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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4) 오직 성경(딤후 3:15-1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826 추천수:2 112.168.96.218
2017-08-13 10:58:50

 

오직(4) 오직 성경

딤후 3:15-17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뮤지컬 ‘더북(The Book)’이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저도 보았는데 기회 되시면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0년 전인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목숨을 걸고 성경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라틴어 성경을 사용했고 일반인들은 라틴어를 알지 못했습니다.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위클리프는 로마 가톨릭의 잘못을 기탄없이 비판했는데 14세기에 목숨을 걸고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1415년 콘스탄트 공회는 그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도록 명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유해는 무덤에서 파 해쳐져서 태워졌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문하고 화형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위클리프의 후예들은 목숨을 걸고 성경을 전했습니다. 가톨릭 기득권자들은 그들에게 '독버섯'과 '중얼거리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롤라드'라는 호칭을 붙여주었습니다. 롤라드들은 성경을 소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성경 한권씩을 암송해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 모여 암송된 성경을 낭독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적어 퍼뜨렸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어 박멸하기 위해 나섰지만 롤라드들은 권마다 줄줄이 외워 광장에서 외치는 글자 그대로 성경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성경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지도 번역하지도 못하게 한 배경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왈도는 위클리프보다 먼저 12세기 프랑스에서 신약 라틴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프랑스 리용에 살던 부자 피터 왈도(왈데시안, 왈도파)는 성경대로 믿고 살 것을 주장하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교회의 부정, 부패의 원인은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된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팔아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데 인생을 걸었습니다. 왈도를 따르는 무리가 점점 많아지면서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천주교회는 1229년 발렌시아 공의회에서 회의를 열어 왈도 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성경을 평신도나 하층의 성직자가 읽을 수 없도록 금서로 지정해 버렸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처음엔 성경 모두를 금서로 정하지 않았지만 13세기 후의 성도들은 성경 없이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왈도 파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 연옥 교리나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성상숭배를 인정하지 않다가 약 100만 명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 개혁의 선봉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핍박해도 위클리프를 이어 윌리엄 틴데일이 다시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위클리프는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는데 윌리엄 틴데일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책을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 교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원어에서 영어로 정확히 번역하여 출판 보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그는 1536년 10월 6일에 브뤼셀에서 줄로 꽁꽁 묶여 목 졸려 죽은 후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습니다.

