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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되는 오직 한 길, 믿음(갈2:11-1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983 추천수:4 112.168.96.218
2018-02-04 16:46:13

 

의롭게 되는 오직 한 길, 믿음

갈2:11-16

 

지난주에 현직에 있는 한 여검사가 8년 전에 당한 성추행을 폭로했습니다. 동료 검사의 부친 상가 집에 갔는데 2010년 10월 30일 법무부장관을 수행하러 온 만취한 검사에게 강제 추행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방송에 나와 폭로의 동기에 대하여 가해자가 최근 종교에 귀의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폭로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용서와 회개는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검사는 2017년 10월 말 서울 모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 때 세례 받은 사람 대표로 약 5분간 교인들 앞에서 간증을 했는데 검사들에게 돈 봉투를 살포한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는데 그는 교회에 다니는 아내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찬송과 기도 성경말씀을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 교만에 대해 회개하니 저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영접할 기회를 주었고, 교만을 회개했으며,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길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처음 느낀 억울함과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주시고, 제 교만을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진정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믿음없이 교만하게 살아온 죄 많은 저에게 이처럼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신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 기사 밑에는 험악한 댓글이 실렸습니다. 그 중에 욕설이 안 들어 간 댓글에는 “하늘에 전화하니까? 죄 사해준 적이 없다네.” “걸레가 물 몇 방울 묻힌다고 행주 되간?.” “예수는 가해자를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피해자만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저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가해자는 회개하고 구원받았다고 하니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누굴 용서하냐고 그 검사와 교회를 같이 비난하는 글들이 실렸습니다. 그런 비난에 대하여 교회는 “교회에서 세례받은 성도로서 과거에 불미스런 사건의 가해자였다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죄받는 행동을 보이도록 권면하도록 하겠다.”라고 해명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는 그 검사의 간증에 대해 "그의 거짓 간증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며 한국교회를 모독하는 일이다. 회개와 구원을 면죄부로 둔갑시켜 자기 허물을 은폐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는 건 더욱 큰 죄를 짓는 행위일 뿐이다"라는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어느 언론은 그를 미행하여 담배 피우는 장면을 찍어 보도하면서 지난날을 회개하면서 아직 담배를 끊지는 못했나보다 비판하며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런 분은 교회에 나와 예수 믿고 세례 받을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1. 우리가 의롭게 되어 천국 가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행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이란 하나님의 계명 전부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행위란 그 것에 순종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수단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명하는 것 모두 해야 하고 율법이 금하는 것 모두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등과 같은 10계명을 다 지켜야 합니다. 15절을 보세요. 우리는 바울 뿐 아니라 베드로 바나바 그리고 유대인 모두를 말합니다.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이 아니었고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지만 그들 역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면 아무도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킨 수 없습니다. 인간은 조금 선한 행동을 하면 자신은 대단히 의로운 체 하며 댓글을 달며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

