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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사모하는 믿음(히11:13-1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253 추천수:2 220.120.123.244
2020-09-27 12:45:20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히11:13-16

 

이번 주는 민속 명절인 추석이 있습니다. 추석이 되면 돌아가신 부모님 무덤에 가서 성묘를 합니다. 그 부모님이 죽음으로 끝나버렸을까요? 죽음 후의 세계는 없을까요?

 

성경은 죽음 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로는 인간 본능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대부분 사람의 마음에 죽음 후의 세계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막연하게나마 사후세계가 있으리라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겨울에 죽은 풀이 봄이면 새롭게 태어나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과 같이 자연계를 보면 인간에게도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원숭이도 사후세계에 대한 의식이 없는데 아무리 미개한 사람도 다 사후세계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100% 객관적으로 지옥과 천국이 있다고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둘째는 임사체험을 통해 지옥과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잠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한 것을 임사체험이라고 합니다. 공영방송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는 ‘저 세상으로의 여행-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그 내용은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종교계, 비종교계, 국내인, 외국인 등의 다양한 사람들의 죽음 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젊은이나 노인이나 한결같이 사후 체험 때 자신이 나쁜 짓 한 과거의 행동이 다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즉 죄수가 재판장으로부터 죄명을 알고 죄의 벌을 받듯이, 죽음 이후에 그의 영혼은 죄를 다 기억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로마서14:12)”라고 했는데 그런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10여 년 동안 1300여 명의 임사 체험자를 조사한 미국의 종양학 전문의 제프리 롱 박사는 그의 저서 <죽음 그 후>에서 입사 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의식이 몸 밖으로 나오는 유체이탈 체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인생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레이몬드 무디(Raymond Moody)박사는 원래는 철학과 교수였다가 의과대학에 다시 들어가 의사가 된 분인데 임사체험을 한 163명의 사례를 모아 <사후의 세계(Life After Life)>란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과거의 어두웠던 삶을 청산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였다고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버드 신경외과 의사의 이븐 알렉산더 교수가 있습니다. 과학 학술지에 150여 편이 넘는 논문들을 게재했고, 국제 의학 콘퍼런스에서 200회 이상의 연구 발표를 하는 등 뇌와 의식의 작용에 관해 뛰어난 업적을 쌓은 세계적인 뇌 의학 권위자라고 합니다. 그가 유명 신경외과 의사로서 이름을 떨치던 어느 날 갑자기 인간으로서 사고와 감정을 통제하는 뇌 부위가 완전히 정지된 거의 죽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료 의사들은 치료를 중단하고 생물학적 사망 판정을 내리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간에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했답니다. 그리고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는 영혼이나 천국이나 지옥을 믿지 않았고 지상에 있는 물질이 유일한 현실이고 나머지 모든 것들(생각, 의식, 관념, 감정, 영혼)은 그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임사체험도 극도의 스트레스 하에서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였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체험해 보니까 물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부정해왔던 영혼, 신, 사후세계 등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임사체험은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 아니라 '완전한 실제(Ultra-Real)'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사은품도, 꾸며낸 신화도, 동화도 아닙니다. 천국, 신, 영혼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의학적인 지식과 양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한 후 신과 영혼이 실재하며 죽음이란 다만 다른 상태로의 전이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임사체험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나 망상이 아니라 뇌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이 직접 이런 체험을 하면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겠습니까? 가까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이 이런 체험을 하고 알려 주면 믿지 않겠습니까? 텔레비전에 의사가 나와 무엇이 몸에 좋다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그것을 믿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은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해도 나는 다 믿을 수 있는 분의 말이라면 믿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있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그 사실을 목숨 담보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거짓이라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예수님을 전했겠습니까? 그것도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거짓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겠습니까?