종교개혁을 할 당시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두하여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문관은 루터의 저작 20여권의 철회를 요청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 되었고, 양심을 거슬리는 일을 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으니,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황이나 공의회도 성경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천명한 것입니다. 성경을 번역한 위클리프나 왈도나 틴데일이나 루터는 성경이 최종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르짖었습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의 권위를 상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에 있어 성경이 유일한 최종 권위라는 말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정경의 규모를 결정했다는 명분으로 교회가 성경 위에 있다고 주장하며 오직 성경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존 폭스의《순교자 열전》을 보면 독일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박해했는지 읽어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얼마나 박해를 받았는지 그 책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작센 지방의 틸리 백작이 지휘하던 제국 군대가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반쯤 교살시키다가 회복시킨 뒤에 똑같은 짓을 반복하기, 손가락과 발가락 위로 날카로운 바퀴 굴리기, 엄지손가락을 기구에 넣고 조이기, 목구멍에 오물을 밀어 넣어 질식시키기,머리 둘레를 줄로 팽팽하게 묶어서 눈과 코,입,귀로 피가 쏟아지게 하기,손가락,발가락,귀,팔,다리,혀에 불타는 성냥 매기, 입속에 화약을 넣은 뒤에 불을 붙여 머리 박살 내기, 몸의 모든 부위에 화약 봉지를 잔뜩 달아놓고 불을 붙여 폭파시키기, 살 앞뒤로 줄을 감아서 끌어당기기, 송곳 바늘과 칼로 피부에 상처 내기, 철사로 코와 귀와 입술 관통시키기, 다리를 묶은 뒤에 거꾸로 매달아 불로 훈제하기, 팔 하나를 오랫동안 매달아 탈골시키기, 갈비뼈에 갈고리를 묶어 매달기, 복부가 터질 때까지 강제로 물 먹이기, 뜨거운 오븐에 굽기, 발에 무거운 돌을 달아놓고 도르래로 들어 올리기, 매달기, 질식시키기, 불에 익히기, 칼로 찌르기, 튀기기, 난도질하기, 강간하기, 몸 쪼개기, 뼈 부수기, 살 갈아내기, 야생말로 몸 찢기, 익사시키기, 교살하기, 불태우기, 불에 굽기, 십자가에 못 박기, 감금하기, 독살하기, 혀와 코와 귀 잘라내기, 톱으로 팔다리 자르기, 온몸 난도질하기, 발꿈치를 묶어놓고 길거리에 끌고 다니기 등.” 이것이 인간이 할 짓입니까?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런 고문을 당하며 순교하면서까지도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습니다. 그 책에 많은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느 나이 많은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발가벗긴 뒤에 테이블에 눕혀놓고 몸을 묶고 크고 사나운 고양이를 배 위에 매달았습니다. 그러고는 고양이를 자극하고 괴롭혀서 결국 고양이가 그의 배를 찢고 내장을 물어뜯게 만들었답니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와 딸을 겁탈하고 어린 아기를 창끝에 매달고 가련한 여인들을 발가벗긴 뒤에 오락 삼아 길거리를 뛰어다니게 한 다음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답니다. 포메라니아에서는 제국 군대가 한 마을에 들어가서 열 살이 넘은 여자아이와 젊은 여성을 모두 붙잡아놓고 부모들을 둘러 앉힌 뒤에, 자기들이 아이들을 강간하는 동안 시편을 노래하게 했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오직 성경을 진리로 믿고 그들은 순교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의 5 가지 기둥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그 중의 오직 성경은 종교개혁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기초,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삽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의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교황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면 읽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면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마리가가 승천했다고 교회에서 가르쳐주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면죄부를 팔면서 그것을 사면 죄가 용서된다고 하면 그대로 믿고 면죄부를 샀습니다. 교회 전통과 사제가 말하는 것이 곧 삶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오직 성경”이란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가 구원받는 진리를 알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외에 무엇을 더 추가할 것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다른 특별 계시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은 충분하지 않으니까 전통을 추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경 속에 구원의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말미암아 구원받는 구원의 지혜가 성경 속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하셨는데 이 성경 말씀 말고 더 무슨 전통이나 이긴자나 말씀을 먹었다고 하는 보혜사가 필요하겠습니까? 비유풀이를 깨달아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데는 성경만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믿습니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원리도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하고 충분한 계시가 바로 성경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알아야 할 내용, 즉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에 필요한 모든 내용이 성경 말씀에 다 기록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충분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행하신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성경에 기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백화사전처럼 나열하고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성의 무시하고 과학을 무시하고 학문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데 충분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답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혼이나 부부관계나 부모 공경, 대인관계, 자녀교육. 기도 생활, 직장 생활, 노년 생활 등 삶의 갖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하여 이런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작정을 충분히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예언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믿어야 할 것을 충분히 가르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충분히 가르쳐 주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 성경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이나 종교개혁자나 성경의 계시성, 영감성, 무오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의 문제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가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권위가 있는 것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교도권(magisterium)이라고 하는,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겉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는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동일할 수도 없고 성경 위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교회 회의에서 마리아 숭배를 결정했다고 그렇게 그것을 믿고 마리아 이름으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면죄부를 사야 구원받는다고 교황이 말해도 성경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치면 그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사제들만 성찬시에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해서 성도들은 성찬식 때 떡만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교회의 전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서 최종 권위는 성경이고,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유일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핵심 사상이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진리의 기초입니다. 교회가 권위를 부여해 주어서 성경이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성보다 경험보다 성경의 권위가 더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선지자가 전해서 말씀의 권위가 있는 것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에스겔이 전했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권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태양빛이 사람의 증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태양은 태양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경 자체에서 증거하기를 성경이 하나님의 성경의 감동으로 씌어진 책이라고 하는 대목이 모세오경에 680군데, 예언서에 1,307번, 역사 문서에서 418번, 지혜 문서에 195번, 구약 전체에 2,600번 나옵니다. 모세는 신명기 4:2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라고 했는데 통계적으로 연구해 보면 출애굽기에는 반 이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함이 없이 직접 인용했으며 레위기에는 90%가 직접 인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3:2에서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하여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받아 말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그들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사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독특한 개인의 교훈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1:11에 바울은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절에 계속하여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하셨다는 것입니다(요5:47 요10:25).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연인이 받아 드리기 어려운 성경구절들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기사(누가17:26, 마태 24:37-39),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누가 17:28-29), 요나의 기적 (마태 12:40), 다니엘의 예언은 다니엘의 것으로 받아드렸고, 이사야서는 두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을 증거 했습니다(마태 24:15, 4:16, 12:17).