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이런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보십시오. “믿음으로”를 세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번 나온 의롭게 되는 것은 문법적으로 수동태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디카이오스(의롭다)”라는 단어는 법정적 용어로 하나님이 재판장으로 판결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기독교 구원의 진리는 간단명료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앞에 인간이 온전히 항복한다는 면에서만 간단명료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으니 예수님이 대신 인간을 십자가에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의롭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의를 인간에게 부여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사람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내부의 의를 개발하여 절대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외부적인 낯선 의인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어야 합니다. 결혼하면 신분이 남편이 대통령이면 영부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입니다. 우리가 의를 소유한 것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모두 성취하신 의로 의롭다 칭해주어 신분적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값을 지불하셨고 온전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다 만족시키심으로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소개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 10:45)”로서 죄인을 위한 “속량의 값(롬 3:24)”을 치르심으로서 “화목제물(롬 3:25)”이 되셔서 우리로 그와 더불어 “하나님과 화평”(롬 5:1)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윤리적으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진리를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살았던 이 사실으리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기준으로 하는 절대적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기준으로 하는 상대적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롭다 칭해주시는 절대적 의는 우리의 선행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롬 3:21)” “일한 것이 없이(롬 4:6)”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언약에 의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해 스스로 악인이지만 예수 믿는 자들을 사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면의 범위는 과거, 현재 심지어 미래에 지을 죄 까지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말씀합니다. 의롭다는 말은 헬라어 문법적으로는 부정과거 형태로서 단회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후크마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의롭다 하실 때는 그 사람의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하신다고 말하는 데 있어 어떤 반론도 있을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회적인 것처럼 죄인이 이신칭의 받는 것도 단회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신 죄인을 향하여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롬8:1).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잘 못하면 계속 고자질을 합니다. 네가 정말 의로운 사람이냐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면죄부를 사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행위 구원을 반대한 것입니다. 국회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지만 한 영주의 숨겨주어 그 성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 앞에 사탄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답니다. 그리고 큰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쓴 글을 들고 와서 마틴 루터에게 보여주었답니다. "이게 바로 너의 과거의 죄야. 네가 이렇게 많은 죄를 저질렀는데 네가 무슨 종교 개혁자야. 너 자신이 죄인인데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어." 하면서 마틴 루터를 끝없이 조롱했답니다. 마틴 루터가 그 말을 가만히 들으니까 힘이 빠지고 용기를 잃고 나약해졌답니다. "맞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어. 난 안 돼." 이런 절망감 속에 마틴 루터가 자주 빠져들었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마틴 루터는 열심히 신약성경부터 번역하였던 어느날 루터 마음속에 로마서 8장 1절 말씀이 떠올랐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루터는 그날도 자기를 조롱하는 사탄에게 잉크병을 들어서 마귀를 향해서 집어던졌답니다. "그래 난 죄인이야. 그러나 주님은 바로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어. 난 이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야!" 그러니까 마귀는 사라지고 잉크병이 벽에 부딪쳐 깨어지면서 얼룩이 졌답니다. 지금도 바르트부르그 성의 루터의 골방에 들어가 보면 나무 벽에 그때 루터가 던진 잉크병 때문에 얼룩이 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이사야서 1장 18절)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신분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의 행위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공로나 의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부부가 남남 이었지만 결혼 서약을 통해 법정적 부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가 어떻든 결혼하면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 권리와 책임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하면 과거와 상관없이 군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분이 변하는 것입니다. 거지가 왕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어릴 때 왕자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하와 같이 가서 아들을 찾습니다. 저작 거리에 가보니 거지가 되어 품바타령을 하며 춤을 추는 아이가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자신을 닮았고 뒤통수에 점이 있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자기 아들입니다. 그를 대려다 왕자로 삼았습니다. 신분이 거지에서 순간적으로 왕자로 변한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군인이 되고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주는 것은 이런 순간적 신분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상태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닙니다. 군대에 갔다고 바로 군인이 군인다워집니까? 결혼했다고 부부가 부부다워집니까? 거지가 왕자가 되었다고 왕자다워집니까? 담배도 피고, 술도 먹고, 거리에 자기고 하고, 놀음도 하고, 성추행도 하고, 성폭행도 하고, 여전히 도둑질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왕자는 왕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값싼 복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코 값싼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은 싸구려 바겐 세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칭의 입니다. 인간이 당해야 할 그 모든 고통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당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칭의 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누구에 있냐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3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둘째는 사람이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한 사람이든, 성추행 한 사람이든, 살인자든 남편을 5명 둔 사람이든 과거 어떤 죄를 지었든 주님 앞에 나와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그 죄를 용서해주신 구세주로 영접하면 누구든지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법정적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깨끗한 사람 의로운 사람 구별하여 부르지 않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죄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도 넓은 가슴을 열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이신칭의를 면죄부로 삼고 성추행을 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마음대로 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면 신분이 바뀐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왕자가 되었으면 왕자답게 살아야 존경을 받고 왕위에 올라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거지 때처럼 거리에 오줌 싸고, 누더기 옷을 입고 구걸하며 거리에 뒹굴며 쌍욕을 하고 살면 그 누구도 그를 왕자라고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베드로를 보십시오. 11절을 보십시오.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인 안디옥 교회에 왔습니다. 이 교회는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가 같이 다녔습니다.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바울이 책망하였습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본래 유대인은 음식을 먹을 때 정결한 것만 먹어야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정결 음식법을 '카셔루트'(being kosher), 그리고 그 규정에 적합한 정결한 음식을 '카셰르'(kosher)라 하는데, 그 성경적 근거는 신명기 14장 3절에서 21절입니다(레위기 11장에도 나옴). 원칙에 따르면 짐승의 경우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만 먹을 수 있고, 물고기의 경우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을 먹을 수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아주 금기시하고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습니다.(신명기 14장 21절)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 기독교 신자와 함께 식사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부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이 사건 오래 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세 차례나 보여 주며 확신을 주며 하나님은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초대에 응해 교제를 했었습니다,(행10장)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이방인에게 할례 같은 율법의 규정을 부과하지 말라고 결의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행15:20) 외에는 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이방인과 식사를 한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했다는 것은 문법적으로 미완료 시제로 이방인들과 함께 계속 식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식사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다 피해 버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을 보고(12) 그랬습니다. 여기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입니다. 당시 일차 예루살렘 공의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 신자들은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유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 인간이 연약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지만 믿음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특별히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라고 말했는데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부활을 체험하고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이 베드로를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단호하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하고 신앙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서 신앙인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외식하며 위선자가 된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람의 연약성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비겁하게 사람들 눈치 보느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참 연약하여 쉽게 넘어집니다. 다윗같이 강직한 사람도 여인 앞에 넘어져 간음하고 살인하였습니다. 한 때 바울도 마가의 문제로 자신을 그렇게 위해 주었던 바나바와 다투고 해어졌습니다. 모세같이 40년 동안 왕궁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인하고 도망자가 되어 40년 동안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첩을 두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솔로몬같이 지혜가 뛰어난 사람도 수많은 궁녀를 거느리고 살아 보았자 별 것 아닌 데 실 것 즐기다가 노년에서야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인간의 연약성을 온전히 벗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끝없이 실수를 반복하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고백하고, 통회 자복할 뿐 아니라 돌이켜 다시는 그런 길로 가지 말아야 하지만 이렇게 했을 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성추행 검사 사건처럼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가 재판장이 되고 검사가 되어 고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도 변호사로 다가갑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둔 여인에게도 변호사로 다가갑니다.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세리에게도 변호사로 다가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사건을 보면 재판장이나 검사가 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고 그 자리에 가지 않고 그런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서지 어쩌면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런 자리 그런 환경 그런 조건이 주어지면 더 악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만 먼저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은혜 아니면 우리도 쉽게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남의 허물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금식수련회를 했답니다. 프란시스가 특별히 제자들과 함께 금식하면서 수련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냥 했으면 좋을 텐데 가운데다 잘 쑤어진 팥죽을 놓고 금식을 합니다. 아마 '에서의 정욕을 이기자'는 뜻일 것입니다. 이틀 지나고 사흘 지나고 나흘이 지납니다. 그런데 수련생 중에 들어온지 며칠 안 된 젊은 수도승이 너무 배가 고파 팥죽을 퍼서 먹었답니다. 그 때 프란시스는 참 안됐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그 주위를 둘러보니까 함께 수련회에 참가했던 제자들이 이 실패한 사람을 향해서 잔인하게 모멸감으로 꽉 찬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는 더 당황했답니다. 그리고는 얼른 가서 자기도 같이 떠 마셨답니다. 기독교는 계율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 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갇혀 사는 정죄의 종교가 아닙니다. 죽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종교가 아니라 죽은 자를 부활시켜 살리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사랑의 종교, 용서의 종교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 충만도 입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하여 삼천 명, 5천명을 회개시킨 능력의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 삶을 살았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사람입니다. 관원들에 온갖 곤욕을 치르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기도하여 감옥문을 나온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핍박 가운데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사람이 왜 이 사소한 것에 실수를 했겠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순간적으로 할례자를 두려워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주류입니다. 아직 바울은 비주류 신앙인입니다. 지금 다수파는 이방인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인 기독교인입니다. 흠이 잡히는 그는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지도적 지위가 흔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 교단 총회에서 파견된 감독들이 오자 평소와 달리 그 사람들 기분을 맞추어 주는 행동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이런 위선을 통해 베드로가 자신의 신분, 위치, 특권을 유지하려 한 것에서입니다. 잠시 동안에 하나님보다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고 순간적으로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즈음 한 때 유명했던 목사님들이 자식에게 편법을 통해 교회를 물려주는 모습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조롱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이 좋다는 사람도 타락한 본성으로 고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더 추하고 교묘하게 흉악하고 더러운 죄를 짓는 것을 봅니다. 복음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주시기까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과는 달리 믿는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감옥에 갇혀 어느 정도 위치를 점하면 그것을 자식에게 남겨 주는 것이 교묘한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아담 이후에 하나님을 제치고 스스로 높아지고 싶어하는 본성은 죽을 때까지 여전히 놀이 공원의 두더지처럼 망치로 두들겨 패도 다른 곳에서 고개를 들고 솟아오릅니다. 언제 어디에서 튀어 나올지 모릅니다.

