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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갈2:2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8814 추천수:7 112.168.96.71
2017-04-09 10:49:29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

갈라디아 2:20

 

지난 주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두 번째 강국이라는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이 미국에서 회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환영 만찬을 베푼 직후, 시리아에 미사일 공격을 했습니다. 이유는 레드라인(Red Line)을 넘었다는 것입니다. 국제전쟁법규 상 민간인을 보호해야 하는데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내전 종식을 위해 무차별하게 민간인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북한도 레드라인을 넘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한계선을 말하는 레드라인(Red Line)과 유사한 말로 과학 기술 분야에서는 싱귤러 포인트(singular point·특이점)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은 100도씨에서 0.1도씨만 모자라도 끓지 않는데 0.1도씨가 더해지면 폭발하듯 끓어오릅니다. 이것을 싱귤러 포인트(singular point·특이점)라고 합니다. 이제 기계가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발명하기 때문에 최고의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면 인간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명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의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PANTS라는 영어 약자로 예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이며(personal), 흥미본위로 살며(amusement), 자연스러움을 좋아하고(natural), 성별구분이 모호하며(trans-border), 극단적 자기사랑(self-loving)으로 살기를 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경제적 용어로 티핑 포인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어떤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극적으로 바뀌는 시점을 임계점이라고 하는데 어떤 상품이나 아이디어가 균형을 유지하던 상태에서 균형을 깨고 한 순간에 전파되는 극적인 순간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시점을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터닝 포인트는 우리의 인생(삶)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지금까지와의 삶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하나의 계기(기회)를 말합니다. 인생살이에는 누구가 이런 레드 라인, 싱귤러 포인트, 티핑 포인트, 터닝 포인트들이 있습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념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십자가는 사탄에게는 레드라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생에 있어 싱귤러 포인트, 티핑 포인트,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역사를 B.C.와 A.D.로 갈라 놓는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겠습니까?

 

1.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문법적으로는 완료 수동형입니다. 과거 어느 때에 십자기에 못 박혀서 지금까지 못 박힌 상태로 있다는 말입니다. 단회적 사건으로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5:24; 6:14절에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19a)”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라(19b)”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느니라”라고 병행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 효력은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3장 13절을 보면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도 거기서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죄인인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우리가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겠습니까?

