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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받은 가정(3) 용서의 산실(창50:15-2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570 추천수:4 220.120.123.244
2020-05-17 09:29:55

은혜받은 가정(3) 용서의 산실

창50:15-21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은혜받은 가정”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첫 번 주제로 은혜받은 가정은 “꿈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받은 가정은 가정 식구들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는 꿈의 산실이 되어야 하지 꿈의 장례식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은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품고 꿈을 이루어드리는 가정을 만들어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는 은혜받은 가정은 “효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효로 복의 통로를 막는 가정이 아니라 효도로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잘 되고 생명이 길리라”는 말씀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것입니다. 개인이 잘되고, 가정이, 교회가, 세상이 잘 되려면 효도해야 합니다. 은혜받은 우리 성도님의 가정은 “순종의 효, 공경의 효, 봉양의 효의 산실”이 되어 참으로 복받은 삶을 사기길 바랍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은혜받은 가정은 “용서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입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가정에서 살면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가족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사랑으로 양육받으며 보호와 훈련을 받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부모이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의 양육방법의 미성숙으로 자녀들을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의 가혹한 체벌, 때로는 가정 안에서 성적 학대, 때로는 부모의 편애와 비난, 때로는 부모의 잦은 불화나 싸움 등으로 상처를 받고 마음에 증오심과 분노를 쌓아두고 살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 문제로 형제 간에 다투고 평생 상종하지 않고 마음에 배신감과 미움을 품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식의 불순종과 탈선, 부모에게 입힌 경제적 타격으로 평생 자식을 용서하지 못하고 한을 풀지 못하는 사는 부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이고 싶은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되어 버립니다. 미움과 분노, 복수의 독을 품으면 그 독이 자신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받은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분노, 복수심, 죄의식, 공포심, 우울증, 죄책감, 자기혐오, 자긍심 파괴, 정상적 인간관계의 단절 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면이 병들어 기쁨도 평안도 없어지고, 부정적 악감정들은 자라나 육체적 질병의 큰 원인이 되어 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복수한다면 시원할 듯하지만 응어리는 남고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일본에는 심료내과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심료내과를 찾아(나츠키 시즈코)>라는 책에는 3년간 원인도 없이 병원 치료로 낫지 않은 요통, 양쪽 귀를 드릴로 뚫는 듯한 통증, 경련과 함께 일어나는 발작성 딸꾹질, 6년 이상 낫지 않는 궤양성 대장염으로 수시로 나오는 혈변과 설사 등 기존 치료도 듣지 않는 불치병과 난치병과 괴병으로 치료받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심료내과에서는 먼저 환자들의 병의 심리적 원인을 찾는데 환자 배후에 숨어 있는 용서하지 못하는 과거의 상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암전문의 칼 사이먼튼 박사는 말기 암 환자 엘렌을 치유했는데 그녀는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를 준 어머니를 평생 원망하면서 살았답니다. 그녀의 분노의 감정은 몸의 병을 키웠답니다. 어머니를 용서하니까 거의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극심한 우울증을 겼었던 그녀는 차츰 밝은 모습으로 바뀌었답니다.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활력을 얻었고, 당연히 건강도 빠르게 호전되어 1년이 지난 후 그녀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답니다. 20여 년간 용서를 연구한 위스콘신대학 심리학과 로버트 엔라이트 교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 이혼 위기에 처한 부부, 암환자, 심장질환자 등 다양한 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용서를 실천한 이들이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병세가 호전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마약중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용서법을 배우고 실천한 이들이 기존 치료만 받은 이들보다 분노, 우울증, 걱정이 줄고 자부심이 높아져 재활 치료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영혼과 마음과 몸이 건강하기를 원하면 과거의 상처에 분노를 품고 살지 말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정을 용서의 산실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1. 은혜받은 우리 가정은 십자가의 용서로 의지적으로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니까 요셉의 형제들이 무엇을 요셉에게 요구합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라고 용서를 빕니다. 그들이 행한 것이 악이고 허물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악이나 허물이나 죄가 조금씩 의미는 다르지만 자신들의 행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인류 보편적인 양심으로 볼 때도 반인류적 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심한 양심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과거 가해자로 요셉을 미워하여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고, 죽이려고 했으며, 반인륜적 인신매매를 한 것이 악이고 허물이고 죄라는 것을 시인하고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들도 변명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그랬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을 사사건건 아버지에게 고자질해서 너만 없으면 행복할 것같아서 그랬다고 자기 합리화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네가 꿈을 꾸고 자랑하면서 우리를 우습게 보며 잘난체 하니까 미워서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성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너도 아버지의 편애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너의 어머니의 힘을 의지하고 얼마나 우리에게 가해를 했느냐고, 우리도 피해자라 복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해자로 피해를 본 요셉에게 진실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이 진정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2장 21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인생을 한때 추락하게 했던 가해자들을 만나 정탐꾼으로 누명을 씌워 아버지와 친동생의 소식을 듣기 위해 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때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절에 당시 맏아들로 살인에 대한 책임의 두려움으로 말리던 르우벤은 지금의 상황을 통탄하며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후회하며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만한 참회를 한 것입니다. 