가장 믿을만하신 예수님께서 영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도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부정하고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킹처럼 “천국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꾸며낸 동화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상이 지옥인데 무슨 또 다른 지옥이 필요하고, 지상이 천국인데 무슨 또 다른 천국이 필요하냐고 항변합니다. 종교인들이 천국과 지옥을 발명하여 종교적 이익을 위한 공포 마케팅의 수단으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모든 답을 주는 신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후 세계를 의식하지 말며 인생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너의 죽음을 기억하라)하지 말고 카르페 디엠(현재를 잡으라.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합니다. 화려한 문명의 세계에 사는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점점 지옥도 천국되 실종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에 대한 공포도, 천국에 대한 소망도 옅어지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지상 낙원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을 보면서 인간의 과학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무신론자들은 "지옥은 없으니 삶을 즐겨요"라는 현수막 광고를 내 걸고 무신론자 회원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안심하세요 : 지옥은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즐기세요."라는 현수막을 쳐 놓고 음식을 제공하며 회원을 모집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야 미친 것들아 무슨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그러느냐 다 죽으면 끝인데 일요일이면 청승맞게 교회에 가 앉아 있느냐?"라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최고인데 돈이나 벌지 무슨 천국 타령하고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인간은 단지 진화의 산물이고 우주는 빅뱅에 의해 생긴 것인데 무슨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그런 허튼 소리하느냐"고 핀잔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은 인간의 산물이니 자유롭게 살려면 신을 믿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컴퓨터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우기는 것과 같고, 1000억개 이상의 신경세포로 조직된 인간의 뇌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면 소가 웃습니다. 산소가 수소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잴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이 없을까요?

 

예수님은 분명하게 지옥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영원히 고통받는 불못으로 묘사된 지옥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되는 영벌의 장소 지옥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게헨나, 풀무불, 유황불이 붙는 못(마13:42. 50. 계19:20, 20:10)으로 표현된 지옥이 있습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하며,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막 9:43.48,49, 마18;8, 25:46)이며 '울며 이를 갊이 있으며(마8:22, 계20:10), 아주 어두운 곳으로 하나님과 친교가 단절된 곳이며(마8:12, 22:13. 25:30 벧후2:17, 유13, 마7:23 25:30. 살후1:9), 마귀와 그 사자(졸개)들과 함께 거하는 곳(마 25:41 계 19:20)이며, 영벌의 곳(마25:46. 살후1:9.유7)이라고 성경은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옥을 이 세상 끝날 '부활과 심판의 때에 불경건한 자들이 가는 곳으로(마10;28. 계21:8 벧후3:19) 불가마, 불못 속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영원히 받는 장소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계20:14, 14:10, 21:8. 마25:41). 하나님이 공의의 심판을 받은 지옥에 들어가서 받는 형벌들 간에도 무수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10, 눅12:47,48, 마10:15 11:24).

 

지옥뿐만 아니라 천국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천국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천국에서는 시집가지도 아니하고 장가 가지도 아니하고 천사들과 같으니라(막12:25,마22:30 눅20:3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나라(약 2:5), 낙원(눅23:42), 아브라함의 품(눅16:22), 하나님 보좌 우편(히 12:2), 그 나라(마 13:41), 주의 나라(마 20:21), 하나님의 나라(마 21:31), 내 아버지의 나라(마 26:29), 새 하늘과 새 땅(계 21: 14), 새 예루살렘(계 21:2) 등으로 칭해지는 천국(마 5:20)이 있습니다. 코로나19도, 폭력, 살인, 인종차별,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한숨도, 죄도, 저주도, 가난도, 전쟁도, 우울증도, 트라우마도, 스트레스도, 염려도, 걱정도 없는 천국이 있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로 가르쳤던 20세기 최고 지성인 중은 한분이었던 C.S.루이스는 인간이 재판장이 되어 하나님을 피고인석으로 끌어내렸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변증하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는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많은 책을 통해 변증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죄는 최후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한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영원히 선택함으로써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전적으로 자아 안에서만 머물면서 거기서 얻는 것에 만족하겠다는 것, 결국 그가 얻는 것은 지옥이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는 된 걸세,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게 없다면 지옥도 없을 거야”

