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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유일한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사도행전 4: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512 추천수:3 220.120.123.244
2020-09-13 21:13:48

우리의 유일한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4:12

 

교회 화단에 감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 모과나무, 포도나무, 배나무, 매실나무, 자두나무, 채리 나무, 사과나무 등 여러 과일나무를 심어 놓았습니다. 예전에 시골서 교회를 다니신 어른들이 옛 추억을 가지게 하고 아이들에게 도시에서 과일이 열려있는 교회에 다니며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작년에는 감이 많이 열려 아이들이 감을 따는 추억을 가졌는데 올해는 이상하게 과일들이 별로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과는 많이 열렸습니다. 코로나 19로 교인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니까 따지 않고 교인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놓아두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떨어져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두 아이가 와서 사과 하나를 따 밝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교회 단체 카톡에 올라왔습니다. 오랜만에 교회에 나와 사진을 찍은 정든 아이들을 보니까 참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그 아이들 사진을 올리고 시를 지어 주보를 만들고, 단톡에 올렸습니다. 단톡에 들어와 읽어 보신 분들은 읽어 보셨겠지만 그 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초가을/제 색을 내며 익어 가는데/코로나19가 눈을 부라리며//새 추억을 만들어 줄 어린 아이도/옛 추억을 길어 올릴 어른도/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합니다.//태풍이 불고/비가 오는데도/기다림으로 버텼는데//보여주는/목마름에 지쳐/하나 둘 떨어집니다.//그런데 홀연히/정든 아이들이 나타나/사과를 보고//하나를 따/마스크로 가릴 수 없는/웃음을 걸어 놓습니다.//이제야, 사과도 웃습니다.”

코로나19가 눈을 부라리고 우리를 예배당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겠다고 정부는 대면 예배를 금지하여 교인들을 주일 예배에 나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어떤 주민들이 '예배 중단 촉구' 현수막을 걸어 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언론은 교회가 코로나19 감염의 온상처럼 연일 보고하고 있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생기면 예배 강행한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모여도 신고하고, 교회에 차가 많이 있어도 신고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학교는 아이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하면 분리하여 앉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예배받은 것을 기뻐하시는데 교회에 같이 모여 예배드는 것 자체가 사회악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제대로 잘 드릴 때 흥하였고,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할 때 망하였는데 세상은 예배를 드리면 망하고 예배를 안드리면 흥할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전염병 예방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이해가 됩니다만 신앙의 힘을 너무 가볍게 여기며 교회를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못 모이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고 교회든, 시장이든, 카페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서나 코로나19가 전염될 수 있는데, 방역수칙을 잘 지키며 얼마든지 소규모로 모여 예배드릴 수 있을 텐데, 무엇보다 교인들이 자신들의 건강을 챙기며 예배를 드릴 텐데, 그래도 신앙인들이 더 세상 사람보다는 도덕적이고, 남을 생각하며 사는데, 신앙인이 위기를 당하면 더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데..., 거대한 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 신앙생활인 모임 예배를 금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국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국가주의, 과학만이 전부라는 과학주의, 인간이 최고라는 인본주의, 신앙은 마약이라는 공산주의, 돈이 최고라는 물질주의, 교회나 세상이나 뭐 다르냐는 다원주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포스터 모더니즘 등 오늘날 밀려오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 어떻게 신앙과 교회를 세상에서 밀어내려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세속적인 힘에 밀릴 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거대한 힘에 밀려도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꼭 믿고 증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전하다 거대한 힘에 밀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시 성령이 임하시고 하루에 3000명이 주님을 믿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성도들의 삶에는 생기가 돌았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성전 문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40여년 동안 앉은뱅이로 있던 자가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19같은 것이 덥쳤습니다. 당시 힘있는 자들이 그들의 신앙활동을 저지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1절에는 제사장, 성전맡은 자(성전내 치안과 경비 담당), 사두개인들, 5절에는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입니다. 산해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지금 말하면 국회의원들입니다. 유대교 최고의 재판 기관으로 사형권만 허락되어 있지 않고 종교 민사 모든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6절에는 대제사장 안나스(9년 수행, 예수님 처형에 앞장 섬 요18:13)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 제사상의 문중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강력한 힘 있을 가진 자들이 총 궐기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제주이신 것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힘으로 사도들의 활동을 저지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사람 사도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합니까?

1) 백성들을 가르치고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전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2). 특별히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사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들의 일처리 방식과 자신들의 계획과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제제합니다.

2) 사도들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7).

3)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18).

4)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3).