구약 모든 선지자들이 수백년 앞서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은 보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우리의 삶의 표준입니다.

 

2. 우리가 구원받는 진리를 알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성경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어도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적 삶을 위해서 꼭 성경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꼭 성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성경을 아니고는 이런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 일반 계시 말고도 특별 계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과 교리의 유일한 근원이며 원천이며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성경의 절대적인 필요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황과 교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성경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성경의 유익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황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황의 말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욱 앞세우는 것입니다. 교회 전통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제도와 의식을 절대화하여 신격화함으로서 성경적 기반 없이도 영속화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모든 전통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잘못된 전통도 있고 아름다운 전통도 있습니다. 문제는 전통을 절대화하고 성경적 검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전통은 성경으로 검증하여 잘 못된 전통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의 우선권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1:3-4)” 딤후2:16절에서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교회 역사에 나타난 신비주의자들(몬타너스 Montanists, 재세례파 Anabaptists, 그리고 제네바의 방임파 Libertines, 등)은 성경의 필요성을 부정하였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내적 광명”이 (inner light)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특별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티스는 자신이 예언자라고 주장했습니다. 1534년 4월을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로 발표하였습니다. 뮌스터 시는 성경에 언급된 새 예루살렘으로 공표하였습니다. 칼을 들어 뮌스터를 점령하라는 계시를 받아 뮌스터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뮌스터 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많아서 성비의 균형이 맞지 않았는데, 그는 남자들이 아내를 원하는 만큼 취하도록 권장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16명의 아내를 취한 사람도 생겼답니다. 옷을 벗고 다니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옷을 벗고 다녔답니다. 완전히 도시가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성경 기록을 위한 계시는 끝났습니다. 가감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말은 성경이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성도들의 삶을 위해서는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 것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딤후 3:15) 16,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종교심을 주셨고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당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롬 1:19, 20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마음이 둔해져서 지으신 만물을 보고도 하나님을 몰라보며 죄 아래 사는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롬 3:10~18에 보니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타락한 종교심 또는 도덕적인 양심으로는 천지만물이 보아도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미련한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고전 1:21에,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라고 말씀합니다. 자연 계시만으로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계시가 불충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연계시 자체는 완전하지만 인간의 죄 때문에 영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시려고 예로부터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영감으로 수록한 완전무결한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히 1:1, 2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진리를 알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책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교회가 온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믿음의 가정이 온전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구원받는 진리를 알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성경은 명료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뜻을 명료하게 알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태복음 28장 20절을 근거로 가르치는 권위 즉 교도권(potestas magisterii)이 사도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에는 사도직을 계승한 교황과 주교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권위 있는 교회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애매성을 빌미로 교도권을 내세우는 로마 카톨릭의 성경해석 독점권에 반기를 들고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습니다. 구원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성경은 결코 애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명료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 중에는 성경이 봉인되었는데 그 성경을 한 사람이 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천지 교주는 성경을 통달했다고 하며 마지막 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대언해 줄 약속의 목자라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이 자신을 증거하고 자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배도 멸망 구원이라는 실상교리를 가르칩니다. 각 시대마다 배도-멸망-구원의 노정 순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시대마다 구원자가 있는데 계시록 시대에는 신천지 교주가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실상 계시를 통해 1966년 3월14일 유재열의 ‘첫번째 장막성전 창립’이 “언약”이며, 1980년 3월 14일에 당회장이 오평호로 바뀌고 교권을 넘긴 사건이 “배도”이고, 1980년 9월14일 재직총사퇴와 교회명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삭교회로 바꾼 것이 “멸망”이라고 하며, 3년 반(1260일) 후인 1984년 3월14일 이만희가 두 번째 장막성전 교회를 창립한 것이 “구원”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유재열씨가 계시록 12장의 해를 입은 여자라고 합니다. 오평호 목사님이 멸망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만희 홍종효씨가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라고 합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미혹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 멋대로 해석하게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구약 39권이 초림의 약속의 목자 예수님 한 분을 증거한 것이며 신약의 27권은 재림의 약속한 목자 곧 이긴 자 한 사람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영계의 영혼과 육계의 신천지인이 신일합일 하여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4절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만든 교리입니다. 