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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밝힘(2)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마태복음5:14-1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372 추천수:3 220.120.123.244
2020-02-09 11:03:17

빛 밝힘(2)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마태복음5:14-16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어린 감자가 하루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감자 맞아?" 엄마는 "당근이지!"라고 답했답니다. 엄마가 자신을 당근이라고 말하자 엄마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고 그 길로 꼬마 감자는 가출해 버렸답니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꼬마 감자가 할머니 감자에 다시 물었답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경상도 출신의 할머니 감자는 "오이야(오냐)"라고 대답했답니다. “오냐”라는 말을 경상도 말로는 “오이야”라고 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감자가 아니고 오이라는 말로 오해하고 또 꼬마 감자는 엉엉 울며 집을 나갔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 하시는 우리 성도님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누구인지 평생 탐구한 소크라테스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답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은 단지 유인원에서 진화한 고등동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에게는 인간은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유전정보를 실어나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처럼 나는 고등동물이나, 물질 덩어리나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그릇에 불과할까요? 거울 자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코가 큰지 눈이 쌍꺼풀인지를 거울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말이나 태도를 통해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모든 것 밝히 드러내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누구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1).(자기 정체성, 신분)

예수님은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빛에는 태양과 같은 자연의 빛이 있고 전등과 같은 인공의 빛이 있지만 참 빛이라는 말하는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은유법적 표현으로 우리가 빛의 속성을 가진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빛이라고 했는데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빛은 빛인데 세상(코스모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류와 인간 세상을 말합니다. 창조할 때는 보시기에 좋은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지만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죄와 죽음과 불행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타락하고 구속받아야 할 빛이 없는 세상은 어둠의 세계요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 세상에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은 바로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빛은 생명을 살리고, 빛은 따뜻하게 하고, 빛은 병원균을 죽이고, 빛은 세상을 밝히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신분은 바로 그런 속성을 가진 빛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광체인 빛의 근원은 될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모시고 살면 반사체인 빛으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빛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을 믿어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자신이 먹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데 늘 실패한 사람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 ‘낙오자’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하면 자신의 빛이 아니라 ‘가난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덜 생겼으면 자신은 빛이 아니라 ‘못난이’라고 생각합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 ‘땅딸기’라고 생각합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면 자신은 빛이 아니라 ‘인간 쓰레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인생은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시골에서부터 교회에 잘 다니는 한 할머니 권사님이 계셨답니다. 권사님이 어릴 때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나이에 비해 늙었다고 늘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낮은 자존감,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살았답니다. 언니나 오빠들은 잘생기고 똑똑한데 자신만 무능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했답니다. <당신 자녀의 자존감>이라는 책을 쓴 도로시 브릭스(Dorothy Brlggs)는 아이들은 다섯 살이 되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든 행동과 말과 기대로부터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기도 하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자녀를 평가할 때 주로 무엇으로 평가합니까? 외모와 성적입니다. 외모와 성적을 기준으로 부모와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평균 이하라는 초라한 자화상,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자존감이 낮아지면 평생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마음 탐구>의 저자 Gary R. Collins은 가족치료의 영역 가운데 80%가 "자존감의 치유"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존중은 정신건강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갖기 위해서는 사고 체계를 바꾸어야 합니다.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스트롬멘(Melton Strommen)의 연구에 의하면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 가운데서도 20%가 낮은 자존감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자신의 잘못에 얽매여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권사님은 어릴 때 가진 그 초라한 자아상, 자기 정체성, 자존감에서 나이가 들어서도 벗어나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 기도회를 갔다가 집으로 오는데 뒤에서 어떤 남자가 따라 오면서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루라 아니고 일주일 째 계속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 권사님은 난생처음 자신의 외모로 인하여 기쁨이 생겼답니다.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 속으로 생각하며 누군지 보고 싶었으나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는 못했답니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 권사님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하였답니다.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을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손자가 물었답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할머니 권사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아까 새벽 기도하고 오는데 어떤 남자가 뒤따라 오면서 나보고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을 수 없어 "할머니, 잘못 들었겠지요?"라고 했답니다. 할머니 권사님은 정색하며 "아니다. 내가 분명히 들었어. 하루도 아니고 일주일 동안 계속, 분명히 처녀라고 했어." "그게 누군데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이 이제 보이는가 봐 내가 예쁜 건 알아 가지고…." 손자는 말했답니다. "그럼 내일 보청기 끼고 다시 들어보세요." 다음날 새벽 기도회를 가면서 보청기를 끼고 갔답니다. 기도하고 기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드디어 들려 왔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 남자의 말은 "같이 가 처녀."가 아니었답니다. 