 있었다.

출산 후 2주. 그는 지금 자고 있다. 몸살이다. 목감기라고 약만 먹더니 급기야 몸살기가 있다며 싸고 누웠다. 그래. 그이는 충분히 몸살날 자격(?)이 있다. 그가 잠이 들면 얼른 아기에게 향해 있던 가습기를 그를 향해 틀어 주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 고춧가루를 풀어 콩나물을 얼큰하게 끓여 주어야겠다.그가 11년 만에 처음 보인 눈물과 이 몸살의 의미는 충분히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아내와 자식과 무엇이든 함께하겠다는…. 그런 미더운 눈물에 대한 보답이 겨우 가습기와 콩나물국이라면 너무 약소할까?

몸살날 자격(?)이 있다./윤현희

-낮은 울타리 98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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