루이스는 천국에 대하여 “세상에서 최고의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했을지라도 그것은 천국을 ‘조금’ 맛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천국을 가장 많이 생각했던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여 대부분 크리스천이 천국을 더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다. 교회가 천국을 향하면, (크리스천들이 천국을 사모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으로 향하면, 천국도 잃게 되고, 세상도 잃게 될 것이다.” "천국을 목표로 삼으면, 그 안에서 지상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상을 목표 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것을 먼저 추구해서는 곤란하다. 첫 번째 것을 먼저 추구해야만 비로소 두 번째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성도님들은 죽은 후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지옥에 가고 싶습니까? 지옥 가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리는 없지만, 오늘 죽으면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과 같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줄 믿습니다.

 

1. 그 영원한 천국을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본향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본향입니까? 15절에 나오는 본향은 육신의 고향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있어서 이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더 나은 본향입니다(16). 이 땅에 있는 고향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그곳은 하늘의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고향과는 다릅니다. 하늘이라는 곳은 높은 곳, 고상한 곳, 거룩한 곳, 하나님의 처소를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20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처소이기 때문입니다.(16)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은 25장 34절에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1:2에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미 천국 백성이 되어 천국 생활을 하고 있고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고 사는 것도 천국이지만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2.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믿음 따라 살다 믿음을 따라 죽어야 합니다(13).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 9절에 나오는 이삭, 야곱, 11절에 나오는 사라를 말합니다. 이들은 그들의 육신적인 고향인 갈데아 우르를 바라보고 산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고 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가나안 땅, 하늘의 별 같이 많은 후손, 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았으나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성취로 말미암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는 동안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살았다는 것입니까? 추호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것들을 멀리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멀리서라는 말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시간적 의미입니다. 멀리 있고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있어 손으로 잡을 수 있기라고 한 것처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약속 성취 결과 얻지 못했는데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변함없는 기대로 일평생 살았다는 말입니다. 보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환영하였다는 말입니다. ‘환영하며’라는 말은 믿음으로 환호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였지만 실제로는 차지하고 누리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우리 번역에 빠짐) 더 나아가 환영합니다. 냉담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뜨겁게 환영합니다. 약속된 것을 실제 누리기 전에 붙잡고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삶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최고의 찬사입니다. 얼마나 복된 삶이고 복된 죽음입니까? 믿음으로 살다 믿음으로 죽었다는 말 만큼 복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것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갈3:3). 달음질을 잘하다가 중도에 믿음을 버리고 배반하는 이들 많았습니다.

당시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11장 36-3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조롱과 채찍질, 결과, 시련, 돌로 맞음, 톱으로 켬, 시험, 칼, 짐승의 가죽 입고 유리함, 궁핍, 환난, 학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하는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끝까지 믿다 죽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본향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다 믿음으로 죽은 선조들을 통하여 끝까지 믿음으로 살다 믿음으로 죽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죽음 중에 가장 복된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을 보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에 대하여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변절하지 않고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아브라함처럼 조금 곁길로 갈지라도, 야곱처럼 젊은 날 욕심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갈지라도 마지막은 본향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 따라 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믿음이 변질됩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믿음대로 살다 믿음 따라 하늘 나라 가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

처음에는 화려하게 시작하지만, 마지막은 비참하게 끝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조금 어렵다고 믿음 팔아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배웠다고 믿음 부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가졌다고 교만해져 믿음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인기 있다고, 조금 권력 있다고, 조금 건강하다고, 조금 아름답다고 이 땅이 전부인인 것처럼 천국을 잃어버리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고, 이 땅의 인생은 풀의 꽃같이, 아침의 안개같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둘째는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13)

