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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앞에 나오면(5) 딸이 죽은 한 관리(마9:18,23-2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279 추천수:7 112.168.96.218
2018-06-17 17:04:08

 

예수 앞에 나오면(5) 딸이 죽은 한 관리

마태복음9:18, 23-26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어머니가 있었답니다. 외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아들에게 늘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 말고 조심하라고 가르쳐주었답니다. 누가 차를 타라고 하면 같이 타지 말고, 길거리에서 과자를 주어도 받지도 말라고 가르쳐 주었답니다. 아들을 믿음으로 잘 기르기 위해 교회에 열심히 보내고 무엇을 배웠는가 점검을 했답니다. 주일학교에 갔다 온 아들에게 오늘은 뭘 배웠는지 물었답니다. 그러자 아들이 "오늘은 모세 할아버지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해서,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하여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애굽 군인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그러자 어머니는 놀래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라고 반문했답니다. 그러자 아이는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믿을걸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장면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믿습니까? 전도를 하다 보면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를 걸어가며 폭풍을 잠잠케 하냐고 믿지를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신화, 우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후대 저자가 지어낸(fiction) 것이거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아득한 옛날의 전설(legend)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읽을 때는 사실적 사건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해석하여 의미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적 이야기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자기 입장에서 선별하여 채택한 후에 편집 작업을 하는 등의 문학적 작업을 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보다는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성경학자 슈트라우스 같은 사람도 예수님이 일으킨 오병이어의 역사는 사실이 아이고 다들 도시락이 있었는데 어린 아이가 내 놓자 이기적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도시락도 내놓아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그대로 믿지 말고 핵심은 기적이 아니라 사랑이니까 사랑의 교훈만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실(fact)로 보지 않고 의미(meaning)로만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실(fact)에 대한 정보(information)을 주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니라 의미(meaning)을 통한 변환(transformation)를 주기 위하여 쓴 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을 기록한 말씀이고 그것을 통해 정보도, 의미도 주고,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변화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병이어의 기적 정도야 믿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12살 먹은 야이로의 딸을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리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 성도님들도 이 땅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1. 예수 앞에 나오면 죽음 후에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온 한 관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와 보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 딸이 살아난 것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5장 41절에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리타"는 소녀야라는 말이고 "쿰"은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죽음을 정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오면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오늘 딸의 죽음 앞에 서있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에 보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강조하십니다. 죽음 앞에 두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린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영생하고, 죽음을 초월하여 사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는 분으로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앞에 나온 우리는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 믿으면 죽어도 산다는 이 믿음입니다. 인생의 최대의 난적은 죽음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해결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12살 소녀를 살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마가복음 5장 42절을 보면 사람들이 놀라고 놀랐습니다.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놀란 정도가 아닙니다. 황홀경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그 소녀에 우리 성도님의 이름을 넣어 고백해 보십시오. 지금 육신이 죽지 않았지만 혹시 영혼이 죽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열정이 죽어 있지 않습니까? 소명이 죽어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은 죽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손발이 죽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을 향한 용서와 사랑의 감정은 죽어 있지 않습니까? 죽어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께 나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가정도 일어서고 교회도 일어서고, 직장도 일어서고 기업도 일어서고, 사업터도 일어서고, 자녀도 일어서고, 나라도 일어서야 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수의 떡을 먹고 일어서야 합니다. 직분자로 죽어있지 말고 그 직분의 사명감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0:1절)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아무리 오래 되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고 해도 주님 앞에 나와 일어나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죽은 것 같은 앉은뱅이 신앙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게 해야 합니다. 나태와 게으름의 병에서 깨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야 그렇게 힘없던 아이가 그렇게 사회적으로 출세하다니? 초등학교 시절 꼴치만 하더니 야 그 애가 어떻게 박사학위를 받았어? 야 그 집안 꼴이 아니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되었지? 야 그 공장 망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되었지? 야 그 아이 시집도 못가고 장가도 못갈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좋은 가정 이루었지? 야 그 교회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교회 이루었지?" 