통역을 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 몰랐지만, 요셉은 다 듣고 있었습니다. 17살 때 자신의 옷을 갑자기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던 형들, 자신의 괴로움과 애걸을 듣지도 않던 형들, 자신을 구덩이에 두고 천연덕스럽게 식사를 하던 형들이 후회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의 아픔과 이국땅에서 외로움, 그리움 등이 섞여 감정이 복받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울 수 없어 홀로 피해 요셉은 울었습니다. 20년 동안 쌓인 원한이 눈물로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물론 과거에 대한 뉘우침만 있었지 동시에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의지는 없었지만, 그 후 완전히 변화된 형들을 보면서 이미 용서를 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자 공모하다가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주동한 유다가 아버지가 요셉의 친동생을 애굽에 보내려고 하지 않자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창43:9) 베냐민을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베냐민이 은잔 도둑으로 몰리자 유다가 과거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판 죄악의 댓가를 치른다고 고백합니다(창 44:16) 요셉은 유다가 얼마나 뼈저리게 후회하며, 뉘우치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더이상 예전의 유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친동생 베냐민의 죄를 베냐민만 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있는 베냐민을 과거 자신처럼 미워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본 것입니다. 창세기 44장 33절과 34절에서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올려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요셉을 팔아넘겼음을 회개했는데, 마음으로만 통회한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며 아버지가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베냐민을 동생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요셉은 한때 자신의 인생을 추락으로 몰고갔던 가해자 대표의 참회의 완성을 본 것입니다. 책임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도 약속하는 진정한 참회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참회하는 형들에게 다시는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힘들어 하지 않도독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용서하였음을 형들에게 창세기 45장 5절과 7절, 8절을 통해 거듭 강조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또 두려워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용서를 구합니까?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용서를 믿지 못하고 보복이 두려워서입니다. 아버지 때문에 형제 우애을 위해 이제까지 복수를 참고 있었는데 막강한 힘을 가진 요셉이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16절에 보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너무나 큰 신분상의 차이와 요셉의 보복이 두려워 자신들이 요셉의 형제임을 밝히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가장 낮은 자세로 그들은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버지가 정말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 요셉의 반응입니다. 그때 요셉을 어떻게 합니까? 17절 하반절에 보며 웁니다. 가해자 형들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의 눈물일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번 울었습니다(1절;42:24;43:30;45:14,15;46:29). 그는 의지가 강하고 매우 이성적이었지만 동시에 진실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형제들을 용서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45:4-8) 자신의 진심이 형제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하며 슬피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전해 주었을 때 울었다는 말을 형제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형제들이 직접 요셉을 찾아갑니다. 요셉이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 찾아간 것입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오자마자 과거 자신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요셉의 바로 앞에 무너지듯이 납작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요셉의 노예가 되겠다는 말이 아니라 요셉이 자신들에게 어떤 징계를 내리든지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어찌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대신 형들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자신이 절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대신한 심판자가 아니라 용서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족의 복수자로 자신을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보복할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판단할 권한도 정죄할 권한도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용서는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준 타인을 이해하고 복수나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생활하면서 억울함과 피해를 당하면 자꾸 자신이 정죄자 심판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의 티만보려고 합니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10:30)”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롱하며 채찍질하고, 못을 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3:34)”라고 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죄를 다 치루시고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가족이 아무리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을 지라도 예수님만큼 우리가 피해를 당하였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을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용서로 가족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자꾸 심판자, 정죄자가 되려 하면 가정은 용서의 산실이 아니라 심판의 산실, 정죄의 산실, 복수의 산실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때로는 가해자가 되고 때로는 피해자가 됩니다.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야 말로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란 이미 일어난 나쁜 일이 비록 나의 과거를 망가뜨렸을지언정 오늘과 미래는 결코 파괴할 수 없다는 ‘힘찬 자기 선언’입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분개하고 복수심에 불타며, 부정적 판단과 무관심한 행동을 할 권리를 십자가의 용서를 본받아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를 향해 예수님의 연민, 예수님의 관대함, 십자가의 사랑을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며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될 것이다(사1:18)."라고 했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2. 