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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다리(10) 희망적인 말하기(민수기13:30-3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611 추천수:5 112.168.96.218
2018-09-02 09:05:50

 

희망의 사다리(10) 희망적인 말하기

민수기13:30-33

 

행복한 가정은 사용하는 말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서로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부부 치료사 존 가트만 박사는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감정코치>라는 책에서 가정 관계의 문제의 근본은 말에 있다고 말합니다. 첫 아이를 낳은 뒤 67%의 부부가 관계 악화를 겪게 되는데 “부부 사이에 생기는 문제 가운데 69%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부가 어떻게 말하는 가를 보면 이 부부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존 가트맨 박사는 35년간 3000여 쌍을 조사한 결과 화목한 가정은 긍정적인 대화가 부정적인 대화보다 5배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를 '가트맨 비율(Gattman Ratio)'이라고 말합니다. 가트맨 박사는 부부의 대화를 3분만 들어보면 이혼 여부를 94%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칭찬과 비난의 비율이 5:1인 부부는 순탄하지만 0.8대 1인 부부는 이혼한다고 합니다. 5:1의 법칙입니다. 비난 한 번 하면 5번 칭찬해야 겨우 만회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잘되고 가정이 잘되며 자녀가 잘되려면 절망적인 말보다는 희망적인 말,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잘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도 직원들의 말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마르셀 로사다의 이름을 따서 "로사다 비율(Losada ratio)"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2.9대 1의 비율입니다. 60개 기업을 조사해 보니까 잘되는 기업은 부정적인 말 1이 있을 때 긍정적인 말 2.9 이상이 되었고 잘 안 되는 기업은 긍정적인 말이 2.9보다 낮았다고 합니다. 실적이 가장 높은 팀은 6대 1로 긍정적인 발언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절망적인 말보다는 희망적인 말, 부정적인 말보가 긍정적인 말을 6배나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도 잘 되는 교회와 잘 안되는 교회를 조사해 보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누가 조사한 자료는 보지 못했지만 잘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부흥하는 교회를 만들려면 교인들이 절망적인 말보다 희망적인 말을,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6배가 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특히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구역장님들, 교회에 오래 다니신 성도님들 우리 교회에 대하여, 목회자에 대하여, 교회 식구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희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인간은 '말'을 만들고, '말'은 인간을 만듭니다. 말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미래가 영향을 받습니다. 늘 희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미래가 밝아집니다. 그러나 늘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미래가 어두워집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에 대하여 무서운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앞으로 내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라고 말씀합니다. 혀의 열매를 먹는다는 말입니다. 말 속에 미래가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이 미래의 인생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한 걸그룹이 노래의 제목으로 '아브라카 다브라'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말하는 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니까 빛이 있었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이 창조되었듯이 말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어 말한 대로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은 성취력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입버릇 이론으로 꿈을 이루다!>의 저자 사토 도미오는 "우리 인간의 몸속에는 '꿈을 실현하는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해서 커다란 꿈을 그리면 그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꿈을 이루어줍니다"라고 말합니다. 생화학을 전공한 작가는 '좋은 입버릇'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면 반복되는 언어는 주술처럼 뇌의 잠재의식을 자극해 의식보다 더 큰 힘으로 상상을 현실화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심리학자 에밀 쿠에도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자율 신경계에 자동으로 입력되며 인간의 몸은 입력된 그대로 실현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빌 게이츠가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난 할 수 있어" 등을 외웠고 그는 말대로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됐고, 세계 최고의 부를 일궜다고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은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머릿속에 각인이 됩니다. 교회에 나왔는데 장로님이 “목사님 몸이 아파요. 표정 보니까 병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머리에 각인이 됩니다. 뇌는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에 더 민감합니다. 말은 각인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견인력이 있습니다. 말은 잡아끄는 힘이 있어 머릿속에 각인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말대로 행동하게 되어 말이 사람을 이끌어 갑니다. 장로님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집에 가서 거울을 보고, 아내에게 “내 얼굴 병든 것처럼 보여요?”라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은 견인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성취하게 하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발 없는 말이 발을 이끌어 갑니다. 아내도 병든 것 같다고 말하면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말에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로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누군가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면 그는 국방부 장관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루에 2만 5천 마디, 여자는 3만 마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희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으면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왕같은 제사장이 된 사람으로 절망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희망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적으로 말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갈렙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각지파별로 지휘관 1명씩을 뽑아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에 미리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25). 그리고 모세와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당장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고 합니다. 능히 이길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정탐한 10명의 사람들의 말은 달랐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 백성을 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말을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정탐꾼이라면 어떤 말을 하는 부류의 사람에 속한 사람일 것같습니까? 희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일까요?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일까요? 지금 경제를 보면서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가정을 보고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자녀를 보고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남편과 아내를 보고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땅, 똑같은 강, 똑같은 나무를 보고 왔는데 왜 이렇게 말이 다를까요?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왜 절망적인 말을 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상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과대평가하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땅에 대하여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의 토양이 너무 좋기에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각 민족들 간에 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에 정복을 해봤자 항상 불안에 떨며 살 수밖에 없다고 절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열심히 최빈국 아이들 만명을 기독교 지도자로 만드는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이룰 수 있게냐고 부정적으로 말하며 오랜 세월 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협력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10명의 정탐꾼처럼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외에 100개의 교회를 건축하여 주님께서 명령하신 선교적 사명을 이루자고 하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말을 하는 10명의 정탐꾼을 보십시오.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든 백성들은 거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같은 거인도 있지만 모든 백성이 다 거인은 아닌데 모든 백성이 거인이라고 확대해석하는 것입니다. 특수한 것을 일반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부분을 전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늘 이렇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고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메뚜기라고 평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 지파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린 것입니다. 상대를 만나 보지도 않고 그들이 보기에 그럴 것이라고 과도하게 절망적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무엇에 근거하여 희망적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까?