힘 있는 자들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산해드린 공회 앞에 모아 놓고 심문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위협적으로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라고 심문합니다. 그때 사도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거대한 힘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졌습니까? 과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들은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세상적인 힘 앞에 무력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증언합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병자를 낳게 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10).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안은뱅이로 있는 사람을 났게하신 구세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한때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담대해졌습니다. 예수 이름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하니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니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지 않겠습니까? 요1서 2장 12절에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죄용서를 받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했는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아냅니다. 예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납니다. 요한복음14장 14절에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라고 했는데 실제로 예수 이름으로 구할 때 응답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들은 실제 성령충만 받고 이런 신앙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힘이 아무리 거대하다하여도 예수님의 힘에 비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질병의 힘에 밀리고 있습니까? 권력의 힘에 밀리고 있습니까? 걱정의 힘에 밀리고 있습니까? 염려의 힘에 밀리고 있습니까? 죄의 힘에 밀리고 있습니까? 죽음의 힘에 밀리고 있습니까? 돈의 힘에 밀리고 있습니까? 자연의 힘 앞에 밀리고 있습니까? 명예의 힘, 외모의 힘 앞에 밀리고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질병아, 죽음아, 걱정아, 염려야, 죄야 물러가라고 외쳐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의 이름 앞에 그 어떤 힘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 앞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고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이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죄 용서를 받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길은 유일하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6)”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말하면 너무나 독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나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반이성주의고, 비인권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몰지각한 독선이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동일한데 어찌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하는가"라고 항변합니다.

"불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회교를 믿든, 토속종교를 믿든 믿음은 동일하고 고귀한 것이니 무슨 종교를 믿든 구원을 받는다."라고 종교 다원주의를 말합니다.

"남의 종교를 비판하지 말라"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비인격적 행동이다."라고 말하며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과연 모든 종교는 동일하겠습니까? 모든 종교는 선하게 살라는 면에서는 동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 지도자도 예수님처럼 인류의 죄와 죽음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다. 딸을 결혼시키면서 모든 남자는 동일하니 아무나 결혼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독선에는 파괴적인 독선이 있고 창조적인 독선이 있습니다. 진리는 비타협적인 특성을 가지며 창조적인 독선입니다. 자신의 남편을 남편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독선이라고, 비타협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흰색을 흰색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을 독선이라고 비타협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죄 없으신 유일한 의인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율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예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눅7:48-49;막9:2).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롬4:25)“

예수님은 예수님 스스로 유일한 구원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9:5).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 "나는 문이다"(요10:9).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나는 포도나무다"(요15:1)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역사 속에서 누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배타적인 표현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 자들에게 편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거대한 힘 앞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사실을 믿습니까? 어떤 거대한 힘 앞에서도 이 사실을 믿고 이 사실을 전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더는 예수님이 증거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들은 다시 사도들을 불렀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못하도록 합니다. 그때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주이기시 때문입니다.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주라고 믿은 우리들은 거대한 힘에 밀렸을 때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2. 힘에 밀렸을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23-31).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거대한 힘에 밀렸을 때 이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고 있던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사도행전 1장에 120명입니다. 2장 41절 보면 제자의 수가 3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믿는 자의 수가 남자만 약 5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되겠습니까? 적어도 2만은 넘을 것입니다. 적은 수가 아닙니다.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힘으로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19시대 거대한 세력이 신앙인을 비난하고, 교회를 오염 덩어리로 취급하며, 예배드리는 것을 물건 사는 것보다 우습게 취급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기독교인의 힘도 만만치 않습니다. 힘을 모아 시위할 수 있고,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용한 방법도 아닙니다. 우리가 택해야 할 것은 예수님처럼 제자들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힘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시 권력자들이 거대한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구세주인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코로나19에 대한 처방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이 났을 때 증세 처방과 원인 처방은 다른 것입니다. 원인 처방은 모르니까 증세 처방만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인 것을 모르니까 예배를 조롱하고 가볍게 여기고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죄문제를 해결하는 역사입니다(요한복음 16:9). 죄는 반드시 죽음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죄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롬3:10). 하나님은 죄의 대가를 치루면서 동시에 생명을 살리기 위해 피의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창세시대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가죽옷으로, 아벨의 짐승 제사로, 족장 시대 때에는 아라함의 제사로, 출애굽시대 때는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사건으로, 율법시대 때는 모세의 율법을 통한 피의 제사법으로 예수님의 모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5:39)"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당시 서리관과 바리새인들, 관원들, 공회원들을 이 사실을 알지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모이는 것을 싫어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지 않는 자들이 권력을 가지면 그 권력으로 그리스도를 대항합니다. 조그만 권력의 힘, 지식의 힘, 부의 힘, 미모의 힘, 명예의 힘, 건강의 힘이 있으면 그리스도께 예배하기보다는 자기 숭배하며 교만해집니다. 힘이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쓰임 받아야 합니다. 국가 권력이 무엇입니까? 대단한 것 아닙니다. 백성이 뽑아준 사람들이 백성이 위임한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국가 권력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사유화하고 백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 부질 없는 것들입니다. 때가 되면 다 살아집니다. 교회를 없애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 그 어떤 세력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약간의 파장이 있지만, 조금 있으면 잠잠해집니다. 바다에 돌을 던지면 흔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살아졌지만,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며 예수님 재림 때까지 신앙인들은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흘러갑니다. 언론 권력은 무엇입니까? 특별하고 대단한 것 아닙니다. 영리를 위한 회사를 만들어 사람들이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것입니다. 언론인들이 그 권력을 사유화하여 국가 권력과 야합하면서 교회를 국민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교회를 마치 이익집단처럼 취급하고 비난하고 야유하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무너지는 것 아닙니다. 언론 권력 역시 공익이라고 포장하지만 결국, 편집권과 방송권을 가지고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어떤 언론 권력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대한 힘에 밀렸을 때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4가지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1) 위협함을 하감해 달라는 것입니다.