그 답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을 했습니다. 내가 협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법을 다 적용받습니다. 우리의 후손들도 다 적용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건물의 벽돌(엡 2:19-22; 벧전 2:4-5)처럼, 포도나무의 가지(요 15:1-8)처럼, 한 몸의 지체(엡 4:15-16)처럼, 결혼한 아내(호 2:19)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삽니다(엡 2:5-6).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내 자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갈라디아서 5:24절을 보십시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고 하였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롬 8:8)고 하였습니다. 바로 거짓된 자아, 옛 자아,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옛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죄에 속한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물세례로 이미 십자가를 통해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죄 속에 살다 지옥에 갈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자세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10절에서는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이요” 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여길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참 신앙인인가 거짓 신앙인인가를 분별하는 첫 번째 요소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부자는 ‘내’란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사용하면서(눅 12:17-19) 자신의 부와 공로를 과시합니다. 자기가 죄된 자아가 죽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며 주인입니다. 옛 사람의 특징은 나 중심 생활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십가에서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는 나의 포로가 된 사람입니다. 자기 의로 살았고 자기 힘으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변했습니다. 본문에서 ‘나’라는 단어를 계속 반복하여 사용하고, 앞뒤 문맥에서는 열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그런데 예전의 나가 아닙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내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내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하던 자였습니다. 당시 인도주의적 범신 사상이 스토아 철학을 안 사람입니다. 물질을 숭배하는 에피규리즘, 냉소적 회의주의를 안 사람입니다. 그런데 초라한 나무 십자가를 체험하고 지금 어떻게 변했습니까? 자기를 주장하며 "복음을 변하게 하고"(1:7), "교회를 혼란시키는"(1:7, 5:10, 12) 사람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나”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이 되어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자는 교회는 다니고 직분은 받았지만 교인일 따름이지 아직 신앙인은 아닙니다. 인간은 욕심덩어리리라 쉽게 에고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죽은 자신은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떤 고백을 합니까?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노하고 속상해 하고 방탕하고 자존심 상해하고 고집부리던 옛사람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롬6:11)” 이미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속상해 하던 옛 사람 죽었습니다. 상처받아 고통스러워하던 옛 사람 죽었습니다. 밤 잠 설치게 하는 원한과 분노로 가득 찬 옛 사람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의 무능을, 무능력을 깨닫고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나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모든 생명의 호흡과 힘이 내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내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기를 쓰고 일어나니까 가정이 불행해지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옛 자아가 죽은 것을 인정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아납니다. 시퍼렇게 살아서 칼부림을 하니까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니까 가정이 죽고, 자기 잘난 맛으로 교회 생활하니까 교회 불행해지고 사회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죽고 나면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저질이라고 모욕을 주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 내 옛 자아 십자가에 이미 죽었어” “그래 나 고집불통, 내 교만, 내 욱하는 성격 다 십자가에서 죽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 자아가 죽어야 죄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행위를 가지고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2.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과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나의 현재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됩니다. 삶의 주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사실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옛 자아가 죽은 마음에 누가 사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신앙인이가 가짜 신앙인인가를 분별하는 두 번째 기준은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가? 아니면 내 안에 다른 것이 살아서 역사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물질이 살아서 주도권을 잡고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쾌락이 살아서 주도권을 잡고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자아가 자신의 왕이 되어 주도권을 잡고 횡포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전의 바울이 더 나은 바울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내가 더 낳은 나로 변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업을 해도, 운동을 해도, 공부를 해도, 취업을 해도, 운전을 해도, 음식을 해도, 전도를 해도, 자녀 교육을 해도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죄가 다스리던 인생이 이제는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마음의 죄의 거주지였다면 이제는 의의 거주지가 된 것입니다. 나의 무능함이 인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절망하기 쉬운 내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도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원리에 따라 살았던 내가 의와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능력, 나의 인격, 나의 지혜, 나의 실력, 나의 경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지혜, 그리스도의 실력, 그리스도의 경험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에 걸려도 예수님이 나오고, 실패를 해도 예수님이 나오고, 흔들어도, 짓밟아도, 무시당해도, 멸시를 받아도, 자존심이 상해도 예수님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기쁨의 근원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주십니다. 내가 용서 못할 것 예수님이 용서하게 하고, 내가 이해 못할 것 예수님 이해하게 하고, 내가 사랑 못할 것 예수님이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치유 못할 것 예수님이 치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연세대 영동 세브란스 병원의 암센터 소장인 이희대 박사님이 『희대의 소망』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2003년도에 대장암이 발병이 되어 암세포가 간과 골반 뼈에 전이되어 암4기, 말기 암 상태라고 합니다.