14장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똑같은 땅인데 희망적인 말을 하는 갈렙은 그 땅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비전의 땅을 희망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최고로 비옥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삼키는 땅”과 얼마나 비교되는 말입니까?

14장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이미 그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에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고 이미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 땅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하여 희망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9절 보세요. 절망적인 말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소평가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했는데 희망적인 말을 하는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이 우리의 먹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상황을 보면서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희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랜 전 말에 훈련되어 있지 않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날 예배 후 할머니 권사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 때문이었습니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 권사님에게 "놈팽이 하나 데려오지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홀로 사신 권사님에게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여 집사님이 속상해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집사님이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에게 "메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이에게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희망적인 말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고 말했습니다.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아이가 없을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이를 준다고 하면 그 약속을 믿고 희망적으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한대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나라가 망하고 성이 다 무너졌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왕에게 희망적으로 말하고 백성들에게 희망적으로 말하고 적들에게도 희망적으로 말하며 결국 성을 재건하였습니다. 질병 걸리면 절망하며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적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 못되게 나아가면 절망적인 말을 하며 저주하지 말고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25)”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적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면서 직장생활 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이 다가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는 말씀을 붙들고 희망적인 말을 하며 기도하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망적 상황보다 강하고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으로 한계를 만나면 절망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희망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감정은 전염됩니다. 희망도 전염되고 절망도 전염이 됩니다. 희망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희망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절망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절망적인 사람이 됩니다. 고사성어에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을 가진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물이유취(物以類聚)”라는 말도 있고, 같은 무리끼리 서로 내왕하며 사귄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한패가 되어 절망하면 생각도 전염되고 기분도, 태도도 전염되게 되어 있습니다. 감기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절망도 전염이 됩니다. 심리학 용어에 “전염현상(contagion phenomena)”이라고 말합니다. 코미디 프로를 보면 가짜 웃음을 삽입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짜 웃음을 삽입시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더 재미있게 보며 웃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스미스는 가짜 웃음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40명의 남녀 대학생들을 통해 실험해 보았답니다. 가짜 웃음이 삽입된 것을 들었던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더 자주 웃고(19회:6회),더 오래 웃었으며(19초:5초),코미디 내용을 더 재미있다고(93점:75점) 평가했답니다. 수십 년 동안 웃음에 관한 연구를 해온 메릴랜드대 라버트 프라빈스 박사는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함께 있을 때 평균 30배 정도 더 많이 웃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만큼 감정도 전염력이 강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은 전염된다(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 제임스 파울러 저)에 의하면 행복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1만 2067명을 추적해서 행복의 생성, 확산 관계를 연구한 결과 '3단계 영향 법칙'을 제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3단계의 거리 안에 있는 사람,즉 친구(1단계),친구의 친구(2단계),친구의 친구의 친구(3단계)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행복할 경우, 1단계(친구)가 행복할 확률은 약 15% 더 높아지고, 2단계는 10%, 3단계는 약 6%이고, 4단계에서는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1020명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네트워크 내에서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있고,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있었답니다.

