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좋은 동역자(빌2: 19 - 24, 빌립보서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884 추천수:3 220.120.123.244
2019-08-18 12:52:01

좋은 동역자(빌립보서11)

빌2: 19 - 24

 

탤런트 김수미 씨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분 남편이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났답니다. 빚더미에 올라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답니다. 잘 나갈 때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외면했답니다. 돈이 많았던 친척도 피했답니다. 그래서 급한 대로 동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몇백만 원씩 돈을 빌렸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탤런트 신앙 좋은 김혜자 권사님이 알았답니다, 김권사님이 정색을 하며 "얘, 넌 왜 나한테 돈 빌려달라는 소리 안 해! 추접스럽게 몇백씩 꾸지 말고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되니? "하며 통장을 꺼내 놓았답니다. "이거 내 전 재산이야. 나는 돈 쓸 일 없어. 다음 달에 아프리카 가려고 했는데 아프리카가 여기 있네. 다 찾아서 해결해. 그리고 갚지 마. 혹시 돈이 넘쳐나면 그때 주든가." 김수미 씨는 그 통장을 받아 그때 지고 있던 빚을 모두 청산했다고 합니다. 연예계에서 함께 일하는 연예인으로 김권사님은 김수미 씨에게 평생 함께할 만한 좋은 동역자가 되어준 것입니다.

동역자란 같이 사역하는 자를 말합니다. 부부가 어느 날 만나 동역자가 됩니다. 모르는 사람이 어느 날 한 직장에서 만나 동역자가 됩니다. 어느 날 같은 교회에서 만나 신앙의 동역자가 됩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 안에서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서로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안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동역자의 전달하는 말)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왜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속히 보내기를 원했습니까? 지금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언제 사형선고를 받을 줄 모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권과 처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자신도 속히 갈 것을 확신하고 있지만 주님이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은 갈 수 없으니 자신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동역자 디모데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사형선고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왜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겠다는 것입니까?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읽은 번역에는 빠져있지만 “너희의 사정” 앞에 목적을 말하는 접속사 ‘히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이 디모데를 보냄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안위(유프쉬코)’라는 말은 ‘용기를 가지다. 안심하다’다는 말입니다. 우리말 사전은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함”이라고 해석해 놓았습니다.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왔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바울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디도데가 빌립보 교인에게 바울의 근황(近況)을 전하여서 빌립보 교인들도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로마에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디도는 감옥에서 바울의 수종을 들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인들이 심히 근심하게 되었습니다(26). 병이 낫자 빌립보서를 기록하여 보내면서 자신의 투옥이 결코 복음의 퇴보가 아니라 복음의 진보를 이룬 것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1:12). 죽지 않고 살아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려 줍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를 통해 이 편지를 읽고 바울의 소식을 들음으로 용기와 격려와 위로를 얻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빌립보교인들이 서로 분열하여 연합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이고 자신이 전도하여 양육한 성도들인데 얼마나 낙심하고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빌립보서를 통해 한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읽고 하나가 되었다는 소식을 디모데에게 들음으로 안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용기와 격려와 위로를 받기 원했습니다. 안위의 말을 들으면 감옥에서 고통과 걱정과 근심은 눈녹듯 살아질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 일에 유일하게 쓰임받은 동역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바울과 빌립보교인 사이에 끼어 이간질하는 자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은 동역자가 아닙니다. 이간질을 시키는 것은 사탄의 주특기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이간질시켜 원수로 만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는 것이 사탄의 주특기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설교 시간에도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아멘’도 잘하지 않은 예의가 바른 교인으로 가득 차 있지만 때로 보면 교회 안에도 사탄의 종노릇하는 못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언론에 나온 기사들을 보면 멘토 멘티라고 하며 사기치고 살인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한 번 잘 못하면 비기독교인은 술을 먹고 풀지만 교인 가운데는 술도 먹지도 않고 상대를 용서하지 않으며 그가 교회를 떠날 때까지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 소비자'(religious consumer)가 되어 '교회 쇼핑'(church shopping)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에 대한 예의가 깡통인 무례한 교인도 있습니다. 기분 나쁘다고 설교시간에 계속 손들고 질문하는 교인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왕따를 시키고 패거리를 만들어 교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추행과 성폭행, 사기 같은 지극히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가 싫다고 선글라스를 쓰고 새벽기도에 나와 맨 앞줄에 앉아 설교 시간에 신문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늘 교인의 험담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검사스런 교인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막가는 목사도 있습니다. 디모데가 이런 소식을 마구 퍼 나르는 사람이 되면 안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면 안위자로 동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디모데가 그 우울한 소식, 속상한 소식, 슬픈 소식을 바울에게 전달하면 안위가 되겠습니까?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는데 디모데가 바울이 보낸 편지는 전하지 않고 이간질 시킬 말, 슬픈 말, 속상한 말, 우울한 말만 전달하면 빌립보교인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받고 격려를 받겠습니까? 우리는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말씀과 말씀의 원리를 전하여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같이 회사를 다니면 사업을 하는 동역자가 맨날 자기 회사 나쁜 일만 드러내고 상품의 나쁜 점만 소개하면 그 회사를 이루는 좋은 동역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세상이든 긍정과 부정은 있습니다.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가능한 긍정을 드러내어 전달함으로 용기를 주고 위로는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을 전달할 때도 내가 보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적 사실, 객관적 사실을 전하고, 일부러 거짓을 전달할 필요는 없지만 용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 사실이 있다면 서로를 위해 접어두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실을 전달해야 합니다.

