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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쉼을 얻으려면(마11:25-3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725 추천수:9 112.168.96.71
2016-06-12 08:21:11

 

참 쉼을 얻으려면

마11:25-30

 

어제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던 박집사님이 천국에 가셨습니다. 참 재능도 많고 신실했던 집사님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으로 바쁜 중에서도 수요일 예배에 나와 반주를 하고, 주일이면 찬양인도를 하시고, 오후 예배 때도 반주를 하며 하나님께 늘 함께 예배들 드렸던 집사님이셨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매년 음악회를 열며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집사님이셨습니다. 홀로 되신 어머님께 잘 해 드리려고 함께 극장에도 가시고, 병이 들었을 때도 아픔 모습을 어머님에게 보여드리지 않으려고 끝까지 무척이나 애를 쓰셨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며 자식들을 잘 양육하려고 애를 썼던 집사님이셨습니다. “성령의 열매” 연속 설교를 몇 편 들으시고 아이들 양육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면서 계속 연속설교를 하시느냐고 물어보시며 좋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 땅에서는 뵐 수 없는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되시는 권사님이 늘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저도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다시 삶의 기회를 달라고 금식기도도 하고, 매일 매일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합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제 천국으로 데려갔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아프고, 이유를 잘 모르나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집사님의 영혼은 지금 인생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죽음도, 질병도, 죄고, 고통도, 슬픔도 없는 영원한 천국에서 안식할 줄 믿습니다. 어떤 인생을 살든 천로역경에 나오는 기독도처럼 누구나 크고 작은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그 짐은 살면 살수록 점점 더 무거워 짐을 느낍니다. 부모로서 책임이 신혼 초에는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는데 가면 갈수록 짐이 무겁습니다. 자식들 대학만 가르쳐 놓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취업이 안 됩니다. 석사한다고 박사한다고 합니다. 결혼할 때 무거운 혼수의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손자 손주 양육의 무거운 짐을 또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도 결혼이나 하면 다행인데 40이 되어도 결혼도 하지 않는 자식을 모시고 사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짐입니까? 결혼했다고 자식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해서 잘 만 살면 그래도 손자 손녀 보는 재미나 있지만 사소한 일로 싸우고 결국 이혼하면 얼마나 또 무거운 짐입니까?

자식으로 부모를 섬겨야 하는 짐도 점점 무겁습니다. 병들고 늙어가는 부모를 섬기는 효도, 봉양의 짐이 무겁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매일, 일 년, 이년, 십년 이십년, 아이 기르는 것보다 더 힘든 부모 섬김을 감당하려면 얼마나 그 짐이 무겁습니까? 우리 권사님 중에 한 분은 참 기쁘게 직장일을 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보면 참 좋으신 권사님이다고 존경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질병의 짐이 무겁습니다. 자신의 질병도 질병이지만 가족의 질병을 짊어져야 하는 짐이 무겁습니다. 인간관계의 짐이 무겁습니다. 살면 살수록 미워하는 사람이, 미움 받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용서 못하는 사람이,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집니다. 직장의 짐은 얼마나 또 무겁습니까? 매일 스트레스를 받아야 합니다. 일에 쫓겨야 합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의 짐은 또 얼마나 무겁습니까? 살면 살수록 바르게 산 것보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더 많아지고, 삶은 깨끗해지기보다 더 더러워지고, 양심의 가책은 더 심해집니다. 경제의 짐이 무겁습니다. 늙어 가면 더 여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힘들어지고, 애경사 찾아다니기도 버겁습니다.

 

이 짐은 제거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장애 자식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능한 자식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살해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병든 부모를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질병의 짐이 너무 무거워, 가난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병든 몸으로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동반 자살하는 노인들도 있습니다.

이 짐 대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무거운 짐을 잊어버리고 떨쳐버리기 위해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바람도 피우고, 여행을 하고, 각종 방법으로 풀려고 하지만 그 짐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을 탐구해 보기도 하고, 즐겨보기도 하고, 성공도 해보았지만 무거운 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라는 노래처럼 말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이 짐을 외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른 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우리가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죽으면 모든 짐도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불신자는 영벌에 들어가는 심판이 있습니다(마25:46). 이 짐은 이 땅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살면서 죽음의 짐, 죄의 짐, 걱정 과 근심의 짐, 두려움과 고통의 짐을 내려 놓고 참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2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쾌한 답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 참 쉼을 얻으려면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28).