이지만은 아직도 그는 절대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붙잡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어요. 본인이 암센터 소장이에요. 본인이 암을 몸 여러 곳에 갖고 있으면서, 암4기는 암 말기입니다. 이 정도 되면 보편적으로 3개월에서 6개월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8년이 지나도록 환자를 돌보았답니다. “암이 허락 없이 와서 돈도 안내고 전세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분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암은 하나님을 만나게 채 주었기 때문에 저에겐 차라리 축복이었습니다. 기독교 학교도 나왔고 성경을 접한 적도 있었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암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짐으로써 비로소 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03년 6월에 저는 이미 4기였습니다. 말기입니다, 말기. 그때 죽는다, 죽는다 했더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적인 치료 외에 영적인 치료를 허락하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믿음으로 암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의술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는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 오직 내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매사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죽었다고 인정하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으로 산다고 근심과 걱정 없이 만사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갈등과 번민, 문제가 다가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지상적 현세적인 삶은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고 말씀합니다.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엘리야도 두려워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도 인정할 만한 온유를 가졌지만 80년이나 훈련을 받았는데 120세에 혈기를 부렸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 성급한 성질 잘 바꾸지 못했습니다. 성군인 다윗도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 죄성(罪性)이 남아 있습니다. 죄의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지만 여전히 노예의 근성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죄의 근성이 남아 있습니다(롬 7:19). “분노를 폭발할까 말까 클릭하여 속된 것을 볼까 말까 욕심을 따를까 말까?” 늘 갈등의 현장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 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7:25; 8:1-2). 오늘 본문은 “나를 사랑하사 지가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사랑으로 이루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인이가 가짜 신앙인인가를 분별하는 세 번째 기준은 매사 믿음으로 사는가 입니다. 믿음은 일회적 거래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다가오고 손해가 되면 믿음과는 상관없이 세상적 이익과 편리 기쁨의 원리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이란 십자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케 하는 통로입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갈2:20과 함께 갈5:25).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육체의 한계 안에 살지만 육체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고후10:3; 갈5:24)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3장 17절을 아주 명쾌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질 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하실 때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내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용서되었으며 하나님은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기억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힘으로 능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넘어질 때 변명할 필요 없습니다. 범죄할 때 자꾸 정당화하고 합리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못했을 때 책임을 회피하고 패배주의에 늪에 갇혀 신세타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십자가 밑에 나가 아픈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깨끗하게 하고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할 수 있는 줄 믿느냐?”(마9:28)

“네 믿은 대로 되라”고 말씀했습니다.(마8:13)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막9:23) 고 말씀하였습니다. 악한 성질, 좋지 않는 습관, 분노하기 쉬운 성질, 미움과 질투, 원망과 시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볼 때 살아난 것처럼(민21장)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를 붙들고 고침받은 것럼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믿의 발로 사마리아 성에에서 예수님을 전했듯이 믿음의 발로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에서 쌍둥이 남매을 선교지에 묻은 이중환 선교사 부부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1997년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640㎞ 떨어진 해발 2700m 오지에 가서 선교를 하였답니다. 8살짜리 쌍둥이 남매는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하려고 밤새 석유곤로를 피웠다 그만 의식을 잃었답니다. 깍지 낀 손으로 10분 넘게 인공호흡을 했지만 반응이 없었답니다. "오, 하나님. 어떻게 선교지에 들어왔는데… 아이들을 이렇게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왜입니까. 왜."

선교사 아내는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아이들을 방치했다는 자책감이 하루에 수백, 수천번씩 고개를 들어 팔다리를 잘라내서라도 시곗바늘을 그 날로 돌리고 싶었답니다. 아이를 그들이 세웠던 가나안영재학교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고 아이들과 함께 네팔에 뼈를 묻겠다는 결심하고 일했답니다. "그래, 엄마 아빠가 너희 몫까지 열심히 살게."라고 다짐했답니다. 선교사님은 '사람이 태어나 80세까지 사는 게 정상 아니냐'며 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은 왜 아이가 먼저 천국에 갔는지는 답을 주시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하셨답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이 통했는지 마을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지만 결국 학교를 가로채려는 마을 정치지도자의 음해로 지방법원에 끌려가게 되었답니다. 판사가 "고의로 아이들을 살해한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추방을 당했답니다. 자식을 잡아먹은 선교사, 추방된 선교사라는 자괴감과 정신적 충격에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 복음의 불모지였던 방글레데시 오지에 다시 가서 유치원과 농장, 진료소, 교회 30개, 학교 3개를 세우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범대 건립을 위해 다카 부근에 1500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현지 사역자는 21명과 전도사 후보생 8명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를 갖고 예배의 자리에 오셨습니까? 질병의 문제가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까? 원한과 증오의 문제가 있습니까? 실패와 좌절의 문제가 있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사랑하시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어떤 고난도, 어떤 질병도, 어떤 절망도, 어떤 문제도, 어떤 아픔도, 어떤 괴로움도, 어떤 슬픔도, 어떤 좌절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아픔 상처를 싸매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 마음과 우리 교회와 우리 직장과 우리 민족에게 넘쳐흘러 치유해 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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