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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용기(7) 위협을 뛰어 넘는 용기(행4:13-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719 추천수:9 112.168.96.218
2017-10-15 18:17:18

 

신앙인의 용기(7) 위협을 뛰어 넘는 용기

사도행전4:13-22

 

104세로 천국에 가신 방지일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분은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5남 1녀를 두었는데 방목사님 아버지가 중국 선교사였는데 후손이 400여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 후손 가운데 85명의 목사와 박사가 있는데 150여명이 모여 가족 수양회를 하는 유명한 신앙 가족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유교 중심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쉽지 않았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방씨 문중의 종갓집 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온 문중이 모여서 붙들어 매놓고 짐승처럼 잔인하게 두드려 팼답니다.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이런 위협이 다가 오면 우리 성도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예수를 믿겠다고 했답니다. 아들이 매 맞아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아버지가 '나도 예수를 믿으련다.' 하며 아들에게 달려들어 감싸 안았답니다. 그리고 아들 손을 붙잡고 문중 재산과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동네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밭을 일구고 살았답니다. 그러다가 6.25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내려 와 신앙의 가문을 만들었답니다. 이런 가정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예수 믿고 우리도 이런 가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 가문을 만들려면 위협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며 수많은 크고 작은 위협들을 당하고 삽니다. 믿지 않는 가족 식구가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위협을 합니다. 믿지 않는 아내가 교회에 나가면 이혼하자고 위협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고약한 선임병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위협할 경우도 있고, 직장에서 제대로 신앙 생활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너만 예수 믿느냐?” “티내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권력으로, 때로는 이성으로, 때로는 법과 제도로, 때로는 인권이라 도구로 위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위협 앞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초라한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위협을 뛰어 넘는 용기입니다. 우리가 갖가지 위협을 뛰어 넘는 용기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위협을 뛰어 넘을 용기를 가지려면 사람의 위협보다 예수님이 주신 소명을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19,10).

베드로와 요한이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고생하는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그 때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경고하고 위협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이 때 이 위협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9절을 같이 읽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그들의 위협 앞에서 권력자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협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용기입니다. 이들은 이런 말을 하면 유대 사회로부터 추방당할 수 있었습니다. 추방 뿐 아니라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 있게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섰습니다.

그들이 택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일을 행하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40년 병자가 건강해졌다는 것입니다.

12절을 같이 읽습니다. 오직 구원받을 이름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용기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 심문을 받으니까 여자 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비겁한 자였습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다 버려 버리고 자기 직업으로 돌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라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지옥 갈 사람들을 천국에 가는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생명을 구원하라고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그들의 꿈은 고기를 많이 잡아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잘 살고 바르게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잘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은 고기 잡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업에 불과하고 주업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그들에게 가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하였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도 마지막 유언의 말씀으로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기 어떤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살고, 천국이 있고,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면 제자들처럼 어떤 위협 앞에서도 용기 있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고,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창에 찔려 죽기도 했고, 목이 잘려 죽으면서도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천국의 상급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위협 앞에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고 용기있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40에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은 줄 알고 몸을 성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는 광야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산의 위험과 강의 위험으로 가득 찬 세상을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 인생을 불살랐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86세에 순교하였습니다. 지방 총독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위협합니다. 그리스도를 욕하라고 합니다. 폴리갑은 말합니다. “나는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그 때 폴리갑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직 잠깐 태우고 잠시 후에 소멸되는 불로 나를 위협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예비된, 다가오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폴리갑은 두 손이 말뚝에 묶인 채 산채로 불태워졌습니다. 그 때 폴리갑은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영과 육의 영생과 부활로 순교자들의 수에 포함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 당신의 소중한 아들을 통하여 참으로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

나는 당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 아멘.” 우리가 인생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주후 347년경 콘스탄틴노플의 주교였습니다.

그가 로마시대 박해자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을 때 황제가 그를 심문했답니다. "네가 만일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면 멀리 귀향을 보내겠다." "이 세상은 어디나 어버지의 집이니 어디 간들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 "나의 생명은 예수 안에 있으니 폐하가 능히 죽이지 못할 것이요." "그러면 네 재산을 다 빼앗아 버리겠다." "내 재산은 하늘에 있으니 빼앗아가기 힘들 것이요." "너의 친구들로부터 너를 떼어 놓겠다." "내 친구는 폐하가 떼어 놓을 수 없는 한 분뿐이요. 그분에게서 나를 떼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요." 하는 수없이 황제는 그를 내보냈다고 합니다. 위협 앞에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위협을 물리치고 이루어야 할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잘 살고 바르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2. 위협을 뛰어 넘을 용기를 가지려면 위협 충만보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8).