무거운 인생의 죄 짐을 짊어지고 술집으로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가서 도를 닦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써 외면한다고 쾌락으로 대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종교적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종교적 신앙생활은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짐이 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왜 교회에서 일을 많이 시키느냐고 불평하며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주일에 놀러가고 싶은데 무거운 짐을 메달아 놓고 주일에 꼭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라고 하고, 헌금하라고 하고, 교사로 성가대로 봉사하라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힘겹게 삶의 현장에서 살다가 주일 하루만이라도 편안히 쉬고 싶은데 교회 다니니까 더 큰 짐을 짊어져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또 다른 짐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 온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종교에의 예속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는 것 같은 신비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늘 내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보십시오.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만나는 것이 짐이 됩니까? 같이 식사하며 돈을 내는 것이 짐이 됩니까? 하루 종일 여행하는 것이 지겹고 지루합니까? 사랑하는 애인의 집의 어려움을 위해 봉사해주는 것이 짜증이 납니까? 왜 나만 부려먹느냐고 불평분만이 가득하게 됩니까? 만약 그렇게 무거운 짐으로 느껴진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랑으로 인격적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배가 안식이 되고, 성경 공부가 즐거움이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참된 보람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오는 것을 한갓 종교로 받아들인다면 그 종교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신의 삶의 방해거리,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큐어 축제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도 기독교를 인류를 억압하는 하나의 종교 시스템으로 오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짐으로서의 신앙을 떠나가 있었던 긴 시기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그가 얻은 참 마음의 안식에 대하여 그의 책 '신앙론'에서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나는 55년 나의 인생동안 최초의 15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 나이 18세 되던 해 나의 친구가 내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한 말에 설득되어 나는 어릴 적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떠났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서 종교는 속박 그 이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55세 나는 내가 스스로 버린 어머니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단순히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의 구주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참된 안식을 발견한 것이다."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진리이시고 부활되시고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모든 짐을 져주시는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구세주로 모셔야 합니다. 단순한 종교 생활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무거운 짐만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마태23:4). 예수님은 짐을 지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를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8:32,36)”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근심과 걱정,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1)우리 주님께서는 수고의 짐을 지고 참된 안식(쉼)을 누리지 못한 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고하다는 말(능동태)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 고생하다는 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율법을 만들어 억지로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날도 억지로 수고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완벽하게 통제함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고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행복해 질 수 있고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 없이도 자기의 양심으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고 참 쉼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완벽주의자들은 참 안식이 없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고, 자기가 심판자가 되고, 자기가 기준이 되는 사람에게는 참 안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에게 안식이 없고 후회가 있을 뿐입니다. 살면 살수록 싫은 사람을 많이 만들어 냅니다. 알레르기 반응을 합니다. 과도한 면역반응을 합니다. 제거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도 이물질로 인식해서 거부하고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보면 불쾌한 감정과 혐오로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조금만 남에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자존심으로 속상해하고 분노합니다. 자신의 완벽주의 때문에 거부감을 품고,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보며 흠만 잡습니다. 타인의 성공을 자신의 불행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하니 무엇을 하든 참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2) 우리 주님은 무거운 짐을 진(페포르티스메노이) 자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수동태)

타의(他意)로, 환경 때문에 짐을 졌다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짐을 지고 고통받으며 괴로워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율법의 짐입니다. 오늘날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무거운 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죽음의 짐, 죄책감의 짐, 사업의 짐, 책임감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미움과 시기의 짐, 고독의 짐, 과거의 짐, 죄의 짐, 자녀의 짐, 아내의 짐, 남편의 짐, 시어머니의 짐, 시아버지의 짐, 며느리의 짐 등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지워지는 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짐이 있다면 그 짐으로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고 그 짐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짐을 지고 있는 우리를 주님은 초청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에게 우리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짐을 나를 불행하게 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망하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짐일지라도 그 짐을 지고 가면 다 받아 주십니다. 한나는 브닌나의 무거운 짐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의 무거운 짐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 나오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피겨 스케이팅으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스콧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책을 썼습니다. "스콧 해밀턴의 행복을 위한 8가지 기본기"라는 책입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친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두 살 때부터 괴질에 걸려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1997년 고환암 3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2004년 뇌종양과 뇌하수체암에 걸렸습니다. 2010년 또 뇌종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1984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81년부터 1984년까지 4회 연속 전미 선수권 대회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세 번이나 암을 이겨내고 현재 암 환자를 돕는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8가지 행복의 비결 중에 "전능한 코치를 믿으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그는 전능한 코치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내가 얼음판 위에서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나의 신앙심은 혼자라면 절대 이룰 수 없었던 경지까지 나를 항상 끌어주었다."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무거운 짐진자들이 그 짐 때문에 주님을 만나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중풍병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그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어 참 안식을 얻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았던 여인이 수치감과 죄의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는데 예수님 만나 참 자유를 얻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연못에게 경쟁의 낙오자가 되어 무거운 질병을 지고 사는 인생이 예수님 만나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멸시를 받는 자, 경멸당하는 자, 짐승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병든 자도 다 오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에 병든 자,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걸어가는 자, 자기의 불성실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 학대받고 천대받는 자, 선을 주었으나 악으로 보상받는 자, 모략과 이기심과 시기심의 제물이 된 자, 비겁하고 비열한 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자,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자,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마음이 허전한 자, 없는 것 없이 차려놓고 살지만 왠지 모르게 텅 빈 곳이 많은 자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믿습니까? 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평생 동안 끙끙거리며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의 포로가 되어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난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2. 참 쉼을 얻으려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29).