제가 이번주 주보 섬기는 언어에 “부정본능과 인간관계”라는 글을 써 놓았습니다.

<팩트풀니스(FACTFULNESS)>라는 책이 있습니다. 빌 게이츠가 내가 읽은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말하며 미국 모든 대학 졸업생에게 직접 선물한 화제의 책입니다. 저자인 한스 로스링은 스웨덴 출신의 통계학자이자 의사이며 세계보건기구에서 활동한 저명한 학자입니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극적인 본능 탓에 세상을 오해하고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오해하는데 10가지 본능들이 우리가 사실과는 동떨어진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본능 때문에 작게는 이웃부터 넓게는 국가간의 외교문제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많은 오해와 왜곡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한스 로슬링은 세상을 왜곡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10가지 본능에 대하여 말합니다. 세상은 둘로 나뉜다는 간극본능, 세계는 점점 나빠진다는 부정본능, 세계인구는 단지 증가한다는 직선본능, 두렵게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공포본능, 비율을 왜곡해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려 생각하는 크기본능,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려는 일반화본능, 타고난 특성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운명본능, 단일한 원인과 해결책을 선호하는 단일관점본능,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비난본능, 위험이 임박했다고 느낄 때 즉각 행동하고 싶게 만드는 다급함본능 등입니다.

그 중에 부정본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팩트에 근거한 사실을 보는 것이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첫째는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 든 사람은 유년 시절을 미화하면서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우긴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정적인 것을 선택하여 보도하는 선별적 보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쟁, 기근, 자연재해, 정치적 실책, 부패, 예산 삭감, 질병,대량 해고,테러 등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부정적 뉴스를 접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생각보다는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보이는 상황을 느낌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뇌는 긍정보다 부정을 보는 쪽으로 발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긍정보다 부정에 쉽게 끌리게 되어있습니다. 선행을 10번 한 연예인도 한 번의 구설수에 오르면 쉽게 몰락해 버립니다. 심리학에서는 다른 긍정적인 정보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인식하는데, 이것을 '부정성 효과 (Negativity Effect)'라고 부릅니다. 대인관계에서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을 더 드러내야 합니다. 셰인 로페즈는 <인간의 강점 발견하기>에서 ‘세 개의 긍정이 하나의 부정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리학계에서 행복 연구로 유명한 디너 교수는 만족스러운 관계 유지를 위한 긍정과 부정의 최소 비율을 말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3대 1, 고용주와 직원은 4대 1, 연인은 5대 1, 친구는 8대 1, 어린이 운동 팀 코치와 어린이 선수는 10대 1, 고객상담원과 고객은 20대 1, 부모와 성인 자녀는 100대 1, 시부모 또는 장모에게는 1000대 1의 긍정과 부정의 비율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부정은 잘 기억하고, 빨리 기억하며, 오래 기억하기 때문에 더러운 물을 맑게 하기 위해 휘젓는 것보다 쉽지 않지만 깨끗한 물을 맑은 물이 될 때까지 계속 부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동역자로 서로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는 안위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성도로 지음 받은 이유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서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린도후서5:18-20)

 