비겁했던 제자들이 권력자의 위협 앞에서 용기를 있는 사람이 된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8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사명과 소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협 앞에 용감해 지려면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을 찾아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두려워서 비겁하게 도망갔던 사람들이 수많은 말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륙 들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대제사장의 위협 앞에서 용기 있게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 6: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행7:5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어떤 위협 앞에서도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 앞에 담대하게 회개를 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15)" 성령 충만이 권력 자 앞에서 담대하게 회개를 외치는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를 꾸짖으니까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행13:9)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이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행2:12-16)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술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술이 사람을 지배해버립니다. 술은 각성제이기 보다는 억제제입니다. 알코올은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자율신경을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지혜력, 이해력, 판단력, 균형 감각 등을 억제해 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해 버립니다. 술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도 성령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생각이 성령에 지배를 받고, 감정이 성령에 지배를 받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행동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더욱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술 충만하면 결과가 방탕하게 됩니다. 무질서하게 하고, 혼돈 상태에 처하게 하고, 이해력과 품위를 잃게 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게 하고 자제력을 잃게 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술 앞에는 꼼짝을 못합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술 앞에서 실수하고 망신 사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술 취하면 술이 사람을 지배해 버립니다. 건강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멀쩡한 사람을 야수로 만듭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우매자로 만듭니다. 부자를 거지로 만듭니다.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이를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행복에 넘치는 가정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돼지같이 더럽게 하고, 원숭이 같이 춤을 추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혜를 주시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이성과 감성, 의지를 지배하여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성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감정을 조절하게 해 줍니다. 시기를 잠재웁니다. 분노를 억제해 줍니다. 다툼에 올가미를 씌워 버립니다. 남을 비판하고 욕하는 입술을 닫게 만들어 버립니다. 의지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해 줍니다. 지혜를 주어 총명하게 합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선한 양심이 생겨 다른 사람의 의식하고 사는 자제력을 가지게 됩니다. 허랑방탕하게 낭비적 생활을 하던 사람이 절제할 수 있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합니다. 불안하던 사람이 평안해지고, 슬픔에 잠겨 우울하게 살던 사람이 어떤 경우에고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도덕적인 삶이 회복되고, 인생의 목표가 회복됩니다.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새 힘을 얻게 합니다.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평강이 넘치게 합니다. 고약한 술 냄새 풍기지 않습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인격을 가진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까 바나바처럼 선하게 인격이 변화됩니다. 어둠 가운데 걸어 다니지 않고 방탕함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취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다 용기가 필요한데 성령 충만하면 이런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성령 충만하면 비겁함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위협 앞에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용감하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를 고친 것도 결국 성령 충만하여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하니까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6장 17절을 통해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질병의 위협이 있습니까? 걱정의 위협이 있습니까? 죽음의 위협이 있습니까? 돈의 위협이 있습니까? 권력의 위협이 있습니까? 성령 충만하여 용감하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질병아, 죽음아, 걱정아, 염려야, 죄야 물러가라”고 외쳐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의 이름 앞에 그 어떤 위협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힘으로 능으로 못하지만 성령의 능력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엘리야와 엘리사가 성령의 충만을 받자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켜 사명을 완수합니다. 브사렐이 성령에 충만하여 당시까지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은 성막을 지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안수를 받을 때 지혜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충만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말을 순종하였습니다(신 34:9) 사도행전 11:24의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돈 충만, 쾌락 충만, 권력 충만, 물질 충만하면 사람이 비굴해집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용감해집니다. 담대해 집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혹으로 벗어나 오랜 세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도한 수도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판에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를 모두 없앨 수 있느냐?"라고 물었답니다. 제자들은 "삽으로 땅을 갈아엎으면 됩니다." "불로 태워 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 그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답니다. "이것은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한 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 보거라. 만약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 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자." 일 년 뒤,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마음속 잡초 때문에 고민하다가 다시 그곳으로 모였답니다. 그런데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밭으로 바뀌어 있었답니다. 그곳에 가보니 스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만 꽂혀 있었습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는 성령을 좇아 행할 때 몰아낼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3. 위협을 뛰어 넘을 용기를 가지려면 위협 앞에 기도하여야 합니다(29)