남 욕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 오면 교회야, 하나님 나라야, 회사야, 가족이야, 국가야 어떻든 나 살고 보자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믿는 대로 잘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나 삶의 현장에서 그 믿음을 실천하는 데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고 총회결의와 십자가 복음과 전혀 동떨어진 행동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이 탐욕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자기를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믿으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면죄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행함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성화가 되지는 않지만 점점 성화가 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삶의 현장에서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마음대로 살면 안 됩니다. 역사상 복음을 세상 종교나 인간 사상과 혼합, 왜곡, 타협, 대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신칭의 교리가 한국교회를 타락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방종 라이센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한 번 구원받았으니 천국은 당연히 가는 것이니까 그 후 제멋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거룩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탐욕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신앙인들은 그런 비판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이신칭의를 방종의 면죄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왕자가 되면 왕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성화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면죄부처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믿음이 방종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그 자유가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고, 자동차가 도로를 벗어나며, 비행기가 하늘을 벗어나는 것 같은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우리는 이렇게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베드로를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동조화입니다. 원리적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교인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세속적인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남은 유대인들이 그와 같이 외식을 합니다. 목사님도 동성애를 주장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도 그 목사님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와 함께 견고히 섰던(1,9) 바울의 믿음직한 동역자 바나바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땅을 다 팔아 내놓고 오직 복음을 위해 살면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된 믿음이 좋은 바나바도 흔들입니다.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 안디옥 교회들이 동조를 하는 것입니다.