믿음의 선진들은 영원한 본향이 있기 때문에 그 본향에 가기 전까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또’ 이후를 보십시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외국인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크세노이'라고 하는데 이는 낯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본국 사람들에게 좀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언어, 풍속, 생활 양식이 달라서 이방 시 되고 끝까지 이질적으로 취급되고 멸시받는 사람을 통틀어 본문에서는 외국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데 이는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는 자기대로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얼마 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현재라는 것은, 이 현실이라는 것은 항상 임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증언하였으니’라는 말은 고백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사는 땅이,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 영구적이고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창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야곱도 그랬습니다(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왜 이렇게 나그네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까?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우리말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앞에 왜냐하면(가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것들을 말하는 자들은 그들이 본향을 찾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고향인 하늘의 도성(16절)을 강한 열망으로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며 실제 살았다는 말입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명백히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즉 믿음의 조상들이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삶과 입술의 고백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고향을 따로 있고 자신들의 삶은 그 본향을 찾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40년간 삼권을 다 거머쥐고 통치한 다윗도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시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시 39:12)" 바울도(빌3:20), 베드로도(벧전2:11)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그네의 본적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생활 원칙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요15:19). 나그네는 타향에서 박해를 받습니다(딤후3:12, 벧전4:14) 이 세상은 잠깐 숙박하는 곳입니다(대상29:15, 히11:13-14)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그네로 살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나그네 중에는 두 종류의 나그네가 있습니다. 한 종류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사는 정처 없는 나그네입니다. 또 한 종류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분명하게 알고 가치 있게 살아가는 정처 있는 나그네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영원한 본향을 모르고 사는 정처 없는 나그네는 허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베스트 셀러를 많이 써서 큰돈을 벌었답니다. 그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답니다.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으며, 파리에도 호화로운 집이 있었답니다. 은행에는 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 정신병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정처 없는 나그네는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하여 수고하며 도전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져버리기 쉽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집착도, 남보다 앞서가려는 경쟁심도, 인간의 욕심과 허영심도, 자극을 극대화하는 말초적 쾌락도 공허함을 채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로 살았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41세의 나이로 약물중독으로 죽었습니다. '할리우드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도 37세 젊은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본향 천국를 바라보며 정처 있는 나그네로 사는 사람의 삶은 다릅니다. 서울 합정동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에는 이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조선 땅의 죽음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선교의 문을 연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명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선진 문명국의 혜택을 버리고 조선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 26살 꽃다운 나이로 이 땅 나그네 인생을 마감한 루비 켄드릭의 묘비에는 "내게 만약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에 주겠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C. S. 루이스 교수가 그를 돕는 조교와 함께 옥스퍼드 캠퍼스 근처의 무덤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답니다. 조교가 매우 흥미있는 한 비문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 비문 좀 보세요. 굉장히 재미있는 비문이 쓰여 있네요." C. S. 루이스 교수가 보니까 이렇게 쓰여 있었답니다. '유언에 의하여 쓰여지다. 갈 곳을 모르는 무신론자 여기 누어있다.' "선생님 재미있지 않습니까?" C. S. 루이스 교수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재미라니 이제 그는 갈 곳을 알지 않았겠나! 너무 늦었지! 너무 늦었단말야!"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히9:27)"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정처없는 나그네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은 후 가야할 천국이 분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이 땅에서 고백하며 그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홍수가 온다는 것을 방주를 지음으로 준비한 것처럼 우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십시오.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가서 그 처절한 고통을 알고 자기 형제 다섯에게 이 고통받는 지옥에 오지 말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이 기회의 땅입니다. 우리가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삶으로 믿지 않는 형제 자매에게 천국을 전해야 합니다.