은혜받은 가정은 모든 과거를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으로 해석하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용서를 구하는 형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9절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악을 도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를 그대로 사용하시면서도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사 가장 선한 결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대로 사용하시면서도 요셉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형들은 더 이상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된 도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철저히 믿고 과거의 아픈 상처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사는 요셉의 진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고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처음 만났을 때도 무슨 말을 하는가 성경을 찾아 보십시오. 창세기 45장 5절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자신의 아픈 과거의 상처를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7절 8절을 보십시오.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 온 것이 형들이 인신매매해서 그 결과로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분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의 가정이나 저희 가정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가정입니다. 모든 과거를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을 용서의 산실로 만드는 비법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시145:17)"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은혜받은 가정은 가인처럼 가정을 증오의 산실로 만들면 안됩니다. 끝없은 악순환을 만드는 복수의 산실로 만들면 안됩니다. 누구도 이익이 없는 보복의 산실로 만들면 안 됩니다. 어떤 아픔도, 어떤 상처도, 어떤 분노도, 어떤 피해도 가정에서 다 용서되는 용서의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일어난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혼을 한 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이 나보다 먼저 떠난 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성폭행을 당한 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첫 사랑과 해어진 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부모에게 폭력을 당한 것도 과거의 일입니다.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은 것은 과거일입니다. 자식에게 상처를 받은 것 과거의 일입니다. 부모님의 사업에 실패한 것도 과거의 일입니다. 실수한 것도 과거의 일입니다. 그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중요한 것을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입니다. 잘 해석하면 그 과거는 보약이 되지만 잘 못 해석하면 그 과거는 독약이 됩니다. 잘 해석하면 디딤돌이 되지만 잘 못 해석하면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사건의 사실보다는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된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우리에게 나쁜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사건이 왜 나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이라면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숨은 섭리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알코올 중독이 된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숨은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그렇게도 구타했던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더 훈련시키고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족한 삶을 살라고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쁜 기억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의 재해석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높은 하늘을 오르는 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런 과정을 통과하게 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에 집착하지 말고 관점을 바꾸어 보고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마음아, 넌 누구니>를 펴낸 더공감마음학교 대표인 박상미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1970년대 산아제한 정책 때 셋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6개월이 된 뒤에 임신한 줄 알고 낙태를 하기 위해 어머니가 산부인과에 여러 번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묘하게 의사 선생님이 없어 결국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태아시절 무의식 중에 받은 충격은 마흔이 넘도록 따라다녔답니다. 어린시절부터 우울증을 앓았고, 신경정신과를 무수히 다뎠답니다. 24살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지난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상처 때문에 상담심리학을 공부했고 36세 때 박사 과정을 밟았고 독일 학술교류처의 장학생으로 뽑혀 독일에서 연구하였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입양인을 만났고 90%는 너무 힘들게 산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국에 돌아와 미혼모를 도왔답니다. 교도소에 가 있는 미혼모의 남편을 돕기 위해 재소자 6만명을 대상으로 치유방송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석하면 아픈 상처도 보약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픈 기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통증은 남습니다. 어차피 상처를 지울 수 없다면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불행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높이 올라가 있는 새처럼 전체적으로 삶을 조망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걷기를 배웁니다. 고통도 말없이 품으면 보석이 됩니다. 재목이 되는 나무는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봉우리는 작은 봉우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은 추운 겨울을 버티고 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3. 은혜받은 가정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정상적 관계를 유지하도록 용서하고 용서받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어떻게 용서했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그래서 이제’라는 번역이 생략되어 있는데 요셉은 이제는 확실하게 용서했으니까 과거에 얽매여서 공포에 떨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들과 형들의 자녀까지 기르겠다고 말합니다. 선으로 악을 갚는 것입니다. 화해는 쌍방이 함께 하는 행동이 따르는 것인데 이제 진정 화해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있는 요셉이 가해자인 형제를 보호하고 떠받들겠다는 것입니다. 형들이 못한다고 하더라도 형뿐 아니라 조카들까지 다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루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시작됩니다(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인에 대한 용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시고 다 잊어 버리시는 철저한 용서로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아름답고 행복한 새 역사는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이런 화해의 새 역사도 힘있는 요셉의 사랑으로 완성되어집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 3:13-14)."