위협 앞에 성령 충만해야 용기 있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데 성령 충만하여 용기 있게 예수님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하나님께서 위협함을 굽어 보시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위협 앞에서 비굴하게 물러가지 말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질병에 걸릴 때 질병의 위협 앞에서 걱정 근심 속에 마음 접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게 해 달라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도하니까 신비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모인 곳이 진동합니다.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용기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순절의 성령도 기도하다 받았습니다(행1:14). 행8:15-17에도 기도하다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왕하2:9 엘리사도 구하여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위협 앞에 용기 있게 담대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 충만을 받을 때 담대하게 예수님을 어떤 위협 앞에서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 땅에 살면서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주석 66권을 쓰신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신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죽도록 공부하라 싱싱하도록 기도하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썩는 것입니다. 목요일 날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 이야기 하는데 어느 목사님이 기도원에 가서 기도원 원장 장로님의 하소연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기도원이 있는데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수 집사님들이 기도를 했으면 좋겠는데 새벽기도도, 금요기도도, 마을 모임도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담임 목사로서 너무나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졌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잠만 잡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세 번이나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잠만 잡니다. 그러다 다 시험에 들어 비굴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다 도망갔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주일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답니다. "저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갑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섭섭합니다. 왜 제가 사드린 넥타이는 안 매시고 ○집사 넥타이만 매십니까? 제가 올해 초부터 매주 체크를 해 봤는데 ○집사 넥타이는 네 번 맸고 제 것은 한번밖에 안 매셨죠? 목사님 그렇게 사람 차별 하시는 거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넥타이 선물해 주고도 시험에 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섭섭 마귀에게 금방 낙아 채입니다. 섭섭하여 시험 들면 자기 욕구 채워주는 무당 찾아가듯 이 목사 저 목사 찾아다니게 됩니다. 용한 점집 찾듯이 이교회 저 교회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어느 목사 만난다고 참 만족을 누리겠습니까? 유명하다는 목사 설교 3년 들어 보세요. 똑같습니다. 유명하다는 교회 3년 다녀보세요. 그 교회 목사에게 넥타이 선물 한 번 해 보세요. 한 번도 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열매는 내가 가꾸는 나무에서 따먹는 것입니다. 중소기업 다녀도 내 남편이 최고인 것입니다. 키가 작아도 내 아내가 최고인 것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똑같은 시험거리 다가옵니다. 내 그릇 크게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축복의 물이 쏟아져도 담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양과 기도의 질을 보고 있습니다. 기도의 정성을 보고 계십니다. 넥타이 사주는 것보다 그 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받고 성령 충만 받아야 비굴하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어떤 경우도 흔들리지 않고 용기 있게 신앙 생활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돈 충만 받으면 날마다 걱정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인정 충만 받으면 말 한마디에도 넘어집니다. 기도하지 않고 친구 충만 받으면 끼리끼리 어울려 맨 남 흉이나 보고 험담만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세상 충만하면 불평과 원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영상 충만 받으면 비굴하게 세상 풍속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기도하여 성령 충만받을 때 능력이 나타나고, 기도하여 성령 충만받을 때 담대히 유혹을 이기며, 기도하여 성령 충만받을 때 기쁨이 임하고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성령 충만받아야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아야 어떤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적들의 위협과 질병의 위협 앞에 기도하니까 용감하게 적들도 물리치고 죽을 병에서도 치유받았습니다. 한나가 브닌나의 위협 앞에서 기도하니까 민족 지도자 사무엘을 낳아 기도로 민족을 구하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나라가 폐허가 된 거대한 위협 앞에 울부짖어 금식하며 기도하고 성벽 재건의 주인공으로 쓰임받았습니다(느 1:4-5). 모세도, 다윗도, 에스더도, 예레미야, 에스겔, 엘리야도 수많은 위협 앞에서 기도로 낙공불낙 같은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기도는 당장 응답되지 않는다고 효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다 기억된 봐 되었다가 가장 적합한 때에 베드로를 보내어 응답받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응답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가 풍요를 누리며 사는 것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그 가난 가운데 기도의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열매만 따먹으려고 하지 말고 기도의 씨를 심으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씨로 바벨론 해방의 열매가 70년 후에 열렸고, 기도의 씨로 400여년 후에 애굽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은총의 회고'라고 하는 작은 책을 펴낸 엄학섭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은 함경도 어느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를 섬겼답니다. 큰 교회에서 청빙이 와 이사 가기 전날 밤에 송별회가 열렸답니다. 저마다 음식을 차려 와서 송별회를 하는데 꼭 오셔야 할 권찰님 한 분이 오시지 않았답니다. 시할머니가 과부요, 시어머니가 과부요, 자신도 과부였답니다. 자녀 일곱 명과 함께 살았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땅 한 평 없이 큰 냇가에 조그마한 돌산을 남겨 주었답니다. 당시 그 돌산은 그냥 가지라고 해도 누가 가지지 않는 산이었답니다. 권찰님은 남의 집 바느질, 김매는 품팔이, 빨래하는 품팔이를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겨우 하루 세끼 죽이라도 굶지 않으면 다행이었습니다. 권찰님이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주일 예배, 저녁, 수요일 기도회, 새벽 기도회까지 빠짐없이 나왔는데 송별회에 나오지 않아 마음이 쓰였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른 새벽에 그 권찰님이 무엇인가를 싸 들고 찾아왔답니다. "목사님! 이사 가시는 오늘 아침에 반드시 이것으로 쌀밥을 해서 잡수시고 가십시오."라고 하였답니다. 권찰님 가정은 쌀밥을 구경도 못하는 가정이너 너무 일이 이상해서 이사 가는 것을 하루 연기하고 그 쌀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날 밤 권찰님이 머리를 잘라 쌀을 두되 사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권찰님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답니다. 새벽에 나와 "하나님 저 큰 냇가에 있는 돌산이 옥토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안타깝게 기도하였답니다.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은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목사님도 "하나님 홀로된 저 가난한 권찰님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저 돌산이 옥토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권찰님이 몇 십리 되는 길을 달려왔답니다. 반가워서 "권찰님 웬 일이십니까?"라고 하자 "목사님이 제일 기뻐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작년에 홍수가 났는데 동네 앞을 흐르는 큰 내의 둑이 터져답니다. 군청에서는 둑을 막을 돈이 없는지라 함경도에서 돈을 들여 둑을 막는데 강가에 있는 돌산을 사서 그 돌을 깨다가 돌을 쌓아 둑을 만들었답니다. 그 후 그 돌산을 판돈으로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우리 열 식구가 전부 먹고도 남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을 전부 공부시킬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새벽 기도에 안 나오던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예수를 믿지 않던 동네 사람들이 전부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나왔답니다.