성경을 비유로 풀어야 할 비밀로 말하며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은 신약에 약속한 구원의 처소로서, 누구든지 구원과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약속한 목자(이만희)와 약속한 성전(신천지)을 알고 믿고 찾아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천지는 구약과 신약을 세대별로 구별하여 “배도-멸망-구원”이라는 구원관을 만들어서 이만희를 예수님과 대체를 시킨 것입니다. 최종적인 구원자로 바꾸어 놓고, 요한계시록의 실상으로서 신천지 교회사에서도 배도자-멸망자-구원자가 있다고 함으로서 이만희라는 개인을 다시 최종적인 구원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나 자신을 구원주라고 주장할 정도로 난해한 책이 아닙니다. 구원의 진리가 명료하고 구원자가 누구인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도록 밝혀놓고 있습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말씀은 곧 성육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에 집중되어 있고, 성경은 이 말씀을 증거하는 데 모호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은 신자들 심령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아멘”하게 하심으로 성경 말씀은 스스로 명료함을 나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줘야 한다고 했지만 개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지식(구원론)은 비록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동등하게 명백하지는 않지만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형식으로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오늘날도 성경을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성경은 다 짝이 있는데 비유로 풀어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천지에서는 이사야 34:16절을 근거로 성경은 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절) 그러나 이 말씀은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이 받을 재앙을 기록하면서 ‘그 짝’은 말씀의 짝이 아니라 짐승의 짝(암,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이나 쉬운 성경을 보면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세 교회처럼 번역의 모호성 애매성을 가지고 속이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만인 제사장을 외쳤습니다. 진실하게 구원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회나 신부(혹은 사제)에 의존할 필요가 없이 스스로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딤후 3:15).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편 19:7-8)”.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119:130)”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고전 2:15,10:15, 요일 2:20). “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익숙히 알고 그 진리를 옳게 분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딤후 2:15).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기 원하면서 그 말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는 그 가르침들이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완벽하게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벧후3:16). 한꺼번에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노력 없이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성경을 연구하는 성경학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다 똑같이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양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위하여 필히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까지 불명료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다 난해하고 애매한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동일한 주제나 동일한 내용이 보다 명료하게 나타난 구절의 조명을 받아 풀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직 하나님이 그 대답을 주시지 않았다고 인정해 버리면 됩니다. 가라는 데까지 가고 머물라는 곳에 머물면 됩니다. 성경을 성경 자체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은 명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경을 보는 자에게는 성경은 명료합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다면 그것은 멸망할 자들에게 가리워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눈으로 광활한 하늘을 보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다(시19:1)’고 고백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성경만으로 구원의 진리를 누구나 명료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원리, 가정 생활의 원리, 결혼의 원리, 자녀교육의 원리, 죽음 이후의 세계 등을 명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내 주시면 우리는 명료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고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 메시아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 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됩니다. 요20:31에 성경을 기록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됩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교황과 주교나 사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다 알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성경을 잃으면 조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길 눈이 밝은 사람도 있고 어두운 사람도 있듯이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알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오직 성경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오늘날 성경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전근대(프리모던)에는 그래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는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두었습니다. 성경의 충분성 필수성 명료성 뿐 아니라 성경의 계시성 영감성 무오성도 부정합니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성경 권위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이후 후기 근대 사회(포스터 모던)에서는 상대성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최고 권위를 부정할 뿐 아니라 이성적 사유도 부정합니다. 직관과 감성을 중요시합니다. 경험을 절대시합니다. 이성 역시 객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역과 시대와 계층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느낌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에 빠져 절대 진리는 없다고 합니다. 각자 생각하는 것이 진리고 각자 자기 소견대로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전통도 다 부정하는 시대입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불사용되고 있습니다. 장식용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오용되고 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남용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숨은 이익과 만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과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성경 자체에만 머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오직 성경을 분명하게 믿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Sola Scriptura’(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으로만)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만이 교리와 실천을 위한 무오한 최종 권위라는 사실을 삶으로 간증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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