(2)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3)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직접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겨울 때는 힘으로 밀릴 때는 핍박이 있고 괴로움이 있을 때는 기도하라는 신호로 알아야 합니다. 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신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니까 성령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을 전할 때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말로 말씀을 알아 듣는 신비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그들이 기도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외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적으로 모든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기도를 통하여 이런 역사가 읽어날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가 거대한 힘 앞에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어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 1:4-5)"

모세도, 다윗도, 에스더도, 예레미야, 에스겔,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다하여도 난공불락 같은 여리고성이 앞에 버티고 있다 하여도 기도하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끓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왜 우리가 기도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힘의 근원이시고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엘빈 토플러가 쓴 <권력의 이동(power Shift)>에서는 권력의 원천은 힘의 원천을 폭력. 부. 지식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폭력은 저품질적권력(Low-quality power)이라고 했고, 부는 중품질적 권력(medium-quality power) 지식을 고품질적 권력(high-quality power)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베스트 하이 퀄리티 파우어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토플러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사야 40장 27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27-31)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은 힘겨울 때 힘에 밀릴 때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힘을, 병든 세상을 치료하는 힘을, 무지에서 지혜의 힘을, 무기력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는 힘을, 썩은 현실을 변혁시키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거대한 힘에 밀릴 때 기도만 하고 그래도 있어야 합니까? 기도한 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 힘에 밀렸을 때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차별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32-37).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방송을 보았습니다. 목사들이 나와 서로 예배에 대하여 논쟁하며 한국교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조금 보다 꺼버렸습니다. 방송사의 의도에 목사들이 놀아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손가락이 가르키는 것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고 논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어떻습니까?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코로나19를 막아주니까 마음대로 교회에 나와 예배드려야 한다는 목사도 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모여서 예배하면 코로나 더 잘 걸린다고 말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예배를 중단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이웃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안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예배당 문에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라고 써 놓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 사태가 번진 이유에 대해서 유난히 교회에 대한 부당하고 편파적인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며 "주일 예배를 영상으로 계속해서 드리게 된다면 교회의 본질인 예배와 신앙에 큰 해가 될 것이 분명하고, 교회들은 정부의 명령에 맹종하는 정부 하부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하며 방역수칙을 지키며 조심스럽게 예배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예배를 드려라, 드리지 말라 명령하실 분은 오직 창조자이자 구원자인 주 하나님 한 분뿐"이라며 "방역 당국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신앙과 믿음에 대한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고, 방역에 협조해달라고만 말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정부 당국자들은 교회를 '문제 집단' 정도로 경시하는 어투로 '예배당 문을 닫으라'는 권한 밖의 명령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프레임 논쟁이라고 합니다. 그 논쟁을 하면 할수록 교회만 손해입니다. 정치인들이 잘 써먹는 방법입니다. 어용 방송국이 잘 써먹는 방법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식문제로, 군대 문제로, 재산문제로 상대를 제거할 때 써먹는 방법입니다. 한 번 걸리면 변명하면 변명할수록 문제는 더 커지고 확대되어 결국 상대의 의도대로 제거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신앙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거대한 힘에 밀렸을 때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주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들은 힘에 밀렸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3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 우선 마음부터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32).

(2)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였습니다(32).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사랑의 공동체인 천국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3) 큰 권능을 받아 부활을 증거하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33).

(4) 핍절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35).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주로 믿는 삶을 실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을 전부라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처럼 실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차별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교회가 왜 이렇게 나약하고 비난을 받고,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유일한 구원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지만 초대교인처럼 믿는 사람답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차별화된 삶을 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이익집단처럼 보이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추한 집단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힘으로 거창한 구호를 말하지만 결국 그 힘을 이용하여 이익과 편리와 쾌락을 추구하는 당시 권력자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삶을 산 것입니다. 거대한 힘 앞에서도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주라를 사실을 믿고 증거합니다. 감옥에 가고 심각한 핍박과 불이익을 받는데도 힘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합니다. 거대한 힘에 의해 밀려가는데도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결과가 일어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 많은 사람이 주님께 돌아옵니다(4).

2) 힘 있는 자들이 인정합니다(13-14,16).

3)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1).

4)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합니다(31).

코로나19로 힘든 이런 시대에 우리와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회 신앙인과 한국 교회를 통하여, 세계 그리스도인과 세계 교회를 통하여 이런 축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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