기도는 허공을 떠도는 메아리가 아닙니다. 기도는 단지 자기최면이나 정신 수양, 심리 효과, 위약 효과(placebo effect) 정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기도는 성령 충만을 주어 어떤 사명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5)“

성 어거스틴은 세계 3대 고백록 중 하나인 『참회록』을 쓴 어거스틴은 10대를 불량배들과 어울려 쾌락을 좇고, 도둑질도 하며 방탕하게 보냈습니다. 20대에는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한 여자와 동거하여 사생아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또 당시 기독교 이단이던 마니교에 흥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였답니다.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성인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약속의 말씀으로 붙들고 어거스틴을 위해 매일같이 눈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어거스틴은 32살 때 소나기와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어거스틴은 후에 그의 『참회록』에서 이런 어머니의 믿음과 눈물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펼쳐주신 당신의 손은 이 깊은 흑암으로부터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는 나의 어머니가 무릎 꿇고 눈물로 당신께 기도한 까닭입니다. ......어머니께서 늘 기도하던 곳은 눈물로 바닥이 흥건히 젖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위해 흘린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 눈물을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들을 보며 절망하며 비겁하게 부모의 사명을 회피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의 뒤에는 19명의 자녀를 믿음과 기도로 길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가 있었습니다. 19명의 아이들 낳은 동안 몸은 병약해졌습니다. 재정적인 능력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로 자녀들을 양육 합니다. 그 중 9명이 근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나와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찰스 웨슬레가 나와 6000곡 찬송가 지어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한 벤 카슨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흑인 빈민가 출신으로 어린 시절 말썽꾸러기였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고 그는 변화되어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의 소아신경외과 과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장장 22시간 동안 수술을 하여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할 때 기자들이 성공한 비결을 물었답니다. 그 때 그는 "저는 수술하는 동안 줄곧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손은 제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성공한 셈이죠."라고 말했답니다.

 

위협이 있습니까?

1. 위협을 뛰어 넘을 용기를 가지려면 사람의 위협보다 예수님이 주신 소명을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19,10).

2. 위협을 뛰어 넘을 용기를 가지려면 위협 충만보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8).

3. 위협을 뛰어 넘을 용기를 가지려면 위협 앞에 기도하여야 합니다(29)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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