앞 구절을 보고 기뻐하다가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면 괜히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 더 무거움 짐을 진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처럼 일을 많이 시키는 것을 처음 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교회에 다니면 좀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데 더 힘들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교회에 다니면서도 불평과 원망을 하며 참된 쉼이 없습니까? 왜 마음의 쉼이 없습니까? 29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꾸 우리의 멍에, 자신의 멍에를 메니까 그런 것입니다. “왜 나만 홀로 고난이냐고” 불평,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사나 성가대의 멍에, 구역장이나 목자의 멍에가 내 멍에가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 시어머니의 멍에, 남편의 멍에, 아내의 멍에, 자식의 멍에가 내 멍에가 예수님의 멍에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결코 불평 원만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메는 멍에는 무거운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복음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해결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 놓은 주님의 사랑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내안에 내가 사는 삶의 멍에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교회 다녀도 탐욕으로 가득찬 어린 아이와 같이 내가 주인이 되어 살 때는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안식이 없었습니다. 내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멍에,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멍에, 명예를 얻기 위한 멍에를 메면 교회 다녀도 안식이 없습니다. 조금만 누가 싫은 소리하면 주님이 주신 짐을 다 팽개쳐버리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면 참 안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짐덩어리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주님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기 때문입니다.(30)

여기서 '쉽다(크레스토스)'는 말은 몸에 잘 맞는다는 것입니다. 알맞은, 사용하기에 적합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삶의 짐이 너무 힘들게 생각되는데 주님이 주신 멍에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가장 적합한 멍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왜 저에게 무거운 날개를 두 개씩이나 양 어깨에 달아놓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네가 날 수 있는 것은 그 무거운 날개 때문이란다.” 우리는 하늘을 날기 원하지만 무거운 날개는 싫어합니다. 무거운 짐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무겁지만 그 날개가 있어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짐을 지는 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하였습니다. 자식들이 무거운 짐이 상급이 됩니다. 시어머니의 짊을 사명으로 받아들고 지고 가면 축복의 그릇이 됩니다. 시어머니 짐 때문에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되고, 겸손해지고 오히려 행복해 합니다. 직장 생활이, 남편이, 아내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꼭 맞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함께 져 주시는 짐이고 그 멍에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한 방향으로 보조를 맞추며 찬양하며 가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멍에는 영광이고 상급이 됩니다. 감동과 감격이 있는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 분이 아프리카에 선교를 갔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답니다. 선교사는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물을 건너려면 힘이드는데 돌까지 가슴에 앉고 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답니다. 원주민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답니다. 주님이 주신 멍에는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피곤하게하고,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해 주신 멍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성결하게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한 가장 적합한 멍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가면 그 짐 때문에 우리 쓰러지고 망하지 않습니다. 안식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무거운 인생의 짊이 있었습니다. 질병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대적이 있습니다. 가난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릅니다. 많은 죄수들은 괴로워서 탄식하는데 그는 찬송을 부릅니다. 감옥 속에서 꼭 맞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멍에를 메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멍에는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선언한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꼭 맞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2)주님이 주시는 멍에로 끌고 갈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멍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밭을 갈 거나 무거운 짐수레를 끌 수 있도록 만든 틀입니다. 이 멍에는 짐을 가볍게 끌기 위하여 짐승의 등이 상하지 않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 멍에가 없으면 힘이 들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두 마리 소에게 이 멍에를 메게 합니다. 어린 송아지에게 밭고랑을 바르게 걷고 또 주인의 명령에 순복하여 행동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어미 소의 멍에 아래 함께 두어서 밭을 갈게 하기도 합니다. 실상 멍에를 끄는 것은 어미 소이나 멍에 안에 어미 소와 송아지가 함께 있으므로 송아지도 멍에를 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송아지는 어미 소를 그냥 따라가기 만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짐을 맡기고 주님의 멍에아래 들어오면 주님께서 우리 짐을 져주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멍에 아래서 인생의 짐을 짊어지되 쉽고 가볍게 휴식과 즐거움이 넘친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메 주신 멍에에 우리는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메는 것은 이제 나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입니다. 이제까지는 나의 힘으로 하려하니 힘이 들고 쉼이 없고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봉사도, 가정일도, 회사일도, 학업도, 전도도, 가르침도, 자녀교육도, 효도도, 질병 치료도, 사업도 이제는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할 때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기 못하고 내가 짊어지고 가려고 하니까 끙끙 거리고 무거운 것입니다. 내가 내 짐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지고 가려고 하니까 무거운 것입니다. 책임감이 너무 강하여 당연히 내 짐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우기면서 쓰러져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5kg은 무거운 것이지만 20대 젊은이에게는 가벼운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온 초창기에 어떤 선교사기 승용차를 몰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답니다. 한 아주머니가 머리에 짐을 잔뜩 이고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선교사가 안쓰러워 차에 타게 했답니다. 그런데 차를 운전하면서 거울로 뒷좌석을 보니 아직도 아주머니가 머리에 짐을 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눌한 말로 “아주머니, 왜 머리에 짐을 이고 계세요? 옆에다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코큰 양반, 차를 공짜로 얻어 타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실을 수 있겠소!”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나의 짐을 내가 지고 낑낑거리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믿고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왜 맡기기 못합니까?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 하나님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복음은 율법처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복음의 짐으로 무거워 쓰러져 죽지 않습니다. 가볍습니다. 죄와 탐욕에 따라가는 삶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 사는 삶은 삶의 짐이 가볍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여 내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어렵고 그 짐은 무겁다면 여전히 인생의 주인이 주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이는데도 속은 더 좁아지고 자기 고집만 강해지고 있다면 진정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정직하게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걱정, 두려움, 염려, 무거운 짐을 믿고 다 맡기시길 바랍니다.