애쉬라는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실험인 것입니다. 6명이 원탁에 앉아 긴 선과 짧은 선을 그려놓고 어떤 선이 기냐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5섯명은 미리 짜가

짧은 것이 길다고 이야기하게 합니다. 5섯 명이 계속 작은 것을 길다고 하면 여섯 번째 사람도 자신도 모르게 심정적으로 틀린 것같이 보이는데도 다섯 사람과 같이 짧은 것을 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 사람이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동조현상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응종을 한다는 것입니다. 고문 기술자가 되면 그것이 옳고 그름인가를 판단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그 일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고문에 열중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적폐 청산이라고 걸려든 많은 공무원들이 그런 종류일 것입니다. 그 중에는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힘 앞에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다수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동조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무엇이가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갑니다. 장로님이 목사님을 비난하면 집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도 동조를 합니다. 다수가 가면 자신도 모르게 다수가 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언론이 성추행 검사를 막 비난하면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고 신앙으로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같은 편이니까 진영논리에 따라 무조건 동조하는 것입니다. 같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 편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바른 복음은 생각하지 않고 같은 편이라는 것에 따라 무조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친한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잘 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친구 따라 강남을 가는 것입니다. 집단으로부터 배척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동조하는 것입니다. 집단 압력에 따라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순교자적 자세로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개혁자이고, 지도자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애썼던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의 면전에서 베드로를 면책합니다. 인생선배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당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베드로가 비난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자 앞에서 공공연하게 베드로 책망(14)합니다. 책망을 한 핵심이 무엇입니까?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드러내 매도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할례와 모세의 정결법은 이미 완전히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부분에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려야 하는데 베드로는 이미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이방인처럼 모세의 율법에 구속 받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런 행동은 마치 이방인들로 하여금 억지로 유대인처럼 살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아주 깊은 마음의 상처를 심어준 것은 둘째 치고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전도할 것이냐고 호통 친 것입니다.

자신보다 먼저 된 사도(1:17)이고 교회의 기둥(9)처럼 쓰임 받으며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베드로를 택한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는 조용히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공적으로 드러냅니다. 왜 바울은 그의 면전에서(11) 모든 자 앞에서(14) 정면으로 그것은 복음을 믿는 바른 신앙적 행동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냈겠습니까?