부정적인 말, 절망적인 말, 부정적인 감정은 아주 빠르고 강력하게 전파되고 전염됩니다. 부정적인 소식은 긍정적 소식보다 7~8배 정도 빨리 퍼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3대 33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긍정적인 소식이 3명에게 전파되는 데 반해 부정적인 소식은 33명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와튼 스쿨의 '불만 고객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불만 고객 31%는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입소문이나 험담을 하고, 이들 중 78%는 3~5명에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우리 인간은 하루에 5-6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생각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연구기관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나이로 세 살 정도의 아이들이 하루에 듣는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의 비율은 100:1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은 관리하지 않으면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절망적인 말을 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2명의 희망적인 말보다는 10명의 절망적인 말이 훨씬 빨리 전염되고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10명의 지도자들이 절망적인 말을 통해 절망을 생산해 내니까 어떻게 확산됩니까? 14장 1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14장 2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아주 비관적인 말을 합니다. 차라리 광야와 애굽 땅에 죽게 만들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칼로 죽게 만느냐는 것입니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땅인데 과도하게 미래를 절망적으로 추측하여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노예로 살았던 애굽 땅이 더 좋다고 그 땅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절망적인 말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말을 하게 하고 결국은 그들의 말처럼 인생을 절망으로 끝내 버리고 맙니다.

왜 이들을 자신들이 가보지도 않았는데 남의 부정적인고 절망적인 말만 듣고 이렇게 절망적이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 주시고 있을까요? 14장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14장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선포합니까? 14장 23절을 읽어 보세요. 하나님을 멸시하여 한 사람도 그 땅을 보지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14장 33절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방황하고 소멸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35). 절망적인 말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결과입니까?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이런 사람들처럼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사람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교회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대통령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성가대가 어떻고..." 부정적이과 절망적인 말을 붓습니다. 아주 자기 의가 강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을 누구보다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신전의식이 없습니다. 이들은 잘 분석하고 평가하고 현실을 잘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만 말할 따름이지 대안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10명의 정탐꾼과 같이 절망의 바이러스, 부정의 바이러스만 전파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백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안된다. 망한다. 끝났다.” 등과같은 절망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을 실제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소극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희망적인 말을 합니다.

희망적인 말을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4장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말을 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헨델은 후기 바로크 음악의 거장이지만 한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곡이 발표되는 공연장에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공연을 방해했답니다. 그 일로 헨델은 충격을 받아 앓게 되었답니다. 그때 무명의 한 시인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부활시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힘을 내십시오."라는 희망적인 말을 들었답니다. 그는 그 편지를 읽고 힘을 얻어 23일간 금식하며 메시아 중 42번 할렐루야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엄마 아빠는 널 믿어. 힘내."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 주면 자녀의 재능은 춤을 출 것입니다. 남편에게 "오늘도 수고했어요. 당신이 최고에요. 내가 결혼 하나는 잘했지요. 다 당신 덕분이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당신은 최고가 될 수 있어요"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 주면 남편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아내에게 "난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최고 예뻐요. 당신 없었으면 난 아무것도 못 했을 거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거여요"라고 희망의 말을 하면 아내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을 것입니다.

 

절망적인 일을 당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 할 수 있습니다. 여보, 당신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 아들아 너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단다."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가망이 없다. 우리 기업은 끝났다. 우리 가정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자녀는 별수 없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 장로님은, 우리 권사님은, 내 남편은, 내 아내는, 내 아들 딸은 별수 없다"고 절망적인 말을 하면 이 땅에서 약속의 땅의 축복을 누리지를 못합니다. "안 된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로 말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할 수 없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할 수 있다"로 말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끝이다"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시작이다"는 말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죽는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산다"로 말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실패한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성공한다"고 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말이 바뀌면 인생도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을 거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사업도 성공할 수 있을 것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장애물도 넉넉히 건너갈 수 있을 거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20년 못 고치는 성경도 고칠 수 있을 거야."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민족을 이끌어야 할 여호수아에게“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여호수아 1:5)”라고 희망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홀로 결혼도 하지 않고 외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예레미야 1:8)라고 희망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우리와 오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네게 힘을 준다. 내가 네 필요를 채운다. 내가 네게 응답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쉬게 한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내가 너를 실족치 않게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희망적인 말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장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와 그 자손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말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다가온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적인 말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순간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적으로 말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희망적인 말을 하며 살다가 죽음의 순간에도 ‘오늘 나 천국 간다.’라고 희망의 말을 남기고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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