예수 앞에 나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할 정도로 죽음의 상태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와 잘못된 신앙으로 나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는 나도 쓰러지고 다른 사람도 주저앉히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앞에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일어나고 다른 사람도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아무나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가버나움의 한 회당장입니다. "집회의 우두머리"입니다.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등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습니다(눅 4:13 ; 8:41 ; 행 18:8,17).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신분도 보장된 사람입니다. 뭐 부족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주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당시 어떤 분입니까? 목수의 아들입니다. 직업이 존경할 만한 분이 아닙니다. 랍비를 통하여 교육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 문제가 아니면 일평생 예수님께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12살 된 외딸이 병들었기 때문에(눅8:42),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한 딸이 역경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역경이 찾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고 위기가 찾아오고 어려움이 있을 때 예수님께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세 가지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는 한계를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려면 합리를 절대시하는 합리주의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딸이 죽게 된 문제를 가지고 젊은 예수님께 나아가 발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고,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면 회당장의 직책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가졌지만 예수님께 복종하겠다는 최대의 존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딸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나 체면, 명예의 종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지위, 부, 명예, 지식, 자존심, 위신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합리적 생각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데는 초합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관습과 합리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와 죽음을 초월할 신앙생활을 하려면 합리와 관습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합리를 절대시하여 합리주의에 종이 되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성보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시할 때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인간의 이성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한계를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려면 경험을 절대시하는 경험주의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경험해 본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소문을 듣고 믿고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발 앞에 엎드려 무엇을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절하면서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간곡히 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한 번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본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기도하면 났게 될 것이라고 교회에 나와 밤새워 기도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구태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험을 무시하는 비경험이 아닙니다. 경험을 초월하는 초경험입니다. 경험을 절대시하니까 초월적인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만 절대시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영동 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이며 한양대 교수인 이강평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어릴 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으로 예수님을 만나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꿈이 생겼답니다. 그의 꿈은 목사와 박사가 되는 것이었답니다. 사람들은 소년이 자신의 꿈을 말할 때마다 비웃었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배구실력을 인정받아 운동선수로 중학교에 편입했답니다. 그리곤 학업에 정진하여 한양대에 진학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답니다. 여섯 번을 낙방하였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노력했답니다. 드디어 일곱 번째에 합격해 유학길에 올랐답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에겐 작은 성경과 7달러가 전부였답니다. 낯선 환경을 극복하고 하루 20시간씩 공부한 그는 미국에서 목사와 한국 최초의 체육학박사라는 소원을 성취했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답니다. 날개의 힘으로 나는 새와 바람의 힘으로 나는 새들입니다. 참새나 메추리 같은 새들은 날개의 힘으로 나는 새들입니다. 이런 새들은 빠르고 분주하게 날갯짓을 하지만 지쳐서 멀리 그리고 높이 날지는 못한답니다. 그러나 바람의 힘으로 나는 독수리나 갈매기는 바람과 기류를 따라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간다고 합니다. 내 힘으로 못하는 것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세계가 열립니다. 낙엽도 바람을 타면 강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한계를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려면 과학을 절대시하는 과학주의의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했습니다.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는 과학을 신앙으로 삼게 만들어 버립니다. 증명되는 것만 믿겠다는 과학신앙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믿음은 비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초월하는 초과학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요구하였습니까?(18) 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맞는 것입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 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수만 하면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을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과학을 절대시하니까 초과학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학의 한계를 초월하여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과학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과학도 하나님이 만든 것입니다. 과학의 법칙을 만든 하나님은 과학의 노예가 아니십니다. 과학의 법칙을 초월하여 세상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딸의 죽음 앞에 서있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에 보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강조하십니다. 죽음 앞에 두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인생 생사화복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린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