성미가 급해서일까요? 혀를 억제 하지 못해서일까요? 논쟁을 즐기는 자여서일까요? 자기 잘낸 체 하려고 그랬을까요? 그의 도덕적 흠을 드러냄으로 기회를 보아 베드로의 체면을 깍고 자신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문제는 하찮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신학적 문제이고 복음 진리의 핵심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리 중의 중요한 문제로 이미 바울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해 버리면 교회는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로 분열될 것이고 구원의 방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를 스스로 무효화 시키고 나아가 율법을 지키길 요구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정해주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베드로도 구원의 방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를 얽매었던 그 사망의 사슬과 죄의 사슬, 율법의 사슬을 끊어주셔 참 자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도덕적으로 조금 더 정결하게 나느냐 부정하게 사느냐? 조금 더 타인을 위해 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자선을 많이 하느냐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누구를 믿는냐? 어떤 예수님을 믿느냐가 본질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알고 사도 베드로도 알고 이방인도 알고 유대인도 아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온전한 복음으로 권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것을 베드로 당신도 믿었고 바나바 당신도 믿었고 그리고 나도 다메섹 도상에서 그 예수님을 만나서 믿었습니다. 이 진리는 모든 세상을 향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율법 몇 개를 지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그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고 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믿음대로 살려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10명의 황제가 신앙인을 죽였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만도 60명 내지 100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각양 형벌의 언도를 받고, 아내와 어린이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답니다. 십자가형, 화형, 태형, 굶주린 짐승에 의한 순교당하는 것은 오히려 약한 편에 속할 정도였답니다. 몸을 묶인 채, 조개껍질로 살을 도려 내 죽이는데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기름 가마에 넣기도 하고 여인들은 한 다리를 꺾이고 옷이 벗겨진 후, 알몸으로 높은 곳에 달려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순교의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 중 가장 센 것들을 한꺼번에 휘게 하여, 그 하나하나에 손발을 결박한 후, 그것을 동시에 놓음으로써,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져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복음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죄를 무너뜨리고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단순한 면죄부가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믿음이 고난도 유혹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유혹이 있을지라도 믿음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주 오래전 성수대교 참사로 딸을 잃은 집사님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94년 10월 21일 아침 다리를 건너다 숨진 32명 가운데는 서울교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1세의 이승영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그의 평소 유언에 따라 병원 해부학 교실에 기증하였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육사 26기인데 대령으로 육군 군수사령부 작전처장으로 일하던 중 47세의 나이로 부대 내에서 과로로 숨졌답니다. 남편을 잃은 지 1년 만에 딸을 또 잃었답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답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했던 딸의 유품을 정리한 어머니는 딸의 유작시 1백 20여 편을 모아 시집으로 출간했습니다. 어머니는 또 딸의 비망록에서 '내가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이라는 제목의 '14가지 소원'을 발견했답니다. 신앙심을 갖고 봉사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늘 되뇌던 딸은 ⓵장학금 제도를 만든다 ⓶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 "…⓷한명 이상 입양한다…"… ⓸맹인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⓹재활시설을 포함한 복지마을을 만든다는 등의 삶의 목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딸의 소망을 대신 이루기로 결심한 어머니는 8평짜리 아파트에 살면서도 국가보상금 2억 5천만 원 전액을 기부해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답니다. 봉사의 삶을 살려는 가난한 신학도들을 교단. 교파를 초월해 지원하는 이 장학회의 도움으로 38명의 목회자가 탄생했답니다. 강원도 산간 곳곳을 돌며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줄 '승영 이동도서관'이 만들었답니다. 남서울 교회에 다니는 김집사님은 딸의 장례식이 끝나자 부의금 전부를 들고 목사님을 찾아가 소중한데 써달라고 맡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집사님이 대단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바른 복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 안에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사랑하는 딸의 시집을 냈을 때에 그 시집 서문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나는 1년 사이에 남편과 딸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차지했던 자리가 컸던 만큼 내 슬픔과 절망도 컸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슬픔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계셔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나 자신도 놀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믿음으로 예수님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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