인간관계의 허다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런 진정한 용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간의 문제도, 부부간의 문제도, 형제간의 문제도 이런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미움과 분노 가운데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제를 간곡한 말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욥셉의 용서를 통해 보여주는 용서의 마감입니다. 요셉은 가문의 구원자로, 예비된 종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인 자신을 80년 동안 애굽의 총리직을 수행하게 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힘을 가질 때 그 힘으로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여 사랑과 화평,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열두 형제야말로 당시 이 지상의 유일한 선민 언약 가문 그 자체였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가정의 평화와 우의를 해치는 것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진정한 참회와 피해자가 가해자의 참회를 수용할 수 있을 때 일어납니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자신도 과거로부터 해방되지만 가해자도 과거로부터 해방되게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요셉은 용서를 통해 야곱 가문의 가족 내 불화를 완전히 해소해 버렸습니다. 요셉은 용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용서 뿐 아니라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줍니다.

요셉은 얼마든지 형제들의 죄를 책망하며 군림할 수 있는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교묘한 방법으로 복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힘과 능력을 가지고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생계와 미래까지 책임을 져 주는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관계를 가지며 오히려 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화해를 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용서 못할 때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용서 못하는 자신입니다. 용서할 때 장 유익을 얻는 자는 용서하는 자신입니다. 용서는 자신의 심령에 깊숙이 박혀 있는 대못을 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가 먼저 용서하면 내 상처는 잘 치유가 되어 집니다. 본훼퍼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 할 수 없는 그와 나 사이 그 중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상처는 예수님께 맡기면 됩니다. 자신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면 덫만 더 납니다. 나쁜 기억과 감정을 없애려고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으로 채우면 됩니다. 더러운 물은 맑은 물이 흘러 들어가다 보면 맑아집니다. 성령 충만하여 기도하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평강,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로 채우는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받은 가정은 상처의 기억이 남은 인생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2015년 6월 17일 미국의 한 교회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요일 저녁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딜런 루프라고 하는 21세의 낯선 백인 청년이 들어와 권총을 난사해 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인들은 한순간에 남편을, 아내를, 딸을, 부모를, 그리고 목사님을 잃었습니다. 범인은 구치소에 감금된 채 화상으로 재판을 받으며 관행에 따라 법정에서 폐쇄화면으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발언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딸 네이든 코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갔다. 나는 다시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다시는 엄마 손을 잡지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을 용서한다.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신다면, 나도 당신을 용서한다." 할아버지를 잃은 손녀 엘레나 시몬스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와 다른 희생자들이 증오의 손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모두가 당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사랑으로 살았으며, 이번 사건도 사랑을 유산으로 남길 것이며, 증오는 결코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유가족들이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모아 발표했습니다. "경건한 크리스천으로서 증오범죄의 연쇄를 끊기 위해서는 죄를 용서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 순간 일어난 과거의 상처와 싸움에서 신앙인들은 승리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 교회 교인들은 더 단단하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결속하여 찬양과 감사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12:19-21)."

용서가 과거의 상처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하나님은 분노의 화염병을 품고 불행하게 살기 보다는 과거를 인정하며, 용서하고, 자신을 위해 타인을 용서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은혜받은 가정은 용서의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어린 시절 받은 상처로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까? 자식이 준 깊은 상처 때문에 자식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까? 형제를 통해 받는 피해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과거의 상처를 되새김질 하며 영혼과 몸과 마음이 병들어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가정입니다.

 

우리는 다 죄입니다. 고슴도치같이 서로 가까이 가면 찌르는 죄입니다. 내가 남을 찌르는 것은 쉽게 잊어 버리고 남이 나를 찌르는 것은 심령 깊숙이 박고 증오심에 사는 죄인입니다. 가슴 깊이 상처를 심어 놓고 짜증 나거나 언짢은 일이 있으면 온갖 형태도 추한 몰골을 드러내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설령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상처를 씻어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두 번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이방 왕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살인한 과거의 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 부하의 아내를 간음하였습니다. 그리고 충성스런 부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과거의 상처입니까?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치스러운 과거의 아픈 기억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가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부족함이 있는 가정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가정입니다.

은혜받은 우리 가정은 십자가의 용서로 의지적으로 서로 용서받고 용서하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받은 가정은 모든 과거를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으로 해석하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받은 가정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정상적 관계를 유지하도록 용서하고 용서받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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