새벽에 나와서 갈치를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나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의 조건, 나의 외모, 나의 경제적 여건, 나의 나이, 나의 지위, 나의 지식을 보면서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아침 일어날 때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 실패할 때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 잘 될 때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 잘 안될 때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사실을 외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너희는 누구겠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무리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무리들은 누구이겠습니까? 4장 24절을 보십시오.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그리 뛰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직업이 변변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감>이라는 책을 쓴 이무석 교수께서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책도 많이 읽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어떤 부인이 있었답니다. 이 부인은 갖출 것 다 갖추었는데 항상 '고졸'이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답니다. 하루는, 아파트 관리소장을 만나러 갔는데, 그 소장님은 어떤 지적인 여자와 얘기하느라고 자기를 미처 못 봤답니다. 자기가 보기에 한눈에 대졸이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지적인 여인이었답니다. 그러자 이 부인은 소장이 자신이 '고졸'이라서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답니다. 집에 가는 길에 과일가게에 들러서 과일을 만져 보는데, 점원이, 너무 만지지는 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 부인은 "어떻게 알았지? 자기가 고졸이라는 사실을..."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택시를 타려고 손을 들었는데 운전사가 자기를 못 보았는지 휙 지나갔다고 합니다. 이때 이 부인은 또 생각했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자기가 고졸이라는 사실을..." 다른 것은 다 남보다 뛰어난데 단지 가난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열등감이 되어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자동적 사고'라고 합니다. 현실에는 객관적 현실과 심리적 현실이 있는데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진위를 확인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하여 어떤 마음과 태도,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예측을 확실한 기정사실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어도, 아무리 작은 교회에 다녀도, 아무리 작은 회사에 다녀도, 병이 들었다고 해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고 해도, 취업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초라한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

빛으로 살았던 베드로는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하나님은 분명하게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그러면 빛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빛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14,15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2. 우리는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사명)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후 빛의 역할, 빛의 자리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시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빛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동네는 성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높은 곳에 성을 세웠습니다. 그 특징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이 비치면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빛은 옳고 그름을 드러내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드러냅니다. 더러움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는 등경 위의 등불입니다. 이것 역시 빛이 비치어 다른 사물을 보게 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빛은 말 안에 감추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은 타는 말이 아닙니다. 곡식 부피를 재는 말입니다. 빛은 숨겨 놓는 것이 아닙니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 등잔 위에 올려놓습니다. 빛은 본질적으로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숨기면 빛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 드러내는 것입니까?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비취기 위해서입니다. 1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빛은 빛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빛은 빛의 도움을 받아 사물을 분명하게 분별하라고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사명은 어두운 곳에 있으며 밝히 비추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면 빛은 그 어두운 곳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등불을 켜는 시기는 낮이 아니라 밤입니다. 위치는 온 방을 비출 수 있는 장소입니다. 어두운 곳, 그늘진 곳, 가기 싫은 곳, 가난하고 괴로운 곳, 문제가 있는 곳, 추운 곳이 바로 빛이 우뚝 서 있어야 할 곳입니다. 그곳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람이든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입니다. 사람은 이익과 편리, 즐거움이 있는 곳만 가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밝은 곳, 풍요롭고 환경 좋은 곳만 좋아하고 희생을 싫어합니다. 이렇게 하면 결코 신앙인은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두운 방을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빛은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는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그들 가운데서 빛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빛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빛들끼리 모여 축제하고 즐기며 자기 자랑하라고, 자식에게 교회 상속해 주고, 브랜드 교회 만들어 종교 마케팅하라고 빛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들이 교회에 모여 “우리 교회는 만명 모인다. 우리 교회는 기도원이 있다. 우리 교회는 무덤이 있다. 우리 교회는 만평의 건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교회는 유명 연애인이 나온다. 우리 교회는 유력한 정치인들이 나온다” 등과 같은 자기 자랑하라고 빛으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 있을 때 빛이 될 수 있고, 존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악이 득실거리는 곳,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이 가득한 곳, 취향이 맞지 않는 곳, 희생이 필요한 곳에 서서 어둠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12:3절에서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 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태양 같은 위대한 발광체는 될 수 없을지라도 미미하지만 어두운 곳에 가서 빛으로 밤길을 비춰 주어야 하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죄로 칠흑같이 어두워진 세상에 들어가 어둠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장애와 가난으로 신음하는 곳에 들어가 따뜻함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약육강식으로 싸늘하게 식은 세상에 들어가 따뜻하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탐욕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사랑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이익이나 편리나 기쁨이 있는 자리에만 갈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빛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명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생활도, 직장생활도, 가정 생활도, 인간관계도 사명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빛의 사람들입니다. 불나방처럼 밝은 곳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두운 곳에 들어가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이 빛의 사람들입니다.