2. 우리는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뜻을 같이 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동역자의 마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 중에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는(가르)’라는 말은 이유를 말하는 접속사로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바울과 뜻을 같이 할 자는 디모데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과 동일한 마음을 가진 적임자는 디모데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도 디모데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설립 초기부터 그 교회의 상황을 잘 알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았던 진실한 인물이 디모데였습니다(행 16:11-40;살전 2:2).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이 갈 수 없으니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과 동일한 마음을 가진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믿을 수 있고 관계가 좋은 대사를 파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직장에 들어가 동역자로 일을 합니다. 효과적으로 자신이 맡은 업무를 수행하고 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기능적 기술(technical skill)입니다. 둘째는 개념적 기술(conceptual skill)입니니다. 세 번째는 인간관계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적 기술이란 자기가 맡은 전문분야의 업무를 말합니다. 개념적 기술이란 거시적으로 조직 전체의 목표달성과 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인간관계 기술이란 문자 그대로 일보다는 직장의 다른 동료, 상사, 부하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기술이 직업적 성공을 거두는데 85% 정도이고, 기술적인 지식은 15% 정도라고 밝혀지고 있답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위건(A.E.Wiggan) 박사는 직장, 가정, 사회생활 등 각 분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전문지식이 모자라 실패한 사람들은 불과 15%밖에 안 되었습니다. 나머지 85%의 사람들은 모두 다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에 인생에 실패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미국의 카네기재단에서도 5년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1만 명을 대상으로 '성공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했는데, 85%의 사람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골고루 인간관계를 잘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능지수나 학교시절의 성적이 인생에서의 성공을 예언하는 정도는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Gibbs).

직장에서 해고된 대부분의 사람 중 66% 정도는 대인관계의 실패 때문에 해고되었던 것이고, 단지 34% 정도가 일과 관련된 기술이라든가 지식 부족 등의 원인으로 해고된답니다. 인간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의 성공의 가장 기본은 무엇이겠습니까?

대인관계 지능의 핵심 요소는 첫째, 다른 사람의 기분, 감정, 관점에 대해 민감하고 이해하는 "타인 이해", 둘째, 타인과 어울리기, 셋째,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더쉽"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같은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어떤 일을 동역자로 같이 할 때는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끼리 하는 것입니다. 같은 입장은 결국 목적과 방향성에 있어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동역자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마음을 가진 자와 사업을 하면 잘 되어도 문제고, 잘못되어도 문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와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마음을 가졌습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자신들이 접수하기 들어와 은밀하게 간첩처럼 활동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결혼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문에 나온 중국의 어떤 부자처럼 실컷 노력하여 큰 사업을 이루고 죽으니까 기사와 눈이 맞은 아내가 좋다하고 그 돈으로 기사와 결혼해 살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기사는 사장님은 평생 자신을 위해 일했다고 말했답니다. 이런 사람은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마음을 품은 유다는 예수님을 인신매매 했습니다. 다른 마음을 품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 했습니다. 다른 마음을 품은 사울은 자기 사위를 죽이려고 했고, 다른 마음을 품은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의 동생을 팔았습니다.