 

셋째는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16).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이 땅에 나그네처럼 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등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다는 것입니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는 말입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살았습니다. 간절히 갈망하여였다는 말입니다.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현세적 평안과 돈이 주는 안락과 문명이 주는 쾌락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존경과 명예를 주는 힘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C.S.루이스는 <악마의 편지>를 통해 사단의 전술을 소개합니다. 사단은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 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과 그 내세를 믿고 사모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의 '천국 외에 우리의 마음을 둘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말같지만 우리가 내세를 참으로 사모한다면, 그 내세를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세는 내세와 연결되어야 의미있고, 가치있고, 힘이나며, 활력이 있습니다. 노아처럼 120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결혼할 처녀 총각처럼 그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천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천국을 대망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죽는데, 희망 없이는 못 사는데, 이 세상이 참된 희망이 아니며, 천국에 참된 희망을 걸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우리 집이 아니며, 우리 호적은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설에 유니콘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저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여기는 저의 진정한 나라입니다. 저는 여기에 속합니다. 비록 지금 이 순간까지 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제가 일생 동안 찾아왔던 나라가 바로 이 땅입니다.”

 

믿음의 선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보십시오. 평탄한 삶이었습니까?

이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외삼촌 집에 가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오는 이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어떻했습니까?

네로 황제 이후 핍박으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까? 비방당하였습니다. 환란, 사람에게 구경거리, 산업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3-3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이방사람의 진을 물리쳤습니다.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15절 보세요. 돌아갈 기회가 있습니다.(15) 가나안에 흉년이 들 때도 갈대아 땅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삭의 결혼을 위해서 얼마든지 기름진 땅, 문명의 땅으로 아들을 보낼 수 있었지만 자부를 자기의 고향에서 데려오는데도 아들을 종에게 고향 땅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합니다(창24:6). 화려한 땅, 문명의 땅, 익숙한 땅,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땅입니다. 야곱 역시 갈데아 우르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창30:24; 31:3)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고향 땅에 묻지 않았고,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창23:19; 25:9,10), 그들은 옛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늘나라 본향을 사모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나라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땅이 이땅으로 끝나지 않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 인생은 의미 있고 활기 있으며 능력을 가지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집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천국에서 모두 날 기다리네 내 주 예수 피로 죄 씻음 받았네 나 비록 약하나 주님 날 지키리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 그 기쁜 찬송 하늘 울려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3.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면 우리를 어떻게 해 주십니까?

첫째, 저희 하나님이라 받으시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16절을 이러므로부터 다시 읽에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이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을 예비해 주십니다.

모권사님이 꿈속에서 천국에 갔는데 자기 집이 없어 깜짝 놀라 선교원에 수십억원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모 목사님 집은 어디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에게 전화를 해 그 목사님이 충격을 받고 상당한 돈으로 복지사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상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신학적, 역사적, 주석적으로 천국 상급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사람이 행한대로 갚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9-10)” 믿는 사람은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요5:29). 그러나 상급의 심판은 받습니다. 순종의 정도와 질에 따라서 상급의 차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0,12)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등급이 있기 때문에 상급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본향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노아 시대 때도 홍수가 없다고 먹고 마시고 즐기면 살았지만 결국 대홍수가 왔고 노아의 가족만 제외하고 모두 전멸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동화의 세계, 종교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하는 세계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지옥이라는 말이 22번 나오는데 예수님이 14번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사기꾼이거나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해 주신 말씀의 주제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없는 장소이지만 지옥, 음부, 하데스는 고통의 세계, 불타는 세계입니다.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지옥은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장소입니다.

추석 명절 진정한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겠습니까? 비록 이 땅에서 힘겹게 살지라도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온 식구가 믿음으로 천국을 예비하며 사는 가정이 진정 행복한 가정입니다. "초가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앞으로 나가 하늘나라에 가면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저 하늘 너머 주 계시는 본향 영원한 기쁨 넘치는 그곳 언젠가 내가 빛난 천국 이르러 주님과 함께 거닐겠네."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이 땅에 살며 죽은 후에는 영원한 천국에 갈 우리들은

첫째, 믿음 따라 살다 믿음을 따라 죽어야 합니다(13).

둘째,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고백하면서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13)

셋째, 힘든 세상에서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16).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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