어제 보니까 작년에 등록하신 어느 집사님 가족이 온 식구가 함께 나와 교회 청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집사님으로 수천, 수만 명이 모이고 사교하기 좋은 유명인들이 모이는 대형 교회 가서 그럴듯하고 모양새 나게 신앙 생활해도 환영받을 텐데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교회 화장실 청소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주 두 주는 할 수 있지만 일 년 12달 계속하는 것은 더더욱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려울 때 개척교회 섬기다가 조금 살만하면, 교회에서 안수집사나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으면 종교적 신분 상승과 자식들 교육과 결혼을 위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대형 교회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등록하신 한 장로님과 상담했습니다. 수천 명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오랜 세월 장로님으로 섬기시다 조기 은퇴하시고, 이사하여 작은 교회 가정교회하는 곳에서 섬기기 위해 교회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진짜 예수님을 믿는 장로님이라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잘 섬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수요 예배 시간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1시간 전에 나와 기도하시고 빠짐없이 예배를 드리는 은퇴 목사님을 봅니다. 한번은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시골에 가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참 빛의 사명을 끝까지 잃지 않고 사시는 목사님이라 생각했습니다. 목회자일지라도 은퇴하면 예배에 소홀히 할 텐데 많이 나오지 않은 수요 예배에 꼭 참여하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예배에 있어서 빛의 사명이 무엇인지 교훈을 받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곳에 있는 때 가치가 있습니다. 어둠이 있는 곳이 등불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 빛의 자녀는 사명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빛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최빈국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기독교 인재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밝은 곳에서 만원 별거 아닙니다. 그러나 똑같은 만원이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대단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야 할 곳은 우상과 죄로 얼룩진 땅입니다. 모세가 가야 할 곳은 환영하지도 않고 유익도 편함도 기쁨도 없는 애굽 왕 바로 앞입니다. 바울이 가서 빛을 비추어야 할 사명의 땅은 핍박과 죽음이 기다리는 땅이었습니다. 빛으로 산 느헤미야가 가야할 사명의 땅은 안락한 궁전이 아니라 무너진 성벽이 있는 고국이었습니다. 사명이면 유익이 되지 않아도, 편리하지 않아도, 기쁨이 없고 고통이 따라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빛의 사람들입니다. 1886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황무한 땅, 우상이 난무한 땅, 아직은 미개한 땅이었습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6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 인천항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이 어둠에 싸여있는 나라인 것을 알면서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며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는 땅 불편한 땅 기뻐할 것 없는 고통의 땅입니다. 그러나 그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빛을 비춰야 할 사명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조선 땅이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 빛으로 서 있으라는 땅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중국에서 선교사를 하다가 24살에 자기 부인이 열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땅에서 수많은 사람이 복음이 없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셔먼호라는 타고 대동강에 들어오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1793년에 영국에서 인도로 배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다섯 살짜리 아들을 잃었고, 그의 아내는 정신적인 질병을 앓았습니다. 그는 사역을 시작한 지 7년이 지난 후에 첫 회심자를 만들어 냈으며, 수년 동안 애써 번역한 것을 화재로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의 휴가도 없이 40년 동안 꾸준히 사역했습니다. '미국의 제1호 해외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4년에 미얀마로 갔습니다. 그는 여섯 살 된 아들을 잃었고, 1년 반 동안 죽음의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의 아내는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쇠약으로 고생했고, 첫 회심자를 만나기까지 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으로 파송된 첫 개신교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었고 첫 회심자를 위해 7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왜 이들은 유익도, 편리도, 쾌락도 없는데 중단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계속하였겠습니까? 빛으로 부름받아 생명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 빛의 사명 때문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친 사람은 박춘권입니다. 망나니 박춘권이 칼춤을 출 때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을 들고 "형제여, 예수 예수" 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때 망나니가 칼로 팔을 내려쳤고 다른 손으로 성경을 들고 "예수 예수" 할 때 또 다른 쪽 팔도 내려쳤답니다. 그래도 "오, 형제여 예수 믿으시오." 할 때 망나니는 그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성경을 대동강에 던지면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복음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 땅을 적실 때마다 복음의 땅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 던졌던 성경을 주운 최초의 어린아이가 최치량이라는 아이였고 그 성경으로 그 집 여관의 벽을 발랐는데 20년 후에 존 마팻이 선교사로 평양에 들어가서 벽지가 된 성경을 보고 최치량에게 물었답니다. 