 

3. 참 쉼을 얻으려면 우리 주님에게 나와 배워야 합니다(29).

29절을 다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멍에를 메고 그 다음 무엇을 말씀합니까? 내게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참 행복해 지는 방법, 부자되는 방법, 안식을 누리는 방법, 출세하는 방법 등을 배우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자녀 한명 키우는데 무려 2억 6천만 원이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참된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주님께서는 주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는 것을 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노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겨운 짐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지루하고 지겹습니까? 아닙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내일 또 보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입니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합니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배우지 않고는 참 안식을 누리는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칼로 과일을 깍아 먹지 못하고 늘 상 손만 벱니다. 자칫 잘 못하면 그것으로 강도짓을 합니다. 칼 쓰는 잘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배우다”라는 말은 “제자가 되다”라는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진 말로 "내 제자가 되어 내 가르침을 받으라."라는 말입니다. 주님께 나와 주님의 멍에를 멘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멍에를 메는 소를 길들이듯 주님으로부터 안식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유명한 오스왈드 센더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운 경험이 하나 있었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곁에서 아내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것이 나에게 오히려 고통을 줍니다. 소원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내 곁을 떠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방해가 됩니다." 목사님은 너무 너무 당황을 했습니다.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간호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니까 너무 당황해서 아내한테 무슨 뜻이냐고 하니까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조용히 이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을 좀 배우고 싶은데 당신이 나에게 너무 친절과 사랑을 베풀기에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때 목사님은 조용히 그 아내를 향해서 조용히 기도하고 곁을 떠나 주었습니다. 그 아내는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도 조금만 자존심 상한 일이 생기면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씩씩 거리며 괴로워하고 밤잠을 설치고 한 달 두 달 아니 평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아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치사하고 간사한 인간들에게 배신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십자가에서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부분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면 견딜 수 없어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지방 사람이 배신하고 속였다고 그 지방 사람들은 다 나쁜 놈이라고 정죄하고 적대시하며 평생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삽니다.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예수님에게 이 부분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저주 당하고 인신 매매 당하면서도 용서하고 품어 주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29)

온유라는 것은 단순히 성격 자체의 유순함이나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적하고 증오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는데도 하나님의 공의를 징벌로 나타내지 않고 따뜻한 마음으로 용서해 주고 고쳐 주어 새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고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신뢰, 의탁하는 가운데 생기는 온화함과 관대함 그리고 친절함입니다. 이 온유함이 없으면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을 배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마땅히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겸손이 없으면 어떤 경우에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우리는 어떤 무거운 짐도 넉넉히 지면서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2)친히 멍에를 메신 분이십니다.(29) 섬김의 도를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멍에를 메지 않는 섬김은 수고가 됩니다. 짐 덩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섬김은 안식이 됩니다. 감사가 됩니다. 참된 인생의 의미가 됩니다.

 

3)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8,29)

참된 마음의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안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 나오십시오. 주님의 멍에를 메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 길을 걷다가 쉴 곳이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졌을 때 찾아가 쉴 곳이 있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찾아갈 쉼터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넓은 가슴입니다. 참 안식을 얻기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와 주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의 답입니다. 28-30절 같이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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