 

3. 예수 앞에 나오면 회의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간구하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일어나 자기 집으로 갑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이제 살았구나,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열 두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으로 인해 지체됩니다. 그 때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막5:35) 당신의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소망도 기대도 다 살아졌다는 것입니다. 혈루증에서 치료받은 여인과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더 악화된 사건입니다. 나사로 때도 주님이 지체하여 나사로가 죽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질병이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는데 더욱 사업은 망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교회는 점점 더 기울어져가는 것입니다. 가정을 회복시켜 달라고 했는데 가정은 점점 망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일을 더 악화된 상태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욥이 더 악화된 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은 바로 치료시켜 주시기 않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최악의 상태로 갈 때까지 하나님은 침묵하였습니다. 다윗도 망명하여 미친 사람처럼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은 침묵하였습니다. 모세가 처가살이하면 40년을 살아가는데도 침묵하였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나왔는데 결국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간구하였는데 왜 내 딸이 죽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겸손이 매달렸는데, 그렇게도 몸부림쳤는데 왜 딸이 죽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신앙적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고쳐주시면서 지체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내 딸을 고쳐 주실 수 있었을 텐데 왜 지체하여 내 딸을 죽였느냐고 감정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와서 무릎 꿇고 빌었는데 어떻게 내 딸이 이렇게 죽습니까하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어디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끝났다고 훤화하며 심히 통곡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니까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회당장이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간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헛소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교회를 떠나버리고, 주님을 멀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회당장 집에서 딸의 죽음을 알려 온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으니 예수님을 더 이상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예의를 갖추고 합리적 판단에 따라 대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풀려고 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적으로 대처해야합니다.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야이로를 통해 볼 때 세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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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회의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보고 끝이라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잔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회의적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회의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역경을 끝으로 보지 않고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보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울며 통곡하며 심하게 떠들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자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끝이라고 생각하면 야이로도 회의적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역경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회의적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년 동안의 고난의 과정, 기다림의 과정, 회의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인신매매가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성추행범으로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신을 죽이려는 장인에게 쫓겨다닙니다. 친구에게 아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기까지는 20여년 동안 수많은 역경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스키너는 50명을 두 집단으로 나눈 후 A집단은 편하고 안락한 환경을 조성해주었고 B집단에게는 불편하고 부족한 환경을 조성해주었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6개월의 일상생활을 하게 한 후 마인드와 능력을 측정한 결과 의미 있는 데이터가 나왔답니다. A집단은 처음보다 5점이 떨어졌고 B집단은 8점이 상승하였던 것입니다. 이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좋은 조건보다는 불리한 조건에서 단련받은 사람의 성공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초반 스탠포드대학 생물학자로 버트 샤폴스키는 막 태어난 일부 쥐들을 21일 동안 매일 작은 우리 속에 15분 정도 격리를 시켰답니다. 그리고 15분 뒤에 다시 어미에게 보내주었고 이를 격리 경험을 겪지 않은 다른 쥐들과 비교해 보았답니다. 실험결과 일시적 격리 현상을 경험했던 쥐들은 성장하면서 더 모험적이고 더 용감했으며 스트레스에 덜 민감하게 자라났답니다. 그에 비해 분리경험이 전혀 없는 쥐들의 경우에는 성장하면서 스트레스에 민감하여 자주 놀라는 일이 있었답니다. 즉, 삶에 있어서 적절한 좌절과 자신의 능력에 맞는 스트레스를 경험한다는 것은 역경극복의 힘을 기르는 필수요소라는 것입니다. 비바람과 눈보라 맞고 자란 들풀이 온실에서 자란 꽃보다 생명력이 강합니다. 생명에게 불편함이 없는 좋은 환경이란 독과 같은 것입니다. 식물은 가물고 바람이 불어야 그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려 더 큰 비바람과 가뭄에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투루먼은 서른여덟에 많은 빚을 지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실업자였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그가 치룬 전쟁 중에서 2/3는 패배했습니다. 발명가 에디슨은 너무나 공부를 못해서 선생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자퇴할 것을 종용했다고 하며, 영국의 영웅 처칠수상은 소학교 졸업까지 지친아들의 특수반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포기했다면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하나님의 침묵을 회의로 받아들이지 말고 과정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셋째, 회의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어떤 비웃음이 있다하여도 지속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잔다고 하자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마가복음 5장 36절 한 번 큰 소리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현재형으로 흔들리지 말고 네가 처음 내게 가졌던 믿음을 지금도그대로 굳게 간직하라는 말입니다. 지속적인 믿음으로 회의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성도님과 저에게 들려주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절망적 소식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에게 희망을 선포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입니다(롬 4:20, 21).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장애물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신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도 우리 주님은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는 것입니다. 내 앞길이 어떻게 전개된다고 해도 우리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님의 사람으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극한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딸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기다림에 쉽게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120년, 아브라함에게는 25년, 모세에게는 40년이라는 때가 필요한 것입니다. 역경도 또 다른 옷을 입은 축복의 도구입니다. 금광석은 용광로에 들어갔다 올 때 가치 있는 금으로 탄생합니다. 전쟁이 영웅을 만들고, 경제적 위기가 부자를 만들고, 역경을 통해 참 신앙은 증명되는 것입니다. 역경을 통해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된 것입니다. 게바가 역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 가정에 야이로의 딸이 있습니까? 가정에 갑자가 불행이 다가왔습니까? 그것이 질병입니까? 심각한 죄입니까? 죽음의 공포입니까? 이혼의 위기입니까? 쓰라린 마음의 상처입니까? 자존심하게 하는 초라한 가난입니까? 해결할 수 없어 잠 못 들게 하는 무거운 부채입니까? 아무리 해도 끝없이 다가오는 환난입니까? 의미를 잃은 방황입니까?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중독입니까? 아무리 화해하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가족 간의 갈등입니까?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깊은 상처입니까? 거듭되는 실패입니까? 실업입니까? 사고입니까? 삶의 풀리지 않는 응어리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심각한 문제일지라도 해결 받고 행복해 집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이 시간 죽은 12살 소녀에게 “달리달굼, 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해 주었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난 것처럼 죽음 같은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 만나 믿음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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