바울이 노년에 감옥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말씀도 앞에 접속사 ‘가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유를 말하는 접속사입니다. 디모데 외에 다른 사람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파송하지 않는 이유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이나 교회의 일이나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구하다’다는 말은 계속해서 자기의 것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 즉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을 알고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문제나 유익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지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인간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자기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홀로 살 때는 홀로 할 때는 그것을 누가 잘못한다고 탓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누가 시비를 하겠습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가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역자가 되어 같이 사역을 하면 달라집니다. 공동의 목표를 놓고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지난주 8.15 광복절이 있었는데, 과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가 다른 마음을 품고 일제에 투항하여 동지들을 밀고하여 죽게 하면 그 사람을 누구든 좋은 동역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일파를 누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일본과 무역분쟁으로 대다수 국민들이 일본산 불매운동을 하고 있는데 일본편을 들면서 배은망덕한 한국인이라고 우리나라 백성을 비난하면 누가 동역자라고 말하겠습니까? 국가든, 교회든, 가정이든 동역자가 되어 함께 일한다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같아져야 할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기준이 무엇입니까? 국가는 국가 이념이 되고, 회사는 창업 이념이 되겠지만 신앙의 동역자는 누구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가정에서 남편의 마음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아내의 마음, 자녀의 마음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목사님의 마음, 장로님의 마음, 권사님의 마음, 학생들의 마음 누구의 마음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빌립보서 2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도 예수님의 마음, 디모데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동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동역하시는 참 좋은 동역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우리가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동역자의 사역)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본 성경에는 번역하지 안았지만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디모데는 자기 일만 구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수고했다(에둘류센)’는 말은 문자적으로 ‘종의 의무를 수행하다’ ‘섬기다’ ‘순종하다’는 뜻으로 ‘노예처럼 일했다’는 의미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는 수고한 세 분이 나옵니다. 첫째, 2:16 바울이고 둘째, 2:22절, 디모데이며 셋째, 25절에, 에바브로 디도도입니다. 16절에 나오는 ‘수고’라는 말은 피곤해서 지칠 때까지 애쓰는 것, 탈진되기까지 수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수고한 분의 모본으로서 빌 2장 초두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2:8에, 그리스도는 자기를 낯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델로 제시한 것입니다. 수고라는 것의 본질은 어떤 일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시간을 희생하고, 정력을 쏟아붓고, 물질을 소모하고,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희생하셨고 마침내 자기 생명 전부를 나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나도 주님 위해 이 몸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크고 적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할 필요도 없습니다.(마20:1-16 고전15:10) 비교의식 정죄의식을 가지고 살 필요도 없습니다.(눅18:9-14) 사람의 영광과 명예를 탐낼 필요도 없습니다.(마6:1) 사람의 반대 급부를 바랄 필요도 없습니다. 은밀하게 맡겨준 일 최선을 다해 하면됩니다.(마6:2-18)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궁극적으로 바울을 위해서 보다는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동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힘이 들고,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복음을 위해서 종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역할 수 있는 것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통해서입니다. 이것들을 세상 없어질 것만 위해 수고하면 세상 끝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좋은 권력이 주어졌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쓰면 자신의 종말과 함께 살아집니다. 권력자를 위해 쓰면 그 권력자가 물러남과 동시에 살아집니다.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좀도 동록도 해하지 못한 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라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와 함께 입니까? 바울과 함께입니다. 어느 날 만난 사람입니다. 인간관계는 몇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똑같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대체불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체될 수는 없습니다. 셋째는 상호의존성입니다. 관계하는 당사자의 운명이 상호 연관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보상성입니다. 생산적인 인간관계를 가지면 서로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다섯째는 참 만남의 희소성입니다. 지금 함께 동역하는 목사님, 장노님, 집사님, 권사님이 바울입니다. 지금 함께 사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이 바울입니다. 자꾸 먼 곳에서 바울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동역하기는 하되 바울을 어떻게 대하였다는 것입니까?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 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이런 모습은 빌립보 교인들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말씀한 연단은 단순히 시험이나 시련보다는 그로 인해서 입증된 인품을 말합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은 이 낱말을 ‘인품’으로 번역했습니다. 공동 번역은 ‘흠 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혼혈아였습니다. 육체적으로 연약했습니다(딤전5:23). 기질적으로 수줍어 하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고전16:10). 아마 당시 사람취급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이미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는 말씀 훈련을 통하여 성품이 온순하고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되었습니다(딤후3:15). 빌립보에서 바울을 만나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행16:2,3). 그는 성장하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행16:2). 그는 바울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훈련을 받아 그리스도 복음의 유능한 일꾼이 되었습니다(살전3:2).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 시 에베소의 소동으로 어려움 당했을 때 바울을 대신하여 빌립보 지역을 순회하며 심방하였습니다(행 19:22).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시 핍박을 피해온 바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복음 전도에 동참하였습니다(행 20:4). 그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면서 동역자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영적 아버지인 바울에게 애정을 가지고 열렬히 복종하였습니다(고전 4:17; 딤전1:2; 딤후 1:2). 디모데의 봉사는 철두철미하며 헌신적이었습니다. 자발적인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엇습니다. 복음의 유익과 진보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이 어린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로마서16:21)’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누군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신앙인으로 좋은 동역자가 되어 성공적인 사역을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동역할 만한 신앙인격입니다. 둘째는 사역의 능력입니다. 셋째는 충성도입니다.

이런 것을 갖추는 동역자로서 사역의 모델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역의 모델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역하셨는가 빌립보서 2장 6-8절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인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쁜 동역자는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디모데 후서 4장 10절에 보면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들 가운데 바울이 노년에 어려움을 당하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말씀합니다. 키르케고르가 "고난을 만나야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알아본다."라고 말했듯이 결정적인 순간을 당해봐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친한 것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여 독배를 마시게 한 소크라테스의 친구처럼, 가장 친하게 지냈지만 결정적인 순간 씨이저를 살해한 씨이저의 친구처럼 허드슨 테일러가 위기를 당하여 등을 돌렸던 테일러의 애인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심에 지극히 충성하지만 참 좋은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달랐습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는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기록으로 남는다면 어떤 기록으로 남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첫째, 전달하는 말을 통해 서로 용기를 주고 위로해 주는 안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마음에 있어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뜻을 같이 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세째, 주어진 사역 앞에서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8.18.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