그때 최치량은 "내가 어렸을 때 대동강에 갔다가 예수쟁이가 목이 잘릴 때 던진 그 성경을 주워다가 이 벽에 발랐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존 마팻 선교사를 통해서 전도를 받고 장로가 되었답니다. 그 후에 토마스 목사의 목을 쳐 죽였던 박춘권이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자기 과거를 회개하면서 자기 집을 교회에 바치고 예수를 믿어서 장로가 되었답니다. 어두운 곳에 빛의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살면 이런 결과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 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등불을 말 아래에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 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삼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3. 우리는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야 합니다./선명한 목적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빛으로 들어내야 할 것은 ‘너희의 착한 행실’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빛의 열매가 모든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슬도 빛은 받으면 빛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우리는 빛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빛이 빛의 역할을 못 하면 안 됩니다. 빛인 교회가 어둠을 닮아가면 안 됩니다. 빛된 교회가 어둠을 밝히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 안 됩니다. 모이면 시기하고, 모이면 야당 여당으로 나누어 싸우고, 모이면 고발 고소하고, 모이면 자랑하고, 모이면 30분 동안 남 험담해야 속이 후련한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조지 바나 리서치 센터의 발표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성에 있어서 불신자보다 40% 이상 격차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행2:8)”

 

결국,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게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잘남을, 우리의 선함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두운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착한 행실을 보이게 만드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나를 높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선전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어떻게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미국에서 '황색의 빌 게이츠' '시애틀의 한인 억만장자'라고 불리는 사람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미국 애리스 사의 폴 송 회장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부인과 함께 1천 달러로 정보시스템 컨설팅회사인 애리스 사를 만들어 10년도 못돼 직원 900명 연간 매출액 1억 1천만 달러(1320억)를 넘는 회사로 성장시켰답니다. 그는 그렇게 된 데는 그의 가족과 기도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종일 교회 활동으로 자녀에게 매달릴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키워 주기를 기도하며" 미국 주류 사회 속에서 성공해 하나님과 한국의 이름을 빛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했답니다. 꼭 출세하고 돈을 벌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삶의 비전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제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서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시19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 번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요11:4, 고전10:31, 계4:11),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시73:25,26, 요17:22-24)"입니다.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말씀합니다. 미국의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 Anderson)은 천재적인 노래 실력으로 23개국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미국국가를 독창했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 상패를 받았답니다. 40년간 성악 가수로서 명예를 떨치고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그가 은퇴하는 시간에 남긴 말은 "나는 보잘것없는 노예밖에 될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유명해진 것이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였답니다. 미국의 여류 소설가 스토우(Harriet Elizabeth Beecher Stowe) 부인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미국에서만도 1년에 30만 권이나 팔리고 20여 개국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이 높아졌을 때 스토우 부인은 성명을 발표하였답니다. "내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의 저자라고요? 천만에, 나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는 이 이야기 내용의 상상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아닌 주님께서 이 책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비천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것이 차례차례 환상으로 보여졌고, 나는 단지 그것을 옮겨 놓은 것뿐입니다. 모든 영광과 찬사는 오로지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반사체인 빛은 발광체의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빛으로 살아 빛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우리를 칭찬하기 보다는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보게 하는 것이 진짜 빛 된 사람의 삶의 목표입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은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빛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성도님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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